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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2.08 기획하는 그대, 세상을 다 바꿔라
  2. 2007.02.07 [펌]문체, 혹은 양파에 대한 생각
  3. 2007.02.07 문장론?

기획하는 그대, 세상을 다 바꿔라

빼빼로데이를 포착해 연간 450억원 매출을 일궈낸 건 기획자의 호기심과 관찰력… 신문의 한 줄 헤드라인을 넘어 시대 흐름을 읽는 ‘통찰력’이 기획의 핵심 요소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빼빼로’는 식품업계에서 마케팅 기획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히는 상품이다. 지난 1983년 첫선을 보인 빼빼로가 도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996년이었다. 부산의 한 여자중학교에서 11월11일을 맞아 친구들끼리 빼빼로를 주고받는 ‘빼빼로데이’ 기념일이 있다는 사실을 마케팅에 활용하면서부터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롯데제과의 마케팅 기획자들은 대대적인 시장조사와 판촉행사를 전국적으로 벌였다. 그 결과 2000년 이후 지금까지 한 해 평균 매출액은 450억원 안팎을 기록하고 있고, 이 가운데 빼빼로데이 대목 기간(9~11월) 동안의 매출액이 한 해 매출액의 60%를 차지하는 현상이 매년 반복되고 있다. 빼빼로데이를 만들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에 대해 지나친 상업주의적 접근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조그마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은 기획자의 호기심과 관찰력이 일궈낸 극적인 변화였다.


9·11의 원인은 ‘상상력의 빈곤’


바야흐로 기획이 대접받는 시대다. 잘된 기획 하나가 조직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는 인식은 이미 널리 퍼져 있다. 미래를 예측하는 기획 능력이 없는 조직은 한 치 앞길도 내다볼 수 없다는 것이 최근의 추세다. 그러다 보니 기업과 정부조직, 개인의 삶에 이르기까지 기획 역량은 조직과 개인을 살리는 핵심 능력으로 꼽히고 있다. 기획이 일상의 한가운데로 들어왔다는 사실은 주변이 온통 ‘~기획’ 투성이라는 데서도 쉽게 확인된다. 광고기획, 마케팅기획, 영화기획, 텔레비전 프로그램 기획, 출판기획, 취재기획, 공연기획, 웹기획, 도시기획, 건축기획…. 정부나 국가기관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국가발전 기획, 신도시건설 기획, 사회간접자본 확충기획, 정보격차 해소기획…. 정당은 선거기획, 종교단체들은 신도확보 기획, 자선단체에서는 성금모집 기획, 사립학교에서는 학생유치 기획을 한다. 기업 내부도 마찬가지다. 영업기획, 생산기획, 구매기획, 자금조달 기획, 신제품 기획, 유통기획, 사업기획, 투자기획, 재무기획….

지구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차원의 기획도 있다. 9·11 테러가 대표적이다. 9·11 테러는 기획이 요구하는 일련의 과정을 꼼꼼히 밟은 치밀한 작품이다. 어떤 특정한 과제와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세계와 이슬람의 적’인 미국을 치명적인 방법으로 공격해야 한다), 그 과제의 완수 또는 문제 해결을 위해(치명적 테러를 통해 미국을 혼돈에 빠트리기 위해) 일정한 대상물들에 대해(미국의 민간 항공기들을 대상으로) 일정 기간 동안 벌어질 수 있는 주요 상황을 파악·예측해(항공기를 동시에 여러 대 납치해도 전투기들이 즉각 뜨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일정 의도에 따라 목표한 결과를 얻도록 하는(납치한 항공기로 미국의 상징적 건물을 향해 자살 테러를 감행함으로써 미국 전체를 혼란에 빠트린다) 일련의 사고 과정과 행동 양식(테러 요원을 종교적·사상적으로 무장시켜 훈련한 뒤 테러 행위에 투입해 실행한다)을 기획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오사마 빈 라덴은 ‘세기의 기획자’인 셈이다. 미국 의회가 초당적으로 구성한 9·11 진상조사위원회는 2004년 8월 해산에 앞서 발표한 최종보고서에서 “9·11 동시 테러를 막지 못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상상력의 빈곤’ 때문이었다”고 결론을 내린 적이 있다. 기획의 핵심 구성요소인 통찰력과 상상력에서 미국 당국은 오사마 빈 라덴에 뒤처진 것이다.

한국의 직장인들을 상대로 “업무 능력 가운데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면 보통 첫 손가락에 꼽는 것이 ‘기획문서 작성’이다. 기획 능력의 핵심을 ‘기획서 작성’으로만 국한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짙은 것이다. 이에 반해 기업 안에서 전문적으로 기획 업무를 담당하는 이들은 이와는 다른 답변을 해 눈길을 끈다. 파워포인트를 능숙하게 써서 깔끔한 기획서를 작성하는 것보다는 기획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해 천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통찰력에 이르는 7가지 습관


100명의 기업 내 기획자를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39명)와 설문조사(61명)를 한 결과가 나와 있는 신간 <한국의 기획자들>(토네이도 펴냄)을 보면 답변자의 70%가 뛰어난 기획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통찰력과 분석력’을 꼽았다. 그 다음은 ‘커뮤니케이션 능력’(26.7%)이었다. 이들은 또 평균 27.4명의 정보원을 확보하고 있으며, 업무 시간은 평균 11.49시간으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지만 업무 만족도는 64.9%로 비교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획 과정에서 통찰력이 핵심 요소가 되는 이유에 대해 피닉스커뮤니케이션의 서재근 차장(AE)은 “기획 과정에서 쓰이는 여러 시장분석 도구가 있지만 아무리 과학적으로 접근해도 인간의 직관과 바꿀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며 “특정한 수치나 자료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며 그것이 통찰력과 관련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통찰이란 정보와 지식을 처리하는 인간 고유의 창조적 상상력 또는 그런 상상력을 통해 사물·행동·사건 등의 본질 속에 숨겨진 ‘새로운 의미’를 해석해내는 과정이자 그 해석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기획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곧 발행될 책에서 기획 업무에서 통찰력에 이르는 7가지 습관을 △전문가를 믿지 말 것 △고정관념 속에서도 답을 찾으려고 할 것 △성급하게 정의하거나 분류하지 말 것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오히려 귀를 기울일 것 △프로세스(과정)의 노예가 되지 말 것 △원인을 추구할 것 △조사를 믿지 말 것 등으로 정리했다.

이 때문에 통찰력 있는 기획 능력을 지닌 기획자들이 스카우트의 1호 대상이 되는 현상도 점점 늘고 있다.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카피를 전 사회적으로 유통시켰던 광고계 인사가 삼성전자 상무로 스카우트된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그를 영입한 것은 무엇보다 그가 지닌 통찰력 있는 기획 능력을 높이 산 것”이라고 말했다. <100억짜리 기획력> <기획 천재가 된 홍대리>의 저자인 하우석 공주영상대 교수는 “기획의 궁극적인 목표는 조직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는 데 있고 이를 위해서는 예측 분석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통찰력은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기획 능력을 높이 사는 기업에 젊은 인재들이 몰리는 현상도 요즘의 추세다. NHN(네이버) 홍보실의 이경률 대리는 “우리 회사는 직군이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개발자이고 나머지 하나는 기획자”라며 “‘지식iN’이나 네이버 블로그 등 이곳에서 이뤄지는 업무의 대부분이 통찰력을 갖춘 첨단의 기획 능력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베르베르와 공지영씨의 공통점


통찰력 있는 기획이 시장에서 먹힌다는 점은 다른 분야에서도 도드라지게 입증되고 있다. 출판기획 분야에서 분야별로 인기를 끌었던 책들은 모두 이런 범주에 속한다. 읽는 역사에서 보고 체험하는 역사로 역사책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놓은 사계절출판사의 <생활사박물관> 시리즈나, 사진보다 더 생동감 있는 세밀화로 상업성과 작품성 모두를 충족시켰다는 평을 듣는 보리출판사의 생태 시리즈 기획 등이 그것이다. 번역서이기는 하지만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우화나 이야기 형식이 장차 대중적인 소구력을 가질 것이라는, 번뜩이는 통찰력이 효력을 발휘한 사례다.

작가 개인의 통찰력 있는 기획 능력도 비교 우위의 차별성을 가져오는 핵심 요소다. <개미>의 베르나르 베르베르나 꾸준히 베스트셀러를 내는 소설가 공지영씨가 그렇다는 게 출판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공지영씨의 경우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보여지듯이 철저한 사전 기획취재를 통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출판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제 작가는 기획력이 있는 작가와 기획력이 없는 작가 두 가지로 분류된다”고 잘라 말했다.

영화 분야에서 기획의 중요성은 오히려 구문에 속한다. 대표적인 영화계 기획통인 MK픽처스의 심재명 대표는 “영화계에서 기획이라는 요소는 마치 공기와도 같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기획 역량을 강조하면 왠지 어색하다”고 전제한 뒤 “다만 성공한 기획과 그렇지 못한 기획으로 나누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했다. 심 대표는 “시대와 소통하는 통찰력을 갖추지 못한 기획의 경우 영화가 개봉되자마자 반응이 온다”고 덧붙였다. ‘이 영화에 저런 배우를 캐스팅하는 게 말이 되냐’ ‘시나리오를 꼭 저렇게 써야 했나’ 하는, 관객의 반응이 그런 것들이라고 한다. 개봉된 영화 가운데 통찰력 있는 기획이 담긴 영화를 꼽아달라는 요청에 심 대표는 영화 <장화, 홍련>을 떠올렸다. “아이디어의 원천은 한국 고전이었지만, 엄마와 가족에 대한 소녀들의 심리적 공포나 억압기제를 적절히 간파한 결과 가장 젊은 관객인 10대들에게 어필한 점은 높이 사야 한다. 신문에 나온 한 줄의 헤드라인이나 문학·음악·미술 등 다른 장르에서 시대의 흐름을 읽는 통찰력이 기획의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영역 간 경계를 넘어서


통찰력 있는 기획을 위해 최근 강조되는 점은 ‘영역 간 경계를 넘는 상상력 있는 기획’과 ‘일상에서 돋보이는 기획’ 능력이다. 인문학과 경영학을 접목해 주목을 받은 구본형씨나 진화생물학과 인문학을 접목한 최재천 교수의 통찰력에서 새로운 기획의 패러다임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틀에 박힌 마케팅 툴로 박제화한 기획은 잘하지만, 요즘은 일상의 삶 속에서 소통할 수 있는 통찰력이 더 필요한 것 같다. 그런 기획이 장기적으로 소비자들에게 먹힐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요즘엔 아마추어이지만 전문가보다 더 전문적인 통찰력을 지닌 이들을 주목하게 된다.” 기획 업무를 10년 이상 해온 한 대기업 ‘기획전문가’의 넋두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획은 준비, 기초 가운데 기초”
기획 이론 강사 김영민 인하대 겸임교수


김영민 인하대 겸임교수는 기획 이론 강사로 기업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기업과 공무원 조직 등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한 지 8년째다. 한 대기업의 인사팀장을 지내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 연구를 통해 기획에 매달린 그는 “처음에 기획에 관한 제대로 된 강의 교재가 없어서 한자사전과 영어사전을 뒤져가면서 교재를 스스로 만들었다”며 “우리 사회가 기획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있지만, 여전히 기획의 개념이 뿌리내리지는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지난해 그동안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기획특강>(새로운 제안 펴냄)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기획력이 다른 능력과 비교해 핵심적인 능력인 이유는 무엇인가.

= 기획은 한마디로 준비다. 준비 잘하는 이가 실패할 확률이 낮은 것은 상식이다. 기초 가운데 기초다. ‘기업이 원하는 능력’에 대한 조사를 해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게 기획력과 문제해결 능력이다. 그런데 기획력 안에는 문제해결 능력이 포함돼 있다. 현황파악 → 원인분석→ 대책개발→ 세부계획 설립이 기획의 과정 아닌가. 아무리 복잡한 것에서도 핵심을 잡아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기획력은 또 통찰력을 필수로 한다. 통찰력은 시스템적 사고를 통해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꿰뚫어보는 능력이다. 일 잘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전체를 보는 데 반해 일 못하는 사람은 부분이 전체인 줄 안다.

기획력에 대한 요구가 이전 시기보다 더 늘어났다고 할 수 있나.

= 서점에 나가보면 10년 전에는 기획 관련 책이 2~3권 정도였는데 요즘에는 15~16권 정도 된다. 관심이 훨씬 늘었다. 요즘 기업들이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방식이 기획서를 준비해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라는 것이다. 취업도 전략적으로 기획해야 하는 시대다. 기획력은 갈수록 비중이 높아질 것이다. 기업에서는 대학에서 기획에 대해 가르쳐서 기업으로 보내줬으면 한다. 대학에서는 이런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실정이다.

기업 영역뿐만 아니라 공무원 조직에서도 기획 강의를 했는데 어떻게 다른가.

= 기업은 신속함을 요구한다. 순발력과 적응력이 아주 뛰어나야 한다. 조직원들이 거기에 길들여져 있다. 강의를 해봐도 스스로 ‘재수’를 하는 이들이 더러 있을 정도로 적극적이다. 공무원 조직은 일단 여유가 있다. 한마디로 유장하다. 기업의 기획이 성과를 내는 게 목표라면 공조직의 기획은 정책의 일관성과 안정성을 목표로 한다. 공무원이 일반 기업의 직장인들처럼 바쁘기만 해도 문제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기획의 깊이이며, 전문성·일관성·신뢰성 등이다. 공무원들이 쓰는 자원은 세금에서 나오는 만큼 공무원들이 만드는 기획이 잘못되면 나라가 흔들릴 수도 있다. 그런데 공무원 조직의 기획 역량은 여전히 부족하다. 공무원들은 기본적으로 간결한 문체를 두려워한다. 기업에서는 두세 줄로 끝날 것을 한 페이지씩 간다. 장관에게 보고된 보고서가 엉망인 경우도 많다. 다행히 요즘엔 지자체의 장들이 선거로 뽑히면서 역동적으로 변하는 분위기도 엿보인다.

기획형 인간’이 되는 법
전문가들이 훌륭한 기획자 되려는 이에게 던지는 첫째 권고는 ‘독서’…영감을 주는 ‘교수진’을 꾸리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생활습관을 만들라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wjryu@hani.co.kr

책에 길이 있다

“월급의 10%는 책을 사는 데 써라.”

훌륭한 기획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전문가들이 권하는 첫 번째 권고사항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생산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기획자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기댈 곳은 바로 정제된 콘텐츠의 보고인 책이라는 것이다. 운동선수들이 연봉의 상당 부분을 체력 보강을 위해 보약이나 건강보조 식품에 투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뇌가 재산인 기획자들은 책에 투자해야 한다는 얘기다. 책을 사지 않더라도 서점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것이 상당한 효과를 불러온다는 이들도 있다. 대형 서점의 경우에는 한 달에 한 번이나 2주일에 한 번꼴로 가서 어떤 책이 새로 출간됐는지를 살피는 게 좋다. 이렇게 하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대중의 관심과 세상의 흐름을 읽을 수 있어 좋고, 자신이 얼마나 무식한지를 깨달아 반성하고 긴장할 수 있다.

자신만의 교수진을 꾸려라


기업 내 기획자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 가운데 하나는 경제·경영서만을 읽으려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최근 세상과 사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기획은 모래 위에 쌓은 성이라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인문학적인 바탕 없이 실무기술적 지식만 잔뜩 쌓아놓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허무해질 수 있다. 하우석 공주영상대학 교수는 꾸준한 독서를 통해 ‘자신만의 교수진’을 만들 것을 권고한다. 그가 제안한 ‘나만의 교수진’의 한 사례를 살펴보자.

“마케팅·커뮤니케이션 부문: 필립 코플러, 돈 E. 슐츠, 잭트라우트, 알 리스, 탄넨바움 등. 철학: 데카르트, 흄, 칸트 등. 기호학: 롤랑 바르트, 소쉬르, 퍼스, 장 보드리야르 등. 정신분석학: 지그문트 프로이트, 칼 융, 에리히 프롬 등. 문화연구: 레이먼드 윌리암스, 스튜어트 홀 등. 시문학: 김수영, 김소월, 김영랑, 구상 등. 마음공부: 법정, 숭산, 달라이 라마, 틱낫한, 에머슨 등. 기타 석학: 노엄 촘스키, 박노자 등.”

하 교수는 “이 스승들은 제자들이 기획자로서 걸으려는 길에 밝은 빛이 되어주고, 끊임없는 영감을 주며, 의지를 강하게 만들어주고, 늘 동기를 부여하고,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고, 격려해주고, 희망을 주고, 늘 함께해준다”고 강조했다. 물론 개인별로 교수진의 구성은 다양해질 수 있다.

세상을 향해 ‘호기심’을 열어라


독서가 중요하지만 책 속에만 파묻혀 있다고 좋은 기획 아이디어가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건 아니다. 일상에서 중요한 것은 세상을 향해 언제나 열려 있는 ‘호기심’이다. 서울에 있는 한 광고기획사는 신입사원들에게 호기심의 중요성을 알려주기 위해 입사하는 날 1시간 동안 명동을 돌아다닌 뒤 회사에 돌아와 돌아다닌 시간과 똑같은 시간만큼 자신이 느낀 점을 말하게 한다. 그렇게 하면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길거리를 다녔던 사람도 사소한 것까지 관찰하게 된다고 한다.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한 생활습관으로는 ‘지하철이나 버스 등 대중교통 수단으로 출퇴근하기’ ‘메모를 일상화하기’ ‘5가지 이상의 전문 잡지를 정기 구독하기’ ‘제2, 제3, 제4의 취미나 동호회를 만들기’ 등이 있다. 현재 물건별로 유행하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법도 권장된다. 자동차, 화장품, 청바지, 아파트, 청량음료, 음악, 연극, 영화, 연예인 등을 쭉 써놓고 각각의 아이템별로 유행하고 있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는지 확인하는 놀이다.

평상시 혼자 있는 시간에 세상만사에 대해 ‘왜’라고 끊임없이 묻는 것도 기획자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생활습관이다. ‘비슷한 규모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 유독 초고속 정보통신이 발달한 이유는 뭘까’ ‘다른 나라보다 비싸다고 하는데도 테이크아웃 커피점이 여전히 인기를 끄는 이유는 뭘까’ ‘인간은 왜 남을 지배하고 싶어할까’ ‘무서운 걸 싫어하면서 왜 공포영화를 찾는 걸까’ 등 단순한 호기심도 통찰력 있는 기획력을 진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감성지수’를 높여라


호기심을 기르면서 함께 키워야 하는 것은 ‘감성지수’를 높이는 일이다. 기업 현장에서는 ‘감성 소비’나 ‘감성 제품 마케팅’이 화두가 된 지 오래다. 기업이 아니더라도 감성이 풍부하지 못한 사람 가운데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나 네트워킹 능력이 뛰어난 이는 거의 없다. 또 감성 능력은 좌뇌와 우뇌를 골고루 발달시켜 균형 잡힌 뇌 기능을 발휘해야 하는 기획자에게는 필수적이다. 일상에서 감성을 키우는 방법으로는 ‘글을 읽는 시간만큼 그림을 보기’ ‘음악을 30분 이상 들으면서 상상하기’ ‘시·소설·수필 등 문학 책을 폭넓게 읽기’ 등이 있다.

국어 공부에 매달려라


기획자는 영어 공부보다는 국어 공부에 매달려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하우석 교수는 “영어는 부차적일 뿐이고 국어 공부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써야 나의 논리가 명확해지고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으며 토론에서 자유롭게 대화하게 되어 기획서 만들기에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이는 결국 기획 자체에 대한 자신감으로 변한다”는 게 하 교수의 주장이다.

시집·소설책·수필집은 부드러운 읽을거리, 철학·역사·전문 분야는 딱딱한 읽을거리, 일기·수필·시는 부드러운 글쓰기, 고객면담 보고·업무상황 보고·기획서는 딱딱한 글쓰기로 나눈 뒤 이 4가지 영역을 반복해서 훈련하는 방법이 있다.

내 안의 여성성에 눈떠라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소장은 기획자의 자질에 대해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중장기적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해야 한다. 이름난 미래학자들의 책은 빠짐없이 읽는 게 좋다. 시대를 관통하고 ‘노마디즘’과 같은 사조에 대해서는 관련된 사회학적 연구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미래를 좌우할 키워드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여성성과 상상력, 창조력이다.”

그리고 겸손하라


기획자에게 요구되는 품성으로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뜻밖에도 ‘겸손’이다. 기획자에게 요구되는 능력 가운데 중요한 것이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기획팀 내부의 의견을 모아서 조율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의견을 조직의 수평·수직으로 전달하면서 조율하는 과정은 전부 복잡한 커뮤니케이션 과정이다. 여기에 더해 협력업체나 관계 기관 등 외부 환경에 존재하는 커뮤니케이션 대상까지 더해지면 겸손하지 않고서는 기획을 제대로 진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참고: <100억짜리 기획력> 하우석 지음, 새로운 제안 펴냄


순간이 위대함으로…
훌륭한 기획의 위대한 품성은 평범한 이들이 갈망하는 일상의 진보적 대안에서…사회환원 사업은 칭송하지 않네, 아름다운 기획은 일과 삶에 지금, 살아 있으니

김학원 출판사 휴머니스트 대표


삶의 시계는 두루마리 화장지와 같다. 술자리에서 누군가에게 들은 말이다. 처음엔 마구 써도 표시가 나지 않다가 갈수록 눈에 띄게 줄어든다. 종국엔 그 끝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후다닥 사라져버린다. 맞는 말이다. 한 사람의 생은 제한적이며 생의 시계는 갈수록 놀랄 만큼 빠르다. 기획의 서사는 생의 그것과 같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의 기획은 변화무쌍하다. 119 소방대원이 되기로 했다가 어느 날 트럭기사와 버스기사 사이에서 고민한다. 기획의 원천은 꿈이다. 만일 ‘기획의 어린 시절’ ‘기획의 사춘기 시절’을 잊는다면, 당신은 아무리 프로 기획자라 하더라도 기획의 원천을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 10대는 기획의 어린 시절이고, 20대는 기획의 사춘기와 같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고 그 사이에서 수많은 체험들이 쌓인다. 30, 40대가 되면 기획이 깊고 넓어진다. 50, 60대로 접어들면 기획은 새로운 동력을 얻는다. 무덤에서 요람까지 기획은 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의지적 활동이다. 한시적인 삶을 어떻게 하면 좀더 의미 있게 살 수 있을까. 이것이 모든 기획의 원천이다.


‘기획의 어린 시절’ ‘기획의 사춘기’…


잘 쓴 글은 멋지지만, 내면을 자극하지 못한다. 그러나 훌륭한 글은 가슴을 뛰게 한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온다. 멋진 기획, 감각적인 기획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 매력이 있다. 그러나 훌륭한 기획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 훌륭한 기획은 공통적으로 위대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 위대한 기획은 취지와 배경, 의도가 훌륭하다.

본문의 글쓰기를 고통스러워하는 저자에게 가끔씩 머리말을 먼저 써보라고 권한다. 머리말이 분명하면 본문이 탄력을 받는다. 기획의 취지와 배경이 얄팍하면 스테디셀러는 나오지 않는다. 학창 시절 ‘강독을 위한 일문법’이라는 소책자가 있었다. 짧은 기간에 일서를 해독할 수 있는 일문법의 핵심들을 놀라울 만한 구성으로 압축해놓은 책자였는데, 일서를 통해 사회과학을 접할 수밖에 없었던 선배들의 오랜 경험이 쌓인 결과물이었다. 지금 다시 보아도 최고의 실용서 기획으로 손꼽을 만하다.

기획의 위대한 품성은 평범한 이들이 갈망하는 일상의 진보적 대안에서 나온다. ‘인생의 책’으로 자주 꼽히는 <백범일지> <난중일기> <전태일 평전>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하나같이 위대한 품성을 품고 있는 책들이다. 내가 펴낸 책들 중 가장 위대한 품성을 지닌 책을 꼽으라면 단연 <살아 있는 한국사 교과서>와 <대담>이다. <살아 있는 한국사 교과서>에는 새 역사 교육에 대한 교사들의 갈망이 담겨 있다.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와 인문학자 도정일 교수가 3년 동안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경계를 허물고 시대의 주제를 놓고 토론한 <대담>은 두 세계의 오랜 장벽에 물꼬를 열며 입에서 입으로 두 학자의 위대한 품성이 오르내리고 있다.


어떻게 하면 탁월한 기획력을 갖출 수 있는가.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다. 아울러 가장 난감한 질문이다. 30대 초반에 기획·출판·편집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책은 거의 모두 읽었다. 도움은 받았지만, ‘기획의 기술, 편집의 기술’은 탁월한 기획력 쌓기와 거리가 멀었다. 기획은 ‘좋은 품성 쌓기’에서 비롯하며 훌륭한 기획은 현장에서 발견·발굴된다는 것을 일 속에서 체험했다. 15년 동안 500여 종의 책을 펴내면서 체득한 기획의 노하우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라면? ‘많이 읽고, 많이 만나고, 많이 생각하라.’ 이보다 훌륭한 답을 찾기는 불가능하다. 그래도 특별한 노하우가 있다면? 나만의 기획 창고를 만들어라. 일반적으로 45개의 창의적인 아이디어 중 3개만이 채택돼 그중 하나가 제품으로 만들어지고 이 과정을 거친 100개의 상품 중에서 2개가 시장에서 특별한 성공작으로 평가받는다. 30대 초반 책에서 읽었던 이 문장 하나가 나의 기획력을 근본적으로 자극했다. 행동으로 옮겼다. 틈만 나면 서점에 가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신간 아이디어를 메모했다. 실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거르지 않았다. 6개월 만에 1천 종의 아이디어를 채웠다. 10여 년 전에 출간한 <상식 밖의 세계사> <상식 밖의 과학사> 시리즈는 1천 종의 기획 비밀 창고에서 나왔다. 물론 책으로 결실을 맺은 것은 20종을 넘지 못했다.


화려한 드리블보다 정확한 패스


훌륭한 아빠가 되고 싶은가. 100개의 아이디어를 메모하라.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아이들과 아내의 요구를 경청해야 한다. 3년 전에 두 아이가 TV를 보다가 말했다. “아빠랑 낚시 가면 정말 좋겠어요.” 지난해 말 아내가 워크숍을 떠난 주말에 두 아이와 낚시를 다녀왔다. 나 역시 난생처음이었는데 그날 나는 아이들에게 “우리 아빠 최고”라는 행복한 찬사를 받았다. 빛나는 창의성은 좋은 품성과 훌륭한 습관에서 비롯한다. 기획의 현장에서 얻은 것을 나만의 비밀 창고에 넣어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행동으로 옮기면 기대하지 않은 감동을 주고받을 수 있다. 마케팅에서 말하는 기획의 승패에 대한 평가 기준은 ‘기대한 만큼의 감동’은 70점, ‘기대 이상의 감동’은 100점이다. 좋은 기획, 위대한 기획은 모종의 비밀스런 음모와 배후가 있어도 좋다. 일과 사랑, 나와 세상에 대한 비밀스런 기획 창고를 만들어 부지런히 저장해두는 습관을 몸에 익혀라.

기획은 아이디어가 아니다. 진보적 열망과 열정, 갈증들을 실천적으로 풀어가는 노력의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품성이 열정을 낳고 열정이 남다른 공력을 거쳐 결실을 맺는 것은 농사일과 다름없다. 1907년에 태어나 2005년 돌아가실 때까지 손수 농사를 짓고 밥상을 차린 내 할머니는 생에서 만난 최고의 기획자였다. 난 아직도 가끔 편의점에 들러 바나나 우유를 사먹는다. 어린 시절 우유만 먹으면 배탈이 났던 내게 바나나 우유는 촌놈을 위한 훌륭한 배려의 결실이다. 이 기획은 누군가의 엄청난 노력의 결실이었을 것이다.

21세기는 평범한 이들의 특별한 기획이 살아나는 시대다. 화려한 드리블보다 정확한 패스 하나에 더 깊이 열광하는 시대다. <라디오 스타>의 안성기가 그랬다. 기획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상 사이의 멋진 관계 맺기이자 소통이다. 핀란드인과 한국인은 공통적으로 이웃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가지지만, 먼저 인사를 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것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지닌 노키야와 삼성의 휴대전화를 낳는 토양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있다. 소통의 문화, 소통의 철학은 서로 승리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기는 관계 맺기는 구시대의 기획이다. 훌륭한 기획자는 정확하고 멋진 패스워크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하며 또한 이를 연출할 줄 알아야 한다. 연출이란 일의 영역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건축과 영화에 대한 가장 큰 아쉬움이 여기에 있다. 훌륭한 건축과 영화에서 왜 설계자와 감독만이 주연이 되어야 하는가.

기획은 설계도이지만, 설계도 모두가 건축물이 되지는 않는다. 연초 워크숍에서 역량 있는 학자들의 깊이 있는 학술서 시리즈의 표지 포맷을 기획한 디자이너의 멋진 프레젠테이션이 있었다. 학자들의 깊은 지식 세계를 남다른 시각의 인물 사진으로 담아내는 안이었다. 박수를 받았지만 실행 단계에서 무산됐다. 인물 사진을 찍기 싫어하는 국내 학자들의 공통된 기질 때문이었다. 이처럼 현실은 기획자들에게 전복의 상상력을 선사해준다.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서 실패는 새로운 상상력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실패가 준 전복의 상상력


이 기획으로 나와 이웃, 세상 사람들이 더 행복해질 수 있는가. 건강한 진보의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가. 인류애를 향한 물음은 먼 훗날, 내가 좀더 윤택해지면 해보리라. 난 빌 게이츠의 재단 사업과 사회환원 활동을 그리 칭송하고 싶지 않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부자들의 논리는 안쓰럽다. 아름다운 기획은 더운 여름날 연거푸 아이스크림을 찾는 아이에게 배탈 나니 오늘은 그만 먹으라며 돌려보낸, 내 어린 시절 동네 아주머니의 아름다운 가게처럼 일상의 일과 삶에 지금, 이 순간부터 살아 있어야 한다.


한겨레21 2007년02월02일 제646호

Posted by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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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 혹은 양파에 대한 생각
로쟈 알라딘 2006-03-19 12:20

'김훈-김규항-고종석의 문체에 대한 생각'이란 제목으로 재작년 6월 모스크바통신에 올렸던 글을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둔다. 고종석에 대한 부분만 따로 떼내어 보강하려다가 '자료' 차원에서 글 전체를 다시 옮겨놓기로 한 것이고, 대신에 이미지들을 보강해 넣기로 한다. 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가 정의한 바대로 문체가 '양파' 껍질 같은 것이라면, 내가 여기서 다루려고 하는 것은 김훈, 김규항, 고종석이라는 세 종류의 양파가 되겠다.

문체에 대한 나의 몇 가지 생각을 적고자 한다. 먼저, 자신만의 독특한 ‘얼굴’ 혹은 ‘손가락’을 가진 작가로 제일 먼저 손꼽을 수 있는 사람이 김훈이다. 그는 소설가이기 전에 에세이스트였고, 에세이스트이기 전에 언론사 기자였다. 그는 자신의 직업과 표정을 그렇게 변화시켜가고 있지만, 나에게 소설가로서의 김훈은 좀 낯설다. 문학판의 각광에도 불구하고(그는 두번째 장편으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고, 첫번째 단편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런 건 그들만의 ‘비즈니스’이다. 작품이 있으니까 상을 주는 게 아니라, 상이 있으니까 작품을 찾는 것이 문학/출판계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소설가의 손가락’이 아니라 ‘에세이스트의 손가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주제를 모른다거나 어리석은 것은 결코 아니다. 에세이로서는 ‘밥벌이’를 할 수 없는 나라가 한국이며, 그는 ‘밥벌이’의 신성함을 누구보다도 ‘지겹도록’ 맹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현재 오랜 기자생활을 그만 둔 그에게 소설쓰기는 그의 밥벌이, 즉 그의 비즈니스이다. 도둑질을 하거나 사기를 치는 게 아닌 이상 남의 밥벌이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은 좀 우스운 일이다. 그건 각자의 문제이다. 그래서 예컨대, 화장실 청소원에게 혹 “그것도 밥벌이냐?”고 묻는 것은 우스운 일을 넘어서 아주 무례한 일이다. 세상의 밥벌이에는 귀천(貴賤)이 없으므로.

나는 김훈의 에세이들을 ‘숭배’하지만(나는 그것들이 국어교과서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소설들은 아직 한편도 읽지 않았다. 그의 에세이들은 출간되자 마자 사들였지만(어떤 건 몇 권씩),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칼의 노래>, <현의 노래> 세 장편 소설에 대해서는 무심하게 대했다. <빗살무늬>는 품절된 이후에야 사려고 돌아다녔는데, 결국 내가 샀는지 못 샀는지도 기억나지 않으며, <칼의 노래>는 대폭 할인할 때에야 ‘싼 맛’에 샀고, <현의 노래>는 사두지 못한 채 모스크바에 왔다. 그러니 내가 그의 소설들에 대해서 말할 ‘지분’은 별로 없는 셈이다.

대신에 나는 북매거진 <텍스트>(2004년 4월호)에서 <현의 노래>에 대한 두 편의 서평을 읽었고, 이 소설에 대한 그림을 대충 그려볼 수 있었는데, 그건 읽지 않은 상태에서 그린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이하의 인용은 모두 두 서평으로부터의 재인용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는 그를 잘 안다고도 말할 수 있다(하긴, 소설을 제외한 그의 글과 인터뷰 대부분을 찾아 읽었으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장편소설’이라고 표지에 박혀 있더라도, 그런 걸 세 권이나 냈더라도 그는 아직 단 한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 그가 쓴 건 에세이스트의 손가락이 쓴 역사 ‘에세이’이고, 혹은 그에 대한 ‘판타지’이거나 ‘모노드라마’들이다. 그건 박상륭의 ‘잡설’들이 ‘소설’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어떻게 해도 감추어지지 않는, 그의 ‘문체’ 때문이다. 흔히 ‘아름답다’ 혹은 ‘현란하다’고 일컬어지는 것 말이다. 요컨대, 그의 문체는 소설이란 장르, 품위 없고 잡스러운 장르가 요구하는 바 일상적 디테일, 저자거리의 언어를 담기에는 너무 고상하며 품위가 넘쳐난다. 그래서 어색하다. 마치 장미희가 떡장사를 연기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가 아무리 “소설이요!”라고 외쳐도 내겐 “똑 사세요!”로 들린다.

<텍스트>의 두 서평은 ‘모노톤의 복화술’(김용필)과 ‘문체의 아름다움이 놓친 몇 가지’(조은영)란 제목으로 돼 있는데, 서평자들이 지적하는 바나 내가 지금 얘기하는 거나 같은 얘기이다. 그의 소설은 ‘모노드라마’이며, 문체의 아름다움 때문에 소설을 ‘망쳤다’는 얘기니까. 조은영 기자의 서평은 “그렇다면, 김훈의 진정한 3인칭 소설, 최초의 3인칭 소설은 아직 씌어지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라는 조심스러운 진단으로 마무리되고 있는데, 나는 그것이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물론 신중함은 기자로서의 조건이다). 그는 3인칭 소설은커녕, 소설 자체를 쓴 일이 없고, 앞으로도 별로 쓸 일이 없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예컨대, 김훈은 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한다: “악기를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그 구멍과 줄과 떨림판과 건반 어디에도 소리의 흔적은 없다. 악기는 소리의 집이지만, 소리는 그 집에서 살지 않는다. 소리는 어디에 있느냐. 소리는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에서 죽느냐. 나는 소리의 거처를 알지 못하지만, 소리는 악기와 그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의 몸 사이에서 아날로그 방식으로 태어나고 죽는다.”(<밥벌이의 지겨움>, 19쪽) 이런 건, 그의 에세이들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사유이고, 문장이지만, 소설로는 옮겨질 수 없는 문장이다(뿐만 아니라 번역되기도 곤란한 문장들이다. 박상륭의 잡설들이 번역 불가능한 것처럼, 김훈의 에세이들도 번역 불가능하다).

그것이 <현의 노래>에서 “소리는 몸속에 있지 않다. 그러나 몸이 아니면 소리를 빌려올 수가 없다. 잠시 빌려오는 것이다. 빌려서 쓰고 곧 돌려주는 것이다. 소리를 곧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 자리는 적막이다. 그 짧은 동안만 흔들리고 구르고 굽이치는 것이다. 소리를 거스를 수 없다.”라는 우륵의 말로 가장(假裝)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게 김훈의 목소리임을 이미 알고 있다. 요컨대, 그의 소설의 언어는 에세이의 언어를 “잠시 빌려오는 것이며, 빌려서 쓰고 곧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그 에세이의 자리는 그가 <풍경과 상처>나 <자전거여행>에서 적었듯이 물론 ‘적막’이다(이 적막으로는 밥벌이가 되지 않는다!). 나는 그가 “짧은 동안만 흔들리고 구르고 굽이치다가”(빨리 한몫잡고서!) 곧 제자리, 에세이스트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에세이를 거스를 수는 없다.” 그 정신, 그 문체, 그 손가락, 그 적막을!

김훈의 보수주의를 이문열의 보수주의와 비교하는 시각도 있는데(하긴 쿤데라와 이문열도 양립 가능하다고 동렬에 놓는 시각에서라면야), ‘보수주의’에 대한 얘기를 잠시 미뤄두고, 일단 ‘소설가’ 김훈과 이문열을 비교하는 것 자체는 흥미롭다. 일단 둘 다 ‘소설가’가 아니라는 점, 즉 ‘소설가’를 연기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김훈은 이제 막 소설로 밥벌이하고 있으며, 이문열은 소설로 밥벌이를 할 만큼 하자 딴짓을 하고 있다(사실, 한때 소설가이긴 했지만, 요즘도 소설가 이문열 운운하는 것은 좀 우습다. 그의 대표작은 <삼국지>이며, 이번에도 동아일보에 <초한지>인가를 연재하는 듯하던데, 그걸로 미루어도 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그의 본업은 ‘고전 번역가’이다). 근래엔 둘 다 내가 아직 읽지 않은 소설들만 썼다는 것도 공통적이고, 그 소설들이 ‘에세이 정신’으로 충만해 있다는 점도 공통적이다(가령, 이문열의 <선택> 이후의 ‘소설들’). 차이라면, 문체에 있어서, 품위에 있어서, 그리고 언변에 있어서 김훈이 한 수 위라는 것 정도(그런 이문열도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다!).

그리고, 보수주의. 요즘 좀 특이한 한국사회의 풍경은 자칭 보수주의자들, 즉 ‘자각적인’ 보수주의자들이 (특히 젊은 세대에서) 늘어나고 있는 것과 동시에 한편에서는 ‘B급 좌파’들이 ‘보수주의자’란 딱지를 마치 이전에 ‘보수꾼’들이 ‘빨갱이’(혹은 ‘사회주의자’)란 딱지를 적대자들에게 갖다 붙이듯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술어논리에 의하면, ‘B급좌파’나 ‘보수꾼’이나 똑같게 된다). 그런 식으로 보수주의나 진보주의(혹은 사회주의)의 외연이 넓어지는 것은 ‘언어의 경제’상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보수주의’나 ‘진보주의’란 말의 의미가 불분명해지는 탓에 앞에다 수식어를 더 붙여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노무현 정부는 한쪽에서 보기엔 좌파 사회주의 정부이고, 다른 쪽에서 보기엔 우파 보수주의 정부이다. 그런 ‘딱지’들이 가리키는 바는 대개 “당신은 우리편이 아니다!” 내지는 “우리는 당신이 싫다!”는 정서적 상관물이자 자기정체성의 확인이지 지시적 연관성을 갖는 논리가 아니다.

김훈과 이문열의 보수주의란 말도 마찬가지이다. 그건 대국적 견지에서의 ‘통찰’이긴 하지만, 섬세하지는 않다. 김훈은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허무주의자이기 때문이다(이문열도 허무주의자인가?). “아마도 소리와 병장기는 같은 것인 모양이구나”(<현의 노래>)라는 통찰, 즉 악기와 무기는 등가이며, 펜과 칼은 같은 것이라는 그의 주장 혹은 자기암시는 대립물의 통일이라는 변증법적 논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그게 그거라는 허무주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허무주의야 말로 모든 것을 ‘풍경’의 자리에 갖다 놓는 그의 에세이스트 정신에 부합한다. 풍경의 자리에 놓일 때,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연의 사계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충만하며 허무하고 부질없다. 역사 또한 그는 그 ‘풍경’의 자리에다 놓고 묘사할 따름이다.

<현의 노래>의 한 장면에서 김훈이 “이 질퍽거리는 구멍은 대체 무엇인가? 이 빨아당기는 속살이 어째서 왕의 무덤 속에 들어가 쇠와 함께 썩어야 하는가. 야로는 식은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하였다.”(117-8쪽)라고 묘사할 때, ‘야로’는 김훈 자신이며, “이 질퍽거리는 구멍”이야말로 그의 ‘허무주의’의 근거이고, 그의 표현을 빌자면, 풍경의 ‘적막’이다. 그는 언제나 그 풍경 앞에서, 허무 앞에서, 적막 앞에서 기진맥진하였고, 그러면서 마치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이 험난한 사투 끝에 돛새치의 뼈다귀만을 건져 올리듯이 자신의 문체를 길어냈다. 언제나 칼로 깎은 연필을 손가락에 쥐고 원고지에 쿡쿡 눌러써가면서 말이다(왜 칼과 펜이 등가가 아니겠는가!). 때문에, 그의 ‘기진맥진’에, 그의 ‘문체’에 나는 언제나 경의를 표한다.

반복하자면, 내가 보기에 김훈에게서 더 핵심적인 건 그의 보수주의가 아니라 허무주의이다. 그가 ‘보수주의자’라면, 그에겐 ‘보수’나 ‘진보’가 무의미하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가 가부장(家父長)적인 사고의 틀을 고수한다는 의미에서일 뿐이다(언젠가 이 때문에 ‘김훈 파동’이 한번 있었다). 그는 무어라고 말하는가?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 언어를 다루는 일의 힘겨움을 생각한다면 등에서 식은땀이 날 지경이다.” 이 고백에 그의 진실이, 핵심이 담겨 있다.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가 뜻하는 바는 말의 허무주의, 의미의 허무주의이다. 그래서 그에겐 그러한 의미(=기의)보다 말의 뼈(=기표), 말의 잔해, 말의 화석이 더 중요하다. 그가 일상적 시간(=밥벌이의 시간)이 아닌, 역사적 시간, 더 나아가 지질학적 시간에 언제나 매혹되며 거기에 붙들려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예컨대, <현의 노래>의 구상 또한 국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우륵의 가야금에서 얻어졌다고 하지 않는가? 그 천년의 ‘적막’이 곧 그의 ‘질퍽거리는 구멍’이다.

작가는 ‘천년의 적막’을 탐사하고 있지만, 사실 그의 문체를 낳은 허무주의는 좀더 실제적인 기원을 갖고 있다.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고백한바 있지만, 그는 5공 때 한 일간지의 젊은 기자로서 군사정권에 대한 ‘용비어천가’에 앞장섰던 경력이 있다. 그가 신념(=이즘)을 갖고 그 일에 나섰던 거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것이 ‘신념’이 아니라 ‘처세’였더라도 마찬가지이다(그랬더라면 이후에 다른 ‘기자들’처럼 금배지라도 달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를 그 일에 내몬 것은 ‘신념’도 ‘처세’도 아닌 ‘체념적 자학’이고 ‘허무’였다. 당당하게, 폼나게 사표를 던질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의 논리는 좀 다르다. 그 대신 다른 누군가가 결국 그 일을 해야 했을 거라는 것. 즉, 한 사람이 폼나는 대가로 또 다른 누군가가 오물을 뒤집어써야 하는 것이다. 그럴 거라면, 자신이 하겠다는 것이 그의 논리이다.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라는 건 그러한 ‘자발적 부역’에 대한 변명의 논리이다. 그의 ‘부역’은 오직 그가 문장에서 ‘의미’를 버릴 때에만 가능했다. 그것이 그의 의미론적 허무주의의 기원이다.

한편으로, 대장부의 길과 가장(家長)의 길은 좀 다른 길이다. ‘질퍽거리는 구멍’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달리 식구(食口)들의 ‘입구멍’이다. 한 가장이 해야 할 최소한이란 그 구멍을 채워 넣을 밥벌이를 하는 것이다. 유구한 일이지만, 대장부의 ‘명분’은 우리를 한번도 밥 먹여주지 않았다(밥 먹여주기는커녕 죽이지만 않아도 다행이겠다. 오, 계백이여!) 후배 박래부 기자와 한국일보에 연재되었던 <문학기행>이 책으로 묶여 나왔을 때, 김훈이 썼던 서문에는 그의 가족사 한 자락이 들어있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그의 아버지는 아주 엄하고 혹독한 분이었는데, 자주 ‘세상을 저버린 자’처럼 세상에 대한 분노와 허무를 무지막지한 술로 달랬다. 그리고 그런 날 새벽이면, 소년 김훈은 해장국 심부름을 가야 했다고. 어느 추운 겨울날 새벽에도 그는 해장국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그만 뚝배기를 바지와 길바닥에 다 엎지르고 말았다. 새벽녘 길바닥에서 그는 목놓아 엉엉 울면서 절대로 아버지와 같은 삶은 살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아버지와 같지 않은 삶? 그건 대장부의 삶이 아니라 충실한 가장의 삶이다.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라는 것은 대장부의 논리가 아닌 바로 가장의 논리이며(대장부는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지만, 가장은 한 입으로 두 말 해야 할 때가 있다), 가장으로서의 김훈이 발명해낼 수밖에 없었던, 발명해내지 않으면 안되었던 논리이다(자신의 아들에게 주는 편지에서 그가 가장 강조하는 바도 ‘자기 밥벌이’라는 건 그런 의미에서 지극히 당연하다. 그 ‘밥벌이’에 그의 오욕과 영광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허무주의는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장(家長)의 허무주의’이다. 그 허무주의는 결코 겉멋이나 잘난 체가 아니며, 젊은 치기나 늙은 달관도 아니었다. 그것은 기자 김훈이 밥벌이를 하기 위한, ‘유능한’ 가장이 되기 위한 허무주의였다. 어찌 그의 허무주의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지금도 나는 6하원칙의 신성함을 믿는다. 다만 6하의 가치와 존엄을 인정하되, 6하로서 충족될 수 없는 진실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뿐이다.”라고 그는 또 말한다. 복습하자면, 그가 말하는 ‘6하원칙’이란 ‘밥’과 동의어이다. 기자 김훈은 어떤 원칙의 신성함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밥의 숭고함과 밥벌이의 신성함을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기자의 밥벌이란 ‘6하원칙’에 맞게 기사를 쓰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또한 ‘6하원칙’이라거나 ‘밥벌이’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건 앎일 수도 있고, 직관일 수도 있고, 양심일 수도 있다. 그것은, 정신분석학의 개념을 가져오자면, ‘죽음 충동’이라 지목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 죽음충동은 삶 혹은 생존에의 의지를 ‘전부가 아닌(not-All)’ 것으로 잠식하며, 거기에서 기자 김훈이 아닌 에세이스트 김훈이 태어난다.

가장은 자기 식구들의 밥벌이를 하는 것으로 충분히 존엄하지만, 한편으로 세상은 그가 다 먹여 살릴 수 없는 ‘구멍들’ 천지이다. 그 구멍들 앞에서, 어느 봄날 전군가도(全群街道)에 무지막지하게 흩날리는 ‘사쿠라’ 꽃잎들 앞에서, 그는 할딱이며 기진맥진이고 속수무책이다. ‘6하’로 기술될 수 있는 세상의 진실들은 몇십 년 기자생활의 ‘짬밥’으로 어떻게든 카바한다지만, 그걸로 충족되지 않는, 그걸 넘어서는 진실들은 다 어찌한단 말인가? 에세이스트 김훈은 그 ‘충족될 수 없는 진실’들을 (‘가부장적’ 책임의식을 가지고!) 기록하고자 분투하지만, 그의 자백대로 언제나 ‘백전백패’이다. 그의 문체는 그 싸움에서 얻어진 전과이되, 패장(敗將)의 그것이어서 아름답지만 속절없다. 아마도 김훈 자신이 그걸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에세이스트 김훈의 허무주의는 기자 김훈의 그것과 같이 ‘가장의 허무주의’이되, 이 대책 없는, ‘무능한’ 가장의 허무주의이다. 어찌 그 허무주의가 안쓰럽지 않겠는가? 하여 그 ‘허무주의들’에 비하면, 보수주의란 딱지는 사소하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사르트르에 의하면, 현실과 지시적 연관을 갖는, 그러니까 현실을 ‘앙가제’하고, 현실에 ‘앙가제’하는 문학은, 곧 소설은 ‘어떻게’가 아닌 ‘무엇을’에 복무해야 한다(그는 총구를 제대로 겨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무엇을’을 달리 ‘의미’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순수한 음악의 상태, 무의미의 상태를 지향하는 시와는 달리, 산문(=소설)은 무엇보다는 ‘의미’해야 하며, 의미-지향적이어야 한다(그것이 시와 산문의 차이이다). 비록 그 의미가 단선적이거나 독백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카뮈와의 논쟁에서 사르트르-장송이 지적했던 바는 카뮈의 아름다운 문체가 ‘앙가주망’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달’이 아니라 ‘손가락’만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훈의 소설에도 똑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그의 아름다운 문체, 그리고 그걸 뒷받침하는 허무주의적 세계관(“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은 소설에 적합하지 않다. 소설가의 문체는 적당히 아름다워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적당히 지저분해야 한다. 그것이 ‘산문적 일상’을 묘사/기술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즉 소설가가 자신의 얼굴, 필체, 문체를 갖는 건 바람직하며, 동시에 좋은 소설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긴 하지만, ‘너무 아름다운 문체’이어서는 안된다(<내겐 너무 예쁜 당신>이란 프랑스 영화의 문제의식이기도 한데, ‘너무 아름다운 여자’는 ‘아내’로서 적합하지 않다. 결혼생활은 ‘산문적’이기 때문이다).

<현의 노래>의 서평이 들어 있는 <텍스트>(4월호)에는 ‘여성’을 주제로 한 서평들도 여러 편 모아져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한국어로 ‘아름다운 페미니스트’란 부제를 달고 나온 <글로리아 스타이넘>이다. 플레이보이의 바니걸로 위장취업할 정도로 미모가 뛰어난, 미국의 이 대표적인 ‘스타’ 페미니스트 운동가의 평전인데, 스타이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녀의 ‘너무 아름다운 외모’는 페미니즘에 혼란과 지장을 초래한다. “곧 그녀는 페미니스트이기에는 너무 예쁜 여성인 것이다.” 그래서 튄다. 다르게 말하면, 그녀는 ‘문체적/문채적’이다. 가령, 그녀의 50세 생일파티 풍경. “보스턴의 부동산 부호가 파티준비를 돕겠다고 나섰고, 파티 장소는 월도프 아스토리아호텔 그랜드볼륨이었다. 베트 미들러의 축하공연이 있었으며 스타이넘의 어린 시절과 젊었을 적 사진이 실린 생일 책이 전시되었다. 언론 또한 이 파티를 크게 다루었다. 스타이넘은 일에서나 개인적으로나 인생의 정점에 서 있었다.”

페미니스트의 삶의 불행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성공적인’ 페미니스트란 건 뭔가 어색하다. 결국 페미니즘은 그녀의 미모와 상승작용하며 스타이넘이란 한 여성에게 ‘성공한 삶’을 가져다 준 것이지만, 그것이 전체 페미니즘, 혹은 억압받는 여성 전체의 삶과는 과연 얼마만큼의 관계가 있을까? 그녀를 비판하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주장대로, 차라리 스타이넘이란 ‘스타’ 없는 페미니즘이 더 낫지 않았을까?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못생겨야 할 필요는 없지만, 적당히 못생길 필요는 있다(그래야 얼굴을 보는 게 아니라, 주장을 듣는다). 즉 적당히 예뻐야 한다. 그건 다른 모든 ‘산문적’ (정치적)운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시적인’ 외모는 ‘산문적’ 일상에 적합하지 않다.

이건 너무 ‘마초적인’ 생각인가? 가부장적인 김훈은 ‘마초적’이란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그 자신은 거기에 굳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념적으로 그와는 좀 거리가 먼 ‘B급 좌파’ 김규항조차도 똑같이 ‘마초적’이란 비판을 받곤 한다는 점이다(술어논리에 따르면, ‘보수주의자’ 김훈과 ‘진보주의자’ 김규항은 똑같다). 그건 그가 성모순보다 계급모순이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데서, 그리고 그런 생각을 공개적으로, 공격적으로 드러낸 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사실 나로선 그의 비판자들보다는 그의 의견에 공감하는 바가 더 많다. ‘중산층 페미니즘’, 즉 “계급과 사회구조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 페미니즘은 ‘허드렛일을 대신해줄 누군가(다른 여성, 빈민, 식민지인)’를 착취하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벨 훅스, <행복한 페미니즘>)는 의견에 동의하기 때문이다(<텍스트>의 서평에서 인용).

그런 의미에서 이 페미니즘은 민주주의와 똑같은 딜레마를 갖고 있다. 민주주의 또한 허드렛일을 대신해줄 누군가를 착취하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민주주의의 기원으로서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바탕은 노예제였다). 미국, 프랑스, 영국 등 대부분의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경영국가, 제국주의 국가였던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라크 침공을 거론하면서 이런 것이 미국의 민주주의냐고 비판하는 것은 따라서 예리하지 못하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반민주주의적, 제국주의적 행태이기 때문이다.

다른 데서 착취해야지만, 자국의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한국의 민주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국내적 ‘평등’은 국외적 ‘차별’에 의해서 지탱된다). 민주주의가 고상하고 고급스런 제도라는 건 그런 뜻에서이다(어느 정도의 경제적 바탕, 가령 1인당 국민소득 1만불 이상이라든가 하는 토대가 마련돼야지만, 민주주의란 제도는 작동한다). 이러한 사정은 ‘고상한’ 페미니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고상한 것들이란 원래 그 모양이다). 나는 다른 민주주의, 다른 페미니즘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며, 자신할 수 없다.

내가 김규항을 처음 알게 된 건, 그러니까 그의 글을 처음 읽게 된 건 <씨네21>의 ‘유토피아/디스토피아’ 지면을 통해서였다. 공동으로 연재하던 몇 사람의 필자들 가운데에서 유독 그가 눈에 띄었는데(그는 아마도 ‘유토피아/디스토피아’ 지면이 낳은 최고의 ‘스타’일 것이다), 그건 그가 자신의 ‘문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의 이름이 공개되지 않더라도 그의 문장들은 ‘김규항’을 입증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비유컨대, 김훈의 문체가 아름답고 유장한 ‘패장(敗將)의 문체’라면, 김규항의 문체는 ‘자객의 문체’이다. 백전백패를 ‘자랑하는’ ‘패장의 문체’와는 달리, ‘자객의 문체’는 ‘무엇을’에 ‘어떻게’가 복무하는 문체이다. 마치 자토이치의 검술처럼, 그는 짧게 끊어서 군더더기 없이 급소들만을 공격한다. 그래서,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때에라도 그의 문장(=수사학)에는 매료되었다. 이후에 내가 가급적이면 그가 쓴 모든 글을 챙겨 읽고자 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최근에 인터넷에서 그가 쓴 글을 읽고 다소 실망했다. 유시민에게 보수주의자란 딱지를 붙이는 글이었는데, 내용에 실망한 게 아니라(“나는 유시민을 보수주의자로 본다”는 데 어쩔 것인가?), 문체가 예전의 문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했다. 온라인 글쓰기의 특수성을 고려한다고 해도(설마 그런 류의 글들이 공식적으로 출판되는 걸까?) 그의 글은 더 이상 김규항의 ‘얼굴’도 ‘필체’도 보여주지 못했다. 덕분에, 나는 ‘손가락’ 대신에 글의 ‘내용’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보게 되었다.

김규항의 문체를 ‘자객의 문체’라고 했는데, 그의 칼끝이 유독 예리하게 겨냥하는 것은 우파(=보수주의자)가 아니라 자신이 유사-좌파(=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그것이 좌파 전체의 ‘이익’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유시민을 전여옥과 ‘똑같은 놈’이라고 배제함으로써, 좌파는, 혹은 민노당은 어떤 이익을 챙기는지) 모르겠지만, 유사-좌파들을 걸러내는 일을 이 ‘B급 좌파’는 자신의 소명으로 간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하지만, 단순하게 말해서, 민노당을 지지하지 않은 90% 국민들, 혹은 요즘 지지율이 좀 올라갔다고 하니까 한 70%의 ‘불순한’ 국민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들을 어떻게 걸러내고 순화/훈육/계몽해야 하나?). 그것은 한국의 논객 중 가장 ‘좌파적’이라 할 만한 자신의 입지/주장을 ‘B급’이라고 공언하는 그의 ‘결벽’에 이미 새겨져 있기도 하다. 그는 자신을 좌파의 ‘최소한’이라고 간주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기준에 미달한다면, 모두 ‘보수주의자’란 딱지를 뒤집어써 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준에 따를 때, 제도권 좌파, 즉 개량주의적 ‘의회주의 좌파’는 진정한 좌파인가? 동급의 의원으로서 한나라당 의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의정을 논할 민노당 의원들은 과연 좌파다운 좌파인가? 대학에 몸담고 있는 제도권 좌파, 자칭 ‘좌파’ 교수들은 과연 진짜 좌파이며 진보주의들인가? 일부일처제를 고수하면서 ‘아빠’로서 자녀들의 교육을 책임지는 일(“너희는 이렇게 바르게 살아라!”)은 진정 얼마나 좌파적인가? 혹은 한국의 자본주의라는 ‘식인체제’ 하에서 구차하게 계속 살아가는 일은 과연 얼마나 좌파적인가? 등등.

‘자객식’으로 말하자면, 사실 “살겠다고 버둥거리는 놈들”은 전부 보수주의자이고, “죽지 못해 안달인 놈들”이 진보주의자이다. 유기체의 생존은 ‘항상성(호메오스타시스)’이라는 걸 조건으로 한다. 항상성이란 건 ‘기브 앤 테이크’, 즉 주고받는 타협을 통해서 유지된다. 단칼에 자결하지 않고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는 일은 언제나 그러한 ‘타협’을 전제로 한다. 그것이 인간조건이다. 그럴 경우, 급진적인 진보주의 혹은 절대적 진보주의(‘숭고한 A급 좌파’란 게 있다면)란 그러한 타협과 인간조건으로부터의 ‘단절’을 뜻한다. 즉, 결코 타협하지 않으며, 죽음을 무릅쓸지언정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것(지젝 같은 좌파가 ‘죽음충동’에 그토록 매혹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당연하다. 그에게 유일한 ‘행위(act)’는 상징적 ‘자살’이다). 지젝과 네그리 같은 좌파들은 모두 기계-인간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바, 그것은 현재의 인간조건이 극복되어야지만 진정한 ‘진보’가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김규항도 그러한지?).

사실, 새로운 사회를 위한 ‘새로운 인간’이란 테마는 러시아문학에서는 이미 고전적인 테마이다.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1863)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가 정면충돌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문제를 둘러싸고서이다. 1917년 혁명 이후에 역사는 한동안 체르니세프스키의 편이었다. 사회주의 인간형, 혹은 공산주의 인간형이 인민들에게 요구되었고(그러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벌레’로 낙인찍혔다), 인간개조론이 제기되었다. 요컨대, 일차적 본성이든(공병호가 얘기하는), 이차적 본성이든(아도르노가 얘기하는), 현재의 ‘이기적인’ 인간본성을 가지고는 사회주의 유토피아(=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공산주의는 ‘인간들’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천사들’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에서 왜 누구는 대학교수를 하고, 누구는 탄광노동자를 해야 하는가? 그걸 누가 결정하는가? 제비뽑기로 결정하는가? 혹은 로테이션을 하는가? 그런 질문들을 허용해서는 사실상 사회주의 건설이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자발적인 ‘의무감’에 따라 마치 ‘기계’처럼 처리되는 수밖에 없다. 즉 인간-기계, 기계-인간들을 만들어내는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좌파적 휴머니즘’이란 말은 ‘듣기 좋은 소리’이거나 넌센스라고 생각한다(그런 얘기를 들먹이는 좌파를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C급이다). 휴머니즘을 가지고는 ‘좌파’를 할 수도 없고, ‘좋은 세상’을 만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진보가 변화/변혁에 대한 요구를 의미할 때 가장 먼저 변화/변혁되어야 할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며, 인간조건 자체이다(기계-인간이 되기 전이라도 최소한 ‘강철 인간’은 돼줘야 한다. ‘스탈린’이란 이름에 새겨진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인간복제라거나 유전자 조작을 가장 앞장서서 환영해야 할 사람들은 라엘리안들이 아니라 좌파들이다. 그리고, 인간본성 운운하며, 인간복제에 반대하는 하버마스 같은 철학자야말로 유사-좌파, 즉 보수주의자이다. 진정한 좌파가 되기 위해선, 모성을 버리고, 부성도 버리고, 인간성 자체를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유토피아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리라(모스크바-유토피아의 ‘새로운 러시아인’들처럼). 좌파, 혹은 ‘에덴의 기계들’에게 입력된, 프로그래밍된 행복!

말이 좀 길어졌다. 요점은 보수주의자니, 진보주의자니 하는 딱지 붙이기가 얼마만큼의 준거성, 혹은 의미연관성을 갖는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급진적 환경주의자들에 따르면, 환경문제의 해결은 이 지구의 암종인 인간이란 종이 완전히 사라질 때에야 가능하다. 거기에 무슨 타협의 여지가 있는 게 아니다. 그러한 관점에 서면, 좌파니 우파니 하는 구분은 사소하다. 좌파 박테리아와 우파 박테리아가 아웅다웅하고 있는 것이기에. 빨간색이건 파란색이건 박테리아는 박테리아일 뿐이다. 거꾸로 그런 게 아니라면, ‘작은 차이’를 중요하게 간주해야 한다. 좋은 사회, 혹은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하는 강박관념이나 순수에의 결벽에 들려 있지 않다면 말이다.

김훈과 이문열은 다르며, 유시민과 전여옥도 다르다. 그리고 전두환과 김대중이 다르며, 노무현과 이회창도 다르다. 그리고 부시와 케리도 다르다. 그들은 아주 조금 다를 뿐이지만, 그 다름을 인정하는 게 내 상식이고 정치적 감각(이기 이전에 일상적 감각)이다. 나는 우리사회가 ‘더 좋은 사회’가 될 거라고 믿지 않지만 적어도 ‘덜 나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덜 나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러한 상식과 감각이 필요하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덜 나쁜 사회’의 의의를 가르쳐준 이는 기자(요즘은 편집위원이던가?)이자 에세이스트이며 소설가인 고종석이다(자칭 ‘자유주의자’인 그가 복거일의 제자를 자처하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 또한 ‘문체’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 문체는 화려하지도 간결하지도 않으며 그저 담백하다. 그리고 상식적이다. 그는 허무주의자(혹은 보수주의자)도 아니고, B급 좌파도 아니다. 그는 개인주의자이고, 자유주의자이다. 이념의 스펙트럼 속에 굳이 자신을 분류해 넣어야 한다면, 나는 그와 같은 칸에 분류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즉 나의 정치적 입장은 그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그것은 내가 그만큼 그에게서 감화를 받은 바가 많은 탓일 것이다(그에 따를 때, 외모에 의한 서열화는 지성에 의한 서열화보다 더 나쁘거나 억지스럽지 않다. 이것도 마초적인가?).

김훈, 김규항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는 고종석의 (모든 글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글들을 읽었고, 읽고자 했다. 전라도 사람으로서의 ‘서얼의식’은 갖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특별한 트라우마나 결벽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그의 사유는 논리적이지만, 모나지 않고 둥글다. 따라서, 그런 그의 문체가 소설이란 장르와 잘 어울리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김훈이 소설을 못 쓰고, 김규항이 소설을 안 쓰는 데 반해서, 고종석은 소설을 잘 쓴다(이 세 ‘글쟁이’를 내 식대로 분류하자면, 김훈은 ‘예술가’이고, 자칭 ‘출판인’이어서 ‘출판운동’을 하는 김규항은 ‘운동가’이며, 고종석은 ‘지식인’이다). 더불어, 그에게선 기자와 에세이스트와 소설가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아름답지도 날카롭지도 않지만 담담하면서 유려한 그의 문체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체는 그렇게 그 사람이 된다…

앞에서, 김규항은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즉 내가 단어와 단어를 꿰고 이어 붙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유는 단지 세상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다"라고 적었지만, 이 마지막 문단에 의거할 때 그건 그의 문장론으로서 불충분하며 부정확하다.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고 할 때 '문장'은 '삶'과 등가화되고 있으며, 그럴 때 '문장'은 단지 수단에만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그의 삶이다. 그러니, "문체는 곧 사람이다"(뷔퐁)라는 고전적인 명제에 기대지 않더라도 나는 그가 '문체주의자'라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 또한 'B급 좌파'이면서 동시에 '양파'인 것이다.

덧붙여 지적하자면, '양파'는 롤랑 바르트의 그것처럼 그저 텅빈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러시아 정교회 사원 지붕들에서 보듯이 신성함에의 의지와 염원을 담고 있다. 내가 문체주의자들을 존중하는 이유이다.

Posted by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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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론?

and writing 2007. 2. 7. 23:41

문장론?
김규항

이따금 “문장론이 뭐냐”는 식의 질문을 받는다. 그런데 나는 글을 쓰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내가 글 쓰는 사람이라는 현실에 익숙하지(하고 싶지) 않아서 늘 대답을 흐리곤 한다. 사실 나는 어떤 문장론을 갖고 글을 쓰진 않는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즉 내가 단어와 단어를 꿰고 이어 붙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유는 단지 세상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다. 나는 글의 소재를 얻기 위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세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글을 쓴다. 어쨌거나, 문장론이 있든 없든, 내가 초고를 써놓고 퇴고를 거듭하는 걸 보면 나에게도 문장에 대한 어떤 태도는 있는 것 같다. 아마도 그건 두 가지일 것이다. 간결함과 리듬.

내가 쓰는 글의 8.5할쯤에 해당하는, 공을 들여 쓰는 글은 초고를 쓰면 적어도 서너 번 이상은 퇴고를 한다. 군더더기라 느껴지는 건 망설임 없이 없애거나 좀 더 간결한 표현으로 바꾼다. 나는 중언부언 하는 것만 군더더기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쓸데없이 화려한 표현도 군더더기라 생각한다. 그리고 부러 반복 효과를 내려는 게 아니라면 같은 글에선 같은 단어를 쓰지 않는다. 10매 이하 칼럼에선 반드시, 30매가 넘어가는 긴 글에선 되도록 그렇게 한다. 동시에 리듬을 만들어간다. 거창하게 말해서 운율을 맞추는 건데, 눈으로 소리 내어 읽으면서 리듬감이 흐트러지거나 호흡이 끊기는 부분은 글자 수를 고치거나 단어를 바꾼다.

간결함과 리듬이 덜 다듬어진 글을 내놓는 것처럼 불편한 일은 없다. 어쩌다, 내 글의 1.5할쯤에 해당하는 글에서, 이런저런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도리 없이 그러곤 하는데 그런 글들은 그저 실용적인 이유를 위해 일회용으로 존재한 것일 뿐, 내가 썼지만 더 이상 내 글은 아니라 여긴다. 간결함과 리듬 말고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쉽게 쓰는 것이다. 나는 왜 거의 모든 글쟁이들이 글은 쉬우면 쉬울수록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배운 사람들이나 알아먹는 어려운 말을 이유 없이 쓰지 않는 건 물론이려니와 되도록 한자말을 줄이려고 애쓴다.

그러나 간결함, 리듬, 그리고 쉬움 같은 문장에 대한 내 모든 태도들은 오로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한다. 나는 이오덕 선생이 말씀한 ‘삶을 가꾸는 글쓰기’를 믿는다. 모름지기 글은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글을 씀으로서 내 일상의 에피소드들은 비로소 내 생각으로 정리되며 그렇게 정리된 생각들은 다시 내 일상의 에피소드에 전적으로 반영된다. 내 삶과 내 글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순환한다. 내 삶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나라는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내 글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

Posted by gyuhang at 2005.08.12 11:42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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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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