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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10.27 취재의 달인들
  2. 2005.01.07 [펌]'한나라당, 못다한 이야기' 안수찬 기자 인터뷰 1
  3. 2004.09.25 interview & interviewe 1

취재의 달인들

and writing 2005. 10. 27. 15:17

취재의 달인들
탐사보도는 저널리즘의 꽃이다.
탐사보도는 세상을 뒤흔들고 사회를 뒤바꾼다. 우리가 정말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세상의 참모습은 매일매일 넘쳐나는 뉴스를 통해서가 아니라 탐사보도를 통해 알려진 것들이 더 많다. 안기부 도청록이나 정치 자금 스캔들, 이런저런 사회적 모순들이 그렇다. 대한민국의 탐사보도 기자 7인을 만났다. 그들은 분노와 오기로 세상과 맞서고 있다.


조선일보 이진동 기자(40)
경력 14년 YS와 DJ 정부 시절 안기부가 국가 주요 인사들을 조직적으로 도감청해온 사실을 처음 밝혀냈다.
“탐사 보도란 사회적으로 은폐된 비리나 구조적인 모순을 심층 취재해서 세상 밖으로 드러내는 데 목적이 있다. 인터넷 뉴스가 넘치는 시대에 깊이 있는 탐사 보도야말로 기자의 마지막 승부처일 수밖에 없다. 내가 지닌 관심사는 권력의 부정과 비리, 권력 남용이다. 아무리 권력 구조가 맑고 깨끗해진 듯해도 음지는 늘 있다. 그걸 감시하는 게 기자의 역할이다. 정말 심층적인 탐사 보도를 하려면 특정 영역에서 꾸준히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틈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권력에 관한 취재의 경우 정보를 지닌 취재원이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에 누가 무엇을 알고 있고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종합적인 인맥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탐사 보도는 평소에 해야 한다.

얼마전 보도한 ‘안기부 도청 파문’ 기사 역시 한 달 정도 취재한 걸로 알려졌지만 사실 수년째 관심을 갖고 탐사했던 부분이다. 국정원과 정부의 취재원 여럿을 만나면서 도청 사실 여부에 대해 반복해서 질문을 했고 그 과정에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해냈다. <문화방송>의 이상호 기자가 도청록의 내용에 집중했다면 난 도청이라는 행위 자체에 주목했던 셈이다. 난 늘 틈새를 노린다. 평소에는 권력 집단 사이 사이를 다니면서 조용히 관찰한다. 그러다 권력 내부에 갈등이 생기면 그때 평소 의문을 품고 있는 부분에 대해 취재를 하기 시작한다. 갈등은 틈을 만들고 권력자들은 기자에게 각자 유리한 각도에서 말을 흘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정권 말기에 큰 비리 기사가 많이 터지는 것이기도 하다. 모두 자기한테 불리한 내용은 숨기면서 말을 하지만 여러 취재원을 반복해서 만나면 결국 무엇이 과정된 것이고 무엇이 의도된 것인지 구분할 수 있다. 사실 권력자들은 기자가 기사를 못 쓸 거라고 생각하기 일쑤다. 그들이 지닌 정보는 대부분 민감하지만 단편적이다. 그래서 기자 역시 사실 확인을 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 단편적인 정보를 조립해내는 게 발로 뛰는 기자의 힘이다. ‘그 기사 나가면 엄청난 오보다’라는 식의 압력이 들어올 때 자신의 기사에 확신을 심어주는 것도 기자의 발이고 말이다.

권력을 겨눈 탐사 보도 취재는 늘 때가 있다. 언저리를 맴돌다 때가 되면 평소 파악한 흐름을 바탕으로 사실을 조합해 진실을 찾아낸다. 권력에 관한 탐사 보도는 일단 한 번 터지면 당분간은 다시 취재하기가 어렵다. 조용히 또 때를 기다려야 한다. 지금은 어쪄먼 삼성과 권력과의 관계를 취재할 틈이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 안기부 도청 파문을 거치면서 삼성과 권력의 유착 관계에 균열이 생겼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권력에 관한 탐사 보도는 매우 정치해야 한다. 특정한 누군가를 겨누게 되기 때문이다. 안 그러면 바로 반격이 들어온다. 하지만 100% 확인된 기사란 건 없다. 그래서 권력에 관한 큰 기사를 쓴 뒤엔 잠을 못 잔다. 나 같은 기자에 대한 미행이나 도청은 암묵적으로 늘 겪는 일이다. 그래서 가끔 ‘그 사람들’을 만나면 ‘덕분에 요즘 참 바른 생활을 하고 있다’고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취재원 보호를 위해 공중전화를 사용하거나 미행에 신경쓰기도 한다. 세상은 하루 아침에 나아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올바른 기사가 많아질수록 아주 조금씩은 나아질 거라고 믿는다. 그게 내가 ‘이 짓’을 하는 이유다.”

KBS <추적60분> 구수환PD(47)
경력 19년 담당PD와 함께 퇴직한 뒤 재벌기업에 입사한 정관계 인사들의 리스트를 보도해 거대 재벌의 정관계 로비 의혹의 실체를 추적했다.

“안기부 도청록을 통해 거대 재벌의 정관계 로비문제가 불거지기 두 달쯤 전부터 이 문제를 후배PD와 취재하기 시작했다. 오랜 동안 <추적60분>을 해왔던 터라 이젠 가끔씩은 그렇게 맥이 잡힌다. <추적60분>은 말하자면 하나의 탐사 보도팀이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의 PD들이 나름의 취재를 하고 선임 프로듀서인 내가 데스크로서 취재 방향을 결정한다. 난 현장 체질이지만 지금은 데스크로서도 할 일이 많다. 특히 방송은 보도 시점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데스크의 진두지휘가 꼭 필요하다. 이번 같은 경우도 그렇게 후배PD와 내가 낚아챈 기획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안기부 도청록이 터졌고 그 직후 퇴직한 뒤 재벌 기업에 입사한 정관계 인사들의 목록을 공개하게 된 것이다. 이런 기획은 앞으로 <추적60분>이 방송 탐사 보도 프로그램으로서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다.

종이 저널에 비해 방송 저널은 탐사 보도에서 취약한 측면이 있다.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만 해도 <추적60분>은 간판 탐사 보도 프로그램으로 꼽혔다. 하지만 그건 당시만 해도 사회적으로 음지가 많았고 거기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만으로도 풍파가 일었기 때문이었다. 구조적인 접근보단 사회부적인 고발 프로그램이 많았다. 그것만도 대단한 것이긴 했다. 방송 기자들이 각자 취재처에 묶여 있을 때 그런 이해 관계에서 자유로운 프로듀서들이 나선 것 역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방송 탐사 프로그램도 더 많은 걸 요구받고 있다. <추적60분>은 대기업에 입사한 정관계 인사의 인맥 리스트 를 취재하거나 갑작스럽게 귀국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에 관한 취재처럼 좀 더 심층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를 건드리려고 한다. <추적60분>이라는 이름값 때문이라도 이런 탐사 보도를 놓을 수가 없다.

방송은 결정적인 취재원 확보가 필수적이다. 정황 증거만으로 논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실질적인 그림이나 분명한 인터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걸 위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취재원을 설득하기 위해 찾아가거나 문 앞에서 기다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예전엔 몰래 카메라를 들고 취재를 다니기도 했지만 요즘은 초상권 소송에 휘말리기 일쑤다. 하지만 방송은 종이 저널에 비해 그 파급력이 훨씬 크다. 난 탐사 보도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집요하게 진실을 좇다보면 어느 순간 세상이 조금이라도 변해 있다. 요즘은 특히 분발해야겠다고 느낀다. 언론이 세상을 주도하는 것 같지만 사실 지금 언론은 뒷북만 친다. 언론이 앞서가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바뀐다.”

시사저널 정희상 기자(43)
경력 17년 그동안 미궁에 빠져있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암살 사건의 전모를 파헤쳤다.

“<시사저널>의 전 편집장은 날‘원혼이 씌운 기자’라고 부르곤 했다. 나도 가끔 이 모든 문제들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고 느낀다. 내가 취재했던 내용들은 결국 내 숙명이 되고 내 영원한 탐사 보도의 대상이 된다. 난 정의로운 분노와 오기로 취재를 한다. 취재 기법 같은 건 잘 모른다. 김훈 중위 사망 사건에서 시작된 군대내 의문사 문제나 매국노들의 조상 땅 찾기 보도,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보도 같은 것들은 그 문제를 처음 접했을 때의 분노 때문에 매달렸던 것이다. 취재 과정에서 자꾸만 감추고 거짓말 하는 사람들을 접하게 되면서 오기가 생겼고 끈질기게 매달리게 된 것들이다. 탐사 보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기자 개인의 문제 의식이다. 사회적인 거악과 마주하면 분노가 느껴지고 기자는 그 분노를 좇아 취재해야 한다. 그러면 치열해지고 치밀해진다. 국방부나 국정원 사람들이 취재를 방해하면 그 때 느껴지는 오기가 자양분이 된다. 어떤 때는 오랜 동안 함께 했던 취재원이 나를 이끌기도 한다. 김훈 중위 의문사 사건 취재가 그랬다. 취재원이 자료를 모아줬다.

내겐 취재 원칙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늘 아래 전혀 새로운 뉴스는 없다. 보이는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볼 때 새로운 뉴스가 나온다는 뜻이다. 둘째는 사람을 만나면서 늘 다른 취재 거리를 묻는다. 그렇게 고구마 줄기를 캐듯 줄줄이 취재를 하는 게 내 방식이다. 그리고 중요한 취재원을 만날 때는 거의 모든 자료를 철저하게 파헤친 뒤 꼼짝 못하게 만든 다음 만난다. 이완용의 손자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1990년대 초 다른 취재를 위해 한 독립투사의 후손을 만났더니 ‘매국을 하면 3대가 흥하고 애국을 하면 3대가 망한다더니 이완용의 자손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 그 얘길 듣고 고구마 캐듯 하나씩 취재를 시작했다. 이완용의 손자를 만나기 전 차라리 나를 만나는 게 자신에게 유리할 만큼 충분히 취재를 한 뒤 연락을 했다.

김형욱 암살 사건을 취재할 때도 그랬다. 그때 김형욱 암살을 취재하려 했던 게 아니라 공작의 세계, 암살의 세계를 취재하던 중이었다. 박정희 시대에 공작과 암살의 세계는 너무 복잡했다. 중앙정보부가 북한 정보부에 이중 간첩을 심어놓고 그 이중 간첩이 남파된 뒤 국내 인사들을 간첩으로 만들고, 다시 중앙정보부가 그 국내 인사를 간첩으로 몰아 잡아들이는 식이었다. 그렇게 서로 속고 속이다 결국 엉겹결에 간첩이 되는 사람들도 많았다. 공작과 암살의 세계를 밝혀낸다면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 같은 현대사의 억울한 누명들을 벗겨낼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다들 입을 안 열다 ‘다른 건 몰라도 김형욱 암살에 대해선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인사를 만났다. 그는 ‘절대 해서는 안되는 일을 내가 했다’면서 암살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모든 탐사 보도는 사실만이 아니라 진실을 좇는다. 그런데 진실일 가능성이 아무리 높아도 결과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기자는 늘 겸손해야 한다. 단정짓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협박을 당하거나 하면 안 괴롭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가끔 ‘네 아들이 학교 가는 길을 알고 있다’는 식의 전화 연락이 오기도 한다. 그럴 땐 섬뜩하다. 난 늘 미완의 보도를 하고 있다. 군대 의문사도, 김형욱 사건도,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사건 보도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 의무는 벌써 몇 년째 보도를 하면서 그 끈을 놓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자는 사람의 마음을 열고 말을 이끌어내는 사람이다. 그것이 탐사 보도의 핵심이다. 하지만 기자는 열어젖힌 마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절대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나도 내가 파헤친 문제들에서 벗어날수 없어서 힘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기자로서 내 숙명이다.”

중앙일보 이규연 기자(44)
경력 18년 난곡빈민촌을 취재해 한국 사회에서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빈부격차 문제의 단면을 입체적으로 파헤쳤다.

한국 언론의 천박함은 늘 기사를 쓰면서 누군가를 적으로 만들고 누군가를 악으로 몰아붙이면서 스스로 중립성을 잃고 헤맨다는 데 있다. 탐사 보도란 흔히 은밀한 취재원인 ‘딥스로트’를 주차장 뒤에서 만나서 비밀 정보를 주고 받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사회의 적을 무찌르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보도는 자칫 폭로 저널리즘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흔히 미국에서 탐사 보도가 활성화된 건 워터게이트 사건 전후라고 본다. 하지만 19세기 말, 20세기 초부터 탐사 보도 저널리즘은 존재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자본가들의 부정부패가 심화되면서 그것을 고발하는 기자들이 등장했고 그게 탐사 보도의 효시가 됐다. 하지만 1,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전시체제 아래에서 국가가 언론을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탐사 보도 기능은 마비됐다. 그것이 1960년대 베트남전 전후로 부활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1980년대 들어서면서 탐사 보도와 폭로 저널리즘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무차별적인 폭로가 정치 권력이나 사회적인 모순을 감시하는 데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탐사 보도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치밀하게 연구하려는 취재 기법에 대한 연구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이 됐다. 누군가를 악으로 몰아붙이는 게 아니라 엄정한 중립성을 갖고 심층적이고 참신한 방식으로 보도를 하는 게 탐사 보도다. 탐사 보도가 흔히 한국 저널리즘의 마지막 보루라고 말들 한다. 그 이유는 무언가 대단한 걸 캐낼 수 있어서가 아니다. 취재원의 입에 의존하는 지금의 취재 방식을 개혁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난곡빈민촌 취재에서 내가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빈민촌의 실상뿐만 아니라 빈민촌이 생성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구조적 모순이었다. 그걸 위해 다양한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고 여러 취재원을 만나 취재를 했다. 그래서 심층적인 탐사 보도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분업을 할 수 밖에 없다. 처음엔 특정한 출입처를 갖는 일상적인 기자 생활을 했었다. 그런데 공허하더라. 무언가 입체적인 취재를 하고 싶은데 힘에 부쳤다. 사회적인 모순을 겉만 보고 지나가는 게 싫었다.

막말로 탐사 보도는 기자 개인에게 이익이 남는 일이 아니다. 출입처와의 유대 관계가 생기지 않으니까. 대신 유착될 일도 없다. 그게 좋더라. 늘 객관적일 수 있으니까. 내가 느끼는 사회적인 모순을 공정하게 분석할 수 있으니까. 천편일률적인 기사 작성 관행을 바꿔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취재 기법부터 기사 작성 기법까지 새롭게 연구해볼 수도 있다. 한국 신문 언론의 위기는 독자들이 기사를 읽지 않고 제목만 보면서 시작됐다. 그걸 돌파하는 길이 읽어볼만한 탐사 보도 기사를 쓰는 거다. 그것이 내가 탐사 보도에 힘을 쏟는 이유다.”

뉴스위크 임도경 기자(46)
경력 25년 국민의 정부 최대의 권력형 비리라는 최규선 게이트를 보도해 당시 집권 후반기를 맞이하고 있던 김대중 대통령을 궁지에 빠뜨렸다.

“탐사 보도의 매력은 내 시각으로 세상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상을 내 눈으로 보고 싶다고 느낄 때 탐사 보도는 시작된다. 세상의 진실은 그냥 보이지 않는다. 단편적인 뉴스 전쟁은 오히려 진실을 감춘다. 원래 취재는 전쟁이다. 기자는 검투사다. 특히 일간지에선 더 그렇다. 하지만 매체들 사이에서 보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선 진실을 가늠할 수 없다. 탐사 보도란 그럴 때 필요한 것이다. 한 발 떨어져서 숲을 보는 것 말이다. 기자의 재산은 사람이다. 올해로 25년째 기자일을 하고 있는데 25년 전에 만난 취재원과 아직도 만난다. 25년 기자 생활 동안 대체로 정치부에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많은 정보가 내게 모인다. 이런 식이다. 오래 전 취재였는데 5공 정권 때 허화평 씨의 친인척 중에 북한에 관련된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시절 분위기론 허화평 씨는 절대로 군인도 못되고 보안사령부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취재해 특종을 했다. 아주 작은 정보에서 시작되는 게 탐사 보도다. 탐사 보도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믿을 만한 취재원을 확보하고 그가 입을 열게 하는 것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집요하게 설득하는 것 뿐이다. 난 대체적으론 설득에 성공하는 편이다. 예전에 ‘오대양 사건’ 취재 때도 집요하게 설득한 끝에 사체에서 정액이 검출됐다는 사실을 확인받을 수 있었다. 사람의 맥을 짚는 게 탐사 보도의 핵심이다. 오랜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언제 어느 순간 어떤 사람이 내게 중요한 취재원이 될지 모른다는 걸 알게 된다. 딥스로트는 언제 어디서 출몰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선택의 기로에 서기도 한다. 최규선 게이트가 그랬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에 얽힌 국정원의 공작에 관한 기사를 쓸 때도 그랬다. 둘 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치명타를 줄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DJ가 날 참 이뻐했었다. DJ 정권 인사들도 잘 알고 지냈고. 다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터였다. 하지만 기사를 쓸 수밖에 없었다. 기자는 때론 단순해져야 하니까.

탐사 보도를 하는 기자는 늘 세상과 사람들을 입체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쓸 가치가 있다 싶으면 과감하게 써야 한다. 탐사 보도는 모든 기사의 꽃이다. 그러나 탐사 보도의 어려움은 단순한 사실 전달이 아니라 입체적인 정황을 보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늘 반격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최규선 게이트의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다. 현직 대통령이라는 권력 핵심을 건드린 대가는 역시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난 떳떳하다. 취재 과정에서 떳떳하다면 탐사 보도의 결과도 늘 좋다. 그게 나의 믿음이다.”

SBS 이정애 기자(34)
경력 11년 말기암을 고친다는 한의사의 실체를 파헤쳐 임상 실험 없이도 시술이 가능한 당시 한의학 법제도의 허점을 지적했다.

“보도한다고 해서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건 아니더라. 그럴 때 화가 난다. 지속적으로 물고 늘어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얘기니까. 또 방송 탐사 보도 프로그램은 자꾸만 사회 문제에 치중하게 된다. 방송국 내에서 탐사 보도 프로그램은 ‘좌천 아닌 좌천’에 해당된다. 특정 출입처만 담당하는 게 보통이니까 말이다. 그러다보니 젊은 기자들이 탐사 보도에 나서게 되고 결국 다양한 부서를 아직 경험하지 못한 탓에 취재력이 떨어진다. 탐사 보도의 깊이가 얕아지고 결국 현상에 치중하기 쉬운 사회부성 보도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건 악순환이다. 탐사 보도는 모든 기자들의 꿈이다. 지금까지 탐사 보도를 하면서 보람있다고 느낀 적이 많았다. ‘말기암을 고친다는 한의사’를 취재했을 때는 객관적으로 너무나 완벽한 조건을 갖춘 한의사가 말기암을 고친다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내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가 치료했다고 주장하는 환자들이 사실 하나둘 죽어간다는 사실을 하나하나 추적 보도했다. 또 그의 치료를 받고 살아났다는 환자가 사실 이미 다른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완쾌되고 있었다는 사실도 증명해야 했다.

또 그 과정에서 임상 실험 없이도 시술을 할 수 있는 한의학 법제도의 문제점까지 주목해야 했다. 결국 겉으로는 멀쩡해보이지만 사실 썩어버린 사회의 거짓 하나를 밝혀냈다. 하지만 여전히 탐사 보도에 대해선 갈증을 느낀다. 얼마 전 안기부 도청을 밝혀낸 <조선일보>의 이진동 기자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진동 기자가 어떻게 취재했는지 궁금했다. 그렇게 구조적인 모순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 방송 탐사 보도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게 좀 속상하다. 만일 내게 그런 상황이 주어졌다면 이진동 기자처럼 취재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했다. 그래도 난 탐사 보도에 열성이다. 보도를 한다고 다 변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 방송 탐사 보도가 성공하면 세상이 크게 변한다는 건 경험해봐서 알고 있으니까.”

세계일보 김형구 기자(33)
경력 7년‘기록이 없는 나라’라는 기획 취재를 통해 주요 문서나 기록이 소홀한 한국 정부 기관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탐사 보도란 과학적인 보도를 뜻한다. 이런 거다. 얼마 전 미국 뉴올리언스 지역을 강타한 허리케인이 어떤 식으로 특정 지역에 더 큰 피해를 입혔는지를 보여주는 보도 기사가 있었다. 그 기사는 태풍의 풍속이 더 빨랐는데도 상대적으로 덜 피해를 입은 고급 주택 지역과 풍속이 느렸지만 초토화된 빈민가를 비교해 이번 카트리나 피해가 미국의 고질적인 빈부 격차가 만들어낸 ‘인재’라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모두가 카트리나 피해가 인재라는 건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증명하진 못했다. 그런데 미국 언론은 과학적인 탐사 보도를 통해 그걸 증명해냈고 사회적인 모순을 새삼 다시 보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다. 탐사 보도가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면서 지난 몇 년 동안 각 언론사들이 탐사 보도팀을 꾸려서 취재를 지시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들 시들하다.

<조선일보>도 얼마 전 탐사 보도팀을 해체했다. 그 이유는 탐사 보도팀을 만들면 매번 대단한 특종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탐사 보도는 특종을 좇는 게 아니다. 현상만을 좇기 마련인 언론 보도의 홍수 속에서 구체적인 자료를 토대로 한 설득력 있고 책임감 있는 기사를 쓰는 게 탐사 보도의 첫 발이다. 한국 언론은 그저 ‘빨대’라고 불리는 취재원한테 한 마디 듣고 와서 확대 보도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런데 한 개 기획에 대해 오랜 시간 취재를 하면서 내실 있는 기사를 쓰는 것은 언론사 차원의 지원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요즘 언론사들이 너무 급하게 탐사 보도에 결과물을 기대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흔히 탐사 보도는 ‘매번 맨땅에 헤딩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일상적으로 접촉하던 취재원이 아니라 매 순간 새로운 취재원을 발굴하고 자료를 모으는 일은 매번 처음부터 일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그래서 탐사 보도 기자들은 멀티플레이어가 된다. 수많은 자료를 엑셀 같은 프로그램으로 분석하고 사람을 만나고 기사를 쓰는 것까지 모든 걸 해내야 한다.

사회적 관계망 분석이라는 취재 방식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현상과 본질을 함께 드러내놓는 취재 형식이다. 그것 역시 탐사 보도의 한 기법으로 개발된 것이다. 탐사 보도란 그렇게 과학적으로 세상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과학적인 방식으로 ‘기록이 없는 나라’ 처럼 방대한 기록을 들춰내야 하는 조직적인 기사들도 나올 수 있었다. ‘국군포로문제’를 취재한 적이 있었다. 소외받고 있는 국군포로를 하나씩 찾아내 국가 차원의 보호가 없는 그들의 처지를 보도할 땐 국방부의 방해도 만만치 않았다. 탐사 보도의 관심 거리는 그렇게 발굴된다. 잘못된 것에 대한 분노 말이다. 거기서부터 진실이 비롯된다.”

에디터/신기주 GQ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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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지난해 12월경에 있었던 안수찬 기자의 인터뷰를 기억하실 겁니다. 어떤 이들은 지승호 최고의 인터뷰였다고 하기도 했는데, 바라보는 위치의 다름으로 인한 독특한 시각을 전해줌으로서 우리가 한나라당을 보는 시각을 한층 더 넓혀 주었다는 평이 많았습니다.

한나라당 출입기자로서 파격적인 이야기를 많이 한 탓에 안수찬 기자의 신변(?)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저 역시 인터뷰어로서 새로운 시각을 많이 전해주고 싶은 욕심 탓에 몇 번의 인터뷰 요청을 더 했었습니다.

그러나 안 기자는 '서프의 매체력이 부담스럽다. 만약 하게 되면 총선 이후에 하자'는 요청이 있었고, 그 후 터진 탄핵 사태로 인해 안수찬 기자는 '한나라당의 최후' 시리즈를 인터넷 한겨레 뉴스메일익스프레스를 통해 연재했습니다. 그리고 약속한대로 총선이 끝난 후 안수찬 기자는 입사때부터 원하던 문화부 학술담당기자로 발령받았고, 정치부 기자로서의 마지막 정리 차원에서 인터뷰에 응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쪽 진영의 시각으로 인해 놓치고 있었던 여러 가지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안수찬 기자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리며, 여러분들에게도 음미하면서 여러 가지를 같이 생각하고, 논의할 수 있는 그런 인터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다음은 인터뷰 전문입니다.

지승호 - 이번에 다른 부서로 옮기게 되었다고 들었는데요.
안수찬 - 다음 주 월요일자로 문화부 학술 담당부서로 가게 됐습니다.

지 - 옮기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본인의 의사였습니까?
안 - 제가 처음에 면접시험 볼 때도 그랬고, 입사할 때부터 희망하는 부서가 문화부였습니다. 그 뒤로 신문사에서 6개월마다 한번씩 인사가 있는데, 그때마다 문화부로 보내달라고 노래를 불렀던 게 입사 6년 6개월만에 이루어진 거구요. 물론 이제 정치부에서 떠나서 내공을 기르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망도 있어서 학술쪽으로 자원을 했죠. 머리가 비어 있어서 좀 채울려구요.(웃음)

지 - 주로 어떤 취재를 담당하게 되나요?
안 - 어느 선배가 그러던데요.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가 학술을 하다가 논설위원실로 갔다가 다시 학술로 왔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전해듣기로는 그쪽도 굉장히 자원하고 희망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주제넘게 이야기를 하면 매체가 지향하는 논조나 좌표 설정 과정에서 이론적이고 학술적인 자양분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조직내에서 하고 싶은 거구요. 외부적으로는 매체가 대상으로 하는 독자들한테 대중적이고 쉬운 언어로 각종 사회적, 역사적 쟁점과 접점에 대해서 이론적, 학술적 이해의 틀이랄까 도구 같은 것을 제공하고자 하는 거죠.

그래서 한겨레도 전통적으로 학술 담당기자가 중요하다고 이해되었는데, 제가 그 역할을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구요. 저 같은 경우에는 준비된 학술기자는 아닙니다. 열의는 있는데, 준비는 좀 덜됐고, 준비를 좀 더해서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다른 방식으로 발언하고 기사를 쓰게 될 것 같아요.

지 - 아직도 한나라당을 출입하십니까?
안 - 이제 끝난 거죠. 지난주말로 끝났어요.

지 - 글 쓰시고 나서 출입하거나 하면서 불편한 점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안 - 제가 쓴 메일 쭉 보셨나요?

지 - 예. 봤습니다. 항의도 많았다고 하던데요.
안 - 불편했어요. 다른 얘기를 더 하고 싶지는 않고, 제가 지금 멀쩡히 있으니까 물리적인 위해를 가하지나 그랬던 건 아니지만, 매우 불편했죠. 처음에 글을 쓰면서 '이 정도는 감수해야겠다. 감내하겠다'고 결심한 부분이 있는데, 그 결심에 비하면 별게 아니었던 것 같구요. 그러나 몸과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에 곤욕스러웠고, 특히 총선 기간 내내 그런 부분이 있었습니다.

지 - 웬만한 사람은 감당하기 쉽지 않은 정신적인 스트레스였을 것 같은데요. 한나라당 출입기자 2년을 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무엇입니까?
안 - '한나라당의 최후' 시리즈를 썼는데, 저는 개인적으로는 반성하고 있어요. 뭘 반성하냐 하면, 제가 충분히 현명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지혜롭거나, 용의주도하지 못했다' 이런 생각을 해요. 그러면서도 후회하지는 않는데, '왜 후회를 안하느냐' 하면 지금 현재 제가 가진 능력이나 그릇으로는 그런 방식 이외에는 달리 발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가지고 있는 용량 안에서는 최선을, 'best of best'를 선택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구요. 그런데 그것을 전제로 하더라도 후회가 되는 건 그런건데, 어찌됐든 기자는 인식으로서의 객관, 판단으로서의 객관 이런 게 아니라 적어도 자신의 주관과 주장을 담을 때조차도 주장과 주관이 담기는 틀은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배웠거든요. 신문기자가 보통 그런 걸 하는 건데, 제가 인터넷 뉴스메일 쓰면서도 비교적 다른 인터넷 논객들이 쓰는 글과는 달리 기자로서의 객관적인 틀이나 객관적인 사실들을 통해서 제 주관과 주장을 드러내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나름의 세련된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는데, 어떤 때는 좀 직설적으로 나갔던 거죠. 그래서 심지어는 강렬한 주장, 주의를 담고 있는 순간이라고 할지라도, 그 조차도 좀 세련된 방식으로 했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곽병찬 선배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톤의 글들을 쓰셨어요. 그런데 그 분의 경우에는 제가 보기에는 굉장히 세련되게 하셨어요. 물론 장단점이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그런 점에서 아쉽고... 일단 거기까지 하죠.

지 - 그 시점에서는 방법적인 세련됨을 떠나서 어려운 얘기를 하셨고, 거기에 대해 격려해주신 분들도 많이 계셨는데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그 기사로 인해 앞으로 한나라당을 출입할 한겨레 기자는 훨씬 더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연재할 동안 한나라당에서 항의도 많이 했었다던데...
안 - 제가 말씀드린 건 개인적인 수준의 얘기였구요. 쓰면서 두 가지를 다 고려한 것인데요. '개인적인 수준에서 무엇을 감내하고, 무엇을 희생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부분에서는 기자 개인으로서의 안수찬에 대한 공신력 같은 것을 생각했던 거구요. 이른바 객관의 틀을 담은 공신력보다 제 기자로서의 양심을 중시했던 결과가 그거였습니다.

하지만 기자는 어찌됐든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몸담고 있는 매체와도 연관성이 있는 거니까 한겨레라는 조직적인 부분도 고려했었는데, 그때 제 판단은 뭐였냐 하면 이 글 쓰는 걸 통해서... 쉽게 말하면 그거였어요. 그 생각했는데, 이것 때문에 회사에서 저를 징계한다거나, 출입처를 바꾼다거나, 심지어는 부서 전별을 시키더라도 아무 말없이 감수하겠다고 결심했었어요.

그게 뭐냐하면 제가 생각하는 기자로서의 양심은 지키지만, 조직에 미치는 불필요한 피해와 불필요한 오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조직적으로 감내해야 할 것은 감내하겠다고 생각했구요. 결과적으로는 선배들이 그런 제 뜻을 전해들은 다음에도 충분히 현명한 방식으로 배려해주신 겁니다. 그런데도 남는 게 있죠. 그 글을 읽은 한나라당 사람들 중에 그 글의 진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오해하거나 오독한 사람들이 결국은 '저 매체, 저 기자' 그렇게 평가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긴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도 두가지 측면의 생각을 했어요.

첫째는 우선 제가 출입을 시작한 2002년 3월, 그때가 이른바 언론사 세무조사가 마무리된 직후였거든요. 제가 이해하기로는 언론사 세무조사 정국에서는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싸운 게 아니라 거의 한나라당과 한겨레가 조직 대 조직으로서 맞붙었던 정국이었어요. 심지어는 한나라당이 한겨레 기자와 한겨레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한겨레도 한나라당 의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었죠. 그 당시 얘기를 들어보면 사무처 당직자들이나 의원들이 저희 신문기자들이 있는 부스 근처에 왔다가 아는 체도 하지 않고 돌아갔다고 하더라구요. 다른 신문사 사람들한테는 인사를 하면서. 그 정도로 힘들었던 것으로 이해하는데, 그 기자들이 얼마나 고생이 심했겠습니까?

그 사태가 종결된 후에 제가 갔을 때는, 물론 제가 나름대로 애를 많이 쓰긴 했지만, 취재원과 매체의 정상적인 관계를 상당부분 복원했었어요. 그게 쉽게 말해서 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문제로, 그리고 특정 기자의 문제 때문에 매체로서의 한겨레의 공신력과 정당으로서의 한나라당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훼손되지는 않을 겁니다. 싫건 좋건간에 한나라당과 한겨레의 긴장 관계는 회피할 수 없는 거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충분히 다른 기자들이 복원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실제로 큰 지장은 없다고 생각해요.

심지어는 저도 돌아가면 복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구요. 두 번째로 하나 덧붙이면 무엇보다, 제가 '최후' 이런 얘기를 쓰긴 썼지만, 한나라당의 소장파 몇 명은 안타까움을 나타내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안 기자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우리가 그렇게 못해서 미안하다'고 얘기한 소장파 의원이 두 세명 있어요. 그 사람들의 경우에는 뭐랄까 제 언어가 비록 정제되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제가 이해하는 진정한 보수정당에 대한 애정이나 기대를 그 글에서 찾았던 것 같구요.

그런 진정성을 이해해주는 정치인이라면 언제든지 다시 취재를 할 수 있는 거고,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면 저도 그런 사람들하고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 거죠. 저는 이 모든 걸 다 떠나서 이른바 보수 정당의 올바른 재정립, 진정성의 차원에서 누가 나에게 돌을 던져도 당당하다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따라오는 여러 가지 희생해야될 부분, 감안해야될 부분은 부수적으로 따라붙는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지 - 총선이 끝난 후 소장파들의 개혁요구가 잇다르고 있는데요. '한나라당의 최후' 시리즈에서 "한나라당의 소장파는 '권력 게임'의 지저분한 박스에 갇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르고 꾸벅꾸벅 졸다, 아주 가끔씩 화들짝 놀라 '정치적 본능'이라는 실눈을 떴다가 그나마 다시 감아버리는 '양계장 병아리'다"라고 혹평하셨는데요.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았거든요. 몰리면 개혁을 얘기하다가 그 시기가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침묵해버리는 면모가 있었는데요. 그런 사람들에게 개혁을 기대할 수 있느냐 이런 얘기도 나올 수 있을텐데요.
안 - 17대 총선 결과를 통해 등장한 한나라당 당선자의 면면을 보면 약간 변화된 양상이 있어요. 뭐냐하면 지금까지 이른바 소장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원희룡, 남경필, 오세훈이었잖아요. 이 사람들이 소장파라고 불린 이유가 젊고 초재선급인데다가 나이대가 386이었다는 것인데, 이걸 제외하면 이른바 이념 지향과 세력으로서의 정체성 같은 게 매우 희미했어요.

정치인 개인으로서의 존립근거를 찾아서 정치적 발언들을 하다 보니까 기회주의적이라고 비판받았고,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17대 국회 이후에 한나라당에서 소장파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인물 구성면에서는 여전히 원희룡, 남경필이 포함이 되겠지만, 기본 주동력은 이른바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386세대 소장파가 아니라 이른바 보수 강단 학자 출신들인 박세일, 박형준, 윤건형 이런 교수 그룹이 될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주로 소장그룹의 주축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이 소장그룹은 양계장 병아리 같이 기회주의적인 행태를 했던 경력은 없는데, 이런 사람들이 남경필, 원희룡 등과 어떻게 화학적인 융합을 해서 이끌고 가냐에 따라서 역시 또 다시 기회주의적인 행태로 정치인생을 마감할 건지 아닐지 판가름나겠죠.

16대까지 보였던 한나라당 소장파에 대한 평가는 저는 별로 틀린 거 없다고 생각하구요. 17대때에 그 평가나 그 판단이 그대로 유효할 것인가는 좀 봐야 되요. 좀 바뀌었거든요. 그 변화된 양상이나 변수를 무시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릴 때 '한나라당 주변의 고급 인력들이 많이 몰려서 두렵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지금까지 보수정치권, 혹은 수구 보수정치권의 외곽에서 일종의 자문그룹, 정책그룹으로 존재했던, 그래서 기껏해야 정책 보고서 정도 쓰고, 총선 대선 공약 만들 때 자료 제공했던 초일류 학력을 가진 엘리트 출신들이 17대 국회 들어서 일정한 자기 세력과 그룹을 형성해서 정치권에 진출한 거예요.

그런 면에서 다른 양상이 전개될 가능성이 있고, 그리고 이 사람들은 분명히 남경필, 원희룡 류와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 양상을 좀 더 지켜봐야겠죠.

지 - 원희룡, 남경필 의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세요? 원희룡 의원 같은 경우는 요즘 웬만한 민주노동당, 열린우리당 의원보다 어떤 부분에서는 한나라당을 더 강하게 비판하고 있구요. 남경필 의원 같은 경우 탄핵때 '임종석 의원이 울 때 같이 울었다'고 했는데,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울면서 찌른 칼은 칼이 아니냐?'고 표현하신 것처럼 그런 식의 마음을 가진 게 정치철학으로 내면화되지 못해서 그때 그때 욕을 먹으면 거기에 반응하고, 금방 잊어버리는 그런 반응들이 나오는 것 같은데요.
안 - 우선 개인적으로는 남경필, 원희룡 의원하고 제일 친했어요. 막판에는 거의 허물없이 이야기할 정도까지 갔었거든요. 그리고 정치인에 대해 평가하자면 남경필 의원은 밖에서는 얄밉게 보는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지 - 정형근 의원보다 더 얄밉게 보는 분들도 계시죠. 그거까지 동의할 수는 없지만요.(웃음)
안 - 얄미운 구석이 없지 않아 있는데, 기본적으로 품성 자체는 밝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싶구요. 정치 철학의 깊이 이런 것은 원희룡 의원이 훨씬 뛰어난 것 같습니다. 저는 적어도 한나라당 틀 안에서 그 이상을 기대하는 것은 좀 힘든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구요. 그 정도라도 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그런 정치인들이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 사람의 정치 스타일에 있다기 보다는 당내에서 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 및 지지 기반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뭐냐하면 원희룡, 남경필 의원이 원내에서는 아무리 개혁적으로 발언을 해도 실제로 지구당이나 지지 당원들의 구조와 정서는 기본적으로는 민정당 때부터 주류 정당, 주류 수구보수정당에 편입되어 있던 사람들이거든요. 남경필, 원희룡이 수구세력에게 '나가라'고 하면 '니가 나가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표를 무시하고, 독립적으로 움직이기는 힘들었을 거구요.

그런 나름의 개혁적 보수를 정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정치인 개인으로서의 전망이 성립한다는 판단을 머릿속에서는 하면서도 그 사람들이 정치적 전망을 밝혀 나가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재선, 삼선 내지는 그 이후까지 보장할 수 있는 지지 집단들은 끊임없이 그 반대 동력을 가지고 움직이는 상황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돌파하고 과단성 있게 추진하는 정치인이 있는가 하면 그들은 그 중간에서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했던 거죠. 지금쯤 달라질만한 건 뭐냐하면 당내구조에서 16대 국회에 비하면 '잘한다. 좀 더 열심히 해라. 과단성을 갖고 계속 추진해라'고 하는 우호세력들이 계속 생길테고, 그들이 하나의 세를 형성해서 당 전체를 움직이는 양상이 된다면 그런 딜레마는 상당히 줄어들 수도 있겠죠.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 반대의 가능성도 상존하는 거죠. 오히려 어떤 맥락에서 보면 지금까지 그들이 기존에 주어진 조건에서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했던 기회주의적인 속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면 어느 순간 당내 구조나 정치적 지형에서 한나라당 내의 개혁적 담론이 불리하다는 판단이 되면 얼마든지 돌아설 수 있다는 걸 전제하는 거니까 전 100% 신뢰하지는 않아요. 다만 잘해주기를 바라는 거죠.

지 - 한나라당에서 탈당해서 열린우리당에 합류한 소위 독수리 오형제와 지금 한나라당에 남아 있는 개혁성향의 의원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어떤 부분이 있습니까? 요즘 들어서 한나라당에 계셨던 분들이라 개혁을 하는데, 한계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도 좀 있는데요.
안 - 의원 개인에 대한 평가를 하고 싶은데, 그건 못하겠구요. 우선 정치인은 인성이나 품성을 가지고 평가한다고 하기 보다는 명분을 가지고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치인 개인이 술먹고 고주망태가 되어서 추태를 부리더라도 그것은 가십성 기사인 거지, 그것이 그 정치인의 본질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참고할 만한 사항은 되겠죠. 언론보도의 문제도 그런 게 있잖아요. 그런 발언들을 중심으로 그 정치인들을 풀어쓰는 거, 예를 들면 독수리 오형제로 상징되는 그 의원들은 그 시기에 수구로 편향되는 한나라당의 정체성에 근본적인 문제를 던지면서 개혁 진영에 합류한 사람들이거든요. 그 사람들의 자질이 실제로 개혁진영의 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 지는 차치하더라도 일단은 그 사람들이 명분상에서는 지금 한나라당에 남아 있는 의원들보다는 더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일관성과 과단성의 측면에서는요. 제가 이해하기로는 입당초기부터 지금까지도 독수리 오형제 몇몇 의원들의 경우에는 민주당이나 열린우리당의 풍토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원내 활동의 체계적, 시스템 구조적인 측면에서의 남다른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한나라당이 기본적으로 협약에 의해서 만들어진 정당이거든요. 지역간 협약도 있을 수 있고, 그 안에 이미 한나라당 소장파, 수구 등으로 나누어지듯이 굉장히 오랜기간 동안 권력의 목적 아래서 양해하고, 협약을 해서 상호공존하기로 약속을 하고 모인 정당이기 때문에 한나라당의 문법에서는 자신의 주의나 주장을 관철시키기 보다는 타협하고, 화해하고, 문제를 유보시키고, 모순을 조정하는 정치 문법을 발달시킬 수 밖에 없는 거죠.

독수리 오형제 관련된 분들도 그것과 관련된 사고방식이 더 발달되어 있는 것이고, 그것이 개혁당 출신이거나 열린우리당의 주류나 재야의 시각에서 봤을때는 일관된 주장, 전투성 이런 게 뒤쳐질 수는 있겠죠. 그러나 큰 맥락에서 보면 그게 융합되어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 게 열린우리당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전범을 보여줘야 한나라당이 끝내 진정한 보수정당으로의 개조가 17대마저도 불가능해지고, 그때까지 정당개조를 위해 애썼던 소장파나 개혁파가 있다면 또 다른 정치적 전망의 전범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저는 그쪽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하나 아쉬운 건 아까 명분 얘기했는데, 어느 하나의 명분이 그 정치인의 정치 인생 전부를 판가름 짓는 것은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 이재오가 민중당 활동을 했다고 해서.. 그건 당연히 훌륭한 거죠.

재야에서 원내진출을 시도했으니까 그것은 훌륭한 거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이후 20년에 걸친 활동 모두가 정당하다고 평가될 수 없는 것처럼 독수리 오형제가 내렸던 명분은 옳고, 아직도 유효하기는 한데, 그 유효기간이 많이 남지는 않은 것 같아요. 지금부터는 새로운 명분을 구축할 필요가 있는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개척하느냐에 따라서 결과적으로 지금 한나라당 내의 소장파보다 못한 원내활동이나 정당활동을 할 때는 뒤쳐질 수도 있는 거죠.

지 - 박근혜 대표 체제가 향후 안정되리라고 보십니까? 집단지도체제 얘기도 나오고, 예전에 쓰신 글에서 "이승만부터 박정희, 전두환 등으로 이어지는 수구정치세력의 정통성을 더 강화해 총선을 치르겠다는 한나라당의 의중이 정확히 반영된 것이다", "누가 봐도 만만한 인물이었다는 이야기다. 뚜렷한 계보도 없고, 더구나 총선 직후면 곧바로 대표의 권위에 금이 갈 수밖에 없는 시한부 인생이다"라고 표현하셨는데요. 지금 어떤 면에서는 총선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어서 만만치 않은 세를 과시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안 - 제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박근혜, 박정희 이 두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여러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거나 중심 화두가 될 것 같아요. 우선 박근혜에 대해서 얘기하면 박근혜가 대표가 된 과정에는 철저하게 당내 지형에 의존했다고 생각해요. 박근혜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박근혜가 제일 적임자였어요. 왜 적임자냐 하면 저 인물이라면 내가 당선되서 올라오기만 하면 총선 이후 체제에서 자기가 충분히 포지셔닝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예를 들면 최병렬 대표 같은 경우는 일종의 당내 정치구도에서 호오, 좋고 싫음이 분명했어요. 그래서 최대표가 집권을 계속 할 경우에는 당선되어서 올라오더라도 이른바 당내 주류로 발탁될 가능성이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이 꽤 있어요. 반대로 박근혜 대표의 경우에는 당선자 중 그 누구도 '박근혜 대표가 대표를 하고 있으니까 나는 큰일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거라고 봐야 돼요. 그런 면에서는 당내 세력균형의 꼭지점에서 당시 정세적으로 박근혜 대표가 등장했다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구요.

박 대표가 가지는 이미지, 기표 기의 체계에서 기표로서의 영남지지표를 모으는데도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것도 플러스 알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게 먼저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영남 대표가 아니라 김덕룡이나 제 3의 인물을 상정했을 때 그 제 3의 인물이 '영남출신이 아니라서 배제했을까' 하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힘의 세력 균형의 정점을 이루는 사람이 누군가 있었다면 다른 사람을 택할 수도 있었는데, 그 사람이 마침 박근혜였고, 박근혜는 영남에서 더 강점을 발휘했던 거죠. 제가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것, 그리고 사람들이 가볍게 본 것 중의 하나가 60년대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이른바 성장신화의 향수를 가진, 심지어는 그 시대를 겪지는 못했지만, 간접체험을 통해서 그 시대에 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영남을 중심으로 우리 생각보다 굉장히 두터웠다는 겁니다.

저는 그걸 미쳐 생각하지 못했고, 아니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얕잡아 봤던 거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연구하고 고민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두터운 세력들이, 아마 한나라당도 놀랬을 거예요. 왜냐하면 지금까지 지난 대선도 그렇고, 제가 기억하는 최근 2∼3년동안 그들이 박정희를 내세워서 캠페인을 하거나 선거를 치른 적이 없었어요. 오히려 박정희 문제만 나오면 수세적이었고, 가급적 그 문제를 회피하려고 했지, 그것을 노골적으로 자극하거나 이용해서 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본 적은 없었으니까요.

지 - 그동안은 자민련 김종필 의원이나 그랬었던 것 같은데요.(웃음)
안 - 제가 느낀건 뭐였냐 하면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한국 사회가 97년 이후에 어찌되었건 거대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겪고 있는데, 이른바 민주화 세력의 집권 이후에 민주화 세력 그 이전의 시기와 단절을 이루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적 전망, 사회적 전망, 역사적 전망 같은 것을 국민들에게 설득을 구하거나, 혹은 직접 집행해서 발현된 형태를 보여주거나 하는 것에 비교적 실패하는 과정에서, 혹은 어려움을 겪는 과정에서 10여년동안 이른바 개혁 피로증후군도 아닌 뭐랄까 오히려 그 옛날의 성공신화에 대한 갈망을 느끼는 사람들이 굉장히 늘어난 것 같습니다.

이것은 문제가 뭐냐하면 신화이거나 환상인 거죠. 실제를 보는 게 아니라 신화를 보는 거니까... 신화나 환상을 깰 수 있는 방법은 제가 보기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게 신화나 환상이라는 것을 교육을 해야 되는 거죠. 사람들이 그것을 인지해야 되는 건데, 그게 굉장히 오래 걸리고, 더군다나 대중적으로는 쉽게 단시간내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또 하나는 그 신화를 넘어서는 다른 형태의 신화를 마련할 수밖에 없는 건데, '이렇게 하면 한국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한국사회가 질적으로 다른 체제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건데, 그것도 역시 1∼2년내 가능한 일은 아닌 거죠.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해도 어려운 일이니까... 저는 이른바 어찌되었던 한국 사회가 민주주의의 완성과 함께 성장론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던 이 사회의 민주정치 질서에 부응하고, 조응하는 방식의 경제적 대안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저는 신자유주의는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사민주의가 되었건 제 3의 길이든 무엇이 되었건 간에 그런 경제적 대안을 실제로 집행하고 구현해 내기 전에는 이 신화를 깨기 힘들고, 이 신화에 환호하는 세력 즉, 박정희에 환상을 가지면서 박근혜에게 환호하는 세력 혹은 집단이 쉽게 없어지지 않을 수 있어요.

결과적으로 뭐냐하면 그 집단이 상당기간 동안 없어지지 않는다면 그 효과에 기대는 한나라당의 전략도 상당기간 동안 유지될 수밖에 없겠죠.

지 - 아까도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착각을 한 부분인 것 같은데, 한나라당이 적극적으로 박정희 정서를 이용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박정희 정서라는 것은 그것에 기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인제 의원도 '난 박정희와 생김새, 키가 똑같다'고 한 적이 있고, 정동영 의장도 일정부분 차이는 있지만, 칭찬을 한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송두율 교수를 계기로 어떤 부분에서 사회가 거꾸로 갈 수 있는 것처럼 박근혜 현상을 계기로 박정희 현상이 우리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부활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우려도 좀 있는데요. '엄마와 꼭 닮았다'며 우시는 할머니들도 계셨고, 그걸 보며 자란 세대들은 밤새 식혜를 했다며 "대표님 꼭 드시라"고 하는 걸 보면서 씁쓸하던데요. "단절과 청산없는 정치세력에게 손 내밀고 환호하는 사람들을 곁에서 지켜보며 현기증을 느낀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어쩌면 박근혜 자체보다도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우리 사회 일부의 멘탈리티가 다시 나타났다는게 더 문제가 될 것 같기도 한데요.
안 - 옛날 운동권에서 주로 이른바 NL이라고 얘기했던 사람들이 주로 썼던 이야기 중의 하나가 '승리의 경험이 중요하다' 이런 얘기를 했었어요. 요즘 들어 생각하는게 그런 건데, 월드컵때 붉은 악마들 모였을 때 왜 환호했을까를 보면 그전에 '패하더라도 응원하겠다'는 것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강팀을 이길 수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딴지일보에서 했던 '우리는 강팀이다'고 했던게 얼마나 통쾌했습니까? 우리도 승리할 수 있구나, 이길 수 있구나, 그게 사람들을 어떤 하나의 이벤트나 이념에 모아세울 수 있는 큰 힘 중의 하나인 것 같아요. 실제로. 반드시 승리를 통해서만 교훈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한국사회를 놓고보면 50년대 이후에 혹은 길게 보면 개항 이후에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뭔가를 해서 이뤄낼 수 있구나 하는 성취감을, 그것이 조작된 것이건 과장된 것이건 간에 국가적으로 경험했던 거의 유일한 시기가 박정희 시대였던 것 같아요.

저는 그 시대를 살지는 않았지만, 50대 이상의 사람들은 그게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느낀 건 '이 사람들이 승리의 추억을 가지고 있구나'하는 거였는데, 예를 들면 그런 거 아닙니까? '히딩크는 이기는데, 왜 너는 못이겨' 이런 거 아닙니까? 정몽준도 히딩크를 자처했었고, 대권주자들이 모두 히딩크를 차용했잖아요. '내가 히딩크다'하고. 사실은 한국 국민들의 정서속에서는 (적어도 50대 이상에게는) 박정희가 히딩크 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제 2의 히딩크를 기다렸던 것 같구요. 이제 그 밑의 20대들은 히딩크가 하는 게임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유능한 감독이 있었다더라는 얘기만 듣고,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구요. 그게 환상인 이유가 착종되어 있는 거거든요. 승리의 경험이라고 하면 어찌되었건 한국사회가 어떤 맥락에서의 성장과 발전을 이루었다는건데, 저는 그 성장과 발전이 온전한 것이 아니고, 올바른 것도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 성장과 발전의 메카니즘 자체가 그 이후(80년대 이후)의 성장과 발전을 막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거든요. 제가 보기에는 박정희의 핵심은 그거라고 생각해요. 비유를 하자면 '좋아. 히딩크가 4강까지 갔어. 그런데 그 이후에 다시는 16강도 올라가지 못할 악패를 남기게 됐어' 그런 식으로 박정희 역시 박정희 방식으로 10년 내지 20년을 지탱할 수 있는 성장의 동력을 만들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때 써먹었던 동력 때문에 그 이후 3∼40년이 지나도록 한국 사회는 더 이상 새로운 방식의 발전과 비젼을 개척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앞의 부분만 보고, 뒤의 부분은 못보는 거고, 결과적으로 보면 '그때 환호했던 20년 동안의 산업화, 한강의 기적이라는 것도 허구였을 수도 있다. 혹은 허구였다'라는 논의로 나가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도 이 부분에 대해서 한나라당이나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은 비교적 적극적으로 이 부분을 인용할 것 같고 열린우리당도 정확하게 신화구조에서 헤어나오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제가 사회과학을 잘 모르지만, 제가 이해하는 패러다임에서는 일정하게는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의 국가가 경제적 부를 팽창시킬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의 과정에서 미국이나 서구 유럽이 채택한 게 신자유주의거든요. 한국은 제 1국이 아니니까 신자유주의를 그대로 원용할 수는 없는데, 불행하게도 한국 역시도 경제 발전과 전망을 내오는 과정에서 딜레마에 봉착했고,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두가지 길에 놓여 있는 거죠.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모방하거나 원용한 또 다른 방식의 새로운 한국적 자유주의, 그것이 제가 보기엔 박정희의 신화를 통해서 이데올로기적으로 구현될 가능성이 높은데, 그 길로 갈 것인가 (제가 보기에는 그 길은 한국적 대안이 될 수 없는데) 아니면 이른바 박정희 모델 혹은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가지는 허구를 폭로하고, 우리가 경험했던 한 순간의 성장발전 모델이 절대 우리의 대안이 아님을 인정하고, 새로운 모델을 찾아서 조금 힘들더라도 그 길을 찾아나갈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는데, 제가 보기엔 열린우리당은 후자의 부분에서 계속해서 다른 방법을 검색하고, 모색해서 다른 방식의 대안을 내놓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정확하게 그 지점에서 열린우리당이 적어도 한나라당의 신보수로 등장한 소장파 내지는 새로운 그룹들과 같은 길을 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 맥락에서 박정희 신드롬이 박정희 신드롬 그 자체라기 보다, 아마 박정희는 서서히 잊혀질 것 같고, 정치인 박근혜도 오래갈 것 같지는 않아요. 그걸 우려하지는 않는데, 이회창이 대통령이 될 것을 우려하는 것과 다른 문제입니다. 저는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문제는 그게 아니라 개인 박정희, 개인 박근혜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한국 사회 전체가 가게 될 길에 대한 우려가 있는 거죠.

저는 87년 이후를 쭉 보면, 이번 탄핵 정국도 마찬가지구요. 한국시민사회가 상부구조로서의 정치에 끊임없이 개입하고,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시민사회적, 참여민주주의적 영역을 확장시켜 왔다는 면에서 한국의 민주주의 혹은 한국은 굉장히 발전해왔다고 생각합니다. 더디지만 17대 총선까지도 그 면에서 발전인데, 한가지 시민사회 자체의 확장은 발전적인 측면이 있는데, 시민사회 내부에서는 신자유주의나 70년대 성장론이나 보수담론과 관련된 반성없이 시민사회 전체는 끊임없이 보수화되고 있지 않느냐는 우려는 지울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시민사회가 국가영역, 정치영역에 어떻게 개입하고, 직접 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를 증대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동시에 시민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이 보수담론, 보수의 허구, 박정희의 허구와 신화, 신드롬 이것을 어떻게 개혁하고 근본을 흔들어서 바람직한 민주주의적인 방향으로 컨텐츠를 키울 것인가에 대해서 그동안 시민사회가 소홀했던 것 같고, 그 결과가 17대 총선에서도 같이 드러난거죠.

지 - '승리의 경험'이라는 재밌는 분석을 하셨는데요. 야구 게임에 비유하면 선수들을 단기간에 혹사시켜서 몇 사람의 선수생명을 끊어놓고 3년 연속 우승을 했다면 그 평가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소속원들을 희생해서 그렇게 우승하는 것이 과연 옳았느냐, 선수를 보호하면서 장기적으로 했어야 하느냐, 그렇게라도 우승을 했어야 하느냐 등등 여러 가지 논의는 충분히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논의는 막아놓고, '그때 우리는 우승을 했었다'는 경험들에 매몰되어서 그런 현상이 지금 나타나는 것 같은데요.


정치인 박근혜에 대해서는 매력적인 부분은 있지만, "시민들이 정치인들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핵심인 '기표-기의 체계의 무한한 자의성'을 박근혜는 거부해 왔다. 그 결과 그를 접해본 상당수의 사람들은 진솔함, 담백함 등으로 박근혜를 기억한다. 분명 이는 다른 정치인들에게서는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덕목'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한국미래연합 대표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지켜본 박근혜는 '기표와 기의의 합일' 이후의 지점에 내놓을 내용이 비어있다. '기의'가 담고 있는 핵심이 없다는 것이다. 함께 한나라당을 출입하는 다른 언론사의 한 기자는 이런 표현을 쓰기도 했다. '박근혜가 구사하는 단어는 100개가 넘지 않아'"라고 한나라당의 최후 6편에서 쓰셨는데요. 정치인 박근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여성계에서는 남성 정치인보다는 여성적인 정책이나 개혁적인 부분에서 낫지 않겠느냐며 박근혜를 사유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는데요.
안 - 우선 여성계 부분 얘기하면 제가 김규항 선생 정도로 페미니스트를 공격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정치 영역에 있어서의 여성성이란건 그런 거거든요.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남성이 가질 수밖에 없는 폭력적이고, 남을 배려하지 않고, 위압적이고, 위계적인 질서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평등주의적이고, 스스로 약자니까 약자에 대한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는 그런 면에서 여성정치가 복권되는 게, 정상화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요.

여성정치를 제대로 복권하고, 구현하는 게 또한 그 담지자가 여성 정치인일 수도 있다고 인정해요. 그게 남성 정치인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여성 정치인이 더 잘할 거라는 데는 동의를 하는데, 모든 것은 예외가 있지 않습니까? 남성 정치인이 모두 파시스트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여성 정치인이 절대로 여성주의 정치를 하고 있다고 신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왜 그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겠구요.

박근혜의 경우에는 추미애와는 다른게 어쨌든 추미애는 여성으로서 가지는 여러 가지 약자적인 지위를 딛고서 자신의 정치영역을 구축한 거잖아요. 그런데 박근혜의 경우는 좀 다르죠. 박근혜 대표가 월급을 받는 곳이 두 곳이 있어요. 정수장학회와 국회의원 세비인데, 정수장학회는 뭐냐하면 박정희, 육영수 이름을 따서 만든 건데, 그 당시 정치자금으로 만들었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어쨌든 3공화국의 산물이라구요.

박근혜가 15대 때인가 보선을 통해서 들어올 때도 박근혜 개인이 추미애처럼 명판사, 인권 변호사를 거쳐서 온 것이 아니라 박정희의 딸이었기 때문에 정치권에 영입이 된거잖아요. 지역구가 대구 달성인 것도 그렇죠. 정치인 박근혜가 월급을 받는 두 조직 전부 다 박정희를 떼어놓고서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박정희를 체현했기 때문에, 박정희를 상징하기 때문에 정치권에 등장한 이 인사에 대해서 여성계가 그렇게 증오해마지 않는 파시스트, 파시즘의 부정적 남성정치의 전형인 박정희를 구현해서 정치인이 된 박근혜가 오로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이 여성정치를 구현할 수 있을 거라고 유보해두고, 양해해주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를 잘 못하겠어요.

그런데 그건 제 전공이 아니니까 거기까지 해두고요. 저는 제가 만나본 이회창, 제가 아는 이회창은... 이런 표현을 하면 또 욕먹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회창이 만약 대통령이 됐으면 사람들이 그동안 잘몰랐던 이회창의 면을, 특히 이회창 반대자들이 잘 몰랐던 이회창의 면을 보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이회창은 한나라당 전체를 자기가 꿈꾸는 대한민국을 구현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측면이 강했어요. 법치주의 이런 얘기하는데, 이회창씨는 실제로 민정계의 등에 올라타 있으면서도 내심으로는 민정계를 혐오했던 것 같고, 그 이전에 정당정치 전체를 많이 혐오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관료제적인 질서하에서 일종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절차적 민주주의 이런 관련된 이상을 대통령이 되면 구현해보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구요.

그래서 이른바 청와대 참모나 캠프 영역에 지금의 386 세대들, 독수리 5형제 혹은 이제야 정치권에 등장한 외곽에 있는 신보수주의 세력 이런 사람들을 충원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이해하는 박근혜 대표는 국가운영의 전망에서 정책적 내용과 이념 지향은 물론이고, 인적 구성에 있어서도 자기 나름의 컨텐츠는 없어요. 뭐냐하면 내일 당장 한나라당이 폭싹 망한다고 하면 맨바닥에서 다시 한나라당이나 보수 정당을 일구어 낼만한 인적 네트워크나 이념 지향이 없다는 거죠.

박근혜 대표는 누군가 그 사람을 사용해주면 자기 역할을 나름대로 잘 할 사람입니다. 한나라당이 대표로 옹립을 해주면 그 대표 역할을 잘 할 사람이고, 한나라당이 그냥 중진의원으로 대접해줘도 잘할 사람이고, 출당시키면 탈당하게 될 사람이죠. 박근혜 대표를 통해서 한나라당 혹은 현재의 보수 정당이 새로운 집권 프로그램을 내놓는다고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심지어는 지금 한나라당에서 박근혜 대표를 중심으로 지지해주고 있는 박세일 등의 강단 그룹이나 원희룡, 남경필 류의 소장그룹들도 박근혜를 대권주자로 옹립해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안하는 것 같아요.

일정한 시기까지 박근혜 대표가 당내 민정계나 영남수구세력들에 대항해서 소장 그룹들을 지켜주는 바람막이 구실, 그게 안착될 때까지 대국민적으로 광범위한 지지 세력을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포괄하는 그 역할까지는 할 겁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역할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정치역량이 있는 가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입니다.

지 - 탄핵될 때 옆에서 지켜보셨을 텐데,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절망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방청석 제일 앞자리에 서있었던 마지막 한시간여 동안, 몇 번이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폭력과 절규와 웃음과 울음이 뒤엉킨 아비규환의 현장이 肉聲 그대로 가슴에 달려와 총탄처럼 박혔다"라고 표현하셨는 데요.
안 - 거기 쓴 그대로인데요.(웃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처음에 제가 얘기했지만, 평생 제가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했구요. 기자가 그런 거예요. 물론 독자들로부터도 평가받지만, 기본적으로 기자 집단이 매우 폐쇄적입니다. 세가지 집단을 상정할 수 있는데, 기자 집단 내부의 평가, 독자의 평가, 제가 취재원인 한나라당의 평가인데, 독자들의 평가는 제가 독자들한테 떴떳하니까 괜찮다고 생각했구요.

한나라당에 대해서도 '난 당신들에게 돌을 던지지만, 망하라고 하는 주문을 외운다기 보다는 정말 기대했는데,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그런 심정을 이해해달라'는 측면에서 얘기했는데, '몰라 주면 할 수 없고, 알아 주면 고맙다'는 그런 거였거든요. 그런데 기자 집단은 낙인 찍어버리는 게 있어요. 저도 그 질서안에 있는데 '저 기자는 이런 기자야'라는 평판이 나면 그건 평생 가요.

예를 들면 한나라당이나 독자의 평가는 만회하거나 이런 기회가 있을 지도 모르는데, 기자 집단 내부에서 '안수찬은 그런 놈이야'라는 인식이 있다면, 그건 아마 굉장히 만회하기 힘들거예요. 그리고 뒤집어 얘기하면 이 건 때문에 기자 생활 오래하기 힘들 수도 있는 거죠. 그 직후에 당 출입을 하거나 주변 기자들의 반응은 대비가 됐는데, 제가 생각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수가 같이 당 출입하면서 '잘했어. 당연한 거 아냐, 속시원해' 이런 격려가 많았구요.

일부는 아예 외면하고, 어제까지도 알고 명함주고 받고 지냈는데, 외면하더라구요. 자신이 볼 때는 옳지 않다는 거겠죠. 그래서 저는 한겨레 신문 기자를 좀 더 했으면 좋겠는데, 시기적으로 좀 더 해야될 일이 있을 것 같고, 잘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기자로서의 평판이란 게 있거든요.

'저 기자 특종 잘한다. 특종 잘하면서도 취재를 페어하게 하고, 기사도 잘쓰고, 관점도 올바르다. 심지어는 적대적인 취재원이나 적대적인 매체의 기자들하고도 잘 어울린다'는 평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번에 그걸 어느 정도 잃은 거죠. 당시의 심정은 절망적이었고, 그 절망을 표현하는 과정의 결과가 제 스스로 괜찮은 기자로서의 생명을 단축시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지금 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웃음)

지 - 한나라당의 최후 시리즈에 대해 일부에서는 '공포소설이니 노빠들의 엄살'이라고 비아냥거렸는데요. 제가 볼 때는 노빠로 보이지는 않는데요.(웃음)
안 - 그런걸 우려하기도 했죠. 예를 들면 진보누리가 아니라 서프에서 오시는 것도 기본적으로 그런 쪽의 이른바 반한나라 전선의 이익에 결과적으로 공모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전 그게 오해라고 생각을 하구요. 왜 그게 오해냐 하면 제가 우려하긴 했지만, 저는 그 글을 쓰면서 단 한번도 열린우리당이나 민노당에 대해서 평가해본 적이 없어요. 전체 시리즈를 통틀어서. 완전히 발가벗으려면 그렇게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마지막날 누굴 찍으라고, 제가 선동을 할 생각이었다면 '우리 어떻게 하자' 이렇게 되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건 아니고, 그럴 능력도 안되지만, 제가 글에서도 줄곧 강조했지만, 87년 이후 나름대로 공고히 발전시켰던 민주주의의 근본이 무너지는 상황에 대해서 각성하기를 촉구했던 것 뿐이죠. 전 그렇게도 예상을 했는데, 그 결과가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모두에게 이익이 될거라고 나름대로 판단을 했어요.

물론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프랑스의 예를 많이 드는데, 프랑스처럼 이른바 진보정당, 사민주의 정당이 발전되어 있고, 동시에 이른바 우파정당과의 대립이 일상화된 나라인데, 이른바 반 르펜전선이라고 해서 민주공화국의 기본질서를 침해하는 수구우익의 발호에 대해서 전체 민주세력이 단결해서 대항했잖아요.

특정 선거 행위에서의 결선 투표에서 나온 과정이긴 하지만... 저는 그런 심정으로 했어요. 제가 쓴 글을 읽고, '이래서 민노당을 찍어야겠구나. 이래서 열린우리당을 찍어야겠구나'라고 판단을 하는 건 순전히 독자의 몫인거지, 저는 단한번도 그렇게 표현해본 적이 없구요. 저 역시 그런 생각을 하진 않았어요. 물론 제가 마지막으로 투표를 할때 개인적으로는 판단을 했죠. 판단을 강요하거나 요구하지는 않았고, 오해되는 부분이 있다면 감수할 것이고, 제 진정성은 그게 아니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지 - 어려운 여건에서 진보운동을 하니까 여유가 없을 수도 있지만, 좀 더 유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노회찬 총장이 TV에 나와서 지지율을 상당히 끌어올렸던 이유가 뭔지, 그게 대중들에게 파고들었던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그분들이 내부에서 꾸준히 활동을 해온 역량도 중요하지만, 그런 요소 때문에 1∼2% 이상의 지지율을 끌어올리지 않았습니까?


1%의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게 얼마나 힘이 든 일입니까? 노회찬 총장이 '열린우리당이 지갑을 줏었으면 경찰에 가서 신고해라'라고 했던 것도 일종의 정치적 유머같은 것 아닙니까? 그래서 선거 끝났고, 여유도 생겼고 하니까 '민주노동당 역시 지갑을 같이 줏었다고 볼 수 있지 않느냐. 그 안에 든 돈이 좀 차이가 있겠지만'이라고 했는데, 굉장히 불쾌해하시더라구요.(웃음)
안 - 주타방이라고 있습니다. 옛날에 운동권할 때, 저도 정파운동까지는 아니지만 학생운동을 좀 했으니까. 주타방이 뭐냐하면 이른바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대중 앞에서 경쟁을 하는 정치그룹 가운데 나와 주도권을 다투는 매우 중요한 상대그룹을 주로 타격한다는 맥락이거든요. 이른바 정파논쟁이란 것도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이구요.

저는 그게 정치적으로 유효한 전술일 수 있다고 봐요. 예를 들면 나와 경쟁하는 정치그룹이 가짜다, 허구다, 웃기는 놈들이라고 말할 수 있죠.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을 비판할 때, 반대로 한나라당이 노무현 대통령을 공격할 때, 운동권식으로 표현하면 주타방 아닙니까? 대중 앞에서 저 정치그룹의 허구를 폭로해서 저들의 지도력을 잃게 만든다는 것은 좋은데, 그 결과를 국민들은 무엇으로 이해하느냐 하면 정쟁이라고 하죠.

그리고 정책경쟁하라고 하잖아요. 저는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노동당 지지자들, 혹은 그 정당에 감히 주문하고 싶은 게 있다면 주타방 그만하고, 경쟁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뭐냐하면 한국 국민들의 정치의식이 정략적인 부분에 관련해서는 너무 지나치게 발달되어 있어서 오히려 문제라고 생각해요. 정치인이 무슨 발언을 하면 워낙 사람들이 정치과정을 많이 겪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건 이런 의도가 있어' 하는 식으로 게임이론으로 이해한다구요.

예를 들면 대중들 앞에서, 네티즌이라고 할지라도 "열린우리당은 허구야. 혹은 민주노동당은 분열주의자야"라고 얘기하는 건 그 내부에서 핵심브레인들이 할 수 있는 얘기일지는 몰라도 대중 앞에서 함부로 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닌 것 같아요. 이제는 둘 다 제도정당이 되었고, 그 안에서 경쟁하는 상황이 되었다면 무엇보다 먼저 인식을 해야되는 것이 두 정당을 현재 존립가능하게 만든 지반으로서의 제도가 그들의 것이 아니란 겁니다.

그 제도를 만든 건, 이른바 의회의 운영구조나 국가의 운영구조, 심지어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관료제 그 모두가 기본적으로 그들이 적대하고 비판하고 있는 근대화 세력에 의해서 만들어진거라구요. 그러면 그 제도 일반에 대해서 같이 연구해서 열린우리당이면 열린우리당의 대안, 민주노동당이면 민주노동당으로서의 대안을 내놓기도 바쁘다고 봅니다.

그 대안을 갖고 얘기를 하자구요. 그렇게 얘기하는 버릇이 되어야, 아마도 그 정당 지지자들도 그런 방식으로 경쟁하면서 갈 수 있고, 그런 수준까지 올라가면 노빠라는 말도 없어질 수 있어요. 그냥 지지자이거나 당원인 거죠. 이런 이유로 지지를 하는 것만 남는 거죠. 노빠라는 건 어떤 의미가 있냐 하면...

지 - 비아냥의 의미가 있죠. '무뇌 노빠'라는...(웃음)
안 - 노빠라는 표현은 노무현이 무슨 짓을 해도 지지한다는 거잖아요. 반대로 민노당에도 그런 게 있다면 민노당 지도부가 아무리 비리와 부정을 저질러도 민노당이기 때문에 지지할 수 있다는 게 되겠죠. 물론 거긴 감시기능이 이런 식으로 무조건적인 광팬들을 주축으로 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정책, 더군다나 70년대 이후의 군사독재의 잔재 철폐 및 민주주의의 완성을 향해서 달려가는 두 세력이 건강하게 경쟁하는 게,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경쟁하는 것보다 더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여옥 대변인과 박영선 대변인이 싸우는 거 괜찮아요. 제가 보기엔 서로 타격의 대상인데, 민주노동당과 열린우리당은 개혁의 화두, 진보의 화두 가지고 경쟁을 했으면 좋겠어요.

지 - 어떤 글에서 탄핵 현장에서 '유독 한사람에게 살의를 느꼈다'고 표현하셨는데요. 누군지 말씀해주실수는 없으시죠?(웃음)
안 -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웃음) 그건 아주 개인적인 감정이었어요.

지 - 상상을 한번 해보겠습니다.(웃음) 한나라당 안에서 윤여준 여의도 연구소장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나름대로 이번 총선에서 공이 크다는 평이 있었는데, 물러나서 유학을 간다는 뉴스가 나왔는데요.
안 - 윤소장은 좋게 표현하자면 담백한 책사예요. 담백한 보수주의 책사라고 표현해야 되겠네요. 개인의 욕망이 있거나 그렇지는 않아요. 경력도 아주 특이한데, 그분이 단국대 출신이예요. 서울대 법대, 정치학과 아니면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한나라당에서 특이한 책사 역할을 하고 있는데요.

이 분은 이회창때 같이 정계에 들어왔고, 처음에는 이회창을 택했고, 이회창을 통해서 나름대로의 보수정당 이념을 구현하려고 그랬고, 이회창이 튕겨낸 다음에는 대표경선할 때 최병렬쪽에 붙었었죠. 최 대표가 대표 당선된 직후에 윤여준 소장을 쳐냈어요 계속 활용한게 아니고. 그러고 난 다음에 한동안 침묵하다가 박근혜 대표가 되었을 때 또 같이 한 거죠.

윤소장은 상대가 기본적으로 써주기만 하면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해가 돼요. 하지만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한나라당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로, 저 같은 사람하고도 술술 얘기가 될 정도로 나름대로의 합리성은 갖고 있구요. 그 사람이 역할을 했던 건 다름이 아니고 판세를 정확히 읽었어요. 판세를 뒤흔들 아젠다나 이슈 파이팅을 창조해 낸 것도 아니고, 그럴 수 있었던 시간도 없었는데, 판세를 제대로 읽는 게 책사가 가진 중요한 덕목중의 하나죠.

지 - 그 정확한 판세예측 탓인지 한동안 열린우리당이 위기에 빠지기도 했던 것 같은데요. 정동영 의장이 비례대표직도 포기하고, 유시민 의원이 앵벌이라는 욕을 먹어가면서 민노당을 자극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지 않습니까?(웃음) 이번 총선 결과를 어떻게 보세요?
안 - '노빠'라는 혐의를 두고 있는 분들을 향해서라도 하고 싶은 말인데요.(웃음) 17대 총선에서 가장 큰 성과는 민노당의 원내진출을 첫 손가락에 꼽을 겁니다. 이건 역사적 사건입니다. 10석씩 얻었고, 진보정당 나름의 담론이 있다면 (충분치는 않겠지만) 비교적 원활하게 발언할 수 있는 지반을 마련했으니까 가장 큰 의미가 있는거구요. 두 번째는 어찌되었든 반수구전선, 수구보수블록에 맞서는 개혁진보그룹이 국회의원 선거를 한 이래로 처음으로 과반 이상을 차지한 거죠.

이른바 대통령 권력, 행정부 권력 이후에 의회권력까지도 진보 개혁 담론 헤게모니 환경안에 포함되었다는 것이 두 번째로 중요한 것 같고, 아쉬운 건 카운트 파트너라고 할 수 있는 맥락에서의 한나라당이 사실은 120석보다 조금 덜 얻었어야 진정한 보수정당으로 거듭나는 길이 더 빠르고 신속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전 아직 그 판단을 정확히 못하겠는데, 17대때 더 두고봐야 되겠는데요. 자민련, 민주당이 사실상 궤멸됐잖아요. 저는 정당이 개조되어서 생명력을 이어갈 수도 있지만, 특정 정당이 소멸되고, 그 정당의 포지션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정당이 탄생할 수도 있잖아요. 한나라당이 긴 맥락에서 소멸의 길로 갈지, 아니면 제대로 된 개조에 성공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만약에 소멸의 길로 가지 않고 개조된 제대로 된 보수정당을 꿈꾼다면 120석은 많아요.

한나라당이나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지금 초반에 소장파, 개혁파들이 나름대로 발언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당내 의석 분포나 이런 걸 보면 영남권에 지지기반을 두고 있는 의원들이 다수고, 결정적인 순간, 선거국면이라고 할지, 당원들의 전체적인 의사를 모아야 되는 일이 생기게 되면 반드시 한나라당은 지역감정 같은 구시대적인 가치들을 놓지 않고 이용할 겁니다.

지 - 이번 선거결과 지역정서가 대구경북 지역에 유폐되었다는 분석도 있는데요. 부산경남은 변화할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는 얘기도 나오고 있구요.
안 - 변화할 가능성도 있는데, 좀 더 두고봐야겠어요. 왜 좀 더 봐야 하느냐 하면 만약에 보수정당이 이념정립을 통해서 진정한 보수정당으로 거듭나는데 실패한다면 2007년 대선, 또 앞으로 다가올 재보선 등의 각종 선거국면에서 결국은 다시 지역주의를 주된 도구로 활용할 수밖에 없어요. 재보선할 때, 경남도지사 선거할 때 한나라당이 무얼 가지고 얘기하겠습니까?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진정한 성장의 대안을 가지고 있으니까 선택해 달라고 캠페인 하겠습니까? 경남이니까 찍어달라고 할 거라구요.

그러니까 당 내부에서의 투쟁이 얼마나 열기가 있다고 한들, 그 결과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바뀌는 상황까지 이르지 못한다면 2∼3년 뒤의 선거라 할지라도 한나라당은 여전히 지역주의에 기대서 정치적 생명력을 온존시키려고 할 수밖에 없을 거구요. 그리고 그 지역주의에 대중들이 넘어가지 말라는 법은 없는 거겠죠.

지역주의가 대중, 유권자들의 판단으로만 규정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제가 대구 출신이라서 오바하는 건지는 몰라도 대구, 경북 사람들이 또라이들이어서 무조건 한나라당을 찍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한나라당이라는 그 지역의 지배적인 정당이 그 방식으로 말에게 풀을 뜯어먹이듯이 계속 그 먹이만 주는 거예요. 유권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뜻을 발현할 수 있는 도구, 일용할 양식을 맨날 그거 밖에 안먹었는데 다른 선택을 하기 힘들겠죠.

물론 풀뿌리에서부터 바뀌어져야 할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기존의 정당 구조 자체가 지역주의 중심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재편되지 않는다면 지역주의를 넘어서는 또 다른 정책 대안을 가지고 투표를 하라고 하는 건 앞으로도 상당기간동안 영남지역 사람들에게 먹히지 않을 가능성도 있어요. 심지어는 부산, 경남 사람들도 돌아갈 수 있죠.

지 - 탄핵 현장에서 웃는 기자들을 보고 절망했다고 하셨는데, 아무래도 조중동쪽의 기자들이겠죠.(웃음)
안 - 아니, 못봤어요. 정확히 말하면 어떤 특정매체 기자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젊은 기자들이었어요. 제가 기억하는 게 맞다면. 전 입사 7년차인데, 입사한지 얼마 안된... 하여튼 기자들도 정치적 입장이란 게 속에는 다 있으니까, 백번 양보해서 기사만 제대로 쓰면 술마시며 손뼉을 치건, 함성을 지르건, 울건 상관이 없는데, 젊은 기자의 경우 어떤 선, 어떤 양식 이런 걸 기대 했던 거죠. 설사 아무리 만세를 부를 상황이었다 할지라도 그 현장에서는 만세부르면 안되는 거죠.

제가 아무리 욕을 하고 싶고, 던지고 싶고, 울고 싶었어도 현장에서는 그러지 않았던 것처럼 그 정도 양식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이상의 뒤로 물러나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지 - 예전에 홍세화 선생께서 정치인은 최소한 30분 이상 토론할 수 있어야 되고, 자기 의견을 글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어차피 정치인이라는 게 자기가 가진 생각을 국민들에게 말로 설득을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그런 자질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다른 기자의 말을 인용해서 '박근혜가 구사하는 단어는 100개가 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는데, 특정하게 의미있는 단어를 세본다면 정형근 의원 같은 경우 10여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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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 interviewe

and writing 2004. 9. 25. 00:59
다른 대상보다 정치인 인터뷰 기회가 많았다.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상적인 인터뷰이는 한화갑 의원이다. 이유? 정치인으로서 아쉬운 대목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간극이 가장 커서. 만나기 전엔 DJ ‘꼬붕’, ‘가방모찌’라고만 생각해서 별다른 정치의식이나 있을까 생각했는데 실제는 전혀 달랐다. 나이에 비해 생각도 열려 있고, 정치의식도 높았고, 진보적이었다. 혼자서도 능히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DJ에게 가려지면서 생겼던 억울함이 있을 법한데도, 수십 년간 자신의 방식으로 다뤄낸 인간적인 성숙도 느껴졌다. 거의 종교에 가까운. 이인제 의원은 말 그대로 ‘화신’이었다. 일반인으로 치자면 욕망의 화신, 정치인으로 치자면 야망의 화신. 한곳만 바라보고 전진하는 일관성은 인터뷰하는 동안 한편으론 매료될 수준이다. 정치인에게 정치적 야망이 나쁜 게 아니라고 본다면 대단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을 받쳐줄 콘텐츠가 없어서 휑하긴 하지만. 서너 시간 인터뷰한 뒤에 “이야!” 했었다. 정치인이 이 정도는 돼야 하는 거 아냐, 하면서. 모든 세상이 자신의 야망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일관성, 그거 대단했다. 야망은 그에게 너무 거창한 것 같고, 욕망이 맞는 것 같다. ‘화신’이라고 부를 대상에 이인제만큼 어울릴 사람은 없다. 박근혜 대표도 인상적이다. 그런 삶을 산 사람은 전 지구인 중에 열 손가락 안에 든다고 생각한다. 어딘가에서 읽었는데, 자신이 테니스를 치는데 취미생활도 단순한 개인적 즐거움으로 즐겨선 옳지 않다고 말하더라. 그야말로 ‘국민교육헌장’의 현신이라는 생각이다. 일반적인 정치인이 그랬다면 인상적이지 않았겠지만, 박근혜의 그 말은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23세에 퍼스트레이디가 돼서 27세까지 그 역할을 했다. 스물셋에 뭘 알 수 있겠나. 집안에서 아버지가 아닌 대통령, 절대적인 존재와 살면서 아버지의 세계관으로 세계를 바라봤을 거 아닌가. 아버지가 곧 국가이고 가족인 가치관. 한동안 사람들에게서 잊혀진 존재였지만, 그는 사람들 누구나 겪는 일상, 결혼, 연애, 좌절, 직장생활, 꿈을 쫓는 것 등등을 전혀 겪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20대 때 만들어진 가치관에 모든 게 수렴되는 거다. 국가와 연애했고, 국가와 결혼한 거다. IMF 때 국가가 망했다는 얘길 듣고 울었다는 고백은 진심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한국에 공주가 존재한다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종합적인 면모로 한 명의 공주를 뽑으라면 단연 박근혜다. 그는 평민의 생활을 모른다. 하지만 국가와 민족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고, 몸에 배어 있는 굉장한 ‘애티튜드’가 있다. 그의 모든 논리는 국민교육헌장에 있다. 물론 그 안에 콘텐츠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노무현 대통령도 여러 번 만난 인터뷰이다. 그에게 상고, 비주류 콤플렉스를 말하는데, 그에겐 그런 콤플렉스 없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섭섭해할 정도로 드라이하고 공평무사한 사람이다. 가끔 콤플렉스로 번역되는 말들을 하는데 그건 콤플렉스가 아니라 답답함의 토로다. 자수성가형은 대부분 자기가 룰을 세운다. 당연히 보통 사람들의 익숙한 관례나 관습 같은 걸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런 점 때문에 불편해하거나, 어떤 사람들은 불안해할 수 있다. 늦깎이로 스스로 학습해서 룰을 세우고 플레이하기 때문에 주류적이지도 않고 탈권위적이다. 관습, 관례에서 나온 게 권위이고 힘인데, 그런 게 중요하지도 않다. 그러다 보니 억울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자신은 공평무사한데, 국민과 대통령 사이에 매체가 끼어들어서 오해를 낳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거다. 국민을 직접 설득하려고 하는 건 그 때문이다. 좋은 쪽으로 보면 나쁜 관습과 관행을 깰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트러블이 생기는 간극까지도 감안해서 조율하는 것도 대통령의 능력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김문수 의원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왜 하필 한나라당에 있을까?”라는 궁금증이 워낙 컸던 터라 인상에 남아있다. 질문에 대한 변은 다양했다. DJ와 YS의 차별성이 없었다, 광주항쟁 이후 곧장 6·10 항쟁이 일어날 줄 알았는데 7년이나 지나 너무 늦게 일어났다, 민중당도 안되더라, 동구권이 무너지더라 등등. 가장 길게, 7~8시간 동안 인터뷰한 경우인데, 인터뷰 뒤에 그 이유를 다시 정리해 봤더니, 그 모든 변들과 관계없이 ‘어쩌다 보니까 그랬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인이라면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역사의식 등등으로 어떤 국면에서 결단을 내릴 것 같지만 사실은 일반인과 똑같더라. 또 하나, 사람들의 오해 중 하나는 김문수 의원 역시 생활인이라는 점이다. 정치도 직업이고 생활이다. 그런 상황에서 딱히 깨고 나올 이유도 없는데 왜 한나라당에서 나오려 하겠나. 그런 걸 생각하면 연민도 들고 이해도 됐다.
- 김어준(<딴지일보> 총수)

뮤지션 한대수. 그는 인생 자체가 드라마틱한 존재이고,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는 희귀한,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캐릭터다. 당연히 인터뷰어의 입장에서는 좋은 글감의 대상일 수밖에 없고, 그만큼 쓸 얘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솔직하고 소박했다. 소년 같았다. 어떤 질문에도 답변을 ‘꼬불치지’ 않고 시원스런 직설로 다해주었다. 지금도 또렷하게 남아있는인상적인 장면은 그가 한국에 들어올 때 생활하는 오피스텔이다.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그의 거처엔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도구만 갖춰져 있었다. 질문과 답변 사이의 틈이 없을 정도로 단숨에 튀어나오는 직설들이 왜 한 치의 거리낌도 없었는지 느끼게 해준 장면이었다. 강금실 전 장관과 소설가 김훈도 인상에 남아있다. 김훈의 경우 굉장히 불편해하면서도 인터뷰는 잘했다. 인터뷰를 정리하다 보면 옮겨 적을 게 굉장히 많은 인터뷰이다.
- 남재일(전 <중앙일보> 기자, 고려대 강사)

아무래도 우여곡절이 가장 많았던 인터뷰이가 기억에 남는다. 그런 이유로 치면 단연 소설가 조정래다. 첫 인터뷰 섭외 때 그의 입장은 ‘<조선일보> <동아일보>와는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였다. 질문 50개와 ‘조선과 동아를 한묶음으로 묶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는 요지를 적어 팩스로 보냈다. 1시간 후 연락이 왔고, 다음날 확답했다. 깔끔했다. 인터뷰 중에도 본인과 관련된 민감한 부분들, 예를 들면 “당신은 친북 공산주의자인가?”라는 사상 관련 질문들을 던졌음에도 깔끔하게 답했다. 모두 알다시피 그는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 평생을 바쳐 대하소설을 쓴 작가다. 인생에서 해찰하지 않고, 잡기도 즐기지 않고, 그야말로 소설에 일생을 바친 구도자 같은 작가다. 인터뷰 내내 그런 성실하고 한결같은 느낌은 떠나질 않았다.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은 균형 잡힌 사고와 솔직한 면에 관한 한 최고였다. 장관 취임 직후에 인터뷰하게 됐는데, 인터뷰할 기회가 많지 않았을 텐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솔직담백했다. 인터뷰가 끝난 뒤, 사적인 질문들을 많이 던졌는데도 모두 답했다. 공직자들의 경우 인터뷰 이후에 어떤 내용은 쓰지 말아달라, 원고를 사전에 보여달라는 등의 구질한 요구들을 하는데, 강 장관은 그런 요구조차 하지 않았다. 지면에 실릴 경우 난처해질 대목들이 있었는데도. 배우를 꼽는다면 박중훈이다. 일명 ‘딴따라’라고 불리는 연예인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책을 굉장히 많이 읽은 듯했고, 생각이 깊고, 답변은 비유가 좋고 논리정연했다. 커피숍에서 인터뷰를 하는데, 여자팬들이 촬영을 하면서 주위가 소란해지자, ‘몇 만 명을 상대로 인터뷰 중’이라는 말로 스스럼없이 양해를 구하는 모습도 의외였다. 그의 또다른 면모. 인터뷰이들은 인터뷰가 실린 뒤 전화를 하거나 연락이 없거나, 크게 두 가지 행태로 나뉜다. 박중훈은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 황호택(<동아일보> 논설위원)

가수 전인권이 최고의 인터뷰이다.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만난 인터뷰이 중 가장 천진난만한 캐릭터였으니까. 난 인터뷰를 많이 당했던 경우라 인터뷰이의 입장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경험이 약이라고, 인터뷰어가 어떤 팩트로 접근하는지 한눈에 보인다는 거다. 첫눈에 느낌이 오는 경우가 있고, 저절로 마음이 열리는 인터뷰어가 있는 반면, 찰떡을 줘도 입을 열기 싫은 경우도 있다. 그런 경험을 속에 품고 인터뷰어로 나선 내 인터뷰 강령 1번은 다음의 것이다. 했던 질문 또 하지 말자. 물론 그러기 위해선 엄청난 자료조사가 필요했다. 하지만 전인권의 경우는 아무리 자료를 찾아도, 그의 무뚝뚝해 보이는 입술이 그날 따라 한여름 엿가락처럼 눌어붙은 건지, 아니면 인터뷰어들이 몇 마디 질문으로 때운 탓인지, 별다른 정보들이 없었다. 한결같이 그에 대한 강한 인상기만 뽑혀 나왔다. 전인권의 터프한 이미지 때문에 마음을 터놓고 다가간 인터뷰어가 별로 없다는 생각만 머리를 맴돌았다. 하지만 그건 전적으로 오해였다. 그는 자신의 스토리부터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기 시작한 인터뷰어에게 이혼, 마약, 감옥 간 얘기 등, 별로 득될 것 없어보이는 얘기들을 경계심 없는 아이들처럼 술술 털어놓았다. 연예인들은 상대에 따라 사생활은 물론, 할 얘기 안 할 얘기 등을 서랍정리하듯 나눠서 하는 게 습성이 되어 있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전인권에게 그런 식의 구분법은 이미 낡은 강령처럼 폐기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인터뷰이로는 이홍렬도 있다. 굳이 분류하자면, 인터뷰어에겐 행운에 가까운 인터뷰이. 그와 두세 시간 동안 인터뷰하는 동안 단 한 번의 질문도 없었다면 말 다한 것 아닌가. 인사 끝내고 그가 던진 첫 코멘트가 이랬다. “배고플텐데 걱정 말고 얼른 한 그릇 시켜. 먹으면서 그냥 듣기만 하면 돼. 나한테는 질문이 필요없거든.” 물론 그의 모든 얘기는 인터뷰에 필요하지 않은 생뚱맞고 쓸데없는 얘기가 아니라 인터뷰어가 뭘 알고 싶은지를 정확히 짚는 내용들이었다. 얘기가 다른 곳으로 흐르면 방향만 다시 잡아주면 그뿐, 아무런 테크닉이 필요없는 그야말로 쿨한 인터뷰로 기억되고 있다.
- 허수경(방송인)

소설가 이윤기 선생은 인터뷰 후 반응이 가장 좋았지만, 최고의 인상적인 인터뷰이는 아니다. 굳이 가르면 그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인터뷰이이다. 이윤기는 일단, 소설을 쓰는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말을 잘할까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만든다. 인터뷰를 상대와 말을 주고받는 게임에 비유할 수 있다면, 가장 묘미가 남달랐던 인터뷰이라는 거다. 레토릭이 워낙 뛰어나서 그걸로 승부하자면 밤을 세울 수도 있는 고수, 말 그대로 무림고수가 바로 소설가 이윤기다. 그의 또다른 특징은 자기고백을 잘한다는 거다. 자신에게 불리할 수 있는 얘기, 가슴 아픈 얘기, 자랑거리들을 그냥 던져도 되는데, 반드시 그 얘기를 하게 된 이유를 달아둔다. 논리적 뒷길을 열어놓는다고 할까. 공격당할 줄 알면서도, 모든 걸 다 받아주겠다는 태도로 임하는 탁월한 인터뷰이였다. 이어령 선생도 떠오른다. 그는 워낙 다변에 달변이라 말을 끊고 들어가는 사람이 없는데, 인터뷰하는 3일 동안, 말다툼은 아니지만 가히 토론에 가까운 인터뷰를 벌였다. 그의 특징은 그 다변과 달변에도 표현이 굉장히 좋다는 점이다. 그는 어떤 질문도 피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임했다. 가령 인터뷰 이틀째가 지났을 때는 이메일도 보내고, 자신을 충분히 방어하지 못한 부분, 오해될 부분에 대해서 정교하게 터치했다. 어떤 점에서 굉장히 무례한 인터뷰, 이어령 선생 스스로 당해본 경험이 별로 없는 인터뷰라고 후평했지만, 대승적인 태도로 받아들였던 점이 기억에 남는다. 진중권의 경우는 대단히 명료하고 적확한 표현을 서로 골라 쓰느라 힘들었던 인터뷰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상대의 정교한 논리에 감명받는 스타일이다. 그 자신의 글 때문에 뜨겁고 열정적이고 과격한 사람이라고 오해받기 쉽지만, 거의 감정이 없는 사람으로 느껴질 정도로 냉정한 캐릭터다. 자기 정돈도 잘 되어 있고, 자기 표현이 정확하고, 자기 모순이 별로 없는 캐릭터다. 어떤 점에서 이런 캐릭터는 인터뷰 재미가 떨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논리적 베이스에서 당대의 논객이 지금과 같은 태도를 취하는지 들여다보는 재미가 남달랐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도 꼽고 싶다. 흔히 연세 높은 아줌마 작가로 생각하는데, 여성미가 뚝뚝 흐르는 단아한 스타일이다. 한편으론 열정적인 면모도 갖춘. 자택에서 두 번 인터뷰했는데, 한 번은 옷을 차려입고 나오는데 지퍼가 내려가 있었다. 너무 단정하고 빈틈없는 캐릭터라는 생각이 워낙 강해서 그 장면이 잊혀지질 않는다. 아, 선생도 사람이구나, 평생 자기 관리를 해왔지만 결국 사람이고 노작가구나, 그런 사람냄새가 좋았다.
- 이나리(<주간동아> 기자)

김창완. 그를 인터뷰하기 전까지 인터뷰라는 행위에 할당되는 시간은 두세 시간 정도였다. 하지만 그와의 인터뷰는 장장 10시간을 훌쩍 넘겼다. 김창완을 만났던 인터뷰어들에겐 공통적인 기억일 수 있지만, 그와의 인터뷰는 대부분 술과 함께 이루어진다. 김창완은 배려심 많고, 난해한 책을 읽는 걸 즐기며, 생각도 깊은 사람이다. 당연히 어려운 얘기도 많이 한다. 그리고 솔직하다. 솔직함만으로 치면 비교를 불허하는 인터뷰이 중 한 명일 거다. 김창완과의 인터뷰 이후 새삼스럽지만 메모하듯 마음에 옮겨둔 인터뷰 방식이 있다. 인터뷰라는 게 두세 시간이 아닌 깊이를 전제로 한 긴 시간을 해야 상대를 조금이라도 볼 수 있겠다라는 것, 인터뷰에도 이런 기쁨과 흥분과 재미가 있다는 것,‘술’이 인터뷰에 끼치는 긍정적 효능에 관한 것. 마음을 슬쩍 들었다 놓았던 인터뷰이는 유진박이다. 한국에 온 지 얼마되지 않던 그를 노보텔에서 만났는데 매니저가 동석한 상태라 분위기도 껄끄러웠고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그러니까 어설픈 한국어와 어설픈 영어가 흐름을 무시하고 뒤엉키며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고 느끼던 순간, 유진박이 자신의 곡이라면서 바이올린을 기타 뜯듯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느닷없음이란! 시간에 관한 노래였는데 노랫말도 그렇고 멜로디도 그렇고, 맞다, 딱 어린 레너드 코헨을 보는 느낌이었다. 사방이 조용했고 한낮이고, 밖에선 바람소리만 들렸다. 그때 유진박이 물었다. “지금 밖에서 나는 소리 들을 수 있어? 혹은 안 들을 수 있어?” 그후 두 번 다시 유진박을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그때 느낀 게 바로 ‘세상에 천재가 진짜 존재하는구나’였다. 그를 떠올릴 때면, 한국에 와서 매니지먼트 안에서 자신의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참, 김창완의 집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첫 인터뷰, 마루로 석양이 슬며시 스며들 때쯤 인터뷰어가 가수에게 던지는 가장 바보같은 질문 하나를 던졌다. “지금까지 만든 곡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은?” 그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봉숭아’라고 답하면서 오디오를 틀었다. 불꺼진 어둑한 마루에서 듣는, 거대한 볼륨 소리에 실려나온 그 비장한 멜로디와 가사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인터뷰의 추억’이다.
- 황경신(<페이퍼> 편집장)

내가 생각하는 인터뷰는 공적인 만남을 가장한 사적인 만남, 그 접점이다.그 접점엔, 매우 퍼스널하게 다가가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활자화된다는 이유로 편한 감정과 이상한 긴장감이 공존하고 거기에 미묘한 기싸움까지 가세한다. 그런 이유로 배우를 인터뷰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과의 기싸움에선 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우선하니까. 설경구가 그랬다. 대부분의 배우들은 친절이 몸에 밴 ‘애티튜드’를 구사하지만 설경구는 처음부터 달랐다. 툭툭 내뱉는 단답형 답변 스타일. 싫고 좋고를 떠나서 무서웠다는 게 맞다. 하지만 인터뷰 횟수가 늘어날수록 첫 느낌은 완전한 오독이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는 어떤 코미디언보다 상황을 재미있게 전하고, 무슨 말에든 자연스럽게 욕이 따라붙었다. 그의 욕은 귀엽다. 말끝마다 호흡하듯 자연스럽게 ‘씨발’ 등등의 욕이 따라붙는 건 그의 음성으로 직접 들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두 번째 인터뷰가 웃었던 기억뿐이라면 세 번째 이후의 인터뷰에서 목격한 건 그가 굉장히 따뜻하고 정겨운 배우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주변 사람들에 대한 걱정을 하더라도, 최민식은 “그 사람, 그러면 안되는데요”라고 하는 데 반해, 설경구는 오히려 욕부터 튀어나오거나 직접적으로 상황을 언급한다. 가령 이런 투로. “문소리, 걔는 시집도 안 간 애가 비비꼬고 앉아있냐?” 그건 <박하사탕> 이후 <오아시스>까지 줄곧 지켜본 후배 배우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 표현이었다. 설경구에 대해 정리된 품평을 덧붙이자면, 그는 대중 앞에서 유명인으로 살아간다는 가식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배우이다. 설경구를 비롯해 여러 배우들을 인터뷰하면서 공통적으로 들었던 코멘트가 있다. 너무 외롭다는 것. 대중이 언제 등돌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했지만, 반면 그것이 그들을 움직이는 동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감정에 대해 전도연은, “외롭다는 건 배고프다, 춥다 같은 본능적인 감정”이라고 말했다. 한 사람의 배우라기보다 어른을 만난다는 생각이 들었던 고두심, 윤여정, 주현 같은 배우들에 대한 인상도 깊다. 평생 <전원일기>의 큰며느리로 살면서 답답하고 힘들 때가 많았다고 토로했던 고두심은, 무병 걸린 사람이 굿을 하지 않으면 안되듯, 배우 역시 연기를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고 말했다. 윤여정은 이혼 후 자신이 가장이 된 상황에서 연기에 대한 필연적 이유에 대해 절박하게 사고했다고 말했다. 그런 절실함이 빚어낸 감식의 결과들, 즉 연기하는 배우가 편하면 그걸 지켜보는 사람이 불편하다는 얘기, “내가 연기해줄게”라는 거만한 태도의 배우에 대한 냉소는 환갑이 다된 나이에도 탁월한 연기를 펼치고 있는 그만의 에너지가 아닐까 싶었다.
- 백은하(자유기고가)

가장 각별한 느낌을 안겨준 인터뷰이는 안정환이다.경기 후에 짤막하게 소감을 밝히는 것을 제외하곤 정식 인터뷰엔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와의 인터뷰를 잡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지난해 J리거 탐방 기사를 진행하면서 가장 먼저 접촉한 게 안정환이다. 당시 시미즈팀에서 뛰고 있던 그를 시즈오카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별도로 구단 허락이 필요한 인터뷰였지만 안정환이 직접 해결한 상태였고, 특유의 말쑥한 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낸 터라 분위기도 좋았다. 문제는 쉽지 않은 인터뷰 팩트였다. 안정환이 매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진짜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사생활에 대한 질문들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질문을 던졌다. “당신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인가?” 그후 안정환이 털어놓은 얘기는 어느 매체에서도 볼 수 없는 진솔한 것들이었다. 엄마는 여전히 부담스런 존재다, 자신은 엄마 손에서 성장한 기억이 없고 줄곧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축구 선수로 얼굴이 알려지면서 엄마가 나타났다, 엄마 나름의 고생이 알려졌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안정환의 엄마라는 명목으로 벌려놓은 일들에 대한 뒷감당을 해야 했다는 것까지 불우한 성장기를 진솔하게 털어놨다. 그라운드에서 보여줬던 제왕의 이미지와 도저히 매치시킬 수 없는 얘기들도 이어졌다. 어렸을 때 굿 구경을 다닌 이유가 굿이 끝난 뒤 제물을 챙겨 할머니에게 전해주려고 했다는 것부터, 처음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 오렌지라는 걸 처음 먹었다는 얘기, 훈련캠프에서 나올 때는 할머니에게 챙겨드리려고 오렌지를 싸왔다는 얘기, 지금은 아이가 생겼지만, 엄마 성을 따른 자신의 호적을 설명하는 게 싫어 아이를 갖지 않으려 했다는 얘기까지. 덧붙여 일면식도 없는 아버지를 왜 언론에서 궁금해하는지, 수많은 선수들 중에서 왜 유독 자신의 사생활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큰지에 대한 불만도 털어놨다. 스포츠 전문 인터뷰어로서 이전부터 안정환에 대해서 알고 있다곤 했지만, 그런 개인사를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은 컸다. 안정환은 볼에 대한 욕심도 많고, 무뚝뚝하다는 이유로 건방지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안정환은 인생에 대한 생각도 많고 똑똑한 선수다. 언론의 무차별 자극이 그를 자꾸 웅크리게 만드는 것 같아 아직까지도 안타깝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또 다른 인상적인 인터뷰이를 꼽자면 허재다. 가장 최근에 ‘취중 토크’를 했던 허재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친화력이 대단했다. 술자리에서의 그는 자연인 그 자체였다. 술 실력은 그렇다 치고 거리끼지 않고 얘기하는 대목에서 인간적인 매력도 느껴질 정도였다. 아픈 과거 얘기도 나왔는데, 하도 술과 관련된 사고가 많아서 잠깐 금주를 했었는데, 오히려 운동이 되질 않아서 다시 마셨다는 얘기도 곁들였다. 흥미로운 에피소드 하나. 허재는 농구계가 알아주는 주당이다. 하지만 그런 허재가 술자리에서 몰래 빠져나온 경험이 있었다. 우연히 합석하게 된 상대와 광주에서 술을 마시다, 이대로 마시다간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 몰래 가방을 들고 부산으로 도망쳤다. 그 상대가 바로 삼성 라이온스의 투수 코치 선동렬이다. 허재의 전언으론 술집을 빠져나왔던 새벽까지 그는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선동렬에게 이 에피소드를 전했더니, 그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털어놨다. 그 막강 상대? 바로 삼성 라이온스의 김응룡 감독이다.
- 이영미(<일요신문> 기자)

김규항이 그랬다. 한국 사회에서 인터뷰라는 건 인터뷰이의 프로필만 확인한 뒤 한두 시간 만나면 조금 안 것 같은 느낌을 받는 행위라고. 그런 방식의 인터뷰, 즉 인터뷰어가 인터뷰이를 분석하는 데 집중한다면, 내 인터뷰는 인터뷰이의 생각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인터뷰이의 내면을 파악한다는 건 내겐 아직까지 건방진 것 같다는 느낌을 안겨주는 요령부득의 영역이다. 난 개인적으로 가장 만나고 싶은 대상을 인터뷰이로 정한다. 그리고 적어도 네 번 이상 만나야 인터뷰이의 생각과 호흡이 온전하게 전해진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인터뷰어의 스타일 문제겠지만. 그런 것들을 전제로, 특별한 인터뷰이를 꼽자면 단연 강준만 교수다. 굉장히 힘든 섭외과정을 거쳐 성사시킨 데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더 간절했던 인터뷰이. 그를 섭외하기 위해 전북대에도 여러 번 찾아갔고, 부산에서 강연한다고 하면 쫓아내려가곤 했다. 그러나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 겨우 허락을 받았음에도 다음날 숙소에서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다시 설득, 인터뷰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인터뷰는 인터뷰이가 전하는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좋아하는 대상을 만나고 기록하는 즐거움도 있다는 걸 뼈아프게 확인한 경우였다. 서너 차례 만나면서 애정까지 생긴 인터뷰이는 홍세화, 진중권, 김규항이다. 인터뷰어로서 가장 공부가 됐던 대상들은 성공회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김동춘, 조희연 등의 교수들이었다. 그들과의 인터뷰에선 사회적 현안에 대한 사유의 방식을 배우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진중권, 김규항은 답변에 산문이나 시적인 표현이 많아 듣는 사람의 상상을 자극하는 면이 많다. 김어준, 신해철의 경우는 천하가 다 아는 ‘말발’들이어서 듣기만 해도 즐거운 인터뷰이들이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만났던 손석희가 기억에 남는다. 몇 년 동안 섭외해서 최근에 만나게 된 그는 절제와 균형감각이 대단히 뛰어나다고 느꼈다.
그 정도 포지션이라면 권위적인 이미지가 약간이라도 엿보일 만한데 그런 느낌도 전혀 없었고. 하지만 가슴속엔 뜨거운 불덩이가 자리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단지 그것을 겉으로 드러낼 경우 편파적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절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지승호(프리랜서 인터뷰어)

세상엔 우문현답이며 기문진답이며 동문서답들이 가득하지만, 인터뷰가 단지 질문과 대답만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다. 당대의 인사라고들 숭상받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자주 기절했던 건 그들 대답이 드러내는 그 하릴없고도 따분한 머리 때문이었다. 무엇이 그들을 ‘명사’로 만들었단 말인가? 그들이 버는 돈은 과연 정당한가? 마누 디방고의 “나는 아프리카 대륙과 모차르트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라는 답변에 충만해하다가, “우리 음악하는 사람들도 이젠 먹고 살 만해졌죠”라는 대답을 들으면 그자뿐만 아니라 그 병신 같은 소리를 들은 나도 함께 죽여 소금에 절이고 싶어진다. 보통 한국의 인터뷰이들의 대답이 아주 상식적이고도 맥없으면서도 일목요연하다는 건 날 극심한 열패감에 빠뜨렸다. 그들은 다른 관점으로 사물을 해체할 재능이 없는 건가? 대답에 대한 국민적 유전자 자체가 촌스러운 건가? 그런 따위의 대답을 재료로 만들 요리가 무엇이란 말인가? 필립 스탁을 만났을 때, 나는 상대에게 관심이 없거나, 궁금한 것이 없을 때조차 호기심을 가져야 하는 내 직업의 더러운 점이 기뻤다. “내 자신, 내 인생의 그림을 그려보면 그건 바로 유령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내가 누군지,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 나는 조용히 존재합니다.” “모든 인간들은 모든 것에 만족할 만큼 훌륭할 수 없다는 걸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이 아인슈타인이 되는 건 불가능합니다. 나 역시 아인슈타인이 아닙니다.” “난 항상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삶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난 항상 창가 끝에 서 있는 기분으로, 그리고 내 머리에 총을 갖다댄 기분으로 매순간 살아갑니다.” 그는 그렇게 질문과 대답 사이의 허장성세에 다리를 놓았다.
- 이충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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