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만남]글쓰기를 잘하고픈 당신에게, “실질적으로 정직하라” 
이만교,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

김이준수 jslyd012@gmail.com


http://www.yes24.com/chyes/Chyesview.aspx?title=003004&cont=3540&y_contents=채널예스&y_channel=오픈캐스트&y_area=104

지금, ‘글쓰기’는 하나의 트렌드이자 매혹이다. 서점만 둘러봐도, 글쓰기와 관련된 책은 차고 넘친다. 글을 쓰고 싶어 하고,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내고자 하는 열망도 커졌다. 과거에 글쓰기는 전업 작가 등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인식되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디지털카메라가 사진을 좀더 대중화시켰듯, 블로그 등 디지털 미디어의 확산은 글쓰기를 장삼이사의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글쓰기 바람은 다양한 분야로 파생되고 있다. 블로그(blog)와 책(book)의 합성어인 ‘블룩(blook)’은 이미 출판계의 트렌드가 되었다. 글쓰기를 통한 심리 치료를 포함하는 ‘비블리오테라피(bibliotherapy)’가 있고, 각종 문화센터 등을 통한 글쓰기 강좌도 늘어나는 추세다. 글쓰기는 뇌의 노화를 늦추고 두뇌를 개발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글쓰기는 이제 특정 직업군의 전유물이 아니다.

한편으로,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은 극심한 고통이 되기도 한다. 고인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유언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그렇다. 한 사람의 생을 지탱하거나 살아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한 요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당연히 고민도 따른다. 어떻게 글쓰기를 할 것인가. 좋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왕 하는 글쓰기, 잘하고 싶은 열망이야 누구나 가질 법하지 않은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글쓰기지만, 글을 잘 쓰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프란츠 카프카와 같은 대문호도 늘 걱정을 했다. 원하는 수준의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 때문에. 그는 『변신』을 탈고한 뒤에도 시간이 없었다며 변명하고 스스로 책을 혹평했다. 대문호도 글쓰기를 걱정했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필부필부야 오죽하겠나.

글쓰기를 걱정하고, 잘하고 싶은 당신을 위해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작가 이만교가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이만교 지음/그린비 펴냄)를 내놨다. 그는 지난 2006년부터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글쓰기를 강의해 왔다. 이 책은 이 시간의 축적물이다. 그리고 지난 6일 서울 신촌의 아트레온 토즈에서 책 출간 기념으로 ‘저자 이만교와 함께하는 글쓰기 워크숍’을 열었다.

그는 글쓰기 강좌나 이 책을 통해, 기술이나 기교로서의 글쓰기가 아닌 삶의 태도로서의 글쓰기를 강조했다. 본질적인 자기 창조의 과정을 동반하는 글쓰기. 곧, 자신의 삶 전체를 살피고 생의 진심을 담은 글쓰기. 이날의 워크숍도 그런 맥락에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아래는 좋은 글쓰기를, 실질적 정직을 담보로 한 글을 짓고 싶은 당신을 위한, 이날의 기록이다.

들어가기에 앞서, 글쓰기 수업을 통해 재차 확인한 그의 글쓰기 지론을 살펴보자. “글쓰기 수업이 단지 등단을 위한 과정이나 절차일 수만은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재삼 확인했다. 꼼꼼히 읽어 보면, 잘 쓴 글이든 못 쓴 글이든, 쓴 사람 특유의 감각과 사유, 상처나 희망 등이 언어습관을 통해 총체적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작가 지망생의 습작 과정 그 이상을 의미한다. 글쓰기 훈련은, 감각하는 방법, 사유하는 방법, 상상하는 방법, 그리고 실천하는 방법까지도 스스로 다시금 점검하고 익혀 나가는, 무척이나 섬세하면서도 동시에 중요하고도 원대한 여정일 수밖에 없다.”(p.6)

이만교, 글쓰기 강좌를 통해 새로운 배움을 얻다

이만교는 우선 책의 제작 과정에 대한 이야기부터 풀어나갔다. 2000년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이른바 ‘뜬’ 작가가 된 그는, 2004년까지 정신없이 보냈다. 네 권의 책을 출간하고, 박사 논문, 신문 기고, 라디오 진행에 영화 칼럼까지. 그러다보니 에너지는 고갈되었고, 모든 것을 그만두고 본업인 집필 작업을 하기 위해 월악산으로 떠났다.

그러나 정작 글을 쓰려고 하면 몸이 아팠고 비염까지 걸렸다. 1년 이상 글을 쓰지 못하는 참혹한 시간이 흘렀고, 어느 날에는 운동을 하다가 고꾸라지기도 했다. 불교 공부를 위해 템플스테이를 하면서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고, 그렇게 월악산에서 3년여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 시간을 인생에서 가장 큰 공부를 한 기회였다고 회고했다. 그런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수유+너머’에서 글쓰기 강좌를 제안했고, 이것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글쓰기 강좌의 시작이었고, 3년여를 부지런히 강연을 한 결과, 이렇게 책까지 펴내게 되었다.

글쓰기 강좌는 그에게도 배움의 과정이었다. “글쓰기에는 성장 과정, 인식(사유) 구조, 욕망 실현 방법 등이 다 걸려 있다. 글쓰기를 통해 다른 사람을 만나면 깊이 있게 만나게 된다. 단편 소설은, 상담으로 치면 1개월에 한 번씩 갔을 때 3개월의 상담 효과가 있다. 그만한 분량이 나온다. 글쓰기 강좌를 진행하면서, 사람들에겐 나름 사연이 있고, 심리적 왜곡이 있으며 정상인이 하나도 없음도 확인했다. (웃음) 사람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인간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이 글쓰기 교본은 그에게 소중한 책이 되었다. 그가 아는 동생은 “소설보다 더 잘 썼다”는 말을 했다. “소설이냐, 글쓰기 책이냐는 상관없다. 나는 이것을 곁다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미 있는 책이다. 앞으로의 목표는 (글쓰기의) ‘기초서’라고 할 만큼의 책을 내는 것이다.” 이만교에게 글쓰기는, 이제 필생의 과업이 되었다. 행여 앞으로 그의 소설을 만날 수 없다손, 슬퍼하지는 마시게. 그는 더 크고 넓은 글쓰기의 전도사가 됐으니. 글쓰기를 통해 만날 수 있는 길이 있을 터이니. 그의 배움을 나눌 수 있다면,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실질적 정직. 글쓰기의 가장 기본

이만교가 글쓰기에서 가장 강조한 대목은 ‘실질적 정직’이다. “‘실질적 정직’이란, 내 안의 생각에 정직해지라는 말이다. 옆집 아가씨가 샤워를 하는데, 훔쳐보고 싶으면 훔쳐봐라. 그리곤 그 감정을, 죄의식까지도 솔직하게 적어라. 계속 실질적으로 정직해야 한다. 우리 욕망은 억압하면 반드시 귀환한다. 실질적 정직을 추구하면 글쓰기에서도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실질적 정직은 그렇게 내 안의 감각과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사물을 정밀하고 섬세하게 보는 게 기본이다. 책을 볼 때도, 사람들은 자신에게 감응을 준 실질적인 반응을 놓치고 굉장히 거칠게 바라보고 사유해서 오류를 범하는 경향이 있다. 어느 출판사에서 나왔다거나, 그게 장르가 어쨌다거나, 작가의 등단 나이 등을 따지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거칠게 사유하지 말고 정밀하게 사유해야 한다.”

그렇다면 정밀하게 사유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는 일반적으로 생의 전체나 일반적인 통념·편견으로 사유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우선 말한다. 가령 장남이나 출신 지역 등 검증되지 않은 편견에 휘둘려 사유하는 것. 그 다음으로 3~4년 등 시간의 단위로 묶어서 사유하는 것 또한 거친 사유라고 지적한다.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사유하는 게 좋다. 그런 면에서 일기를 쓰는 것이 좋다. 하루 단위로 사유할 수 있으니까. 자기 전체를 놓고 사유하지 말고, 지금 즉시 내가 어땠는지를 사유해야 한다. 더 정밀하게는 하나의 사건에도 여러 이유나 감정이 섞여 있으니까 그것을 조각조각 사유하는 것이 좋다. 시인이 감각적으로 예민하다지만, 감각적으로 예민한 모든 사람이 시인이다. 모든 사람은 감각적으로 예민해야 한다.”

그렇다. 인간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다. 한 가지 사유를 할 때도 샛길로 빠지는 것은 예사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념들이 곳곳으로 가지를 뻗치게 마련 아닌가. 생각해보라.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때도, 우리는 저 멀리 다른 세계로까지 사유의 촉수를 뻗친다. “무념무상을 하려고 명상을 11~12시간 해도 안 되더라. (웃음) 그 망상 덩어리를 적었다. 정리해 보니 내 욕망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지하철을 탈 때도 온갖 망상을 다 한다. 그것이 실질적 욕망이다.” 그는 새소리에서 시작한 명상이 딸, 전원주택, 1억, 베스트셀러, 로또, 한국 사회의 병폐, 범죄자 욕까지 꼬리를 무는 망상의 예를 들었다.

“그렇게 우리의 평소 사유들은 아무 근거도 없고, 생산력이 없다. 이걸 해체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구체적으로. 그게 돈이면 돈으로, 여자면 여자로. 하루, 사건 단위로 사유하고 혼재된 감각을 사유하고 미망의 흐름까지도 보면, 사유 체계를 다른 방식으로 이끌 수 있다. 실질적 정직을 통해 자신을 면밀하게 보는 작업, 그게 필요하다. 도덕적 정직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억압할 수 있다. 글쓰기에는 라이프 스타일이나 욕망 구조가 나와 있다. 자기 삶을 돌아보는 키워드가 실질적 정직이다. 거친 사유는 틀린 것이고, 정직한 것이 아니다.”

실전 1. ‘언어+생명’과 ‘언어+사건’

인간에게는 두 개의 중요한 요소가 있단다. 언어와 생명체. “우리는 안경, 운동화, 카드, 컴퓨터 등 늘 기계와 접속해 살고 있다. 우리의 의식이나 마음속에도 이식된 기계가 있다. 그게 언어다. 문법 구조를 가진 시스템이자, 넓은 의미의 기계다. 사유 방법 시스템이랄까. 내 마음의 흐름을 컨트롤하는 방식으로, 언어를 통해 우리는 사유한다. 우리는 그래서 ‘언어+생명 사이보그’다. 다른 동물과 다른, 지금의 인간을 만든 것이 언어다. 언어는 또 인간 문명이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시스템이다. 인간은 언어로 존재하는데, 모든 사건을 사건 자체가 아닌 언어로 본다. 즉, ‘언어화된 사건’이다.”

아래의 보기를 보자.

보기)
ⓐ 마음을 바꿔 먹어라.
ⓑ 우리가 직면한 중요한 문제들은, 그 문제들이 발생한 때 갖고 있던 사고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이에 대한 그의 설명을 듣자. “ⓐ, ⓑ는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장이다. 다만 ⓐ는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표현이다. ⓑ는 의미상으로만 보면 ⓐ와 같지만, 상투적인 문장이 아니어서 새롭고 명료한 표현으로 다가온다. 그렇다 보니 ⓑ가 한결 더 정확하고도 강렬한 메시지로 전달될 여지가 크다. 이처럼 같은 사건이나 같은 의미의 문장을 얘기해도, 어떤 언어로 얘기하느냐에 따라 다른 강도와 충격을 준다. 언어는 희한하고 놀라운 힘을 갖고 있다. 독서할 때 좋은 문장은 공들여서 꼼꼼히 읽어야 한다. 모든 사건은 언어화된 사건으로 인식하는데,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이건 글쓰기 이전에 삶의 문제다.”

또 다른 보기.

보기)
ⓐ 홍대 앞의 프린스 카페에서 나는 미숙을 한 시간이나 기다렸지만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 홍대 앞의 프린스 카페에서 미숙에게 바람 맞았다(혹은 차였다).
ⓒ 미숙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의 첫사랑은 그렇게 참담한 작별을 고했다. 그날 이후 나의 순수했던 청춘도 내 인생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다시 설명. “이들 보기는 사건이 가진 풍요로운 의미나 그 다음 삶에 대한 힌트를 주지 못한다. ⓐ는 기계적인 사실 전달에 그치고, 여자친구를 기다리는 애절한 심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는 비속한 인식을 드러낸다. ⓒ는 감성적인데 거친 문장으로 미화한 자기 기만적 글이다. 비속어를 자주 쓰면 자기 삶도 비속해진다. 요즘 좋거나 나쁘거나 놀라는 일 모두 ‘대박이다’ 혹은 ‘빠밤~’이라는 말을 쓰는데, 일상에선 좋다. 그러나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진심을 펼치기엔 부족하다. 거친 일상적 상식에 묶이면 자기가 경험한 것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지점을 놓칠 수 있다.”

이어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의 일부를 보여준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같은 내용이라도 ⓐ, ⓑ, ⓒ보다 좋은 예. “다소 감상적이긴 해도, 화자가 실질적으로 느낀 정서를 그대로 표현하는 실질 언어를 사용한 좋은 예입니다.”

실전 2. 다양한 잠재성으로서의 ‘언어+사건’

글쓰기를 위한 또 하나의 팁. ‘감각을 깨우라’. “인간은 감각 기관을 깨우면 엄청난 일이 가능한, 풍요로운 존재다. 인간에게는 무수한 잠재성이 안에서 들끓고 있다. 이면적 진실까지 민감하게 느끼는 것이 가능하면, 삶이 풍요로워진다.”

초코파이를 둘러싼 다음의 보기들을 살펴보자.

보기)
ⓐ 초코파이는 오리온 초코파이가 제일 맛있어.
ⓑ 군대 있을 때 초코파이 정말 많이 먹었는데.
ⓒ 러시아에서 요즘 초코파이가 불티나게 팔린대.
ⓓ 초코파이엔 초콜릿이 없대. 대신 화학 처리된 유지가 들어있대.

“사람들 반응이 ⓐ~ⓓ처럼 제각각인 것은 그들이 초코파이에 대해 갖고 있는 정보와 관심의 초점이 달라서다. 늘 다양함을 인식해야 한다. 언어로 표현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한 문장 한 문장 다양한 표현이 있고, 그 표현마다 뉘앙스가 다르다. 하나의 사건을 놓고도 무한한 변형 문법이 가능하다. 인지 감각을 섬세하고 풍요롭게 하면서, 뭐가 나를 즐겁게 하고 고양시키는지 안테나를 세우고 있어야 한다.”

감각 기관을 열어놓고 촉수를 세운 뒤에 필요한 것은 언어다. 물론, 그 언어도 내 안의 정직한 언어라야 할 테다. “언어 선택만 잘하면, 엄청 무섭거나 슬픈 사건도 새로운 사건으로 만들 수 있다. 하나의 사실조차 매우 다양한 서술이 가능하다. 양자 역학에서 관찰자 위치에 의해 입자의 실체가 얼마든지 다르게 나타나듯, 화자가 문장을 서술하는 방식에 따라 사건과 의미는 얼마든지 다르게 나타난다. 언어는 한 구절 한 구절 민감하고 삶에 밀접해 있다. 글쓰기란 사물과 세상을 감지하고, 그중 어떤 관심 사항에 언어로 초점을 맞추는 일이다.”

고로, 일상어 즉, 통속어나 상투구를 그대로 쓰면 그 글쓰기는 거칠게 다가오고, 반복하면 글쓰기는 엉망이 된다. 주어를 반복하거나 간투사(‘글쎄’ 등)를 자주 쓰는 것은 비경제적인 문장이 되고, 의성어·의태어 혹은 비속어를 쓰는 것보다 정확하게 언어를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

버려야 할 리얼리티와 찾아야 할 리얼리티

이만교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지점은 ‘리얼리티’를 다루는 문제. 일상적이고 모범적인 리얼리티는 버려라! 개연적이고 역동적 리얼리티를 찾아라. “일상에서는 일상 언어가 20퍼센트의 의미만 담보해도 소통이 가능하다. 그러나 글쓰기는 그렇지 않다. 일상어에 오염돼 있어서 글쓰기가 제대로 되지 않기도 하는데,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상어를 쓰지 말아야 한다. 일상적 리얼리티를 벗어나 개연적 리얼리티를 찾아야 한다.”

정리하자면, “글쓰기는 일상적 리얼리티를 벗어나는 일이다. 동시에 개연적 리얼리티를 확보해야 한다.” 개연성을 확보한 글쓰기가 읽는 사람의 호응을 얻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모범적 리얼리티도 감흥이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역동적 리얼리티. 역동적 리얼리티는 역설과 아이러니를 품는다. 이는 곧 세심한 관찰력에서 온다. 불경이나 성경 등의 경전에 이 같은 역설이 많다.

“역동적 리얼리티까지 가면 글의 힘이 세어진다. 모든 존재는 다발성이 있고, 어마어마한 잠재성이 있다. 인간은 결코 변하지 않는 지점이 있지만, 어떤 지점은 점층적으로 변화한다. 어떤 것은 직선으로 쭉 간다. 어떤 것은 생겨났다 죽었다, 나타났다 죽었다 한다. 여러 층위가 다양한 방식으로 변한다. 내가 공부하는 만큼 달라지고, 그것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언어 사용도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깥에 핑계대지 마라. 자신이 열어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쓰기. 허투루 생각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온몸으로, 삶으로 밀어붙여야 가능한 일이다. 그저 컴퓨터 앞에 앉았다고, 자판을 두들긴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글쓰기는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실질적 정직’이 글과 합일될 수만 있다면. “글쓰기는 인류가 만들어낸 소중한 유산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어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걸 빼놓고 얘기해선 안 된다. 이 공부는 공평하다. 책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마음을 열고, 다른 이와 치열하게 나누고, 잘못된 부분 인정하고, 새로운 창의성으로 접근하면 된다. (글쓰기는) 온몸으로 헤매는 수밖에 없다. 온갖 헤맴 속에서 우발적으로 나온다.”

또 하나의 팁을 더하자면, 줄거리로 사유하지 않기. “인생에서나 글쓰기에서나 줄거리 중심으로 사유하지 말자. 살면서 자신의 서사를 미리 만들지 말아야 하듯, 글쓰기에서 전체 줄거리부터 짜놓지 말자. 줄거리로 사유하면 모든 명작들조차 B급 잡지에서나 다룰 줄거리로 전락한다. 줄거리를 이루는 구체적인 사건, 인물들의 성격과 고민 등에 집중해야 한다. 정서로 사유해야 한다. 구체적이고 정서적인 감각을 가동해야 한다. 갈등이나 사건을 통해 줄거리는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다시 글쓰기다. 한 작가는 “이도저도 다른 재능이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끝물이 글 쓰는 직업”이라고 농(?)을 던지기도 했지만, 글쓰기는 재능이 아닌, 온전히 자신의 몸으로 세계를 향해 밀어붙이는 작업이자 태도가 아닐까. 소설가 김훈은 언젠가, 밥벌이뿐 아니라, ‘글쓰기의 지겨움’을 털어놓으면서도 “글은 몸속의 리듬을 언어로 표현해 내는 악보”라고 말했다. 온몸으로 헤맨다는 말은, 그래서 사실이다.

당신이 하는 일부터 세상 모든 것이 나름의 가치를 나름의 형식에 담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최종적 가치를 획득하는 건 문자의 세계, 그러니까 그것에 대한 글쓰기가 아닐까. 자신이 속한 세계를 좀더 드러내거나 표현하고, 혹은 영속적으로 보전하기 위한 모든 인간의 노력은 글쓰기로 귀결되곤 하니까.

아, 사실 딴 말은 필요 없다고 본다. 나는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에 나온 이 말을 아직 글쓰기의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다. “글쓰기의 첫 번째 열쇠는 쓰는 것이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표현의 자유가 끙끙 앓고 있는 하수상한 시절이지만, 그래도 써라. 거기에 당신의 실질적 정직을 꾹꾹 눌러 담아서. 우리는 그렇게, 당신을 감탄하고 싶다. 그렇게 당신이 내리면, 우리는 우산도 없이 당신을 맞을 것이다. 

Posted by 없음!
,

책 읽은 뒤 느낌 기록하는 습관 ‘필수’
직업인에게 듣는 나의 전공 출판편집자 정은숙


인문학 전공자들이 비교적 유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과학을 전공했다면 과학책을, 음악을 전공했다면 음악책을 편집하면서 전문성을 발휘하고 두각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전공은 크게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글을 좋아하고, 잘 읽고, 잘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출판 편집자는 좋은 글과 문장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작가가 왜 이런 책을 썼을까,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원고 읽기’를 해야하고,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토대로 글에 담긴 작가의 생각을 되짚어보는 ‘겹쳐 읽기’도 할 줄 알아야 한다. 평소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권을 보더라도 자기만의 ‘기록’을 하는 습관을 들이면 좋다. 책을 본 뒤에는 좋은 문장, 읽은 느낌 등을 적어본다. 메모는 비판적 책읽기의 기초이고, 편집자가 반드시 ‘전공’해야할 분야다.

적성
호기심: 세상과 인간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면 단 한 권의 책도 만들 수 없다.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그런가?’ ‘왜 그런가?’하는 호기심이 샘솟고, ‘다른 사람들은 지금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편집일을 잘 할 수 있다.

관찰력: 작가, 또는 취재 상대가 말 하는 것을 잘 듣고, 어떤 사람인지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글 쓰는 능력은 얼마나 되는지, 주요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특별한 버릇은 없는지…. 세심하게 관찰한 뒤라야 ‘이 사람과 어떤 책을 만들 수 있겠다’는 답이 나오기 때문이다.

열정: ‘이런 얘기가 무슨 책이 되겠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이런 책을 만들 수 있고, 세상에 꼭 필요한 책’이라고 설득할 수 있는 열정이 필요하다. 남을 설득하려면 자신의 생각만 고집해서는 안된다. 편집자의 열정은 안으로부터 나오되 독자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다.

집중력: 창 밖에 눈이 내리더라도, 지금 편집하고 있는 책이 꽃피는 춘삼월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편집자는 ‘봄’을 살아야 한다. 책을 기획하고 작가와 밀고 당기기를 할 때는 철저히 현실적이어야 하지만, 원고를 앞에 놓고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현실을 깡그리 잊고 오직 글에만 집중해야 한다.

한겨레 이미경 기자 2005년 12월 26일자

Posted by 없음!
,

 성질 급한 지원자와 독특한 면접 
[나의 민주노동당 잠입기①] "내 영혼이 원하는 것을 찾아"
 
 
이 글의 필자는 <레디앙>에 '프랑스 남자와 결혼 않고 살아가기'를 연재를 한 바 있습니다. <레디앙>은 연재됐던 내용을 포함 필자의 새로운 원고를 추가해서 책으로 낼 예정입니다. 이 글은 출간될 책 가운데 '나의 민주노동당 잠입기' 편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이 글은 필자 개인의 견해와 입장을 중심으로 써내려간 것이지만, 민주노동당을 바라보는 의미있는 시각, 내부자이면서 일정한 거리두기를 하면서 바라본 당의 속내가 솔직하게 표현돼 있어, 민주노동당에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용에 대한 찬반을 넘어서 좋은 거울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레디앙>은 앞으로 6회에 걸쳐 그 내용을 전재합니다. <편집자 주>


현재 난 민주노동당 문화담당 정책연구원이다. 출산으로 휴직했던 1년을 포함하여 3년 넘게 여기서 일하고 있다.
만만치 않은 야망을 가졌거나, 왠지 순수하지 못한 기회주의자일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정당인'에 대한 일반적 선입견에 '민주노동당'이라는 날선 이름을 합해 놓은 내 명함은 받는 사람들에게 잠시 표정관리를 놓치게 할 만큼 자극적이다.

스카프와 집시풍의 긴 치마 그리고 내 명함

더구나 당에 온 이후로, 특히 희완과 함께 살게 된 후론 그의 지지에 힘입어 더 자주, 나풀거리는 스카프며, 집시풍의 긴치마, 베트남에서 사온 알록달록한 옷들을 자유분방하게 걸치고 다니는 나의 겉모습과 주저 없이 사변적인 느낌들을 표출하는 캐릭터가, 얌전히 있어도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내 명함과 빚어내는 대비는 “황당” 혹은 “정리 안됨”의 효과를 종종 유발한다. 명함을 건네는 나는 이 의도하지 않은 코믹 상황을 견디느라 입가의 웃음을 배시시 베어 물게 된다.

그러나 의심의 여지없이, 현재 내가 지닌 직함은 일찍이 내가 지녔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비로소 나는 긴 모색 끝에 나의 지향과 노력이 만나고 있는 지점에 서 있고, 눈이 땅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던 시절을 지나, 내리는 눈은 소복히 땅을 덮으며 두께를 더하고 있다.
더 이상 적어도 정체성의 균열이나 혼선 따위로 방황하지 않고, 앞에서 다가오는 거센 역풍을 온몸으로 딛고 서 있을 필요도 없으며, 내가 선 이 자리엔 늘 눈덩이를 굴리기에 넉넉한 함박눈이 내려온다.

절망의 골짜기에 우두커니 머물러 있던 내 인생의 한 시기에, 불교신자인 한 친구는 “세상에 나쁜 경험은 없다”란 말로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쓰든 달든 지나고 나면 모든 경험은 약이 된다는 차원에서 그 말은 여전히 옳고 실제로 내가 겪었던 모든 사회적, 개인적 경험은 결국 오늘의 선택을 하는데 십시일반으로 다리를 놓아준 셈임을 충분히 인정한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한참 가다보니 “이 길이 아닌가 봐” 하며 방황을 거듭하는 고달픈 인생을 살아갈 순 없는 노릇이다.

물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방황해 볼 겨를도 없이 세상이 정해준 가치와 서열에 자신의 욕망을 맞추어 살아가는 인생보다는 방황하는 인생이 훨씬 아름답지만, 비로소 내 길을 찾아 이율배반에 시달리지도 영혼을 배반하지도 않고 소복이 그 안에 자신을 담을 수 있는 삶을 누리는 기쁨에 비할 바는 아니다.

영혼을 배반하지 않는 삶의 기쁨

직장에서 내 눈앞에 꽂혀 있는 모든 자료들이 모조리 진정한 개인적 관심사이며, 아무리 재미없는 문체로 써 있어도, 밤새 그 자료들을 읽는 일이 별로 고통스럽지 않다.
아침에 출근하여 인터넷을 켜면, 간밤에 타전된 갖가지 뉴스들에 대해 자리에 앉아 한두 마디씩 던지는 각 연구원들의 멘트들 중에 - 그중에는 꼭 한 대 갈겨주고 싶도록 한심한 생각을 유포하는 인간들이 꼭 끼어있는 여타의 사회집단에서와 달리 -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타 영역에서의 진보적 판단들로 나를 이끄는 키워드가 톡톡 튀어나오는 따위의 멋진 일들.
그리고 주말 저녁, 아이랑 깔깔대고 있을 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한 지방의원이 내게 전화하여, 문화정책에 관한 자문을 구해오면, 그것이 귀찮기는커녕, 오히려 문화에 관심 갖는 민주노동당의 '동지'를 만난 기쁨에 허둥대며 즐거워하는 그런 일들이 지금 내가 뿌리내리며 살고 있는 숲에서 벌어지는 전경이다.

프랑스에서 어학을 하던 시절, 퐁피두센터 내의 도서관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꺼내 읽은 나의 첫 전공서적, 『프랑스 문화정책』의 첫 장을 펼치며, 아직 어설픈 불어로도 선뜻 눈에 들어오던 그 책의 모든 목차들. 그 날렵하고 감각적인 어휘들로 적혀진 모든 챕터들을 순간 꼭꼭 씹어 먹고 싶은 욕구가 강렬하게 솟구치면서 난 비로소 내가 그토록 도달하고 싶던 그 숲에 왔다는 걸 처음 감지할 수 있었다.
문화와 예술이 충만하게 살포된 이 나라의 공기가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길 줄 아는 시민정신을 낳았고, 그 속에선 훨씬 더 쉽게 숨쉬고, 훨씬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걸, 책과 일상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의 선택은 잠깐 동안의 발레단 외도를 제외하면, 그 연장선 위에 있는 셈이다.

작가주의 영화와 민주노동당

세상에는 상업 영화가 있고 작가주의 영화가 있다. 상업영화는 쉽게 말해서 이거 먹히겠다 싶어서 만드는 영화다. 작가주의 영화는 이 얘기를 세상에 꼭 하고 싶어서 만드는 영화다. 물론, 작가주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동시에 “먹히기도” 하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은 한다. 그러나 제작의 동기는 다른 곳에 가 있다.  
민주노동당은 흥행을 목적으로 만든 영화가 아니다. “먹히겠다” 싶은 정책이나 공약을 내놓으며 인기몰이를 하지 않는 유일한 정치집단이다. 지금 당장 사람들이 찬동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한 정책을 설정하고 그것을 할 수 있는 만큼 설득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민주노동당은 영화로 말하자면, 지금 당장 대박을 목표로 하지도 않고, 그렇게 포장할 물적 토대도 없으며 오로지 진정성으로 승부하고자 하는 투박한 다큐 영화에서, 이제 좀 사정이 나아져서 얼굴이 알려진 배우 몇 명이 등장하는 저예산 영화다. 약간의 세련미, 표현의 미학까지 곁들여져 있다면 훨씬 폭넓은 대중의 지지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있는.
당이 후자의 미덕까지 갖추지 못한 아쉬운 점이지만, 정당을 통해 문화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민주노동당은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당이었다.

어쩌면 민주노동당 당원들뿐만 아니라 당직자들도 대부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민주노동당의 문화강령은 당의 목표 중 하나를 문화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첫머리에 적고 있다.
문화산업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너저분한 자본주의 사회의 욕망들을 나열해 놓은 다른 당들의 그것과 비교해, 민주노동당의 문화강령은 누군가 내 꿈을 조금 어려운 말로 적어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내가 꿈꾸는 문화정책의 방향과 일치하고 있었다.

내 꿈을 어려운 말로 적어놓은 것 같은 문화 강령

내가 아는 직장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광고를 보고 이력서를 낸 후 시험과 면접 등을 보는 일이다. 적어도 민주노동당에 들어오기 전까진 그랬다. 프랑스에 가기 전, 그런 방법으로 두개의 직장에서 각각 4년과 3년 동안을 일했었다.

처음 일했던 곳은 관광공사였다. 관광엔 아무런 뜻도 없었고, 대학 4학년이 되었지만, 하고 싶은 일은 초등학교 때만큼이나 많고 뭘 덥석 집어 들기엔 조심스러워서, 고심 끝에 좀 더 생각해보기로 하고, 영리추구를 하는 대기업이 아니라는 것에 약간의 위안을 삼으며 전공 살려 들어간 곳이었다. 내 전공인 러시아어를 하는 사람도 뽑았기 때문이었다. 영어, 러시아어 필기시험에 원어민과의 오럴테스트까지 받고 들어갔건만, 4년 동안 러시아어는커녕 영어를 쓸 일도 손꼽을 만큼이었다. 다행이도 문화축제 담당이었는데, 늘 두꺼운 장갑을 여러 겹 끼고 문화를 대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4년 내내 나갈 궁리만 하다가 내가 일할 곳은 적어도 문화예술 방면이란 걸 뼈 속으로 알고, 드디어 방향을 틀었던 것이, 대학로에 있는 동숭아트센터였다. 개관 이래 최초의 공채였다는데, 면접 결과 기다리는데만 한달 반이 걸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에 가있던, 대표의 전속 무당에게, 지원자들의 사진을 보내 관상 면접까지 거치느라 걸린 시간이었다. 관광공사 재직 경험이 마치 동사무소 방위를 했던 것 같은 느낌으로 남아있다면, 동숭아트센터에서의 경험은 대학원이라도 다녔던 것 같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연애와 많이 닮은 직장

처음 거길 다니게 되었을 땐, 구름 위를 떠가듯 기뻤다. 직장은 연애와 많이 닮아 있어서, 지긋지긋한 전 직장을 떠났을 땐, 그 해방감에 날아갈 듯하고, 꿈에도 그리던 새 직장으로 옮겼을 땐, 적어도 초기 3개월 정도는 “어쩜 이럴 수가...모든 것이 내가 바라던 그대로야”를 연발하게 된다.
드디어, 문화영역에서 두꺼운 장갑 벗어던지고 맨손으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이젠 숨이 탁 트이는 것 같았는데... 영리추구가 공간의 목적은 아니지만, 공간이 지속되기 위해서 최소한의 유지비는 나와야 했고, 입맛에 딱 맞는 공연과 예술영화만을 다루면서는 그마저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끊임없이 타협을 강요하는 현실과 스스로가 부여한 문화공간의 사명 사이에서 우리는 그 해답없는 딜레마를 부둥켜안고 질문의 구덩이를 파며 세월을 보냈다.

거기 있는 동안 그 공간을 드나드는 향기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던 건, 지금도 축복처럼 생각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그 향기로운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지, 그들 자신은 아니었다. 그러한 자각은 나에게 좀 더 연필심을 갈도록 충동질했다. 3년 만에 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기다란 질문 목록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은 이후 프랑스에서의 석사논문으로 이어졌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직후, 잠시 내가 여전히 한국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까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을 때, 그들이 구인광고를 냈고, 북한산에 올라가 깔고 앉은 신문에 그들의 구인광고가 있었던 인연으로, 몇 가지 키워드만 슬쩍 맞춰본 채, 지원했던 국립발레단에서의 짧은 경험 이후, 난 결심 하나를 하게 된다.
허울만 번지르르 했던 애인이던 발레단에서 내 영혼이 쨍하고 전율하는 경험 따위는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다시는 이렇게 얼렁뚱땅 적당한 상대를 고르지 말자. 내 영혼이 주저 없이 원하는 바로 그것을 찾고, 나의 확신으로 상대를 설득시켜서 그것을 쟁취하자.

내 영혼이 주저 없이 원하는 것을 찾아

정책을 공부한 만큼, 마침내 호랑이 굴에 들어갈 결심을 하고, 각 당들의 사이트를 들어가 이들의 문화에 대한 생각들을 들여다보았다. 민주노동당의 그것은 다른 어떤 당의 것과도 달랐다. 흑과 백. 하늘과 땅이었다. 어려운 이론서적의 한 구절을 통째로 갖다놓은 듯한, 소화 안 된 공약들도 있었지만, 그렇게 지향을 설정한다는 것 자체가 어딘가.
당명이 풍기는, 편협하게 노동의 가치에만 집중하는 듯한 인상과는 달리, 이 당은 매우 지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유럽 사민주의적 이상을 가진 정치집단이었다. 더 이상 좀 더 선명한 현실적 가능성과 물질적 안위를 위해 내 영혼을 구겨넣지 말자고 결정하고 나니, 판단은 아주 쉬웠다.

난 민주노동당의 17대 총선 문화공약을 분석하고 이에 평가와 보완, 대안을 제시한, 리포트를 써서 우편으로 보냈다. 그리고 며칠 뒤 전화를 걸어, 일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머지않아 공개채용 계획이 있고, 그 때가 되면 함께 심사하겠노라는 대답이었다.
정책정당을 표방하는 민주노동당은 보좌관을 비롯한 분야별 정책연구원을 1~2명씩 뽑을 계획을 갖고 있었다. 아직 공채계획이 구체적으로 잡히기도 전 불쑥 지원을 해버린, 이 성질 급한 지원자에 대한 면접은 따로, 좀 독특한 방식으로 - 여의도 공원에 앉아 장장 3시간 동안 - 이루어졌다.

그리고 한 달쯤 뒤, 희완과 합천 해인사에 들러 먼발치에서 답답하게 팔만대장경을 구경하고 내려오던 길에, 울리던 핸드폰을 통해 합격통보가 날아들었다. 5대 1의 경쟁률이었다는데, 감사하게도 날 선택해준 것이다. 문이 열리길 기다리지 않고, 내가 먼저 길을 만들어서 갔던 그 첫 시도가 멋지게 성공한 것이다.
  

실종된 원칙, 그래도 떠나지 않은 이유 
[나의 민주노동당 잠입기②] "위대한 두가지의 부재"
 

위대한 두가지 부재 : 위계와 학벌

나중에 듣자 하니, 공동으로 면접을 치른 사람들에겐 대학교 때 운동을 했느냐는 질문이 던져졌다고 한다. 난 그 질문을 듣자마자 “아뇨. 연애만 했는데요.” 라고 서슴없이 대답했을 터이고, 당장, 족보를 따져 묻는 듯한 그 우문에 심사가 뒤틀려 나머지 질문들도 제대로 답했을지 의문이다.
딴에는 젊은 날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던진 질문이라고 하는데, 학력고사 점수가 몇 점이었냐고 묻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질문이다.
운동을 직업적으로, 혹은 포교하듯이 행하던 무리들을 난 경계했고, 그들의 파시스트를 닮은 태도를 무시했다. 대학 1학년 때, 내가 다니던 대학의 학생회장이자, 전대협 의장이었던 사람은 현 여당 국회의원 오영식이다.

파시스트 닮은 운동권 수괴들 지금 뭐 하나

“민족의 태양” 운운하며 사회자가 과장스럽게 그를 소개하면 그는 신나게 올라와 웅변대회 나온 아이처럼 흥분된 일장 연설을 했다. 운동을 출세삼아 했는지, 하나같이 수권정당이나 우파정당에 들어가 권력의 노른자를 떠먹고 있는 자들이 우리 세대의 운동권을 대표하는 자들의 현주소다.
그런데 여기서 또 운동족보를 들먹이다니. 사실 '운동권'이라는 어휘 자체가 어처구니 없다. 과시적으로 대열에 서지 않으면 시대에 대한 고민도 실천도 하지 않는 자라는 건가? 운동권과 비운동권. 그런 단순한 이분법으로 사람을 가르는 집단이란 걸 나에게 진작 알려주었더라면, 지원을 안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가 개척한 길로 따로 들어온 덕분에-불행인지 다행인지-일어났을 지도 모를 초입에서의 갈등을 피할 수 있었다.
첨엔, 당연히 모두가 의욕에 차 있었다. 우리들 뿐 아니라, 기자들도 그랬다. 기자들이 그랬다는 건 일반대중의 시선 또한 그랬단 얘기다. 지지율 12%로 17대 국회에서 10명의 의원을 당선시킨 민주노동당은 국회입성 직후 25%까지 치솟은 지지율에 현기증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연히 민주노동당 최초의 공채 연구원들과 보좌관들에 대한 취재열기도 대단했다. 나만해도, TV를 비롯 서너 군데의 신문과 잡지에서 연신 인터뷰를 가졌다. 심지어는 MBC에서 인물 다큐멘터리가 기획되기도 했었다.(진행되다 엎어졌지만)
MBC 텔레비전과 가졌던 생방송 인터뷰에서 “민주노동당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 부모님 반응이 어땠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나는 “널 알아보는 걸 보니, 똑똑한 집단인가보다” 라고 하셨던 엄마의 답변을 그대로 전했다. 실로 엄마가 내게 던진 생애 최고의 찬사였다.
진작부터 민주노동당 당원이었던 언니는 물론, 엄마도 나의 선택을 믿고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셨다. 이미 지난 총선에서 나와 언니의 강력한 요청으로 비례대표는 민주노동당을 찍으시기도 했다.

어색하던 '동지' 호칭이 좋아지기 시작하고

여기선 서로를 OOO동지! 라고 부른다. 첨엔 그렇게 불리는 것만으로도 어색해서, 그렇게 불리고 나면 표정이 수습이 안돼, 어벙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호칭을 강요하지 않았고, 내가 다른 사람들을 OO씨라고 부르는 데에 대한 무언의 압력도 전혀 없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이란 의미의 단어인 '동지'는 민주노동당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였다. 그 의미의 정당성 때문에 난 오래지 않아 이 단어를 받아들이고 좋아하게 되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지만 가장 흔하게 쓰이는 이 표현이 우리들 사이에 각별한 동류의식을 불어넣음은 물론이다.
멀쩡한 공당에 월급 받고 다니는 거지만, 마치 비밀요원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고 그게 은근한 재미를 선사한다. 무엇보다 이 명칭은 연령의 고하나 직위의 상하를 희석시키는 수평적 구조를 자연스럽게 구성하게 만든다.

특이한 성 때문에 어딜가나 존재하는 “목!” 이라는 호칭에서부터, 목수정 동지, 목수정씨, 목수정 연구원 여러 가지 표현이 공존하지만 중요한 건 그 모든 표현과 그 표현을 둘러싼 관계들은 수평적이라는 점이다.
대리, 계장, 과장 등의 별로 듣기 좋지도 않은 직함들이 도토리 키재기 하듯이 사람을 수직적인 관계에 놓으면서 피곤하고 재미없게 만드는 관행이 사라진 그 자리엔 생각보다 큰 의미가 자리한다.  

출신 교 질문이 없는 곳

또 하나 날 즐겁게 한 '부재'는 출신학교에 대한 질문의 부재이다. 정책연구원들은 각각 명확한 자기 분야가 있기 때문에 전직이 뭐였는지, 어떤 분야를 공부했는지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약사, 회계사, 노무사, 사회복지사 등 사자로 끝나는 직업을 전직으로 가진 사람들이 반 정도 되고,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정도를 취득하고 각자 전문분야의 연구원 혹은 사회단체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간혹 박사들도 있지만 극소수다. 그런데 들어온지 3년이 넘었어도,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모르는 연구원들이 대부분이다. 아주 최근에서야 옆자리에 앉아있는 연구원이 나와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걸 알았을 정도다. 그런데 알고도 그냥 “그렇구나”하고 서로 무덤덤했다. 다른 집단에서였다면 어느 쪽에서든 또 누구누구가 같은 학교며 한 번 같이 만나자는 둥 하는 쉰소리가 오고 갔을 것이다.

출신학교부터 물어보면서 말을 트기 시작하던, 대부분의 우리사회의 인간관계들이 가지는 그 속 보이는 천박함에 비해, 여기에선 금기까지는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그런 걸 궁금해 하는 태도가 촌스럽게 느껴지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이 지긋지긋한 학벌사회에서 은근히 서로를 서열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그런 종류의 질문이 조직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대학서열을 폐지하려는 정당으로서 최소한의 실천이지만, 뿌리 깊은 한국사회의 관행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매우 위대한 실천이다.
 
파삭 깨져버린 원칙, 석달만에 한산해진 기자실

한 달간의 어수선한 연수가 끝나고 우린 각자의 자리를 찾아 떠났다. 보좌관과 정책연구원 두 갈래 길이 있었다. 보좌관은 정책 담당과 정무 담당이 따로 있는데, 정무담당은 주로 의원과 호흡을 같이 해 오던, 당직자들이 맡았고, 정책보좌관은 공채를 통해 주로 채워졌다.
40여명의 정책연구원들은 여의도 당사 5층에 자리 잡았다. 비좁은 책상, 빽빽한 좌석 배치. "여기 고시원이에요? 우리 텔레마케터에요?"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지만, 그 불만을 듣는 기존 당직자들은 미동도 않는 기색이었다.
우린 기차를 타고 단체로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희망과 꿈에 가득찬 여행을 떠나는 중이었는데, 그들은 '그래 한 번 가봐' 하는 표정들이었다. 저건 뭘까 싶었다. 악의적이진 않지만, 저 심드렁하고 밋밋하며 피식 웃는 듯한 저 표정은.

심드렁하고 밋밋한, 심상치 않은 표정들

심상치 않아 보이는 의문을 뒤로 한 채, 난 일속으로 한걸음씩 들어가기 시작했다. 정책연구원의 일이란... 말 그대로 정책을 연구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일년에 한두 편 두꺼운 논문을 써내는 일이 우리의 주된 업무는 아니었다. 담당분야에 상임위를 둔 국회의원의 정책담당 보좌관과 해당 영역에서 발생하는 정책적 사안들을 적절히 배분하여 일한다.
보좌관들은 의정활동의 흐름을 타며, 의사일정에 맞게 법안심사나 발의, 국정감사, 예결산 등에 주력한다면, 정책연구원들은 조금 더 장기적 호흡으로, 당이 제시해야 할 정책의제들을 만들어 내고, 길지 않은 논문들을 작성하여 논리를 만들어낸다.

관련 분야의 시민단체들과 정기적으로 네트워크를 꾸리며 의견을 청취하고, 공동으로 토론회나 워크샵을 진행하기도 하며, 해당분야에 중요한 사안이 발생하였을 때, 당을 대변하는 입장을 정리하여, 정책논평을 작성하기도 한다.
선거 때 공약을 만들어내는 일 또한 정책연구원의 고유 업무이며,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지방의회 의원들이 필요로 하는 정책자문이나 조례 등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 국회에 제출한 법안을 만드는 일도 정책연구원이 의원실과 함께 진행하는 일이다.

언뜻 보기에 재미없을 것도 같은데, 문화정책과 관련된 일이라면, 한순간에 재미와 의욕을 재깍 충전받을 수 있어서 내게는 진정으로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정책은 상상력의 산물"

민주노동당의 정책통으로 불렸던 이재영씨가 정책연구원들 앞에서 했던 말처럼, “정책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게다가 우리의 현실과 미래를 개선시키고 변혁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상상력이다. 그러니 잘만하면 정말 흥미진진한 일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입성 첫 해에, 나는 내가 꿈꾸었던 그 어떤 거대한 실천도 하지 못했다. 마음에 쏙 드는 성실하고 실력있는 정책보좌관과 한 팀이 되어서 계류 법안들을 차곡차곡 검토해가고, 함께 문화 영역에서 열리던 토론회에 참석하여 문화계 정책 현안들을 파악하던 어느 날, 그녀는 뜻하지 아니하게 사직서를 내게 되었던 것이다. 일하기 시작한지 한달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권위적 성향을 지닌 국회 쪽의 한 보좌관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 똑똑한 정책보좌관을 민주노동당 답지 않게 짖누르고 협박성 발언을 한 것이 발단이 되어 결국 정책보좌관의 사임으로 이어진 것이다. 나를 비롯한 몇몇 연구원들은 사태의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데 서너 달을 훌쩍 보냈다. 그 사이 해당 의원실의 다른 보좌관들도 한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떠나갔다.
문제의 그 보좌관이 스스로 다음 해에 사직서를 내고 물러났을 때에야 싸움은 종료되었고 의원실은 그제서야 비로소 정상화되었다. 출산을 위해 휴직을 했던 나는 파리에서 그의 사직 소식을 들었다.

당에 발을 딛자마자, 내가 알고 있던 정책정당의 찬란한 원칙이 파싹 깨지는 현장을 마주쳤다. 마치 내 뼈가 단단한 쇠사슬로 옥죄어져 바삭하고 으깨지듯 괴롭고 허무한 시간을 보내야했다.
그즈음, 문득 시선을 들어 주변을 돌아보니, 17대 국회 초기, 고3 교실처럼 빼곡히 차던 기자실에는 점점 사람이 줄어들어 서너명이 보일까 말까 했다. 떠나간 기자들의 숫자는 떠나간 국민들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불과 서너달 만에 밀물처럼 다가왔던 기대와 관심은 썰물처럼 사라졌다.

불과 서너달 만에 썰물처럼 빠져나간 기자들

그리고 다른 연구원들, 다른 의원실들도 모두가 우리처럼 심각한 갈등을 빚지는 않았지만, 크고 작은 문제들을 겪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기차는 예상만큼 멀리 나가지 못했고, 예기치 않게 발생하는 문제들에서 작동해야 할 원칙들은 '정치적 해결' 이라는 화딱지 나는 방식에 밀려나면서 당은 처음부터 여기저기서 삐그덕 소리를 냈다.
그러다 보니, 다음 역에서 하차하는 성급한 승객들도 생겨났다. 멀리서 보기에 아름다웠던 경치가, 가까이서 보니, 시커멓게 탄 상처와, 뻥뻥 뚫린 구멍들, 때로는 돌무더기와 쓰레기더미도 있었던 거였다. 덩치는 갑자기 커졌는데, 문제를 거르는 자정 장치가 없거나 작동하지 않아, 순식간에 당은 너무 많은 오염물질로 뻑뻑해 지기 시작했다.
처음 우리가 책상 크기를 가지고 투정을 부릴 때 보았던 그 모호한 심드렁함은 ‘뭐 그 정도를 가지고 그러시나, 아직 멀었는데’ 하는 뜻의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이들의 묵언의 답변이었다.

그러나 내가 믿고 있던 원칙이 작동되지 않는 걸 보면서도 당을 떠날 생각은 금방 들지 않았다. 실망스런 지점에 봉착할 때, 우리가 비난하는 당은 정해진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유기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원칙이 있는데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원칙을 지켜내기 위해 싸워야 하는 것이지, 그 사람들 때문에 내가 떠날 필요는 없는 거다. 원칙을 위해 싸워야 할 사람들이 모두 떠나면 원칙을 엿가락처럼 주무르는 사람들이 남고, 당은 그들의 것이 될 뿐이다. 영아사망의 전통을 깨고 기적처럼 의회에 발을 딛은 이 진보정당의 실험은 계속되어야 하고, 죽 쒀서 개주는 일은 웬만하면 하지 말아야 하므로.
 

뉴라이트에 쫓기고 경찰 보호받고 
[나의 민주노동당 잠입기③] "일심회 그리고 정파의 늪"
 
 
1년간의 휴직을 끝내고 다시 당에 돌아왔다. “어, 다시 돌아왔네?” 가 주된 반응이었다. “안 올 줄 알았는데”라는 말이 생략된. 다시 돌아 왔다. 8개월 된 아이와 그 아이의 아빠를 이끌고. 들어온 첫 해엔 변변히 일도 못해봤고, 두 번째 해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프랑스에서 보냈다. 세 번째 해에야말로 제대로 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한편으론 늦게 엄마가 된 흥분을 몸소 실천하고픈 마음 또한 간절하여, 아이와 살 부비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고 싶었다. 기꺼이 몸 바쳐 충성하고 싶은 두 가지 사이에서 모든 일하는 엄마들의 딜레마를 겪으며 내 몸은 지옥의 스케줄을 견뎌야 했다.

파리에 들려온 우울한 당 소식들

스스로 한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느슨하게 출근하면서도 정시에 퇴근해 아이와 몸 바쳐 놀았다. 못다한 일은 아이가 자고난 밤과 새벽에 해야 했다.
파리에서 간간히 들어왔던 당에 대한 소식은 대체로 우울할 뿐이었다. 조승수 의원이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의원직을 상실하였고, 그의 지역구였던 울산 북구에서 열린 보궐선거에서, 승리를 자신하던 당은 패배하였다. 이미 두 번이나 구청장을 민주노동당에서 낸, 당의 가장 만만한 텃밭에서의 패배는 당에게 심각한 타격을 안겼다.
당대표를 비롯한 최고의원들이 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총괄 사퇴를 하였고, 2기 지도부가 출범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소위 NL이라 불리는 자주파는 그간 확장된 세력을 선거에 집중시켜, 사무총장, 정책위원장을 포함한 주요 당직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2005년 12월, 다시 돌아온 당에 의외로 사람들은 아직 떠나지 않고 있었으나 무겁게 가라앉은 패배감과 싸늘한 자조, 소통을 어긋나게 만드는 불신에 휘감겨 있었다.

일심회 사건

민주노동당에서 일하면서 가장 곤혹스러웠던 시기는 소위 간첩단 일심회 사건이 터졌을 때였다. 처음엔 모두가 조작이나 당에 대한 탄압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북핵 사태에 대한 적극적 해결책으로 지도부의 방북이 계획되어 있던 시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간첩 행위로 규정할 수 있건 없건, 당의 현직 간부가 북한 조선노동당에게 일정한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 검찰 발표로 드러나자 당 내부는 심각하게 양분되기 시작했다.

최모 전사무부총장에게 씌워진 혐의는 민주노동당 당직자 350여명의 신상을 북한에 유출했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이 정도 사안이 국가기밀 누설에 해당되는지 심히 의심스럽지만, 심상정 의원이 지적한 바 있듯이, 이는 간첩행위 이전에 “심각한 인권 침해이고, 진보운동의 일탈 혐의”임에 분명하다.
더욱이 민주노동당으로선 조선노동당이라는 타당에 당직자의 신상을 알린 일종의 프락치 행위를 한 내부자가 있었던 셈이니, 더욱 좌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최대 피해자는 민주노동당 그 자체

그러나, 당론은 국가보안법의 존재에 모든 탓을 돌리며, 최모씨를 옹호하는 입장과 인간적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안에 대해서는 냉정한 비판의 입장에 섰던 두 가지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당은 공식적으로 민주노동당에 대한 공안 탄압이니, 국가보안법을 철폐해야 한다느니 하는 원론적인 얘기만을 반복하다가 뒤늦게 대국민 사과를 하고 사태에 대한 자체 진상조사를 벌일 것을 결의했으나, 끝내 당내 진상조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주파 중심인 최고위원회에서 진정으로 조사의 진행을 바라는 사람은 적었던 탓이다.

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분명 민주노동당었다. 이후 민주노동당 깃발만 보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의 수는 더 많아졌고, 혐오를 드러내는 표현은 더 노골화 되어갔다. 대선을 앞두고 매우 부담스런 짐을 지게 된 셈이었다.  
이 사건은 안 그래도 민주노동당을 향해 빨갱이라는 비판을 서슴지 않는 수구보수 세력들에게 그 물증을 가져다 준 격으로, 그들은 우리를 노골적으로 '간첩당'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당사 앞에는 연일 뉴라이트 회원들이 장사진을 치고, 삭발을 하고, 농성을 하며 북한으로 꺼져버리라고 고함을 쳐댔다.

참으로 유치하게도 그들은 “민주노동당은 악마”라는 사뭇 유아적이고 조금은 종교적인 냄새까지 풍기는 플래카드를 당사 주변에 걸어놓기도 했다. 그들이 물러난 뒤에도 한동안 그 희한하기 그지없어 화도 나지 않는 그 플래카드는 당사주변에서 너덜 거렸다.

출근길에 전경들이 우리를 지켜주느라 연일 당사 1층 로비에 들어차 있었다.
우린 전경들이 우리를 지켜주는 이 진기한 세상을 만끽하며, 오늘도 뉴라이트는 계속된다는 것을 확인하며 출근하곤 했다. 뉴라이트 회원들의 항의 시위는 사실 우리를 괴롭히는 일에 속하지는 않았다.

뉴라이트의 공격과 전경의 보호 

조폭 비슷한 외모의 아저씨들이 내지르는 저 거칠기 이를 데 없는 언사들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해줄 뿐이었다. 그들이 내지르는 과격한 구호, 삭발, 혈서 등은 그 대상만 반대일 뿐, 모두 80년대 학생운동 세력이 해오던 그것이었다.
일련의 행위들이 전해주는 소름끼치는 폭력성을 보면서 비로소 시대정신은 저런 과격함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음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더니, 우리가 할 때는 사회를 위한 것이고 그들이 할 때는 추태로 보이는 것은 아마 그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 가는 길에 가해지는 과격한 행위, 더 이상 이런 모순이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다.  

간첩단 사건 직후 감행한 민주노동당 지도부의 북한 방문에서 실제로 이들은 조선노동당이 아닌 조선사민당 위원장을 만나고 왔고, 다른 정당들에 이들이 갖추어온 정당한 예우조차 받지 못하고 별다른 성과없이 귀국했다. 실제로 민주노동당과 조선노동당은 끈끈한 연대를 구성할 아무런 근거도, 실체도 없는 두 개의 상이한 정체성을 지닌 당이다.
일심회 사건으로 당은 심각하게 들끓었다. 당 홈페이지의 당원게시판에 가장 활발하게 분당론이 개진되었던 것도 이 때였다. 새는 좌우로 날고, 역사는 정반합 변증법을 통해 진화하지만, 같은 당 내에 공존하는 이 두 방향의 생각은 진화 이전에 당을 갈갈이 찢어놓을 듯했다.

당직자들은 당시 난데없이 친구들이나 친척들로부터 잘 있냐는 전화를 받았고, 성질 급한 부모님들은 다짜고짜 그만 다니라고 종용해 오기도 하셨다. 택시기사들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가도 "민주노동당사 앞에서 세워주세요"라는 말이 나오면 싸늘하게 대화가 식어버리곤 했다.
심지어는 민주노동당 조끼를 입고 뉴라이트 회원들 앞을 지나가다가 몰매를 맞을 뻔한 사람도 있었다. 뒤에서 "저 놈 잡아라" 하고 달려오는 뉴라이트 회원들을 피해 잽싸게 국회 쪽으로 달음박질 쳐서 봉변을 면했다.
그 무렵 나도, 집에 들어올 때면, 누군가 (혹 국정원 직원 같은 이가) 내 뒤를 밟는 건 아닌지... 뒤를 돌아보곤 했었다. 실제로 몇몇 당직자들의 집에는 국정원에서 사람들이 다녀가기도 했다. 의혹의 눈초리로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면, “우리야 말로 피해자라구...” 외치고 싶었다.

정파의 늪

사실 난 당에 들어오고 나서야, 아직도 NL이니 PD니 하는 정파가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엔 ‘어른들이 되게 할 일 없네. 대학교 때 하던 그 유치찬란한 싸움을 아직도 하구 있어?’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철이 안 들었다는 건 아직 싸울 용기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건 좌파의 필수적인 숙명이었다. 철드는 순간, 시퍼런 투쟁의식은 녹슬기 시작한다.
그들은 다행이도 아직 철이 안 들었고, 운동도 놓지 않았지만, 정파도 버리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당에서 발생하는 많은 갈등의 근본 원인이 정파 갈등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모든 정당에는 정파가 존재한다. 조선시대에도 시기를 불문하고 피 튀기는 당파 싸움은 숙명이었으니, 정치조직에 정파가 있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정파는 정당의 동생'이다. 오히려 정당이 존재하기 위한 필수 요소라 부르는 것이 맞다.
각각의 정파가 서로를 견제하고 경쟁하면서 건강한 조직문화를 형성할 수 있을 때, 정파의 존재 의미를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치 종교단체처럼 비판과 분석, 합리적인 토론이나 공개적인 논의를 거부하며 금기의 영역을 만들어가는, 상식과 이해를 넘어서는 정파가 있고 그들에겐 당보다 정파의 이해가 우선한다면, 이는 당의 암적인 존재밖에 될 수 없다.

합리적 토론과 공개적 논의를 거부하는 정파

여의도 시절, 4층(사무처가 있는 곳-편집자)에 내려가면 왜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처럼 생겼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던 나는 오래지 않아 북한 사람들을 닮은 그들의 분위기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그 동안 당에서 느꼈던, 저 오만할 만큼의 자유로운 지성과 비권위와 비형식이 약간의 냉소와 함께 맴도는 젊고 가난한 엘리트집단의 분위기는 자주파를 거의 포함하고 있지 않은 5층 정책위원회만의 것이었음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사실 난 자주파로 불리는 사람들의 사고의 중심에 민족통일이 있다는 것 이외에 자세한 그들의 생리는 알지 못했다. 민주노동당에 들어온 이상, 민주노동당이 주창하는 대원칙에 합의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고, 나 스스로가 정파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니, 정파적인 편가르기를 피하고 함께 정책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화정책과 관련한 논의를 진행할 때, 자주파 쪽 사람들은 두 시간이 지나도록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듣고만 있는 광경을 연거푸 연출했다. 그러다가 '남북' 문화교류 같은 단어가 나오면 그제서야 눈을 반짝 뜨고 반가워하고. 논의가 끝날 무렵, 몇 시간 동안 아무 말도 안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민망스러워 "한 말씀 하시죠" 하면 그 사람 좋은 얼굴로 "오늘 많이 배웠습니다"라고 언제나 이야기하곤 했다.

이러한 현상은 3년이 지나도 전혀 달라지는 법이 없었다. 이게 개인적인 현상인지 어떤지 알 길이 없어 주변에 물었더니, '이쪽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라는 것이 답이었다.
더 재미있는 건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의 핵심에 해당하는 주체사상이란 단어를 결코 입 밖에 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자주파는 현재 당내 최대 정파임에도 그들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 사항이다. 그들이 갖고 있는 논리를 공개적으로 토론해서 서로 공유할 것은 공유하고 버릴 것은 버리도록 하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진정으로 순진하게) 생각하였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의 세계는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돌고 있지만, 정작 사고의 핵이 되는 그 사상은 논쟁과 토론을 거부하는 금기의 벽장 속에 가둬 두고 있었고, 이러한 태도는 그들을 점점 어리석고 비타협적인 집단으로 몰고 갔다. 금기와 우상에 사로잡혀 있는 집단이 교조주의에 사로잡히지 않는 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민주노동당 '까페 투쟁'을 아십니까?
[나의 민주노동당 잠입기④] 공간에 정확히 반영된 권력구조
 
 
'다니다'는 민주노동당 당직자들을 위한 '문화감성 충전 프로그램'이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문화 프로그램 하나를 정하여, 가고 싶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가이드가 될 만한 전문가 한 사람과 함께 가서 보고, 토론하고, 밥이나 술을 먹는 그런 느슨한 (그러나 속내는 야심찬) 모임이다.

당직자들의 문화감성 충전 프로그램

상상력의 산물인 정책을 생산해 내는 사람들에게는 상상력을 건드려줄 다각도의 자극이 필요하고, 정책을 팔아서 장사를 해야 하는 사람들도 민주노동당 당사에 갇혀 해가 지고 달이 뜨는 일상을 벗어나, 발랄한 감수성 솜털이 피부 위에 돋아나는 경험을 하는 것이 분명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문화부를 상대하다보면, 그들로부터 "예산을 올렸는데 기획예산처에서 다 잘렸다"는 얘기를 흔히 듣는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경제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 전체의 문화적 수준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생각을 매번 해오기도 했다. 민주노동당의 문화에 대한 무관심과 건조한 인식은 당내 설문조사를 통해 공인된 바 있다.

어느날 온 국민들이 대오 각성하여, 갑자기 민주노동당에 권력을 쥐어준다면, 그 때 기획예산처, 재경부, 산자부, 노동부 등에 가서 국정을 다룰 민주노동당의 사람들은 그럼, 문화적인가? 문화는 문화부만의 영역이 아니며, 삶의 모든 영역에 명사적인 대상으로서 뿐 아니라, 형용사적인 가치로서 스며들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잘 스며 있는 사회가 우리가 흔히 일컫는 선진사회일 것이다.

문화(Culture)란 단어의 라틴어 어근을 들여다보면, 경작하는 거다. 밭을 경작하고 그리고 나를 경작하는 거다. 문화를 소유한다는 것은 다독다독 잘 다져진 풍요로운 땅을 소유하는 거다. 문화는 꽃이 아니라 토양이다. 그 땅에서 어떤 나무, 어떤 꽃이 피고 어떤 열매가 맺힐지는 나중의 일이며 각자 선택의 몫이다.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임하는 자들이 마르크스만큼 향기롭고 풍요로우며 문화를 즐길 줄 아는 매력적인 인간이었다면, 마르크스주의가 20세기 말에 와서 이렇게까지 푸대접 받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세상에서 가장 하고 싶어하는 일은 셰익스피어를 한없이 읽는 것이었음을 그의 딸들은 증언하고 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로 시작하는 공산당 선언의 유령은 햄릿에 등장하는 그것과 일치하고 있음을 자크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les spectres de Marx)』이란 책에서 또 얼마나 명민하게 간파해 내고 있는지.(보라, 마르크스와 셰익스피어가 주고받은 저 위대한 상상력의 유희를!!)

민주노동당 사람들이 자신의 문화의 토양을 일구어 가며, 위대한 상상력의 뿌리를 그 속에 내리게 되길 기대하며 난 조촐한 작업을 하나 시작하였다. 나와 비슷한 문화적 열망을 갖고 있던 의원실의 보좌관 한 사람과 모임의 초동 주체가 되어, 약간의 예산도 의원실에서 마련해 주었다.

피카소, 박제된 천재에서 살아 숨쉬는 인간으로

의원실의 보좌관들과 중앙당 당직자들을 모아서 한 달, 혹은 두 달에 한 번씩 박물관, 뮤지컬 공연장, 전시장, 극장 등을 함께 다녔는데 기껏해야 10명 안팎의 작은 인원이었다. 가겠다는 사람은 꽤 있지만, 결국 그 날이 오면, 언제나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들이 우리 발등 위에 무수히 떨어지고, 반쯤은 자신의 문화적 감성을 내려놓는 선택을 한다.

그 중에 가장 만족스러웠던 기억은 함께 피카소 전을 보러갔을 때였다. 이 때에는 희완이 우리의 가이드가 되어 주었다. 마치 피카소 옆집에 살았던 이웃처럼, 세세히 그의 모든 작업과 고민과 각각의 작품들이 갖는 관계들을 입체적으로 드러내주며, 온 몸으로 눈앞에 그리듯 설명해주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천재도, 괴상한 사기꾼도 아니고, 하루하루 예술 작업이라는 실천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확장해간 공산주의자이자 예술가였던 피카소의 삶은 '천재'라는 박제된 이미지에서 벗어나 비로소 우리에게 인간의 모습으로 걸어나왔다.
희완의 설명과 나의 통역으로 진행된 두 시간 남짓한 우리의 관람에는 일반 관람객들의 긴 행렬이 더해져서, 나중엔 큰 무리를 이루기도 했다. 그들이 따랐던 집단이 민주노동당이란 걸 아는지 모르는지... 희완은 그것이 예술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예술 작업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예술가들이 그것을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모든 진정한 예술작품은 시대를 튕겨져 나가 저항하고 조롱하고 비판하며 앞서나간다.

우파는 오른쪽으로 가기 보다는 주어진 길을 가는 사람들. 좌파는 현상을 뒤집어보고 까보고 다른 각도에서 삐딱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철학을 하고 예술하는 자세와 같다. 우파는 사람들을 얌전히 성냥갑 속에 넣어놓고 통제하려 하고, 좌파는 어떻게 해서든 그 통제의 틀에서 뛰쳐나오려 한다.
평등에 초점을 맞추던 좌파의 태생적 관점은 점점 자유 쪽으로 그 무게 중심을 옮겨왔다. 그러나 자본의 무한한 자유를 허락하는 '신자유주의'의 도래로 말미암아 이는 부언이 필요한 난감한 설명이 되어버렸다.

최근 들어 깨닫는 가장 명확한 좌와 우에 대한 설명은 전자는 생명을 지향하고 후자는 죽음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살아있고 깨어있으며 무한한 정신의 자유를 추구하고 모든 살아있는 것과의 조화로운 상생을 꿈꾸는 것이 좌파라면, 텔레비전 앞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보내면서 영혼을 일찌감치 무덤 속에 파묻으며 보수언론의 선동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개발의 미명하에 생태를 파괴하는 것을 발전이라 여기는 쪽은 우파다. 우파가 가장 싫어하는 좌파의 부류가 생태주의자들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우연일까.

우리에게 까페를 달라

2006년 12월, 당은 여의도 당사를 떠나 문래동 당사로 이전하게 되었다.
여의도 당사는, 전엔 집권 직전의 김대중이, 지금은 차기 집권을 노리는 이명박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명당 자리였다. 구구한 이유들이 있었지만, 핵심은 경비 절감이었다. 국회와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당연히 여의도에 머물러 있는 것이 효율면에서 유리했다. 새로 이사 온 문래동 당사 주변에는 수백 개의 철공소가 있었다. 그 밖에는 철공소 사이사이에, 자리에 앉으면 백반을 자동적으로 주는 밥집 몇 개, 배달을 전문으로 하는 다방 몇 개가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에 맞게 노동자들 옆으로 왔다고 했지만, 우리가 말하는 노동자가 육체노동자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면, 노동자는 어디에나 있다. 굳이 철가루 휘날리는 철공소 밀집 지역이 최적의 사무공간이라고 우길 필요는 없는 거다.
이번 당사 이전은 국회 입성 이후, 쉼없이 퇴보해온 당의 지지율만큼,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민주노동당의 명백한 퇴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숨막히는 계파간 갈등과 소통의 부재는 점점 더 명백하게 당으로부터 활력을 앗아가고 있었고, 나는 숨 막혀 죽기 전에 이사를 계기로 내가 할 수 있는 시도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새로 이사가는 당사에 까페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이것은 소통과 휴식과 상상력 충전을 위한 공간이었다.
이전 당사에는 소위 담배방만 하나 있을 뿐, 휴게실 개념의 공간이 없었다. 부서와 일하는 층을 떠나 중앙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섞여서 대화 나누고, 잡지나 만화책도 뒤적이고, 음악도 들으면서 잠시나마 히피처럼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을 꿈꾸며, 난 예산과 함께 계획표를 짜서 당에 제안했고, 그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약속됐던 까페는 이사 당일 없었던 것으로 되고

새로운 당사에 까페를 위한 공간은 당연히 없었지만, 평면도를 보면서, 두 층 사이에 나있는 내부 계단을 막아, 그 자리를 까페로 만들자는데 합의할 수 있었다.
건축 담당 연구원이 내부 인테리어 구상을 맡기로, 화초를 좋아하는 에너지 담당 연구원이 실내 조경을 맡고, 희완에게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할 벽화를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까페는 책과, 잡지가 그득한 북까페로 꾸며질 예정이었다.
서가는 각 당직자들의 기부를 받아 채워지고, 꾸며지는 것으로 구상되었다. 오호... 이렇게 신나는 일이. 난 잡지, 인터넷을 통해 샘플이 될 북까페들의 사진들을 열심히 수집하면서 이사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내부 집기를 위한 약간의 예산까지 확보된 상태였다.

그런데 이 까페는 이사 당일 사라졌다. 정작 이사를 와 보니, 도면상으로 예상했던 것보다 공간이 좁다는 게 이유였다. 까페 자리에는 사무실이 들어찼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런 기도 안차는 주먹구구. 무책임. 무대책에 난 소위 뚜껑이 열려버렸다.
집단의 철학은 공간이 그대로 반영한다. 반대로 공간이 담고 있는 철학은 집단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일할 공간도 없는데 무슨 까페냐”는 논리로 약속했던 까페는 없어졌건만, 대표, 정책위의장, 사무총장은 독방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았다.

당사 내부 공간배치와 민노당의 철학

권력구조를 공간 구성을 통해 정확히 반영해 낸 것이다. 더구나 이들의 사무실은 햇빛이 잘 드는 남쪽 창가를 차지하고 앉았다. 당의 '일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차지한 방과 사무 공간 사이를 완강하게 막고 선 석고보드에 햇빛이 차단당한 채, 좁을 뿐 아니라 차갑고 암울한 분위기를 나눠가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권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독방들을 없애고, 그 자리에 공동의 공간을 만들며, 벽면을 투명 혹은 반투명으로 바꾸고, 소통을 위한 까페를 만들어 달라는 주장을 담은 글을 써서 당 내에서 서명을 돌렸다. 4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서명을 했다. 서명을 한 사람과 안한 사람. 거의 정확하게 정파로 갈렸다.

서명된 문서는 대표와 사무총장과, 정책위 의장에게 전달했다. 아무런 답변도 들을 수 없었다. 이 무렵 당 내에 노조가 만들어졌고, 노조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요구는 공문으로 전달되었으나, 우린 나중을 기약하는 무성의한 답변을 받아보았을 뿐이다.
대신 NL쪽 색깔을 대변하는 것으로 알려진 매체들, NL을 대변하는 당원게시판의 논객들에게서는 일제히, "정책연구원들, 웬 웰빙타령인가" 하는 비아냥들이 쏟아졌다.
결국 또, 까페 논쟁도 정파적인 싸움으로 읽혀, 의견은 이분되었으며, 아무 것도 실현되지 않았다. 삶은 정치이며 당 안에서 모든 사안은 정파적으로 해석되고 결정된다는 진리를 다시 입증한 셈이다.

단언컨대, 민주노동당사 안에 내가 구상했던 그 북까페가 들어서고, 당직자들이 그 안에서 음악을 듣고 잡지를 뒤적이고, 그림을 그리며, 업무영역과 무관하게 사적인 대화를 주고받으며 낄낄거릴 수 있게 되고 그것이 당 사람들의 우울하고 딱딱했던 감성을 말랑말랑하게 자극해 주는 순간, 당의 지지율은 뛰어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너, 아직도 거기 다녀?" 
[나의 민주노동당 잠입기⑤] 멋진 구상과 한심한 꼬락서니
 

연애와 직장이 닮아 있는 또 하나의 구석은, 한 가지에 반해 선택하게 되면 나머지 모두를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랑에 눈멀 때, 우린 그 사람의 한 가지를 사랑하면서 나머지 모든 것에 기꺼이 윤색과 도취의 작위를 범한다.
그리고 서서히 사랑의 환각에서 벗어나면서 아름답지만은 않은 진실을 직면할 때, 환멸을 내 손으로 보듬어 살로 채워내는 것은 사랑을 지속하는 유일한 방법이자, 내 최초의 선택에 대한 존중을 통해 스스로 성숙해지는 길이기도 하다.

난 민주노동당이 갖고 있는 저 황홀한 문화강령과 감히 아무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급진적인 정책 의제들의 그 발칙함을 보았을 뿐,다른 그 어떤 잡다한 현실에도 눈 두지 않고 기꺼이 이 세계에 발을 담궜다. 내가 생각하는 진귀한 가치를 오로지 민주노동당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조건에 대해서도 재고해 볼 수 없었다.

그의 비듬을 털어주고, 주름진 눈가에 입맞추며

그것은 희완이 자신의 생물학적 나이와 무관하게, 시퍼렇게 젊고 타협을 불허하는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사람인 것에 압도당해, 그가 가진 다른 그 무엇에 대해서도 한 점 고민 없이 그와 함께 삶의 질주에 나서게 되었던 것과 비슷하다.
옆에서 말하지 않으면 씻는 것도 옷 갈아 입는 것도 늘 잊고, 세상 모든 존재에 대해 정치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믿으며, 이러한 믿음을 옆 사람과 꼭 공유하고 싶어하는 진지함과 돌멩이 하나 놓치지 않고 세상사를 다 이해해야 하는 완벽주의로, 종종 사람을 지치게도 하는 그이지만, 기꺼이 그의 셔츠에 언제고 앉아 있는 비듬을 털어주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긴 식탁에서의 토론 사이, 핸드폰을 삽입시켜, 나만의 쉬어가는 방법을 마련해 가며, 그의 까칠한 손등과 주름진 눈가에 입맞춰가며 살고 있는 것처럼.

이 소화도 이해도 안 되는 정파 갈등의 늪에 빠져 있는 정당. 노조를 슬금슬금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고, 금년 들어서는 임금 체불도 대수롭지 않게 하면서 미안해 하지조차 않는, 참 기가 찬 소위 진보정당. 당직자로 하여금 심심찮게 "일하는 사람의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야"라는 푸념을 서슴없이 늘어놓게 만드는 나의 직장 민주노동당에 대해서도 난 기본적으로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가진 한 가지가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였기 때문에, 이젠 내가 그를 살찌우고 나의 새로움으로 당을 신선하게 만드는 데 설탕 한 스푼만큼 기여할 수 있다면, 난 이 곳에서 내 존재의 이유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당에서 일한 지 3년째 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내게 “아직 거기 다녀?” 라고 묻는다. 바깥사람들이 묻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당 안 사람들조차 종종, “왜 계속 다니는데?” 하고 허심탄회하게 물어온다. "아니, 그럼 당신은?" 하고 되물으면 “넌 좀 자유롭잖아”는 답변이 돌아온다.
물론, 머리도 몸도 자유롭다. 대학시절부터 운동하면서 십여 년을 비슷한 사람들과 저 멀리 나부끼는 희미한 희망의 불빛 같은 것을 바라보며, 현실의 부대낌을 견디며 살아온 많은 동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 긴 역사를 함께 해온 동지도 없고 따라서 배신할 대상도 없다.

다 아는데... 난 신문 보고 안다

때론 이 점이 당에서 일하는 데 핸디캡이라 느껴지기도 했다. 모두가 빤히 들여다보는 정황을 혼자만 못 읽고 신문 보고 나서야 이해하는 일들이 종종 발생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난감함을 굳이 극복할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그 정황이라는 것이 내 머릿 속을 단순하게 만들기 때문에, 좀 노력하면 알 수 있는 내막들에 대해서도 대충 귀 닫고 지낸 편이다.
비록 운동하며 박힌 군살은 없지만, 삐딱한 모난 돌로 세상을 관통해온 세월은 있기에, 또 다른 시선과 접근을 당에게 제공할 수 있다고 믿어 보고, 동종교배가 열성인자를 낳는 건 불멸의 법칙이라 되뇌이며, 완전한 자유의지로 난 여전히 민주노동당에 여전히 남아 있어야 할 이유를 발견한다.

첫번째의 지극히 실용적인 이유는, 민주노동당은 내가 만든 문화분야의 공약을 받아줄 유일한 정당이기 때문이다.
나는 문화가 교육처럼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이자 국가가 일정한 수준까지는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는 공공서비스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인간은 정신의 양식을 갖고 있고, 그것을 일궈내는 일은 그만큼 존재하는 일이 된다. 하나의 인간에게서 문화적 정체성을 소유한다는 것은 비로소 그가 정신적인 개별적 자아를 구축한다는 의미와 같다.

한 개인에게서 뿐 아니라 한 사회에게도 이 사실은 공통으로 적용되며 이 생각은 민주노동당 문화공약의 근간을 이룬다. 문화정책에 자본의 논리를 대입시켜, 마치 문화가 산업자원부의 문화섹션인양 취급하는 현 정부, 그보다 한술 더 떠서, 문화를 표방한 개발 정책에만 골몰하는 우파 정당의 문화정책과는 완전히 반대의 지향점을 지닌다, 민주노동당은.

둘째, 적어도 현재까지 민주노동당은 한국사회에서 진보적인 생각들을 담는 유일한 큰 그릇이다.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주장하고 녹색정치선언을 통해 유기농법과 대체에너지, 환경파괴를 저지하기 위한 정책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폭발 직전의 지구 위에 더 이상 성장이란 이름으로 토목공사가 남발하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를 제시한다.
현대판 노예제도 비정규직을 철폐해야 한다는 주장도 민주노동당만이 하고 있고, 미국의 명분없는 전쟁에 우리의 젊은이들을 내모는 파병에 반대하는 유일한 정당도 민주노동당이다. 사회양극화를 가속화시키고 경제주권, 문화주권을 송두리째 빼앗기에 할 한미자유무역협정을 결사적으로 막고자 하는 것도 오로지 민주노동당 뿐인 것이다.

그런데, 주장과 일상의 간극에 민주노동당의 허점이 있다. 민주노동당이 제시하는 미래사회에 대한 구상은 나무랄 데 없지만, 자기 자신 현재의 꼬락서니는 한심한 수준이다. '민중'의 삶을 불타는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때로는 '가열찬' 투쟁을 전개하고 있지만, 눈 앞에 있는 자신의 동료와 자기 자신의 삶을 보살필 줄 모른다.

민주노동당은 사람들의 가슴에 파편을 꽂는다

2007년 초에 만들어진 노조가 그 문제점을 지적하기 전까지, 당에서 임금은 예산집행 순위의 최하위에 있었다. 잔치를 벌일 넘쳐나는 풍성함이 없더라도, 투명하고 평등하며, 합리적이기만 해도 모두가 감사히 누릴 자세가 되어 있는 민주노동당에서, 대의를 향한 아름다운 원칙들은 당내의 일상으로 돌아오면, 산산이 파편이 되어 자취를 감추면서 사람들의 가슴에 그 파편을 꽂는다.
여자인 내가 1년 간 육아를 위해 휴직할 때에는 잠잠했던 사람들이, 다른 남자 동료가 육아휴직을 하려고 하자, 끊임없이 간접적인 압력을 행사하여, 그로 하여금 육아휴직을 실천하는 일을 거대한 운동을 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그 남자동료의 1년은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서 나오기도 했다.

다른 세상에 대한 실험이 우리 내부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은 명백하다. 실험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으면서 권력을 잡아 하루아침에 세상을 바꾼다는 거짓말은 나부터 믿을 수 없다. 실천하지 않는 만큼 우리의 미래는 더 멀리로 내달린다.
늘상 비어있는 독방들을 그래도 기어이 유지해야만 자신들의 권위가 선다고 생각하는 지도부가 있는 상황. 지도부들도 당 내에서 각자 다른 자기 역할을 맡은 동지일 뿐임을 망각하고 이들이 다른 당직자들보다 열 배쯤 넓은 공간을 차지해야 할 이유를 은근슬쩍 인정한다면, 어마어마한 관성의 무게와 자본주의의 선동에 사로잡힌 집단적 맹목의 상태를 극복해야 할, 대학평준화를, 비정규직 철폐를 어떻게 남들에게 설득해낼 수 있을까.

“잘난 놈들은 더 누릴 권리가 있다. 억울하면 일류대학 가고, 정규직이 되라.” 이 논리를 극복하기 위해선, 평등한 세상의 탄력을 체험하여 몸에 밴 자신감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하지 않을까.
 
 
눈 뒤집힌 나, 노조사무국장 되다 
[나의 민주노동당 잠입기⑥] "아름다움, 내 발길 향하는 곳"

행복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남에게 행복을 나눠줄 수 없고, 자유를 누려보지 않은 사람이 더 큰 자유를 다른 사람들에게 허락할 수 없다. 하물며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집단이 더 건강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주장을 세상은 얼마나 진실하게 들어줄 수 있을까.

우울증 앓는 사람들

민주노동당 당직자들은 1년에 한 번씩 건강검진을 받는다. 의사 당원들의 병원에 가서 소변검사부터 내시경까지 비교적 꼼꼼하게 받는 건강검진이다. 이 검사에는 정신건강에 대한 항목도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가벼운 우울증 증세에 대한 진단을 받는다. 육체건강에 대해서도 결과는 비슷하다.
종합적인 진단이 붉은색, 노란색, 녹색으로 나타나는데, 아주 건강하다는 뜻인 녹색을 받은 사람은 주변 당직자중 나 혼자 뿐이었다.

좌파정당으로서, 언제나 지는 싸움을 익숙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 세상 모든 사건들에 대해 가장 적나라하고 격렬한 시선으로, 부패한 주류언론을 뚫고 제 목소리를 내야 하는 고달픔, 거기에 가장 치명적으로, 하루하루 들려오고, 눈앞에 펼쳐지면서, 쓰린 가슴을 추스르게 만드는 당 내부의 모순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지내는 건 사실 내는 건 엄청난 자기관리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민주노동당이 갖는 이 자기모순은 나에게 또 하나의 떠나지 않을 이유를 부여한다. 민주노동당에게 “민중을 말하기 전에, 먼지 우리 꼬라지부터 살펴보자. 우리의 삶과 주장을 일치시키자” 라고 말하며 자기모순을 타파하게 하는데 앞장 설 소위 당내 개혁을 모색할 사람이 절실히 필요하다.
얼마 전, 난 민주노동당 당직자 노조의 사무국장으로 임명되었다. 내가 생각해도 점입가경이고 희대의 아이러니다.

내가 사무국장? 남한테 사기치는 것 같은 기분

아이를 가졌을 무렵, 한 친구가 “그처럼 판타지를 많이 품고 사는 네가 어떤 엄마가 될 수 있을지 상상할 수 없어”라는 문자를 보내온 적이 있다.
몽상가에다 이상주의자 심미주의자, 개인주의자. 냉정하고 치밀하며 꼼꼼해야할 노조 사무국장이 지녀야 할 덕목과는 정 반대의 것들을 줄줄이 자발적 특징으로 가지고 있는 나다.

4주 정도 지났지만, 아직도 새로운 직함으로 나를 소개할 때, 음절 하나하나를 똑바로 조심스럽게 발음하면서 천천히 말한다. 웃음이 나오려고도 하고, 꼭 남한테 사기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사실 여전히 한번도 걸쳐보지 않은 어색한 옷이어서 어떻게 여미는지도 잘 모르겠고, 계속 옷걸이에만 걸어놓고, '저게 지금 내꺼란 말이지' 하고 암시하는 중이다.

사연은 이렇다. 금년 상반기 들어서, 임금은 계속해서 체불되고, 이미 집행한 사업들에 대한 사업비 지급이 서너 달 째 동결되면서도 설명없이 막연히 사람을 기다리게만 하는 당을 보며, 난 당이 처한 자기모순에 급격히 눈을 떴다.
갑자기 부채가 18억으로 늘어났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예기치 않은 엉뚱한 사업들에는 목돈이 펑펑 들어가기도 했다. 이 상황에서 갑자기 늘어난 적자에 대한 명확한 원인 분석도, 투명한 내역도 공개 안하고 당직자들한테 세액공제 사업만이 대안이라고 윽박지르는 당 지도부는 한마디로 피식 비웃어주기에 딱 적합했다.
가난하다면 정직하고 평등하기라도 해야지 우리가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기는 법이다. 그런데 당의 태도는 그 먼 나라에 미뤄둔 '대의'를 위해 이 모든 것을 쓰레기통에 쳐넣고 있었다. 내 눈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내 눈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칙 없이 좌충우돌하는 당 지도부를 신나게 공격하며 실력 발휘를 해야 할 적기에 미온적으로 대응하는 노조 집행부를 들들 볶아대는 가장 극렬한 조합원의 한 사람이 나는 되어갔다. 정보통신과 지적재산권 담당 연구원인 노조위원장의 자리가 내 자리에서 두 발자국 앞에 있었던 정황도 한몫 했다. 지나다닐 때마다 벌침처럼 아프게 한마디씩 쏘아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심각한 얼굴로 내게 다가온 위원장이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사무국장 맡아줄래요” 하는 거다.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라는 말을 꺼낼 때, 나는 “이제 그만 좀 할래, 너무 아프거든”. 하는 말을 할 줄 알았다.
어쩌면 실제로 그는 두 가지를 다 원했는지도 모른다. 활활 타오르는 나의 공격 의지를 양분삼아, 그의 말대로 강성노조로 전환하고자 하는 뜻도 있었던 한편, 내가 집행부에 들어오고, 대응에 대한 고민을 함께 짊어지면 좀 덜 아프게 그를 찔러대지 않을까 하는.
마침 전임 사무국장이 개인적 사정으로 휴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문제제기한 사람이 총대 매는 게 당의 철칙이거든” 하면서, 이 해괴한 결정을 부추겼다. 그렇게 나는 노조전임자를 뽑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라는 단서를 달고, 사무국장이 되었다.

 마음 속 불씨 하나 의지해서 어둔 길에 나서다

가보지 않은 어둑컴컴한 길을 마음속에 있는 불씨 하나에 의지해서 더듬거리며 가는 기분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직함이 내게 당장 눈앞에 펼쳐 주는 일들은 평생을 해도 적응 안 될, 저 저주스러운 공문 따위를 만드는 일이다. 뜻은 눈앞에 있지만 과정을 고달프고 길은 멀다.
그러나 한편으론 세상에 대한 가득한 불만을 옆 사람 하고만 토로하며 씩씩대다가, 민주노동당에 발을 딛고, 세상을 향해 새로운 대안들을 날려 보낼 수 있게 된 일이 기뻤던 것처럼, 소위 진보정당이 명쾌하게 뛰어넘지 못한 자기모순의 덫에 대해 냉소와 자학을 일삼다가, 여기에 정면으로 대응하며 “똑바로 하시지” 하고 잽을 날릴 수 있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 즐겁기도 하다. 그러나 그 뿐이다. 멍석을 펴주니, 나 역시 잽을 날리기는 커녕, 제 정신도 못차리겠다.

노조의 상급단체인 공공연맹의 조직실장을 만나러 가는 자리에, 오페라에 가는 사람처럼 화사하고 여성스런 옷차림을 하고 나서자, 희완이 “그 사람이 너의 옷차림이 제시해주는 통념을 극복하고 너를 다시 보는데 1년이 걸릴지, 2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야. 세상 사람들은 생각보다 명석하지 않거든”. 하며 온건한 어조로 나를 만류했다.
난 오페라와 민주노동당 노조, 유함과 강함, 여성적 화려함과 남성적 공격성을 병렬하는 정반합의 논리로 스스로에게 합을 향해가는 주문을 외고 싶었고, 극단의 대비가 주는 상상력을 공중에 날리고 싶었으나, 이번엔 그의 조언을 따랐다. 생각보다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아름다움이 구원할 것이다

모순의 틀을 깨기 위해서 계속해서 또 다른 틀을 만들어 보지만, 새로운 틀을 만드는 순간 조직이 갖는 고질적인 병폐는 하나 둘씩 우리의 발목을 잡고,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또 다른 내부의 싸움은 시작된다. 그러면서 태초의 순결한 의지는 내부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에너지로 소진되어 버린다.
그 속에서 개인의 번잡한 욕망 따위야 꽃피어날 틈도 없이 사회적 대의란 무거운 흙더미 속에 묻혀버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흙더미를 뚫고 피어나는 꽃도 있고 풀잎도 있다. 난 그 꽃들에 물을 주고, 눈을 맞추며, 종종 노닥거릴 뿐이다. 결국 세상은 아름다움이 구원할 것이고, 나의 발길은 오로지 날 자극하는 신선한 향기를 내뿜는 곳을 향해서만 움직일 터이다. <끝>
 
www.redian.org
bastille@naver.com 목수정

Posted by 없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