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해당되는 글 13건

  1. 2014.12.21 해야 하는 질문
  2. 2010.04.12 고종석이 기억하는 유럽
  3. 2009.06.17 [펌]글쓰기를 잘 하고 싶은 당신에게

눈먼 자들의 국가

김애란 김행숙 김연수 박민규 진은영 황정은 배명훈 황종연 김홍중 전규찬 김서영 홍철기, 문학동네, 2014


문학동네 가을, 겨울호에 실렸던 글을 묶은 거란다 

<우리는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가>를 두고 각자가 글을 쓴 거다


작가의 글도, 연구자의 글도 섞여 있는데 읽고 전율하게 되는 건 작가의 글이다 

그래서, 

작가는 힘이 세다 


지금 당신을 가장 절망케 하는 건 무엇입니까

... 

이창근씨 아내인 이자영씨 차례가 왔을 때, 그녀는 누구도 건너본 적 없는 시절로 혼자 돌아가듯 담담하게 말했다 

저를 가장 절망하게 만든 건, 더 노력해야 된다는 말이었어요


김애란,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바다는 잔잔했다 

그래서 더, 잔혹했다 

...

국민이 국가를 지켜야 하는 의무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국가가 국민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저버렸을 때 

국가는 어떤 처벌을 받아야 하는 걸까?


당신은 의무를 다해왔고 

한 푼 빠짐없이 세금을 납부했다


박민규, 눈먼 자들의 국가


시혜의 언어... 베푸는 사람은 자비롭게, 베풂을 받는 사람은 고분고분하게 감사하며

...

시혜의 시소 한쪽 편에 올라타는 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활동의 가능성이라는 환상이다

... 

그녀는 더  이상 불쌍한 후보를 돕는 거룩한 선거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선거가 자신이 유일하게 적극적일 수 있는 활동이라는 표상으로부터 떨어져나왔기 때문이다 


진은영,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돌아가다니 어디로

일상으로

...

어떤 일상인가, 일상이던 것이 영영 사라져버린 일상, 사라진 것이 있는데도 내내 이어지고 이어지는, 참으로 이상한 일상, 도와달라고 무릎을 꿇고 우는 정치인들이 있는 일상, 그들이 뻔뻔한 의도로 세월을 은폐하고 모욕하는 것을 보고 들어야 하는 일상, 진상을 규명하는 데 당연히 필요한 것들이 마련되지 않는 일상, 거리로 나와야 하는 일상, 거리에서 굶는 아내를 지켜봐야 하는 일상,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과 같은 마음으로 초코바, 초코바, 같은 것을 자신들에게 내던지는 사람들이 있는 일상,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아니 그보다 내가 좀 살아야겠으니 이제는 그만 입을 다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일상, 밤이 돌아올 때마다 그처럼 어두운 배에 갇힌 아이를 건져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는 일상, 4월 16일 컴컴한 팽목항에서 제발 내 딸을 저 배에서 좀 꺼내달라고 외치던 때의 통증에 습격당하곤 하는 일상,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고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어, 거듭, 거듭, 습격당하는 일상


황정은, 가까스로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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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기억
고종석, 개마고원, 2008

몇 안 되는, 질리지 않는, 좋아하는 글쓰기 스타일
유명한 스타일리스트니까 유명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걸 인정한다는 점에서 마음에 든다 

스페인과 프랑스, 독일 등 유럽도시와 북아프리카, 미국도시들에 대한 짧은 방문과 방문에서 느껴지는 도시에 대한 인상을 서술한다
개인적으로는 스페인에 가 보고 싶은 열망을 마구마구 불러일으키는
미국에 대한 얘기에서는 생각이 겹쳐지는 부분도 있다

이 양반은, 스스로 인정하듯이, 유럽문화에 대한 지적 허영과 동경 같은 걸 가지고 있다 
굳이 서술하지 않아도 책 내용 전반에 면면히 흘러나오는 
그걸 스스럼 없이 고백한다는 것이 속물을 벗어나는 지점이고 
동시에 역사, 과거에 대한 쓸쓸함이 적지 않게 배어있는 듯하다 
예컨대 스페인의 탕헤르와 그라나다에 대한 서술에서 한때 세계를 지배하고 과학기술을 전파했던 이슬람의 역사와 흔적을 설명하는 가운데에서 드러나는 

언어학을 공부한 사람 답게 어원을 중심으로 말의 생성과 소멸을 차분히 서술하는 대목도 흥미롭다 
세상의 모든 말들에 역사가 배어있다는 사실은 흥미로우니까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읽은 모든, 고종석 책의 단점을 그대로 이어받아, 
하나하나의 글들이 너무 짧다 
여운을 남기려는 의도일 수도 있으나, 뭔가 생각이 유장하게 가지를 치다가 뚝 끊기는 느낌이다
총체적으로 책 전체가 하나의 이미지와 느낌을 전달해 주는? 단편으로만 읽기에는 아까워서 그렇다
Posted by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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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 만남]글쓰기를 잘하고픈 당신에게, “실질적으로 정직하라” 
이만교,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

김이준수 jslyd012@gmail.com


http://www.yes24.com/chyes/Chyesview.aspx?title=003004&cont=3540&y_contents=채널예스&y_channel=오픈캐스트&y_area=104

지금, ‘글쓰기’는 하나의 트렌드이자 매혹이다. 서점만 둘러봐도, 글쓰기와 관련된 책은 차고 넘친다. 글을 쓰고 싶어 하고,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내고자 하는 열망도 커졌다. 과거에 글쓰기는 전업 작가 등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인식되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디지털카메라가 사진을 좀더 대중화시켰듯, 블로그 등 디지털 미디어의 확산은 글쓰기를 장삼이사의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글쓰기 바람은 다양한 분야로 파생되고 있다. 블로그(blog)와 책(book)의 합성어인 ‘블룩(blook)’은 이미 출판계의 트렌드가 되었다. 글쓰기를 통한 심리 치료를 포함하는 ‘비블리오테라피(bibliotherapy)’가 있고, 각종 문화센터 등을 통한 글쓰기 강좌도 늘어나는 추세다. 글쓰기는 뇌의 노화를 늦추고 두뇌를 개발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글쓰기는 이제 특정 직업군의 전유물이 아니다.

한편으로,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은 극심한 고통이 되기도 한다. 고인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유언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그렇다. 한 사람의 생을 지탱하거나 살아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한 요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당연히 고민도 따른다. 어떻게 글쓰기를 할 것인가. 좋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왕 하는 글쓰기, 잘하고 싶은 열망이야 누구나 가질 법하지 않은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글쓰기지만, 글을 잘 쓰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프란츠 카프카와 같은 대문호도 늘 걱정을 했다. 원하는 수준의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 때문에. 그는 『변신』을 탈고한 뒤에도 시간이 없었다며 변명하고 스스로 책을 혹평했다. 대문호도 글쓰기를 걱정했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필부필부야 오죽하겠나.

글쓰기를 걱정하고, 잘하고 싶은 당신을 위해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작가 이만교가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이만교 지음/그린비 펴냄)를 내놨다. 그는 지난 2006년부터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글쓰기를 강의해 왔다. 이 책은 이 시간의 축적물이다. 그리고 지난 6일 서울 신촌의 아트레온 토즈에서 책 출간 기념으로 ‘저자 이만교와 함께하는 글쓰기 워크숍’을 열었다.

그는 글쓰기 강좌나 이 책을 통해, 기술이나 기교로서의 글쓰기가 아닌 삶의 태도로서의 글쓰기를 강조했다. 본질적인 자기 창조의 과정을 동반하는 글쓰기. 곧, 자신의 삶 전체를 살피고 생의 진심을 담은 글쓰기. 이날의 워크숍도 그런 맥락에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아래는 좋은 글쓰기를, 실질적 정직을 담보로 한 글을 짓고 싶은 당신을 위한, 이날의 기록이다.

들어가기에 앞서, 글쓰기 수업을 통해 재차 확인한 그의 글쓰기 지론을 살펴보자. “글쓰기 수업이 단지 등단을 위한 과정이나 절차일 수만은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재삼 확인했다. 꼼꼼히 읽어 보면, 잘 쓴 글이든 못 쓴 글이든, 쓴 사람 특유의 감각과 사유, 상처나 희망 등이 언어습관을 통해 총체적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작가 지망생의 습작 과정 그 이상을 의미한다. 글쓰기 훈련은, 감각하는 방법, 사유하는 방법, 상상하는 방법, 그리고 실천하는 방법까지도 스스로 다시금 점검하고 익혀 나가는, 무척이나 섬세하면서도 동시에 중요하고도 원대한 여정일 수밖에 없다.”(p.6)

이만교, 글쓰기 강좌를 통해 새로운 배움을 얻다

이만교는 우선 책의 제작 과정에 대한 이야기부터 풀어나갔다. 2000년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이른바 ‘뜬’ 작가가 된 그는, 2004년까지 정신없이 보냈다. 네 권의 책을 출간하고, 박사 논문, 신문 기고, 라디오 진행에 영화 칼럼까지. 그러다보니 에너지는 고갈되었고, 모든 것을 그만두고 본업인 집필 작업을 하기 위해 월악산으로 떠났다.

그러나 정작 글을 쓰려고 하면 몸이 아팠고 비염까지 걸렸다. 1년 이상 글을 쓰지 못하는 참혹한 시간이 흘렀고, 어느 날에는 운동을 하다가 고꾸라지기도 했다. 불교 공부를 위해 템플스테이를 하면서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고, 그렇게 월악산에서 3년여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 시간을 인생에서 가장 큰 공부를 한 기회였다고 회고했다. 그런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수유+너머’에서 글쓰기 강좌를 제안했고, 이것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글쓰기 강좌의 시작이었고, 3년여를 부지런히 강연을 한 결과, 이렇게 책까지 펴내게 되었다.

글쓰기 강좌는 그에게도 배움의 과정이었다. “글쓰기에는 성장 과정, 인식(사유) 구조, 욕망 실현 방법 등이 다 걸려 있다. 글쓰기를 통해 다른 사람을 만나면 깊이 있게 만나게 된다. 단편 소설은, 상담으로 치면 1개월에 한 번씩 갔을 때 3개월의 상담 효과가 있다. 그만한 분량이 나온다. 글쓰기 강좌를 진행하면서, 사람들에겐 나름 사연이 있고, 심리적 왜곡이 있으며 정상인이 하나도 없음도 확인했다. (웃음) 사람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인간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이 글쓰기 교본은 그에게 소중한 책이 되었다. 그가 아는 동생은 “소설보다 더 잘 썼다”는 말을 했다. “소설이냐, 글쓰기 책이냐는 상관없다. 나는 이것을 곁다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미 있는 책이다. 앞으로의 목표는 (글쓰기의) ‘기초서’라고 할 만큼의 책을 내는 것이다.” 이만교에게 글쓰기는, 이제 필생의 과업이 되었다. 행여 앞으로 그의 소설을 만날 수 없다손, 슬퍼하지는 마시게. 그는 더 크고 넓은 글쓰기의 전도사가 됐으니. 글쓰기를 통해 만날 수 있는 길이 있을 터이니. 그의 배움을 나눌 수 있다면,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실질적 정직. 글쓰기의 가장 기본

이만교가 글쓰기에서 가장 강조한 대목은 ‘실질적 정직’이다. “‘실질적 정직’이란, 내 안의 생각에 정직해지라는 말이다. 옆집 아가씨가 샤워를 하는데, 훔쳐보고 싶으면 훔쳐봐라. 그리곤 그 감정을, 죄의식까지도 솔직하게 적어라. 계속 실질적으로 정직해야 한다. 우리 욕망은 억압하면 반드시 귀환한다. 실질적 정직을 추구하면 글쓰기에서도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실질적 정직은 그렇게 내 안의 감각과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사물을 정밀하고 섬세하게 보는 게 기본이다. 책을 볼 때도, 사람들은 자신에게 감응을 준 실질적인 반응을 놓치고 굉장히 거칠게 바라보고 사유해서 오류를 범하는 경향이 있다. 어느 출판사에서 나왔다거나, 그게 장르가 어쨌다거나, 작가의 등단 나이 등을 따지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거칠게 사유하지 말고 정밀하게 사유해야 한다.”

그렇다면 정밀하게 사유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는 일반적으로 생의 전체나 일반적인 통념·편견으로 사유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우선 말한다. 가령 장남이나 출신 지역 등 검증되지 않은 편견에 휘둘려 사유하는 것. 그 다음으로 3~4년 등 시간의 단위로 묶어서 사유하는 것 또한 거친 사유라고 지적한다.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사유하는 게 좋다. 그런 면에서 일기를 쓰는 것이 좋다. 하루 단위로 사유할 수 있으니까. 자기 전체를 놓고 사유하지 말고, 지금 즉시 내가 어땠는지를 사유해야 한다. 더 정밀하게는 하나의 사건에도 여러 이유나 감정이 섞여 있으니까 그것을 조각조각 사유하는 것이 좋다. 시인이 감각적으로 예민하다지만, 감각적으로 예민한 모든 사람이 시인이다. 모든 사람은 감각적으로 예민해야 한다.”

그렇다. 인간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다. 한 가지 사유를 할 때도 샛길로 빠지는 것은 예사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념들이 곳곳으로 가지를 뻗치게 마련 아닌가. 생각해보라.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때도, 우리는 저 멀리 다른 세계로까지 사유의 촉수를 뻗친다. “무념무상을 하려고 명상을 11~12시간 해도 안 되더라. (웃음) 그 망상 덩어리를 적었다. 정리해 보니 내 욕망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지하철을 탈 때도 온갖 망상을 다 한다. 그것이 실질적 욕망이다.” 그는 새소리에서 시작한 명상이 딸, 전원주택, 1억, 베스트셀러, 로또, 한국 사회의 병폐, 범죄자 욕까지 꼬리를 무는 망상의 예를 들었다.

“그렇게 우리의 평소 사유들은 아무 근거도 없고, 생산력이 없다. 이걸 해체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구체적으로. 그게 돈이면 돈으로, 여자면 여자로. 하루, 사건 단위로 사유하고 혼재된 감각을 사유하고 미망의 흐름까지도 보면, 사유 체계를 다른 방식으로 이끌 수 있다. 실질적 정직을 통해 자신을 면밀하게 보는 작업, 그게 필요하다. 도덕적 정직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억압할 수 있다. 글쓰기에는 라이프 스타일이나 욕망 구조가 나와 있다. 자기 삶을 돌아보는 키워드가 실질적 정직이다. 거친 사유는 틀린 것이고, 정직한 것이 아니다.”

실전 1. ‘언어+생명’과 ‘언어+사건’

인간에게는 두 개의 중요한 요소가 있단다. 언어와 생명체. “우리는 안경, 운동화, 카드, 컴퓨터 등 늘 기계와 접속해 살고 있다. 우리의 의식이나 마음속에도 이식된 기계가 있다. 그게 언어다. 문법 구조를 가진 시스템이자, 넓은 의미의 기계다. 사유 방법 시스템이랄까. 내 마음의 흐름을 컨트롤하는 방식으로, 언어를 통해 우리는 사유한다. 우리는 그래서 ‘언어+생명 사이보그’다. 다른 동물과 다른, 지금의 인간을 만든 것이 언어다. 언어는 또 인간 문명이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시스템이다. 인간은 언어로 존재하는데, 모든 사건을 사건 자체가 아닌 언어로 본다. 즉, ‘언어화된 사건’이다.”

아래의 보기를 보자.

보기)
ⓐ 마음을 바꿔 먹어라.
ⓑ 우리가 직면한 중요한 문제들은, 그 문제들이 발생한 때 갖고 있던 사고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이에 대한 그의 설명을 듣자. “ⓐ, ⓑ는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장이다. 다만 ⓐ는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표현이다. ⓑ는 의미상으로만 보면 ⓐ와 같지만, 상투적인 문장이 아니어서 새롭고 명료한 표현으로 다가온다. 그렇다 보니 ⓑ가 한결 더 정확하고도 강렬한 메시지로 전달될 여지가 크다. 이처럼 같은 사건이나 같은 의미의 문장을 얘기해도, 어떤 언어로 얘기하느냐에 따라 다른 강도와 충격을 준다. 언어는 희한하고 놀라운 힘을 갖고 있다. 독서할 때 좋은 문장은 공들여서 꼼꼼히 읽어야 한다. 모든 사건은 언어화된 사건으로 인식하는데,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이건 글쓰기 이전에 삶의 문제다.”

또 다른 보기.

보기)
ⓐ 홍대 앞의 프린스 카페에서 나는 미숙을 한 시간이나 기다렸지만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 홍대 앞의 프린스 카페에서 미숙에게 바람 맞았다(혹은 차였다).
ⓒ 미숙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의 첫사랑은 그렇게 참담한 작별을 고했다. 그날 이후 나의 순수했던 청춘도 내 인생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다시 설명. “이들 보기는 사건이 가진 풍요로운 의미나 그 다음 삶에 대한 힌트를 주지 못한다. ⓐ는 기계적인 사실 전달에 그치고, 여자친구를 기다리는 애절한 심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는 비속한 인식을 드러낸다. ⓒ는 감성적인데 거친 문장으로 미화한 자기 기만적 글이다. 비속어를 자주 쓰면 자기 삶도 비속해진다. 요즘 좋거나 나쁘거나 놀라는 일 모두 ‘대박이다’ 혹은 ‘빠밤~’이라는 말을 쓰는데, 일상에선 좋다. 그러나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진심을 펼치기엔 부족하다. 거친 일상적 상식에 묶이면 자기가 경험한 것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지점을 놓칠 수 있다.”

이어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의 일부를 보여준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같은 내용이라도 ⓐ, ⓑ, ⓒ보다 좋은 예. “다소 감상적이긴 해도, 화자가 실질적으로 느낀 정서를 그대로 표현하는 실질 언어를 사용한 좋은 예입니다.”

실전 2. 다양한 잠재성으로서의 ‘언어+사건’

글쓰기를 위한 또 하나의 팁. ‘감각을 깨우라’. “인간은 감각 기관을 깨우면 엄청난 일이 가능한, 풍요로운 존재다. 인간에게는 무수한 잠재성이 안에서 들끓고 있다. 이면적 진실까지 민감하게 느끼는 것이 가능하면, 삶이 풍요로워진다.”

초코파이를 둘러싼 다음의 보기들을 살펴보자.

보기)
ⓐ 초코파이는 오리온 초코파이가 제일 맛있어.
ⓑ 군대 있을 때 초코파이 정말 많이 먹었는데.
ⓒ 러시아에서 요즘 초코파이가 불티나게 팔린대.
ⓓ 초코파이엔 초콜릿이 없대. 대신 화학 처리된 유지가 들어있대.

“사람들 반응이 ⓐ~ⓓ처럼 제각각인 것은 그들이 초코파이에 대해 갖고 있는 정보와 관심의 초점이 달라서다. 늘 다양함을 인식해야 한다. 언어로 표현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한 문장 한 문장 다양한 표현이 있고, 그 표현마다 뉘앙스가 다르다. 하나의 사건을 놓고도 무한한 변형 문법이 가능하다. 인지 감각을 섬세하고 풍요롭게 하면서, 뭐가 나를 즐겁게 하고 고양시키는지 안테나를 세우고 있어야 한다.”

감각 기관을 열어놓고 촉수를 세운 뒤에 필요한 것은 언어다. 물론, 그 언어도 내 안의 정직한 언어라야 할 테다. “언어 선택만 잘하면, 엄청 무섭거나 슬픈 사건도 새로운 사건으로 만들 수 있다. 하나의 사실조차 매우 다양한 서술이 가능하다. 양자 역학에서 관찰자 위치에 의해 입자의 실체가 얼마든지 다르게 나타나듯, 화자가 문장을 서술하는 방식에 따라 사건과 의미는 얼마든지 다르게 나타난다. 언어는 한 구절 한 구절 민감하고 삶에 밀접해 있다. 글쓰기란 사물과 세상을 감지하고, 그중 어떤 관심 사항에 언어로 초점을 맞추는 일이다.”

고로, 일상어 즉, 통속어나 상투구를 그대로 쓰면 그 글쓰기는 거칠게 다가오고, 반복하면 글쓰기는 엉망이 된다. 주어를 반복하거나 간투사(‘글쎄’ 등)를 자주 쓰는 것은 비경제적인 문장이 되고, 의성어·의태어 혹은 비속어를 쓰는 것보다 정확하게 언어를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

버려야 할 리얼리티와 찾아야 할 리얼리티

이만교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지점은 ‘리얼리티’를 다루는 문제. 일상적이고 모범적인 리얼리티는 버려라! 개연적이고 역동적 리얼리티를 찾아라. “일상에서는 일상 언어가 20퍼센트의 의미만 담보해도 소통이 가능하다. 그러나 글쓰기는 그렇지 않다. 일상어에 오염돼 있어서 글쓰기가 제대로 되지 않기도 하는데,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상어를 쓰지 말아야 한다. 일상적 리얼리티를 벗어나 개연적 리얼리티를 찾아야 한다.”

정리하자면, “글쓰기는 일상적 리얼리티를 벗어나는 일이다. 동시에 개연적 리얼리티를 확보해야 한다.” 개연성을 확보한 글쓰기가 읽는 사람의 호응을 얻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모범적 리얼리티도 감흥이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역동적 리얼리티. 역동적 리얼리티는 역설과 아이러니를 품는다. 이는 곧 세심한 관찰력에서 온다. 불경이나 성경 등의 경전에 이 같은 역설이 많다.

“역동적 리얼리티까지 가면 글의 힘이 세어진다. 모든 존재는 다발성이 있고, 어마어마한 잠재성이 있다. 인간은 결코 변하지 않는 지점이 있지만, 어떤 지점은 점층적으로 변화한다. 어떤 것은 직선으로 쭉 간다. 어떤 것은 생겨났다 죽었다, 나타났다 죽었다 한다. 여러 층위가 다양한 방식으로 변한다. 내가 공부하는 만큼 달라지고, 그것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언어 사용도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깥에 핑계대지 마라. 자신이 열어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쓰기. 허투루 생각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온몸으로, 삶으로 밀어붙여야 가능한 일이다. 그저 컴퓨터 앞에 앉았다고, 자판을 두들긴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글쓰기는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실질적 정직’이 글과 합일될 수만 있다면. “글쓰기는 인류가 만들어낸 소중한 유산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어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걸 빼놓고 얘기해선 안 된다. 이 공부는 공평하다. 책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마음을 열고, 다른 이와 치열하게 나누고, 잘못된 부분 인정하고, 새로운 창의성으로 접근하면 된다. (글쓰기는) 온몸으로 헤매는 수밖에 없다. 온갖 헤맴 속에서 우발적으로 나온다.”

또 하나의 팁을 더하자면, 줄거리로 사유하지 않기. “인생에서나 글쓰기에서나 줄거리 중심으로 사유하지 말자. 살면서 자신의 서사를 미리 만들지 말아야 하듯, 글쓰기에서 전체 줄거리부터 짜놓지 말자. 줄거리로 사유하면 모든 명작들조차 B급 잡지에서나 다룰 줄거리로 전락한다. 줄거리를 이루는 구체적인 사건, 인물들의 성격과 고민 등에 집중해야 한다. 정서로 사유해야 한다. 구체적이고 정서적인 감각을 가동해야 한다. 갈등이나 사건을 통해 줄거리는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다시 글쓰기다. 한 작가는 “이도저도 다른 재능이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끝물이 글 쓰는 직업”이라고 농(?)을 던지기도 했지만, 글쓰기는 재능이 아닌, 온전히 자신의 몸으로 세계를 향해 밀어붙이는 작업이자 태도가 아닐까. 소설가 김훈은 언젠가, 밥벌이뿐 아니라, ‘글쓰기의 지겨움’을 털어놓으면서도 “글은 몸속의 리듬을 언어로 표현해 내는 악보”라고 말했다. 온몸으로 헤맨다는 말은, 그래서 사실이다.

당신이 하는 일부터 세상 모든 것이 나름의 가치를 나름의 형식에 담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최종적 가치를 획득하는 건 문자의 세계, 그러니까 그것에 대한 글쓰기가 아닐까. 자신이 속한 세계를 좀더 드러내거나 표현하고, 혹은 영속적으로 보전하기 위한 모든 인간의 노력은 글쓰기로 귀결되곤 하니까.

아, 사실 딴 말은 필요 없다고 본다. 나는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에 나온 이 말을 아직 글쓰기의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다. “글쓰기의 첫 번째 열쇠는 쓰는 것이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표현의 자유가 끙끙 앓고 있는 하수상한 시절이지만, 그래도 써라. 거기에 당신의 실질적 정직을 꾹꾹 눌러 담아서. 우리는 그렇게, 당신을 감탄하고 싶다. 그렇게 당신이 내리면, 우리는 우산도 없이 당신을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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