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writing'에 해당되는 글 21건

  1. 2008.08.20 글 잘 쓰는 법 정민 표정훈
  2. 2008.07.16 온달아빠의 돈불리기
  3. 2008.05.23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2

정민 교수가 귀띔한 글 잘 쓰는 법

형식이 다를 뿐 글의 목표는 모두 같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그리고 깔끔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글쓰기는 본질적으로 통한다. 그렇다면, 글쓰기의 달인으로 꼽히는 정 교수가 생각하는 글 잘 쓰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스승 이종은 교수와 얽힌 에피소드를 먼저 들려주었다. 오래전, 정 교수가 한 한시를 번역할 때 이야기였다. 空山木落雨○○ 정 교수는 이렇게 번역했다. "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이종은 교수는 정 교수에게 대뜸 "야 사내자식이 왜 이렇게 말이 많아?"라고 면박부터 줬다. 남은 문장은 "빈 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
정 교수는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불필요한 것들만 줄여도 글이 달라진다고 강조했다. 그 역시 제자에게 글쓰기 조언을 할 때 "글에서 부사와 형용사를 30% 정도만 줄여보라"고 늘 말한다. 글쓰기는 전달력이 중요한데, 이 전달력은 문장을 줄일수록 늘어난다는 점이 그의 글쓰기 지론이자 글 잘 쓴다는 말을 듣는 비결이다.

종결어미: 이다는 잽, 것이다는 스트레이트: 잽이 기본, 스트레이트는 결정타. 그런데 것이다 자주 쓰면 짜증나는 글. 있다는 긴장감이 없어지는 약점.
김흥호 선생의 책 "생각 없는 생각" : 힘이 넘치는 문체. 있다와 것이다 쓰지 않음. 콤마가 들어가지도 않는데 강한 힘.


표정훈이 말하는 글을 잘 쓰게 되는 법

표씨의 강점은 폭넓은 주제와 다양한 성격의 글을 빠른 시간 안에 쓸 수 있는 힘이다. 이런 힘을 갖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 표씨는 뜻밖에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던 소설 덕분"이라고 말한다. 끼낑대며 1500매에 이르는 글을 써 본 것이 그에게 자신감을 가져다준 것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혼자서 이야기를 써본 덕분에 호흡이 길거나 분량이 많거나 주제가 바뀌어도 두려움을 덜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첫번째 실패는 그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던 셈이다.
그래서 그는 글 잘 쓰는 법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소설이든 아니든 1천매짜리 원고를 책 쓰는 심정으로 먼저 써보라"고 권한다. 원고지 1천매는 300쪽 안팎의 책 한권 분량이다. 책 한 권을 써보는 첫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런 경험의 유무는 글을 쓰는데 있어 하늘과 땅의 차이가 된다.

+구본준, 한국의 글쟁이들, 2008, 한겨레출판
+임의로 잘라낸 문장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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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에 목숨 걸지 말라
부동산값 급등으로 가장 재미본 집단은 금융회사들…무리하면 총이자가 원금에 가까워질 수도

“두 분 명의의 부동산이 있나 보죠?”
남편 이기용(36·가명)씨와 부인이 각자 청약예금과 청약부금 통장을 갖고 있고, 무주택자만 가입할 수 있는 청약저축 통장이 없어서 물어본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이씨 부부는 현재 서울에서 1억4천만원짜리 전세를 살고 있는데, 4년 내로 4억원쯤 되는 아파트를 마련하고 싶어한다. 이씨는 4년 전에 300만원짜리 청약예금에 가입했다. 부인 역시 비슷한 시기에 청약부금에 월 10만원씩 붓다가 최근에 불입을 중지했고 잔금은 450만원이다.
결혼 뒤 부인은 이씨가 청약예금을 해약하고 청약저축에 가입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4년씩이나 유지한 통장을 해약하는 게 아까워 은행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은행 직원은 1순위이니 그냥 유지하라고 말했다. 오히려 더 큰 평수가 가능한 600만원으로 증액하는 것도 고려해보라고 했다.
상품 자체로만 본다면 은행 직원 말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건 이씨에게도 맞고 다른 사람에게도 맞는 말이다. 그렇게 누구에게나 맞는 답을 찾자는 게 아니라, 이씨의 구체적인 상황에 가장 알맞은 답을 찾자는 것이다. 은행 직원은 투자가치를 생각해 그렇게 대답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이씨 가정에는 국민주택 규모의 주택이 우선 필요하다. 그리고 부인도 청약통장이 있으므로 본인은 청약저축으로 전환해 주택공사나 지자체가 공급하는 국민주택을 청약하고 부인이 민간 건설 국민주택을 청약하는 게 유리하다. 4년 뒤를 목표로 하므로 시간은 충분하다. 또한 자금 계획 면에서도 가능한 자금이 적게 드는 아파트를 구입하는 게 좋다. 이후 발생할 투자가치를 위해 무리한 대출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금 계획을 보자. 이씨가 4년 뒤에 4억원대 아파트에 청약했다고 하자. 지금 전세가가 1억4천만원이니까 차액은 2억6천만원이다. 저축 여력의 80% 이상인 200만원씩을 매월 연 8% 수익률로 투자하면 4년 뒤에 약 1억1천만원을 모은다. 그래도 1억5천만원이나 모자란다. 모자라는 돈을 연 6% 이자율로 3년 거치 20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대출받는다고 치자. 이씨가 내야 할 총이자는 무려 1억1600만원이 넘는다. 원금에 가까운 금액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 돈을 대출해주는 금융사는 아주 쉽게 이자수입을 챙긴다. 은행으로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집을 사면서 최대한 많이 대출해가기를 바란다. 은행 직원 역시 자기가 일하는 은행의 논리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동화된다.
물론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민영 개발 아파트에 청약하는 것이 더 많은 시세차익을 얻을 수 있다.’ ‘시세차익이 대출이자를 감당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지난 몇 년 동안 부동산값이 많이 올랐다. 대출을 많이 받아 투자 목적으로 아파트를 산 사람들도 많았다. 부채도 자산이라며 너도나도 수익률 경쟁에 나섰다. 그래서 정말 각 가정들이 재산을 더 불렸는지를 조사해봤다.
지난해 재무설계 전문업체인 포도에셋에서 재무 상담을 받은 36∼45살 고객들을 부채가 500만원 이하인 고객과 1억원 이상인 고객으로 분류해봤다. 가구당 월평균 소득은 각각 474만원과 487만원으로 큰 차이가 없다. 자녀 수도 1.80명과 1.85명으로 비슷하다. 부동산 자산은 부채가 1억원 이상인 가구(3억9435만원)가 부채가 거의 없는 가정(1억7869만원)에 비해 두 배 이상 많다. 그런데 자산에서 부채를 뺀 순자산은 반대로 부채가 거의 없는 가정(2억6439만원)이 부채가 1억원 이상인 가구(2억4466만원)보다 더 많다.
부채가 1억원 이상인 가정의 자산(부동산자산+금융자산) 비중을 보면, 부동산 자산이 전체의 92.5%로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다. 또한 그 부동산 자산의 반 가까운 46%(1억8181만원)가 부채다. 그 빚을 갚기 위한 원리금 상환액이 월 114만원으로 소득의 23%나 된다. 이렇게 부채 상환 부담이 크니 당연히 저축액(월 51만원)은 소득의 10%를 조금 넘을 뿐이다. 반면 부채가 500만원 이하인 가정은 저축액이 월 159만원으로 소득의 33%가 넘는다.
결국 부채가 없는 가정이 많은 가정에 견줘 월 70만원 정도씩 저축을 더 하고, 대출 상환으로 새는 돈도 극히 적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부동산값 급등으로 가장 확실하게 수익을 남긴 집단은 대출 금융회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너도나도 앞다퉈 부동산 담보대출 경쟁에 나섰던 것이고, 그 결과 이제 한국도 부동산 거품이 꺼질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경제보고서가 나오고 있다. 이런 대출에 따른 손실과 큰 자금이 묶이는 위험을 감안한다면, 가능한 한 대출을 적게 받도록 평수도 다소 적은 것으로 공공분양 아파트에 청약하는 게 바람직하다.


장마보험? 너 자신을 알라
내년 결혼이 목표여서 단기자금이 필요한 김씨, 고액 장마보험 상품을 즉흥적으로 구매하는 실책을…

“내년에 결혼하는 게 목표입니다.” 직장생활 5년째인 김상철(33·가명)씨에게 가장 큰 재무목표는 결혼이다. 아직 사귀는 사람은 없지만 늦출 수는 없다고 한다. 재무 관점에서 보면 결혼자금과 집 마련계획이 관건이다. 특히 서울에 사는 김씨로서는 전세든 자가든 주거대책이 큰 걱정이다. 재무상황을 점검하면서 자산을 보니 순자산이 1500만원 정도였다.
“1년에 300만원씩 모은 셈이네요?” 머리를 긁적일 뿐 말을 못한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얘기한 것이지만, 김씨에게는 질책이다. 지난해 포도에셋 재무상담을 받은 비슷한 나이대의 미혼 남성의 순자산이 6천만원인 점을 감안하면 김씨의 지난 5년 재무성적은 낙제점인 셈이다. 그런데 최근 김씨의 저축률은 매우 높다. 전자우편으로 받은 재무점검표에는 월 저축액이 145만원으로, 세후 소득의 60%나 된다. 문제는 김씨가 적은 대로 정리해보면 월 현금 흐름이 마이너스 60만원이라는 점이다. 하나하나 물어보며 점검해봤다.
지난해 봄 큰맘 먹고 적립식 펀드에 50만원씩 불입하기 시작했다. 가을엔 좀더 욕심을 내 50만원짜리 계좌를 하나 더 만들었다. 연말에 홈쇼핑을 보다가 월 30만원씩 내는 장기주택마련보험(이하 장마보험)에도 가입했다. 주택마련을 위한 청약부금도 15만원씩 내고 있었다.
이렇게 저축액을 늘렸지만 소득이 그에 따라준 것도 아니고 소비지출을 크게 줄이지도 않았다. 당연히 현금 흐름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수익률이 마이너스인 두 번째 적립식 펀드와 청약부금의 불입을 중지했다. 그렇게 해서 현금 흐름상의 적자를 모면했지만, 가장 시급한 과제인 결혼자금 마련계획은 여전히 요원했다.
그렇다면 단기 목적자금을 모을 수 있는 저축계획이 필요한데, 가장 최근에 가입한 장마보험은 20년 동안 유지해야 하는 장기상품이다. 게다가 초기에 해약하면 원금을 하나도 받지 못한다. 펀드는 불입을 중지해도 되지만 이것은 그렇게 하면 해지가 된다. 어쩔 수 없이 계속 불입해야 하는 강제성이 있다. 사실 이 강제성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김씨 역시 홈쇼핑을 보다가 문득 이런 맘이 들었다고 한다. ‘저축부터 해야지. 안 그러면 다 써버릴걸.’ 거기다 김씨를 더 자극한 건 연말정산이란 단어다. 마침 그때가 연말이었다. 그리고 7년 이상 유지하면 이자소득세도 전혀 없다는 것이다. 김씨가 가입한 장마보험은 소득공제와 비과세란 장마상품의 일반 특성에다 한 가지 기능이 더 있다. 사망하면 사망보험금이 나온다. ‘500만원 + 해약환급금’.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은행이나 증권사 장마상품에는 없는 이 사망보험금은 보험사가 고객 돈을 20년 동안 장기로 운용할 수 있는 대가다. 중간에 그 약속을 저버리면 원금 손실이라는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투자하거나 상품에 가입하거나 새로 일을 시작할 때 사람들은 늘 잘되는 측면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김씨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 눈 딱 감고 20년 동안 저축하는 거야.’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김씨가 결혼자금을 모으려면 단기저축이 필요하다. 현재 순자산 1500만원으로는 1년 뒤 결혼 때 전세자금도 모자란다. 부모님이 4천만원 정도를 도와준다 해도 서울 변두리의 신혼살림집 전셋값에도 턱없이 모자란다. 김씨가 생각하는 전세금은 적어도 8천만원 이상이다. 저축 여력을 최대한 다 동원해도 모자랄 판인데 월 30만원씩 장기로 묶어두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30만원씩 20년이면 원금만 7200만원이나 되는 고액이다. 이런 고액 상품 가입을 앞뒤 충분히 따져보지 않고 홈쇼핑에서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펀드나 예금상품처럼 몇 달 뒤 해약해도 원금이 보장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물론 장마보험을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대출이자는 손해 보고 투자수익을 낼 기회는 놓치는 방식이다. 이미 납입한 120만원이 아까워 김씨는 장마보험을 그냥 유지하겠다고 한다.
그 상태로 생애 재무설계를 해보았다. 죽을 때까지 대출을 끌고 가야 하는 마이너스 신세였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상황은 김씨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수도권의 주거비용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결혼비용에서 남자에게는 역시 주거비용이 가장 부담스런 존재다. 설명이 끝나자 김씨가 멋쩍게 웃으며 한마디 던진다. “결혼해도 부모님 집에 살아야겠네요.” 김씨 부모는 현재 40평대 아파트에 살고 있다. 김씨나 부모 모두에게 그것이 재무적으로나 효도나 행복한 삶이란 면에서 가장 훌륭한 선택일 수 있다.


유니버설 보험이냐 적금이냐
언제 어디에 돈 쓸지 따져야…5년 동안 불입하고 10년 뒤에 환급금 받는 경우 적금이 훨씬 유리

“복리로 운용되고 2년만 넣으면 그 다음부터는 안 넣어도 된다는데요?” 지난 연말 재무상담을 받았던 진효숙(48·가명)씨가 보험사 저축상품에 대해 물어보며 한 말이다. 한 보험사 텔레마케터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마침 저축 여력이 20만원 정도 생겨서 할까 말까 고민하다 전화한 것이다. 이런 금융상품 얘기를 할 때 빠지지 않는 수익률 얘기도 덧붙인다. “5% 이상 수익이 난대요.”
그리고 10년 이상 유지하면 이자소득세가 없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일정 기간 불입하면 그 이후로는 불입하지 않아도 해지되지 않고, 목돈이 필요할 때 약관대출이 아니라 쌓인 해지환급금 범위 내에서 그냥 꺼내 쓸 수 있는 유니버설 상품이다. 예전 보험사 상품에 비하면 이 두 가지 기능은 고객 입장에서 꽤 유리한 것이다.
수화기 너머로 전보다 밝아진 진씨 목소리를 들으며 과거 상황을 떠올려봤다. 4개월 전 진씨는 머니마켓펀드(MMF)에 넣어두고 있던 목돈 1500만원을 다른 금융상품에 넣고 싶다며 찾아왔다. 펀드수익률이 한창 절정에 달한 때이기도 해서 진씨는 그 돈을 거치식으로 펀드에 넣고 싶어했다. 그러나 안전한 고정금리 상품에 일단 넣어두자고 설득했다. 마침 저축은행 이자율도 6%대로 좋은 편이었다.
그때 진씨의 소득과 지출을 따져보면서 투자 여력을 찾아낸 게 월 20만원이었다. 그 돈을 적립식으로 투자하기로 했다. 1년쯤 해보면서 투자는 손해볼 수도 있다는 걸 몸소 익힌 다음에 더 큰 금액을 해보자고 했다. 그런데 그 뒤 확인해보니 진씨는 월 30만원씩을 펀드에 넣고 있었다. 소비지출을 좀더 줄인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사교육비에 들어갔던 돈 일부를 아껴 더 투자할 생각인 것 같았다.
“적립식 펀드는 계속 잘 넣고 있나요?” 넣고 있다고는 하는데 수익률이 마이너스라며 실망스러워했다. 당장 돈 쓸 일이 없는 진씨로서는 적어도 2년 정도는 그냥 유지하는 게 필요하다. 그러나 진씨가 수익률 높은 걸 찾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보험사 장기상품이 눈에 들어온 것 같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렇게 모은 돈을 언제 쓸 거냐고 물었다. 지금 당장 확정된 것은 없지만 5년쯤 뒤에 돈 쓸 일이 생길 것 같다고 한다. 아마 지금 직장에 다니는 딸이 결혼하는 걸 생각하는 모양이다.
5년 정도 소득이 유지되고 그 뒤에 돈 쓸 일이 있다면, 진씨가 생각하는 유니버설 상품의 복리·비과세·중도인출·납입유예라는 특징은 그에게 해당되지 않거나 별 쓸모없는 것이 돼버린다. 가장 평범하게 적금을 드는 게 최선이다. 즉, 모든 투자 여력을 펀드에 몰입하는 것보다 일부는 고정금리 적금상품으로 분산하는 게 바람직하다. 또 진씨는 아직 원금손실을 볼 수 있다는 펀드투자를 이해는 하지만 몸으로는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상태다.
실제 진씨가 유니버설 보험상품을 선택해 5년 동안만 불입하고 그 뒤 10년 동안은 불입하지 않은 채 보험상품을 유지하고 있다가 일시불로 환급금을 받는 경우를 가정해 계산해봤다. 사망보험금은 1천만원으로 설정했다. 이럴 경우 63살에 진씨는 약 1600만원을 받는다. 이번에는 같은 5% 수익률로 5년 동안 적금을 불입한다고 가정해보자. 5년간 적금 불입 뒤 10년 동안 예금으로 유지한 금액은 2187만원이다. 적금이 훨씬 더 낫다.
“그럼 이자에 대해 세금을 내야 하잖아요?” 적금을 들라는 제안에 진씨가 보인 반응이다. 이제 절세 문제를 따져보자. 15.4% 일반과세가 있고, 세금우대로 하면 9.8% 세금을 낸다. 단위농협·신협·새마을금고 등에 조합원으로 가입하면 1.4% 저율과세가 적용된다. 진씨는 당연히 조합원으로 가입하고 저율과세 상품에 가입하겠다고 했다. 월 20만원짜리 1년 정기적금의 일반과세나 저율과세는 이자 차이가 1만원 정도에 그치지만 금액이 커지면 사정은 조금 달라진다. 1천만원을 연이율 6%로 1년 정기예금에 가입하면 그 차이는 8만4천원으로 늘어난다. 조금만 신경쓰면 챙길 수 있는 이득이다.
전화를 끊을 즈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유니버설 상품에 가입하라고 할 걸 그랬나?’ 남편으로부터 노후자금을 보장받지 못할지도 모르는 진씨로서는 중간에 쓸 목적자금도 중요하지만 노후자금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놓아야 한다. 보험사 상품은 유니버설처럼 중도인출을 할 수 있다고는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다른 금융상품에 비해 끝까지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른바 강제저축인 셈이다. 먼 미래보다 눈앞에 닥친 일에 먼저 돈을 쓰는 관성을 생각하면 강제저축도 일리가 있다.
어떤 상품이 더 좋은지는 단지 수치로만 비교할 문제는 아니다. 언제 어디에 돈을 쓸지에 대한 명확한 목적과 그에 맞게 실천할 자세가 되어 있느냐를 함께 따져봐야 할 문제인 것이다.


2천만원이 더 중요합니까
부동산에 2억 투자해 10% 수익 기대하는 부부, 당장 주거환경·아이 교육은 어찌하나

“상담 애프터서비스 해주세요.” 1년 전에 재무상담을 받은 고객 박철수(41·가명)씨 부부로부터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최근 서울 근교에 있던 아파트를 팔았는데, 그 자금을 어떻게 운용하는 게 좋을지 해법을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그사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재개발 예정 주택을 구입하는 등 변화가 많았다. 소득은 크게 늘지 않았지만 1년 사이에 자산은 1억원 넘게 늘었다.
먼저 갖고 있던 아파트가 1년 전에 비해 3천만원 정도 오른 상태에서 팔았다. 물론 아쉬움도 크다. 매매계약을 맺고 중도금을 받은 뒤부터 뉴스에서 날마다 서울 강북지역 아파트값 오르는 소식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가만히 앉아서 3천만원을 벌었지만, 더 벌 수 있었던 돈이 눈앞에서 날아가는 걸 보자니 마음이 여간 쓰라린 게 아니었다고 한다.
“그 아파트에 나중에 살기로 하지 않았나요?” 현재 박씨 부부는 남편 직장 근처 다세대주택 밀집지역에 전세를 산다. 상업지역이 둘러싼 지역이라 전셋값은 비싸지 않지만 아이들 교육상 썩 좋지 않아 걱정이 많았던 터였다. 그런데 몇 달 전 재개발 예정 주택을 매입하는 바람에 1가구 2주택이 되어 양도세를 피하기 위해 서둘러 아파트를 판 것이었다.
이 재개발 예정 주택도 그사이 무려 4천만원이나 올랐다. 예상대로 재개발이 추진된다면 2∼3년 내로 더 큰 시세차익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재개발주택조합에서 내부 분란이 생겨 일정이 혼미해졌다. 서울 밖이긴 하지만 몇 년 뒤 제법 안락한 아파트로 이주하는 것을 상상했던 1년 전의 계획이 어지러워졌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부동산을 통해 오른 자산가치는 약 7천만원이 된다. 나머지 3천만원은 1년 동안 저축한 금액과 금융소득이다. 박씨네는 월 200만원 이상을 저축하는데, 이는 소득 대비 35%가 넘는 금액이고 비슷한 조건인 비교고객군의 저축률 23%에 비해 월등히 높다. 1년 전에 있던 빚도 그사이 다 갚아 부채상환액이 전혀 없다. 비교고객군은 부채상환액이 소득의 9%인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박씨 부부는 새로 생긴 여유자금으로 또 다른 부동산 투자를 하고 싶어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박씨 부부가 부동산 시세차익으로 올린 수입은 총 2억4천만원으로 순자산의 50%가 조금 넘는다. 그리고 지금까지 실패도 없었다. 이쯤 되면 누구나 경험주의자가 되기 십상이다. “얼마를 투자하고 싶은 거죠?” 2억원쯤 투자하겠다고 한다.
현재 투자한 재개발 예정 주택도 몇 년 동안 자금이 묶일 건데, 유동성에 문제가 있지 않느냐고 지적해보았다. “재개발 예정지 물건을 잘 골라 사서 1년쯤 지나 팔려고요.” 그러면 또다시 2주택 문제가 생기지 않느냐는 질문에 박씨는 아버지 명의를 빌리겠다고 했다. 위장전입이나 가짜 경작확인서를 만드는 일부 고위 공무원들의 위법에 비하면 이건 편법이라고도 할 수 없는 정도다. 세금 문제와 유동성까지 생각이 잘 정리돼 있었다.
이번에는 수익성을 물어볼 차례다. “1년에 2천만원만 벌었으면 좋겠어요.” 생각보다 낮은 수익률 목표를 제시했다. 최근 판 아파트의 지난 4년 반 동안 연수익률이 20% 정도인 점이나 재개발 예정 주택의 시세 상승을 생각하면 매우 낮은 목표치다. 그런데 박씨 부부는 2천만원이라는 금액을 생각했고, 나는 수익률을 계산했다. “2억원 투자해서 2천만원 벌면 10% 수익 아닌가요?” 돈으로는 2천만원이 큰돈이지만, 10% 수익률은 그리 높은 수치는 아니다. 투자할 원금이 많아졌기 때문에 10% 수익률로도 큰돈을 버는 것이다.
하지만 초등학생과 유치원생 자녀 하나씩을 두고 있는, 평범하고 알뜰한 40살 전후 박씨 부부에게 2억원은 함부로 할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다. 관성대로 또 부동산 투자를 하려고 하지만 금액이 커질수록 위험도 커지고 유동성도 문제가 된다. 더욱이 10% 수익률이 목표라면 더 안전한 금융투자도 얼마든지 있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불입하고 있는 적립식 펀드 수익률을 확인해보라고 했다. 연수익률이 하나는 16.58%, 다른 하나는 9.69%였다. “이 정도 수익률이면 되지 않나요?”
자연스럽게 자녀 얘기가 시작됐다. 직장이 멀어 일찍 출근하는 엄마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둘째가 안쓰럽고, 저녁에 집에 오면 어수선한 것도 걱정이라고 한다. 주변 주거환경도 걱정이다. 서울 노원구 아파트 밀집지역 전세를 생각해봤는데, 현재 전세보다 적어도 1억원 이상이 더 든다. 당장 눈에 보이는 더 높은 수익률을 좇을 것인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편안한 집과 좋은 교육 여건을 택할 것인가? 정답이 있을 수 없는 해법을 박씨 부부와 나는 일주일 넘게 고민하고 있다.


빚 문제, 도망가지 마세요
개인회생이나 파산제도 활용 못하는 사람들…적극적으로 헤쳐나갈 의지를 잃는 것이 더 문제

박미숙(39·가명)씨를 만난 건 지난해 가을이다. 네이버와 함께한 ‘부채 클리닉’ 캠페인에서 선정된 고객이었다. 중학생과 초등학생 자녀 둘을 데리고 사는 기초생활수급자다. 사업을 하던 남편이 망하면서 급기야 이혼까지 하게 됐다. 사업이야 흥할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이 때문에 가정까지 엉망이 되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10여 년 전 역시 망해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남 얘기 같지 않았다.
남편이 사라진 뒤에도 사업 실패의 흔적은 박씨를 괴롭히고 있었다. 남편이 부족한 사업자금을 대려고 박씨의 언니 이름으로 차를 샀다 팔았는데, 이 때문에 언니는 차를 써보지도 못하고 할부금을 내야만 했다. 박씨 이름으로 대출받았던 빚도 고스란히 남았다. 채권자는 카드사 두 곳과 새마을금고 한 곳이었다. 이 가운데 한 카드사에만 월 10만원씩 갚고 있었다. 다른 두 곳은 아직 연락이 없다고 한다.
“이거 갚지 마세요.” 국가에서 주는 최저생계비로 사는 마당에 무슨 빚 상환이냐고 다그쳤다. 파산제도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변호사 비용을 댈 형편도 아니고 정말 파산 신청을 하면 빚이 완전히 없어지는지도 확신하지 못하던 중이었다. 잘 아는 변호사 사무실에 부탁해 실비만 내고 파산 신청을 하도록 안내했다. 그리고 6개월쯤 지난 즈음에 법원 판결을 받았다는 연락이 왔다. 이제 몇 달을 더 기다려 면책선고까지 받으면 박씨는 빚 문제를 청산하게 된다. 적은 액수이지만, 빚 갚는 데 쓰던 월 10만원이라도 자녀교육비를 위해 저축하는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경기도에서 자영업을 하는 최충환(43·가명)씨는 10년 전 친척이 망하면서 보증 빚 때문에 아직도 고생이다. 최씨는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소득신고를 할 수 없는 형편이다. 7년 전부터 시작한 자영업이 그래도 이제는 조금 자리를 잡았다. 사업자 등록은 부인 명의로 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사업을 키우면서 자금이 많이 부족했다. 아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는 것도 이제 거의 한계에 도달했다. 부인 명의로 사업을 하기는 하지만 최씨 때문에 제1금융권 대출은 불가능했다. 다행히 A캐피털로부터 연 10% 이자로 급한 자금을 대출받았다. 그런데 계속 사업은 확장될 것이고, 앞으로 20년 정도는 경제활동을 해야 할 여건이기에 신용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놓는 게 필요했다. 게다가 최씨는 등록된 장애인이기 때문에 사업자금 대출을 일반인들보다 유리하게 받을 수 있다.
파산 신청이 가능한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일주일 뒤에 만난 최씨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부인 명의이긴 하지만 이미 부채 이상의 자산을 모아놓은 상태라 법원으로부터 파산 인정을 받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개인회생과 파산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던 2004년 즈음에만 신청했더라도 어렵지 않게 파산 선고를 받았을 것이라고 한다. 물론 원칙대로야 자산이 생겼으니 그것으로 빚을 갚으면 된다. 그러나 자가 주택도 없고 팔순 노모를 모시고 두 자녀를 키우는 최씨 부부가 10년을 고생해 이제야 겨우 먹고살 기반을 마련했는데, 그것을 10년 전의 보증 빚을 갚는 데 다 써야 한다는 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다.
박씨나 최씨 모두 자신의 빚 문제를 혼자 해결하거나 도피하는 방향으로 끌고 갔다. 개인회생이나 파산제도를 제대로 알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더라면 마음고생도 덜하고 훨씬 빨리 재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지 그런 제도를 잘 모르는 것보다, 자신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헤쳐나갈 의지를 잃는 것이 더 문제다. 꼭 학력과 지식이 짧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8년 전에 부도를 낸 김창식(49·가명)씨는 일류 대학 출신이고 그전에 10년 정도 사업을 잘 이끌어오던 사람이다. 당시 1억원 가량 빚을 졌는데, 그냥 방치했다. 아는 사람 회사에 비공식적으로 다니고 있는데, 최근 날아온 독촉장들을 확인해보니 빚이 무려 3억원이 됐다고 한다.
“진작 파산 신청을 하시지 그랬어요?” 김씨는 좀 엉뚱한 대답을 한다. “이 나이에 얼마나 더 사회생활을 한다고….”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아직 경제활동을 할 시간이 많이 남았다. 정상으로 되돌려놓고 다시 재기하는 게 옳다. 은둔자처럼 사는 것은 사람을 불행하게 한다. 빚은 사람의 희망을 갉아먹는 주범이다. 빚이 많아지면 대부분 삶의 의욕을 읽고 자포자기하게 된다.
그런데 빚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미래에 받을 국민연금을 담보로 현재 빚을 갚도록 하겠다는 정책을 내놓는 건 참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게라도 해서 신용불량 상태에서 빨리 탈출하라는 뜻이라는데, 그게 당사자들의 재기에 도움이 되기보다 채권기관만 확실하게 빚을 받아내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답답하면 기록하고 정리하라

현금흐름과 자산현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안정감과 자신감 얻을 수 있어

중학생 자녀 둘을 둔 박지수(38·가명)씨는 광고업을 하는 남편 회사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다. 남편 사업이 불안정해서 자신이 집에서 살림만 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집으로 매달 얼마씩 가져오죠?” 간단한 질문이지만 박씨는 대답을 주저했다. 그때그때 되는 대로 돈을 가져다 쓰기 때문에 정확히 얼마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남편이 얼마를 버는지 확인해보았다. 이 역시 정확한 자료가 없다.
그럼 집안일로 얼마를 쓰는지 물어보았다. 이 역시 정확히 파악된 게 없다. 질문을 하면서 하나하나 적어나갔다. 월세 30만원, 통신비 15만원, 부식비 80만원…. 이런 식으로 적어보니 월평균 330만원이나 되었다. 친정어머니를 모시는 5인 가족이라고는 하지만, 소비성 지출만으로는 꽤 많은 금액이다. 이렇게 수입과 지출이 정리돼 있지 않으면 남들만큼 쓰면서도 제대로 쓴 것 같지 않아 늘 빈곤감을 느끼게 된다. 빈곤감의 악순환인 셈이다.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재생자동차부품 공급상을 하는 김중철(41·가명)씨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7년 전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는 아주 조그맣게, 거의 자본을 들이지 않다시피 했다. 조금씩 사업을 키워오다 올해 초 다소 무리를 감수하고 사업 규모를 2배 이상 키웠다. 원칙대로라면 자본을 충분히 확보한 다음에 사업을 확대해야 하지만, 시장의 경쟁구도 때문에 무리하게 앞당겨 확장해야만 했다. 당연히 늘어난 거래처에 결제해야 할 자금과 비용이 늘었다.
자영업 수준이다 보니 금융권 대출은 거의 불가능했다. 친인척에게 무이자로 2천만원을 빌렸다. 3년 전부터 월 50만원씩 불입하던 유니버설보험은 올 초부터 불입을 중지했고, 사업을 확장하면서 800만원을 인출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보장성보험 약관대출로 300만원, ○○캐피탈로부터 2천만원을 대출받았다. 둘 다 10% 전후의 높은 금리였다.
“유니버설보험에서 더 인출할 수 있는 금액이 있을 텐데요?” 확장된 사업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어서인지 김씨는 쉽게 인출해 쓸 수 있는 자신의 돈이 있는데도 점검해보지 않았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처럼, 돈에 쪼들리더라도 차분하게 따져보고 계획을 세우면 도움되는 게 생각보다 많다. 앞의 박씨와 마찬가지로 김씨도 돈 흐름이 어수선하다 보니 돈은 돈대로 쓰면서도 늘 쫓기기만 하고 여기저기서 조금씩 손해를 보고 있었다.
사업이 아직 정상화되지 않았기에 김씨 자신의 급여는 150만원으로 정했다. 부인은 무급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면 김씨가 150만원으로 다섯 식구의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을까? 아니다. 사업체 자금흐름을 하나하나 따져보니 실제 김씨가 가정으로 가져가는 돈은 300만원 정도 됐다. 사업을 확장하기 전에 가져가던 450만원보다는 많이 줄었다. 사업을 확장하면서 직원 임금, 자동차 비용, 임대료, 대출 원리금 등이 늘어난 것에 비해 매출은 아직 그만큼 늘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정의 필요에 따라 가져가는 돈이 자신의 명목임금인 150만원보다는 꽤 많았던 것이다.
이것은 자영업자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다. 독일에서 발간된 재무 관련 책에서 ‘자영업자 재무설계의 기본은 사업수지와 가계수지 분리’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보면 선진국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봐야 한다.
아무튼 김씨의 재무설계는 일단 사업수지를 정리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집으로 가져가야 할 돈을 300만원으로 확정하고, 조금이라도 사업자금의 부담을 덜기 위해 세 차례로 나눠 100만원씩 가계통장으로 옮기기로 했다. 사업 확장 4개월째와 5개월째의 월별 손익을 정리해보니, 4개월째는 320만원 적자였지만 5개월째는 96만원 흑자로 돌아섰다. 물론 아직 안정 궤도에 들어섰다고 보기는 어렵다. 3개월 정도 살펴봐서 매출이 안정되면 가계수지로 돌리는 돈을 550만원으로 올리고, 그때쯤 가서 주택마련, 자녀 학자금, 노후자금 등에 대한 자세한 설계를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한편 자산을 살펴보니 아직 주택은 없지만, 재고자산이 많아 부채를 감안하더라도 순자산이 2억8천만원 정도로 계산됐다. 지난해 재무상담을 받은, 자녀가 둘인 같은 나이대 가정의 순자산 평균보다 20%가량 많았다. “부자입니다.” 비교표를 보여주며 농담조로 추켜주었다. 사업을 확장하면서 자금에 쪼들리고 사업 전망에 불안해하는 김씨에게 힘을 불어넣어줄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현금흐름과 자산현황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김씨는 안정감을 얻었다. 6월 손익계산서의 예상매출액 6천만원을 1억원으로 고쳐보자고 한다. 예상 순수익이 1천만원을 넘어섰다. “연말에는 이 정도 될 것 같아요.”


미래가 두렵습니까

재무상담은 사회적 필연 법칙을 인식시키고, 미래를 몰라 갖게 되는 두려움을 떨치게 하는 것


서울과 경기 부천에서 살다 강화로 이사간 지 올해 12년째다. 사업이 망한 탓도 있고, 아이들 건강 문제도 생각했고, 막 초등학교에 들어가려던 큰아이에게 좋은 선생님을 만나게 하려는 뜻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다. 아이들에게 도시의 각박한 경쟁에 시달리게 하지 않고 농촌에서 맘껏 뛰놀게 했다.

그런데 요즘 농촌이 아이들에게 다 좋은 건 아니다. 또래 아이들이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가 이사간 동네는 우리처럼 도시에서 이주해온 집들이 많아 또래 아이들이 많았다. 워낙 가깝게 지내다 보니 어린 나이이긴 하지만 친구 집에서 잘 때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반대한 적이 없다. 다만 꼭 한 가지를 챙겨가라고 한다. 어른들에게 재무 교육을 할 때 재미 삼아 이걸 문제로 내보곤 한다. “제가 우리 집 아이들한테 ‘친구 집에 놀러갈 때 꼭 가져가야 할 것은?’이란 질문을 종종 합니다. 뭘까요?” 내가 요구하는 답은 ‘칫솔’이다.

그러면서 나는 돈과 삶의 필연 법칙을 설명한다. “양치질을 안 하면 이빨이 썩고, 이가 상하면 건강이 나빠집니다. 돈도 많이 듭니다.” 이것은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것보다는 정도가 약하기는 하지만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자연과 사회의 필연 법칙입니다. 단지 지식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몸에 배게 훈련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자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용이다. 지식은 때가 되고 느끼게 되면 얼마든지 스스로 습득해나갈 수 있지만, 어릴 때부터 이런 필연 법칙을 제대로 몸에 익혀놓지 않으면 두고두고 고생한다.

재무상담사로서 고객이나 청중에게 전달하려는 핵심 역시 마찬가지다. 보건복지부 직원들에게 강의할 때 이렇게 물었다. “여러분은 무엇이 걱정되나요?” 정권이 바뀌어 부서가 통폐합되고 자리가 불안정해질까봐 걱정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걱정(?)이 있다. “우리 모두 100년 이내에 죽지 않나요?” 분위기가 차가워진다.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나는 아이들에게도 가끔 이렇게 혼낸다. “너, 그러면 100년 이내에 죽는다!” 사실이다. 우리가 100년 이내에 죽는다는 것은 필연이다. 그렇지만 우리 아이들도 그렇고 보건복지부 직원들도 그렇고 반드시 죽는다는 이 엄연한 사실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식 웃을 뿐이다. 왜 그럴까?

죽는다는 게 두렵지 않은 게 아니라, 죽는다는 필연을 충분히 인식하고 그에 맞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죽는다는 것보다 조금 정도가 약한 ‘늙으면 돈을 못 벌고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은 필연일까 아닐까? 지금 초등학생인 아이들이 10년 뒤 대학을 가고 결혼을 하게 되면 돈이 얼마나 들까? 이런 것들은 자연의 필연 법칙보다 그 정도는 약하지만, 사회적 필연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재무상담은 이런 사회적 필연 법칙을 인식시키고, 그럼으로써 미래를 몰라 갖게 되는 두려움을 떨치게 하는 것이다.

김주연(36·가명)씨 부부는 공무원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신혼 초에 주말부부를 했고 오랫동안 공부를 하느라 둘째는 낳을 엄두도 못 냈고 재산도 많이 모으지 못했다. 재무 상태를 점검하면서 은퇴 뒤 생활비를 물어보았다. 250만원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그 정도면 두 사람의 연금만으로도 남는다. 공무원연금법을 개정해 70% 정도로 감액한다 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돈 쓸 일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한도가 없다. 그래서 사실 돈 자체보다 돈에 대한 주관이 더 중요하다. 김씨 부부는 특별히 무리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주택은 서울에서 32평 아파트, 외아들 대학자금은 연 1500만원을 생각했고 유학은 고려하지 않았다. 다만 결혼지원금은 조금 많이 생각했다. 아이가 대학 갈 즈음에는 서울 집을 팔고 수도권에 전원주택을 짓겠다고 한다. 그러면 여유자산이 많이 생긴다. 이 정도로 자금 수요를 생각한다면 김씨 부부의 재무설계는 여유롭다. 오히려 돈 쓸 일을 더 찾아보라고 권할 판이다.

그러나 이건 두 번이나 만나 상담을 하고, 사전에 김씨 부부가 스스로 자신의 상황을 점검해보면서 생긴 결론이다. 그런 과정을 거쳤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하는 결론이 얻어진 것이지, 그렇게 수치로 따져보지 않았더라면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일단 많이 벌고 보자는 심리가 앞서게 되고, 누가 이러저러한 투자로 재미봤다더라 하면 자신도 뒤처지지 않으려고 기웃거리게 된다. 그런 불안한 심리를 파고드는 게 사기꾼이다. 최근 군 장교들이 관련된 금융사기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의 결론이 이런 식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제대 뒤 마땅한 대책이 없고 연금도 부족해서 장교들이 불안해한다.’ 불안의 진정한 원인은 돈이 적다는 그 자체에 있지 않다.


문제는 용기다
처지에 맞는 목표를 정하고 재무설계를 짰다면 남 눈치 보지 않고 용감하게 밀고 나가야

재무 상담을 받은 고객 중에 철학박사가 있다. 40대 주부들과 함께 ‘수다로 푸는 논어’라는 기치 아래 논어강독을 한다기에 함께하고 있다. 지난주 강독한 내용에 이런 구절이 있다. ‘지혜로운 자는 의혹하지 않고(知者不惑), 어진 자는 근심하지 않으며(仁者不憂), 용맹한 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勇者不懼).’ 사리를 밝힐 지혜가 있기에 혹하거나 걱정하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을 것이란 대목은 쉽게 이해된다. 그런데 그 다음 해설이 문제가 됐다. ‘이는 학문의 순서다.’ 그런데 왜 ‘지, 인, 용’(知, 仁, 勇) 순서일까? 공자에게 ‘인’은 최고의 덕목이므로 맨 마지막에 ‘인’이 와야 할 텐데 왜 ‘용’일까? 의아했다.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는 말도 있잖아.” 아줌마들의 수다가 시작됐다. “<톰 소여의 모험>으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은 용감하게 돌진해서 쟁취하는 것을 미덕으로 치켜세우던데요.” 미국 서부개척 시대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는 의견도 덧붙여졌다. “순서가 정말 지, 인, 용이라는 뜻 맞아?” 수다 끝에 실천의 문제가 끄집어내졌다. “이치를 배우고 삶의 철학으로 삼은 다음 실천해야 하는데, 실천에는 가치판단과 결단이 필요하잖아요. 그때 두려움 없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재무 상담을 하는 나에게는 쏙 와닿는 말이다. 정보를 주고 목표의식을 갖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필요자금을 얼마로 할 것인지, 돈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등이 모두 개인의 판단과 결단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혼자 사는 게 아니고 남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기에 정말 소신과 용기가 필요하다.

결혼을 앞둔 김인철(31·가명)씨에게도 마지막 설명은 역시 용기다. 수도권에서 집 사고 애 둘 키운다는 전제하에 대학자금과 결혼자금을 마련하고 60살에 은퇴해 월 150만원씩 쓰며 노후를 보낸다는 설계다. 소득이 많지도 않고 저축률이 높지도 않다. 모아놓은 순자산도 얼마 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설계가 어렵다. 결국 목표를 낮춰야 하는데, 세심한 김씨가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과감하게 결단을 내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상담 직전 김씨의 저축액은 월 50만원이었다. 첫 번째 상담을 하면서 저축을 100만원으로 늘려야겠다는 각오를 했고 소비성 지출을 줄이겠다고 했다. 연애 비용이 많이 드는 때인데,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결정이다. 변동성이 큰 몇 개 항목만 목표로 설정한 엑셀파일을 건넸다. 며칠 뒤 김씨한테서 답신이 왔다. “한 달 쓸 돈 벌써 다 썼네요.” 그렇지만 두 번째 만났을 때 보니, 지출을 줄이는 것에 대한 피로감은 커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록하면서 자신이 푼돈을 얼마나 많이 쓰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놀란 점을 표현했다. “전에는 쓴 돈을 열심히 적기만 했는데, 이제 써야 할 목표를 정하고 매일 목표와 비교하니까 눈에 확 들어오던데요.”

김씨는 결혼하고 살 집은 현재 마련돼 있는 전셋집(4천만원)에서 시작하되 7년 뒤 1억6천만원짜리 장기전세주택 마련을 고려해보았다. 현재 서울시에서 시행하고 있는 역세권 장기전세주택(SHIFT)이 잘 시행된다면 서민의 주거안정에 꽤 도움이 될 터다. 노후는 고향에 가서 보낼 생각이다. 현재 부모님이 농사를 짓고 있는데, 최소한 노후에 살 집은 확보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렇지만 생활비는 준비해야 하는데, 60살에 은퇴해 90살까지 살 계획이라면 무려 15억원(60살 시점 가치)이나 마련해야 한다.

전셋집 외에 모아놓은 자산이 거의 없는 김씨에게는 현재 저축액 월 100만원으로는 이런 목표마저도 달성하기 어렵다. 목표와 조건을 과감히 바꾸는 용기가 필요했다. 핵심은 목표는 낮추고 조건은 빡빡하게 하는 것이다. 주택비, 자녀의 대학자금과 결혼자금은 낮추고 은퇴 시기는 늦추고 저축액은 늘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물가상승률까지.

그동안 나는 물가상승률을 3.5%로 잡았었다. 그런데 요즘 5%대까지 오르고 있다. 물가야말로 재무설계에 가장 부담을 주는 요소다. 그러나 개인이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물가도 결코 방법이 없지는 않다. 물가에 영향을 덜 받는 생활방식을 개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사지 않거나 덜 쓰는 방식이다. “어지간하면 차는 안 살 겁니다.” “맞아요. 둘째 낳기 전까지는 없어도 살 만하죠.” 나의 응수에 김씨 표정이 밝아졌다.

집 문제도 신부 될 사람과 얘기해봤는데, 도시는 답답해서 농촌 지역으로 가기로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부담이 많이 준다. 거기에 나는 자녀 대학자금을 줄이고 결혼자금은 대주지 않는 것이 결코 문제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부모가 그걸 소신껏 결정하고 자녀에게 어릴 때부터 애정을 표시하며 자립심을 키워주면 된다. “이제 흑자 흐름이네요.” 문제는 이제 김씨가 이렇게 인식한 설계안을 얼마나 과감하게 밀고 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설계안을 믿는다면 이제 남 눈치 보지 않고 용감하게 밀고나갈 일만 남았다.

한겨레21h21.hani.co.kr

이광구 포도에셋 재무상담사 nari@phod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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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동아시아론’ 전문가 3인 토론
"한국이 '소통의 연결고리' 되게"


동아시아 담론의 갈래

이정훈=먼저 동아시아 담론의 갈래를 잠깐 짚고 넘어가죠.

류준필= 우선 현안과 관련된 사회과학 쪽의 다자간 협력과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가 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중국 스스로도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아시아통화기금(AMF) 창설 등 경제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죠. 환경, 노동 문제를 다룬 것도 있고요. 좀 다른 맥락에서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성격의 담론도 있죠.

이욱연= 왜 동아시아여야 되는가, 동아시아 담론이 우리 삶과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논하는 작업을 많이 해왔죠. 이제는 동아시아라는 틀 속에서 우리를 규정하지 않으면 한국 사회를 한 단계 더 진척시키지 못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깔려 있어요.


이정훈= 문화나 현실 차원에서는 이미 동아시아 삼국을 넘나들며 상호 보충하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지식인 담론이라는 측면은 좀 약하지 않나요.

류준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이라는 것이 주는 상징적 의미가 중국이나 동아시아를 중요한 거점이나 상상력, 혹은 인재 개발의 대상으로 여겼던 세력들의 현저한 약화를 반영하는 것이죠. 오히려 지금 한국 사회는 반(反)동아시아 담론적인 것이 지배화되고 있지 않나 해요. 현 정권 초기에 동북아시대위원회 등에서 나온 동북아 정책 비전이라고 하는 전략 자체가 실질적 위력을 갖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중국을 통한 미국 중심의 지배 질서에 대한 재조정 내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상상의 여지가 작용했지만 근래 들어 중국위협론 쪽으로 정리된 게 아닌가 해요. 삼성 이건희 회장의 ‘샌드위치론’도 한몫 했고요.

이욱연= 동아시아를 축으로 해서 한국 경제를 업그레이드시키겠다는 발상은 한국 자본주의가 한계에 도달했을 때 그 돌파구를 어떻게 찾느냐 할 때 나온 구상이죠. 비판적 지역주의 쪽에서는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 냉전 질서를 혁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이 미국 중심의 세계 체제를 뒤흔들어 놓는 균열을 내는 길이라고 얘기해요. 문제는 한국에선 그렇다 해도 중국이나 일본은 미국에 대한 인식도 굉장히 다르고 한국에서 정서적으로 갖고 있는 미국 중심의 냉전 구조를 넘지 못하는 한계도 있죠.

동아시아와 미국, 북한

이정훈= 동아시아를 논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미국이죠. 미국을 조금 더 들여다보기 위해 반드시 건드려야 할 부분은 북한문제고요.

류준필= 북한 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를 때 그 문제가 넓은 의미에서는 동아시아적 차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역시 남북관계인데, 여기에 북한은 미국과의 1 대 1 대화를 더 요구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이탈하는 일이 일어나죠. 그런 면에서 남북 분단 자체가 동아시아론을 낳은 것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분단은 동아시아 담론을 약화시킬 수 있는 역설적인 양면을 가진 게 아닌가 해요.

이욱연= 미국이 동아시아에 부재하면서도 편재한다면 북한의 경우에는 편재하면서도 부재하는 형태죠. 미국이 북한과 화해를 추진할 수밖에 없는 것은 미국의 위기를 반영하는 것 같아요. 미국의 신자유주의 질서에 대항하는 것으로서의 동아시아 담론을 얘기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동아시아 담론에서 미국을 빼놓고는 어떤 일도 어렵다고 봐요. 중요한 것은 미국에 제몫 찾아주기죠. 그런 큰 줄기 하에서 6자회담이나 북·미 관계도 결국 동아시아 협력 틀 안에서 나름대로 소화될 것입니다.

현실을 못 따라가는 담론

이정훈= 한 포털사이트에 미국에 유학 가 있는 사람들이 그곳 체험을 전하는 코너가 있어요. 한 중국인 학생이 “한국은 중국의 역사적 속국이었다”고 글을 올리니까 댓글들이 잇따라 붙었는데 주류는 그 입장에 동조했지만 반대하는 반응들도 일부 있었어요. 그런데 이런 것들은 지식인들의 담론 속에는 잘 잡히지 않는 것 같아요.

이욱연= 동아시아론이 한국에서 부각된 것이 한국 현실을 변혁하고, 동아시아를 동시에 사고하자는 데서 나왔죠. 이게 여러 갈래로 나눠지면서 동아시아론이 상당히 위축된 측면이 있어요. 동아시아 담론의 힘과 의미를 구체적인 일상의 실천 속에서 전개시키지 못했던 거죠. 사실 한국인들은 동아시아 담론의 원조로서 담론을 수출하는 데 바빴지, 그들이 동아시아를 어떻게 상상하는가를 보는 덴 게을렀죠.

류준필= 동아시아 담론만의 문제는 아닌데 담론과 현상은 시간 차가 날 수밖에 없어요. 다만 동아시아론이 다른 것보다 어려운 것은 사회과학적인 수치화가 가능하다거나, 국가기구에 대한 데이터로서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인문학적인 추상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거죠. 단적으로 일본, 중국에 관심을 가질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언어 습득의 비용이에요. 이 노력이 시민사회에서 10년간 진행된다 해도, 그 효과를 1년 동안 국가 기구라거나 자본이라거나 금방 전유해서 가져가기에는 느슨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있는 거죠.

이욱연= 유교 자본주의론, 동아시아 가치를 내세우고 서구문명의 대안으로서의 동양 사상을 내세우는 것은 잘 되는 것 같아요. 문제는 비판적 지역주의 담론으로 가면 어려워지고 있어요. 동아시아 현실을 변혁하는 탈냉전 탈식민 작업이기 때문에 이론적인 담론뿐만 아니라 자국 현실, 동아시아 현실을 구체적으로 변혁하는 일이고 결국 세계체제에 균열이 가는 일이기 때문이죠.

류준필= 동아시아는 어쩌면 태생적인 동아시아를 내건 이상 짊어져야 되는 한계 같은 것이 있는지 모릅니다. 동아시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비용이 많이 듭니다. 현실적인 장애물이죠.

민족주의와 동아시아론

이정훈= 주변국과의 영토, 과거사 갈등과 같은 문제에 대해 동아시아론이 무기력하게 뒤로 물러서 있는 상황도 있는 듯합니다.

류준필= 우리가 일본을 향해 적대감을 표현하는 것은 그 사안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본이기 때문에 표현하기도 하거든요. 이게 사회 전체의 기제로서 활용하기가 아주 쉬워요. 잊을 만하면 일본에서 누군가 고위관료가 한 번씩 말을 해주면 신문 1면의 톱이 될 거라는 거죠. 동북공정이 무엇인지 아는 것보다 우리는 일단 쟤들이 내 건데 자기 것이라고 우긴다고 하는 게 핵심이 되잖아요. 대중 일반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금방 합의에 도달되는 무엇인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이욱연= 동북공정 문제는 단순히 역사 분쟁이기보다 우리가 갖고 있던 심리적인 위계질서로서 중국을 상상했던 것이 뒤흔들린 거죠. 동아시아론이 그것을 혁파시키고 동아시아적인 상상으로 바꿀 것인가에 대해서는 사실 지금까지 동아시아 담론이 이론적으로 큰 역할을 못했죠. 이걸 못하면 동아시아 담론은 이론적인 수준에만 멈추고 다분히 경제공동체 위주로 가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동아시아론 자체가 한국적 브랜드이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한국 중심주의로 가려고 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이정훈= 이질적인 것의 조화로운 공존, ‘화이부동’ 같은 논리가 동아시아를 다시 생각하는 데 중요한 배경인가요.

류준필= 저는 화이부동 논의가 가진 함정이 있다고 봅니다. 차이라고 할 때는 보통 질의 차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면 또 형태는 같다는 것을 은연 중에 또 전제하게 되고. 저는 이 부분까지도 문제 삼아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의 규모 작음 자체가 동아시아 3국의 상호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규정하는 중요한 한 요소일 수 있어요.

이욱연= 중국 애들은 천하 질서를 놓고 사고하잖아요. 이건 스케일이 다른 거죠. 그 사람들이 훨씬 더 좋은 생각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문제를 사고하는 층차가 다른 거죠. 우리는 천하를 사고할 필요가 없는데, 여기다가 중국의 천하에 대한 사고를 우리 쪽에 소개하면서 이것은 중화 패권주의 일변도의 사고라고 해버리면 더 이상 이론을 갖고 중국과 소통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져 버리는거죠.

소통의 매개자로서의 정체성

이정훈= 동아시아에서 우리의 역할을 말할 때 정치·경제와 군사력을 중심으로 세계로 확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좀 다른 방식으로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이 민족성을 활용할 수 없을까요.

이욱연= 한국이 무슨 동아시아의 허브가 되겠다는 발상이 아니라 그야말로 연결의 고리가 되고 그 다음에 자유롭게 소통하는 매개가 되는 역할이 돼야겠죠. 어떻게 보면 무정체성이 정체성이고, 그것 자체가 고유한 특성이 되는 이런 국가적인 정체성을 고민하는데, 동아시아론이 한 자극이 됐으면 좋겠어요.

이정훈= TV 토크쇼 ‘미녀들의 수다’를 보면 출연자들이 굉장히 글로벌하고, 그 사람들의 반응도 어떤 그런 종류의 위계 없이 어떤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이제는 들어와서 존재하는 사람들을 승인하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그게 추석, 설날 특집 수준에서 일상적인 것으로 안착했다는 것에 주목해요.

류준필= 한국이 우크라이나 같은 데서 축구를 하면 교민들이 꼭 수백 명은 와있죠. 우리 상상보다는 훨씬 더 많이 나가 있어요. 나가 있는 우리 애들에 대해 전혀 다른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어요. 이질적인 교육시스템 속에서 어찌 보면 소수자로서 크는 교육을 받는데 저는 이 교육의 장 안에 한국이 적극 기여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한국인만 모이게 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있는 이질적 국적,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동시적으로 모이는 곳에 한국이 적극적으로 그 과정의 교육 프로그램을 만드는 방식으로요. 그런 감각들이 다시 안으로 들어올 때, 이주노동자 문제뿐 아니라 한국에 이질적인 것들이 들어오는 것에 관한 전혀 다른 감각들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세대 간 전수가 일어날 수 있어요.

이욱연= 우리 스스로 밖의 것들을 끌어와서 우리의 단일한 조성들을 흐트러뜨리는 일이 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민족주의 논쟁’ 전문가 3인 토론
제목이없어졌음

‘근대국가 만들기’와 ‘민족주의’는 일제 식민지와 분단을 거치며 한국 지식인 사회의 가장 큰 화두 중 하나였다. 이는 ‘해방전후사’를 보는 다양한 시각과 관련해 최근까지도 많은 논쟁을 낳았다. 지난해 뉴라이트 열풍 속에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발간에 참여했던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정치학)와 탈근대 역사해석을 주도하며 ‘근대를 다시 읽는다’를 펴낸 윤해동 성균관대 연구교수(한국사)가 23일 경향신문사에서 이 문제를 논했다. 사회는 신용옥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상임이사가 맡았다.

신용옥=비판론의 관점에서 기존 학계의 민족 및 민족주의 인식의 공과를 어떻게 봅니까.

윤해동=근대 이행기에 민족주의는 자유, 평등이라는 기본권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 이념을 확산시켰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민족주의적 해석은 부정적 측면이 더 많았습니다. 민족주의는 과도한 대립 도식을 상정하고, 내부적 억압성 같은 게 있죠. 외부적으로도 과거에 대해 대립적 측면을 내세워 역사 해석에 지나친 단순화를 초래했고요. 민족주의만 내세워 20세기 역사 전체를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많아요.

김일영=해방 후 역사 연구와 관련, 식민사관이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민족(주의)을 강조하는 것은 이해해요. 문제는 정치적·운동적 목적에서 민족(주의)을 강조하는 것과 학문 연구에서 그것을 유일한 가치기준으로 강조하는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거죠. 또한 우리는 근대적 의미의 개인이 형성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민족주의라는 집합 담론 속에 그냥 개인이 실종돼버렸죠. 거기에는 민족주의가 지대한 역할을 했어요. 추구할 가치에는 민족 외에 민주, 민중, 개인 등 다양할 수 있는 거죠.

윤해동=식민지 시기나 해방 이후 역사를 민족주의 측면에서 접근하게 되면, 해석할 수 없는 영역이 너무 많습니다. 아주 다양한 가치들이나 인간의 삶이 있는데, 그것을 민족주의 속으로 포섭해 해석하거나 그렇지 않고 배제해 버리면 제대로 해석되지 않는 영역이 많이 생깁니다.

신용옥=‘모든 근대는 식민지 근대’라는 명제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식민지 근대화론, 개발-수탈론 등 기존 문제의식과의 차이점은 무엇이죠.

윤해동=식민지 근대론은 식민지와 근대를 분리하는 사고에 입각해 있어요. 식민지 근대화론은 서구의 자본주의적 양상 등을 근대화의 지표로 해서 식민지 현실을 설명하려 했으며, 수탈론 역시 식민지 현실이 이에 미달한다는 식으로 취급해 왔습니다. 이것은 식민지 자체가 근대의 고유한 현상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식민지는 특수한 양상이 아니라 근대의 보편적 양상 중 하나입니다. 해방 이후 사회 역시 상당히 식민지성을 갖고 있습니다.

김일영=저는 수탈론에 별로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식민지 근대화론에 동의하는 의견 표명을 한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현대정치사 전공자 입장에서 해방 이전과 이후 사이는 단절보다는 연속성이 크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60년대 이후 산업화가 일제 시대에 깔아놓은 철도나 항만때문에 가능했다는 뜻이 아니라 개발에 대한 사람들의 마인드가 그때 형성되었다는 측면에서 그렇죠.

신용옥=김선생님은 민족주의 비판론에 동의하시는 듯 한데요, 하지만 선생님을 국가주의라고 비판한다면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김일영=‘해방전후사의 인식’이 민족을 너무 강조한 반면, ‘재인식’은 국가를 너무 강조했다고 하는데 그건 오해입니다. ‘재인식’에 실린 것 중 국가형성 과정을 연구한 글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국가주의와 구별돼야 합니다. 서구의 스테이트 빌딩을 연구한 찰스 틸리를 국가주의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근대를 거부하건 수용하건 근대의 중요한 양상 중 하나가 생활과 사고의 단위가 국민국가이기 때문에 국민국가 형성 과정을 연구하는 거죠.

국가주의라고 비판하기 위해선 그 연구자의 세계관 속에 국가와 민족과 사회, 개인이 하나이고, 개인은 오로지 국가에 봉사할 때만 의미 있다는 식의 국가유기체론적인 사고가 담겨 있음을 증명해야죠. ‘재인식’에 글 쓴 분들 중 논문이나 공석에서 그런 발언을 한 사람은 없어요.

신용옥=박정희 정권의 발전국가론을 국가주의적 입장으로 보는 견해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김일영=그것도 오해인데요. 발전국가론은 국가가 경제에 깊이 개입해 경제발전을 견인한다는 국가개입주의지 국가유기체론적 국가주의는 아닙니다. 만약 국가개입주의를 국가주의라고 한다면 박정희 시대의 진보 진영도 국가주의적이죠. 박정희나 정권 담당자들은 발전을 위해 국가가 개입해 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반대편의 민주화 진영은 국가가 개입해 분배를 해야 한다고 했거든요.

윤해동=제가 ‘재인식’에 대해 ‘국가주의’라고 표현한 것은 오해의 여지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다만 이영훈 선생님의 글 등 몇 군데에서 ‘대한민국 중심주의’의 혐의가 있어서 이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단순화가 있었던 듯 합니다.

신용옥=식민지 시기 민족 이외의 다양한 집합 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민족은 어떤 위치이며, 앞으로 민족과 다른 집합 정체성들간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나요.

윤해동=민족주의가 사라질 수는 없겠지만 지식적으로는 상대화시키면서 네이션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나가야 되지 않을까요. 한국사회만 봐도 문화 다양성, 인종적 다양성이 증가하고 있어서 민족지상주의적 가치를 내세워 사회를 끌고 나갈 수 있는 시대는 지난 것 같아요. 저는 친일 민족반역자 진상조사 청산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데요. 그 법안 첫머리에 ‘민족 정기를 회복한다’와 ‘사회 정의를 실현한다’가 같이 나와요. 이 두 가치는 굉장히 충돌하죠. 지금 한국사회에서 민족정기를 회복한다고 하면, 인종적 문화적으로 정체성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 들어와 살아야 되고, 또 기여하는 사람들은 다 빼놓고 정기를 회복하겠다는 거죠.

신용옥=결국 민주주의를 어떻게 성취하고 그 경로를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로 이어지는 듯합니다.

윤해동=지금까지 변혁 주체를 설정할 때 민족, 민중과 같은 집합적 주체를 설정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김선생님처럼 거대담론의 억압성을 강조하며 개인 주체의 형성이 더 필요한 게 아니냐는 자유주의적 담론도 있었는데요. 그런데 과연 자율적 개인이라고 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 성립될 가능성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대신 저는 공통의 이익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공공적 가치라는 걸 생각해봤습니다. 가령 식민지 시기에 최종적으로 독립이나 민족해방이란 문제를 갖고 식민지 국가와 대결할 수 없는 그런 식민지인들이 심을 수 있는 중요한 가치 중 하나가 공공적 가치입니다. 그런 집단적 의사 표시는 매우 다양한 형태를 띠었지만 그게 독립운동으로까지 취급되지는 않고 있죠. 저는 그것이 사회의 중요한 주체 형성의 과정일 수 있다고 봅니다. 집합적 주체냐 개인 주체냐 문제보다 거꾸로 공동의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해 왔느냐는 것을 중심으로 보자는 거죠.

김일영=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사이에 차이점뿐 아니라 공통점도 많은 것 같아요. 집단주의적 사고를 하는 거죠. 한쪽은 집단의 내용이 국가고, 또 다른 쪽은 민족이죠. 민주화 이후 국가주의적 사고는 극복하기 쉬웠던 반면 민족지상주의자들의 생각은 쉽게 극복이 안됩니다. 집단주의적 사고를 극복하려면 민주주의로만 되는 게 아니라 자유주의를 강조해야 합니다.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점에서 민주주의도 미완이지만 그 못지 않게 자유주의도 미완의 프로젝트입니다.

윤해동=산업화·민주화 세력 사이의 공통점이라면 저는 오히려 산업주의, 성장주의의 측면을 꼽고 싶습니다. 분배 이야기가 많이 들리기도 하지만, 노무현 정권에 참여하는 민주화 인사들이 과연 어떤 신념을 갖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한국 민주주의가 단계적으로 향상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가 그렇게 단계적으로 딱 구분될 수 있는 것일까요. 오히려 절차적 민주주의가 아직 심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드러나는 것 아닌가요. 의회제도나 정당정치가 제 기능을 못하고 있고, 사회적으로 다양한 부분에서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못한 것이 큰 장애가 되는 것 같아요.

신용옥=민족국가 건설론과 관련된 해방 후 우리 사회의 과제를 좀더 얘기해보죠.

윤해동=일제 때부터 해방 후까지 민족국가 건설은 지상 과제로 돼 있는데, 이것으로 식민지나 해방 이후를 다 설명하려고 하는 발상은 국가 중심적 사고입니다. ‘스테이트 메이킹’에 과도한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면 그 뒤에 전쟁도 마찬가지로 정당화합니다. 50년대 이승만 정권에서 했던 ‘스테이트 빌딩’의 측면과 50년대 북한이 했던 것이 비슷했죠.

김일영=해방 이후 한반도 정세는 미·소나 좌우의 협력이 점점 멀어져 가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어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사항 내용 자체가 이용함직하다고 그 자체를 이상화해서 ‘우리가 이것을 했어야 하는데’라며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아요.

신용옥=우리 내부의 직접적인 해방 역량으로 해방을 성취했다면 해방 후 내외의 문제를 풀어가는 데 훨씬 더 자율적이지 않았겠느냐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일제시대의 해방 역량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럴 때 해방 주체를 설정할 수밖에 없고, 어떤 운동들을 해왔으며 그 기반이 무엇이었는지 밝히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봅니다. 끝으로 우리 사회의 민족주의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 보는지요.

윤해동=민족주의는 평화와 별로 친연성이 없는 이데올로기입니다. 민족이라고 하는 가치를 우선하며 통일을 지상과제로 둘 때, 전쟁이 일어났잖아요. 앞으로도 민족주의를 통일이라는 목표와 과도하게 연결시켜서는 안된다고 봐요.

김일영=보수와 진보 사이에 역전이 일어났고, 그 역전 과정에서 진보세력 안에서도 분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70년대만 해도 진보진영에서는 통일되지 않고는 민주화도, 경제발전도 어렵다며 민족지상주의를 얘기한 반면, 보수진영은 북한에 흡수통일될 것을 우려해 ‘선건설 후통일’을 얘기했죠. 90년대 이후 남북관계가 역전되니까 이제는 북한이 통일에 대해 장기적인 태도를 취했죠. 남한의 진보진영도 일부를 빼고는 통일에서 평화, 공존 쪽으로 옮겨갔어요. 거꾸로 극보수인 사람들은 흡수통일하자고 난리예요. 통일론, 민족주의가 진보진영의 전유물이 아니게 됐다는 뜻이죠. 민족주의는 보수 중에도 상당히 오른쪽 사람들의 소유가 되고 있어요. 그런데도 일부 진보진영은 여전히 그 담론을 붙잡고 있고, 보수 쪽에 있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만 나오면 공연히 기가 죽어요. 양쪽 다 한심한 측면이 있습니다.

경향신문 www.khan.co.kr

정리 손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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