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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9.05 [펌]김진숙의 항소이유서
  2. 2006.02.28 글을 잘 쓰는 Tip 움베르토 에코의 충고 11가지 1

김진숙의 항소이유서

아래 글은 김진숙님의 1995년도에 썼던 항소이유서입니다.
원글은 영남노동운동연구소의 기관지 연대와 실천 1995년 12월호에 실렸던 것입니다.

편집자주 : 부산노동자연합 김진숙 의장은 지난 10월13일 제3자개입,폭력, 업무방해,집시법 위반 등으로 구속되었다가 11월20일, 1심공판에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2년으로 풀려났다.
93년 동래봉생병원 노조의 59일에 걸친 치열한 파업투쟁을 지원,지지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시 동래봉생병원 노조는 신생노조로서 노조인정, 최소한의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한 상태였다.
그러나 병원측은 대화를 통한 해결보다는 합법적인 노동조합을 "빨갱이 집단"으로 내몰며 구사대를 동원, 대부분이 여성인 조합원들을 무차별 폭행하는 등 노조탄압에만 혈안이 되었다. 부산,양산지역 노동자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었고 동래봉생병원노조의 투쟁은 지역적 투쟁으로 확산되어갔다. 당시 누구도 동래봉생병원의 악랄한 노조탄압을 남의 일로 간과할 수 없었던 것은 병원의 비인간적인 폭력행위가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진숙 의장은 노조사수를 위해 울부짖는 동래봉생병원 노동자들의 절규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속되어야 했던 것이다. 현재 항소심 계류 중이다.


물이 0도에서 얼듯이 세상만물은 영하로 내려가야지만 얼어붙는 줄 알았습니다.

출감한 후 따뜻한 방안에서 발가락이 몹시 가렵고 잠시도 못참고 긁어대면서도 그저 무좀이려니 했습니다. 발가락을 끊임없이 긁어대는 걸 보다못한 친구가 제 발가락을 들여다보더니 화들짝, "동상이다!"하길래 그때서야 발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말 새끼 발가락부터 빙돌아 뒷꿈치까지 벌겋게 얼어 있었습니다. "부산엔 한번도 영하로 내려간 적이 없는데 발을 우쨌길래 이래되?ㅃ??"하는 친구의 핀잔을 들으며 가만히 생각하니 짚이는 구석이 있더군요.

제가 있던 독방은 누우면 머리끝과 발끝이 벽에 닿을 정도로 좁았습니다. 자연히 뼁끼통으로 불리우는 변소문짝이 발끝에 닿았었죠. 담요를 덮으면 발치께 담요 한자락이 변소안으로 들어가 버립니다.아크릴로 된 변소문짝이 달려있긴 해도,밑이 휑 뚤려있어서 잠결에 여차하면 담요자락이 그리로 들어가 버리거든요.그래서 의식적으로 담요를 자꾸 위로 끄집어 당기고,잘때도 그런 잠재의식이 작용을 했던지 발이 시려워서 새벽6시 기상전에 늘 깨곤 했었습니다.물론 양말은 신었었지요.

영하가 아니더라도 얼어버리는 게 있다는 사실을 무슨 귀중한 진리나 되는듯 깨닫습니다. 엄동설한 얼음이 꽁꽁 얼어있을 줄 알았는데 단풍이 들어 있더군요. 하늘도 너무 파랗구요. 오랫동안 불치의 병을 앓다 방금 일어나 새로운 생명을 얻은 사람의 희열이 이만할까요?

길거리에 뒹구는 은행잎 하나도 예사롭질 않고 골목 모퉁이집 대문 사이로 빼꼼 보이는 국화 한송이에도 문득 목이 메이는 요즈음입니다. 너무 호들갑 스럽지요?

갇혀있던 기간이 40여일이 채 안됨에도 밖에서의 4년보다 길고, 알록달록한 사람들의 옷색깔도 소중하게 눈에 들어오고,낯선 이의 웃는 얼굴에서 십년지기를 만난듯 가슴이 뭉클하기도 합니다. 그런것들을 그만큼 간절하게 그리워해서 그럴거예요. 온종일 보이는 거라곤 높다란 회색담 만큼이나 암울한 그곳 사람들의 표정,사방 회색뿐인 벽,회색의 철문,횟가루 떨어져 내리던 관뚜껑만한 천장. 그런것들에선 바람만 나올뿐이었죠. 햇볕 한부스러기 기웃거리지 않는 외진 독방엔 한낮에도 손을 내놓지 못하게 하는 독사의 혓바닥같은 시린 바람만 온종일 낼름거리며 소름끼치게 온몸을 핥을뿐이었습니다.
열심히 살아야겠구나.내 인생에 최선을 다해야겠구나.나가면 사람들한테도 잘해야지.어떤 경우라도 부끄럽지 말아야지.그런 다짐들도 어째 그리 절박하던지.

노태우씨도 그럴까요. 그는 무슨 다짐을 하면서 징역살이를 깨고 있을까요. 아주 근엄했던 사람. 그가 노동자문제에 대해서 언급을 하는 경우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던걸로 기억됩니다.

"불법 노사분규 엄단, 국가의 기반을 흔드는 근로자들의 집단행동에 대해선 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 그런 발표가 있을때마다 어김없이 노동자들이 굴비두름처럼 줄줄이 엮여 감옥으로 끌려갔고, 저 역시 그 행렬의 틈바구니에 끼어 90년에 145일간 복역하기도 했습니다.

구더기가 꾸물꾸물 기어나오는 한여름 징역을 살면서도 법이 그러니까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옳고 그래서 이렇게 갇혀있는 건 부당하다는 울분이, 진동하는 똥냄새보다 진하게 꺽꺽 숨통을 막아도 법을 어긴 현실은 쇳덩어리 철창처럼 요지부동이기만 했습니다.

그 근엄하기만 했던 대통령께서 어느날 갑자기 못난 노태우가 되어 눈물을 찔끔거리며 0.75평 제 독방에까지 찾아들었습니다.
비자금이라고도 하고 도자금이라고도 하는 그 돈이 5천억이라고도 하고 그보다 훨씬 많다고도 합니다. 억대라 하면 만져보기는 커녕 평생을 가봐야 먼발치서 구경할 일조차 쉽지않은 노동자들에겐, 5천억이 만원짜리 지폐로 5톤트럭 11대가 꽉 찬다고 해야 서서히 입이 벌어집니다.

그러면서 40년 혹은 50년 자신들의 노동자 인생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20여년전 부인이 시집올때 가지고와 이제는 거울이 뿌옇게 벗겨져 흰머리카락도 제대로 뽑을 수 없을 만큼 낡은 8자짜리 장농과, 펴고 접을때마다 벌건 녹이 가루져 내리는 호마이카밥상,군내나는 보온밥통과 때절은 신앙촌 담요뭉치까지 다 합치고, 아이들 국민학교 교과서까지 구석구석 ?y어 실어봐야 5톤 트럭 두대를 미처 못채울 자신들의 인생 전부에 대해서 말입니다.

노태우씨가 국민들 앞에 청렴결백을 맹세하며 대통령 취임선서를 한 날로 부터, 역사에 한점 부끄러움 없는 대통령으로 남게되어 감개가 무량하다는 퇴임사를 한 날까지, 5년 동안 공장에서 일을 했던 노동자의 퇴직금이 500만원을 넘기가 쉽지 않은게 이땅 노동자들의 현실입니다.

제가 한진중공업에서 받은 퇴직금은 113만원이었습니다. 찬란한 미래로 가는 희망의 꽃가루인듯, 온몸에 용접불똥을 뒤집어 쓰고 여름이면 55도가 넘는 선박 탱크안에서 손톱 밑에까지 땀띠가 박혀 귤껍질 같은 온몸에 소금을 벅벅 문질러가며(소금을 문지르면 덜 가렵거든요), 죽음과 산재사고로 부터 한순간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5년의 세월동안, 결근은 물론 지각 한번 안하고 받아든 퇴직금 113만원은 서러워 목이 메이면서도 제 일생에 처음 만져보는 큰 돈이기도 했습니다.

지루하시죠? 그래도 이왕 읽으신거 제가 살아온 인생얘기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18살 순진한 근로자가 왜 싸우는 노동자가 되고, 서른여섯 장년이 되어 두번의 전과기록을 가진 전과자가 될 수 밖에 없었는가 하는 사연을.
끝까지 읽어주시면 그것만으로도 저에겐 큰 격려가 될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는 지금 회한의 늪으로 자꾸만 빠져드는 심정이거든요.


열여덟살. 누가 그랬지요. 숫자만으로도 찬란한 축복받은 나이라고. 그 나이에 공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반여동 대우실업, 가난한 농촌출신인 저에겐 어마어마한 공장 건물과 100대가 넘는 통근버스를 가진 회사라는 것 만으로도 가슴벅찬 자랑거리이기에 충분했었습니다. 시키는대로 일을 했지요. 선적이 바쁠때는 일주일간 곱빼기 철야까지 해가며 비록 점심시간에 길다랗게 줄을 서서 밥을 타는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서서 졸면서도, 철야를 못하겠다거나 오늘은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은 감히 엄두도 못낼 일이었습니다. 손가락에 물집이 가실 날이 없어도, 쪽가위질이 서툴러 옷감을 상하게 하고 그때마다 볼때기를 쥐어 박히고, 행동이 빠리빠리하지 못하다고 발길질에 이리 채이고 저리 채여 종아리에 시퍼런 멍이 가실 날이 없었어도 매월 7일 월급날을 기다리는 기쁨 하나로 버텼습니다. 기숙사에 돌아와서는 저녁마다 베갯잇이 흠뻑 젖어 아예 베개위에 수건을 덮어야 하고, 하얀 벽위로 새카맣게 기어오르던 빈대에 물어뜯기면서도 그 생활이 기꺼울 수 있었던 건 희망 때문이었죠. 이 악물고,

어머니 말씀대로 이 악물고 몇년만 고생하면 나도 보란듯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큰만큼 욕심도 많았습니다. 내 공부도 하고 싶고," 니가 좀 고상이 되드라도 저거 하나만 니가 맡아서 높은 핵교만 마쳐주면 내가 여한이 없겄다"시며, 하나뿐인 아들인 남동생 진학을 간절히 바라시던 아버지 소원도 들어드려야 하고,고생만 하신 부모님 호강도 시켜드리고 싶고... 하루 스물네시간은 정해져 있는거고, 남들보다 빨리 성공하는 건 그 만큼 부지런한거 밖에 없다는 걸 좌우명으로 삼기까지는 채 일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여름에는 해운대 백사장에서 아이스크림 장사를 했습니다. 고되고 자존심이 상해서 그렇지 벌이는 공장보다 낫다길래... 그해 여름 태풍이 불어서 아이스크림 장사는 보증금 3만원만 떼이고,밥대신 주식으로 삼았던 라면 외상값만 고스란히 빚으로 남더군요.

신문배달도 했었죠. 새벽엔 조간, 오후엔 석간.낮시간 동안엔 서면일대 다방들을 돌아다니며 땅콩도 팔고 주간지도 팔고 그랬습니다. 팔아줄때까지 끈적거리며 붙어 있는다고 예사로 쥐어박히며-. 열아홉의 시퍼런 자존심보다는 풀칠해야 할 입이 휠씬 더 절박했었죠.

새벽 4시 통행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우유배달도 해봤습니다. 오후 두시쯤 배달이 끝나면 싸구려 샴푸나 주방세재 외판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루종일 걸었죠. 한걸음한걸음이 돈이다 생각하니 발목이 퉁퉁 부어도 아픈 줄을 몰랐습니다. 한겨울에도 연탄불을 못 피운 방에서, 이불 하나가지고 한자락은 깔고 한자락은 덮어가면서 3년을 살았습니다. 스폰지 깔개 하나를 3년만에 장만을 하고 어찌 그리 좋던지... 계획만큼 욕심만큼 통장이 따라와주는 건 아니고, 꿈과 통장 사이에 서서히 체념이라는 게 자리잡아가기 시작하더군요.

남들도 다 이렇게 사나. 울긋불긋 모자쓰고 놀러가는 또래의 아이들을 보면 괜히 우울하고 일할 맛도 안나고. 인간답게 사는걸 포기해야 했습니다. 현실이 그걸 강요했죠. 동생은 이미 대학에 입학을 했고 그 전의 벌이로는 동생하숙비 조차 빠듯했습니다.

결단을 내리듯 찾아든 곳이 버스회사였습니다. 122번. 시내버스 안내양이 된거죠. 그때만하더라도 안내양은 운전기사나 배차주임의 밥이고 안내양은 갈보보다 더한 창녀라는 소문들 때문에 안내양이라면 버린 여자 취급하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절대 술집이나 버스차장만큼은 안된다시던 어머니와의 약속을 어겼습니다. 나만 깨끗하면 어머니도 이해하실거라 생각했습니다.

보세공장이나 가방공장,신발공장의 세배가 넘는 월급보다 더 중요한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새벽 4시15분, 김해에서 첫차로 나오면 충무동까지 하루 여섯번 왕복. 차고지에 돌아가 입금하고 속옷 구석구석까지 홀딱 벗고 항문까지 몸검신 당하고, 다시 나와 빠께스에 하이타이 풀어 수세미로 차 청소하고 숙소에 들어가면 일러야 새벽 1시30분. 두시를 넘기가 예사였습니다. 그리고 또 4시15분. 이틀에 한번씩 쉬게 해준다는 건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오히려 배차주임이 쉬라할까봐 조마조마 했었죠. 규정대로 휴일찾아 먹다간 수입이 1/3로 줄어들거든요. 자면서도 잠꼬대를 하는건 물론 밥을 먹으면서도 주례 삼거리 나오세요 소리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아침에 학생들 등교시간이면 문을 닫지도 못하고 버스는 출발을 하죠. 김해 대저에서 구포까지 그냥 대롱대롱 문짝에 매달린 채 구포다리를 건넙니다.

손님 수십명의 생명이 제 두팔에 매달려 있다는 생각. 난 언제까지 이 무게를 버티며 살아야 하나. 그렇게 구포다리를 지날때면 문득문득 그 팔을 그만 놓고 싶다는 생각을 날마다 했습니다. 고향을 떠나올때 꼬깃꼬깃 접은 5천원 짜리를 쥐어주시며 "객지밥이 오죽허겄냐, 밥이나 굶지마라"시며 내내 우시던 어머니가 아니라면, 합격통지서를 들고 "우리집안은 인자 고생 끝났어."하며 환하게 웃던 동생의 그말이 아니었다면 전 그 질긴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설날도 고향엘 못가고 색동옷의 손님들을 온종일 실어나르고 숙소에 돌아가니 어머님의 부음이 기다리고 있더군요.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어요. 워낙 돈독 오른 깡다구로 통했으니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고향엘 한번 다녀오라고 해도 안 갈까봐, 일부러 고향 보내주려고 그런 농담을 하는 거려니 했지요.

그날 아침에 이미 위독하시다는 전보가 도착을 해있었는데도, 대신 일해줄 사람이 마땅치 않아 알리지 않았다는 배차주임의 평소와 다른 변명에 그제서야 무릎이 툭 꺾이더군요.

임종도 지키지 못한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서도, 버스회사가 있던 김해쪽으로는 고개도 돌리기 싫었습니다. 신문광고를 보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찾아간 곳이 영도에 있는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였습니다.

용접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남자들이 하는 일이니 다른 공장보다 돈이 많을 거라는 그 생각 뿐이었습니다. 사내직업훈련소에서 기술을 배우고 용접기능사 자격증을 따고 배치받은 현장은 지옥이 이러랴 싶었습니다.

여기저기 철판들이 괴물처럼 솟아 있고, 몇발자욱을 떼기도 전에 용접불똥과 그라인다 쇳가루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덮쳐 왔습니다. 이곳에서 일을 해야 한다니. 저 높은 배위를,저 아슬아슬한 사다리를 타고, 한쪽어께엔 40㎏짜리 홀더를 메고 , 또 한쪽 어깨엔 작업공구통을 메고 안떨어지고 오르내릴 수 있을까. 용접가스와 그라인다 먼지 ,가우징가스에 뒤덮여 발끝이 보이지 않는 탱크안에서 질식하지 않고 살아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가용접 해놓은 철판이 바로 옆에서 텅텅 소리내며 쓰러지고, 수십키로짜리 철판이 족장위에서 미끄러져 코앞에 떨어지는 일은 예사였습니다.

비오는 날 수십미터 족장위를 미끌거리며 곡예를 하듯 홀더를 끌고 작업을 해야 하고, 바람이 몹시 부는 날 바다에 떠있는 선박표면을 용접할때면, 폭 30㎝짜리 족장위에 서 있는 것 자체가 묘기였습니다.

마침내 올것이 오고야 만듯이 넘어지는 철판에 깔리는 사고를 당하고 그 사고로 지금도 오른쪽 발목이 온전치를 못합니다. 그때 병원에 문병을 오셨던 동료분들이 그러시더군요. "기름밥 묵기가 쉬분 줄 아나. 그래야 옳은 땜쟁이가 되는기다. 삼년 넘은 사람중에 빙신 아닌 사람이 하나또 없다."

저도 그렇게 옳은 땜쟁이가 되어갔고, 그렇게 서러운 기름밥그릇수가 쌓여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노동조합이 뭔지도 몰랐고, 그런게 제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거라곤 꿈에도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아침 출근 타각기를 찍을때 내가 무사히 살아서 저녁퇴근 타각기를 찍을 수 있을까 두려울 뿐이었고, 저녁 퇴근타각기를 찍을 때면 오늘도 살아냈구나 안도하는 그런 생활일 뿐이었습니다.

13만원 가량의 기본급으로는 방세 3만원 내고, 이래저래 한푼씩 갈라붙이고 나면 작업복 빨 아댈 빨래비누 하나 못사쓸 형편이라, 잔업 한시간이라도 더 하려고 아둥바둥하고, 철야라도 있는 날이면 제일 먼저 철야신청을 하면서 나이드신 분들한테 "딸린 식구도 없는기 벌써르 저래 돈독이 올라가 우짜노" 핀잔을 들어도 그저 칭찬이려니했습니다.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철판에 코를 박고 그렇게 청춘이 흘러도 잔업시간이 채워지는 기쁨 하나로 살았습니다.

친구 만나서 마시는 커피값 한잔도 목돈이고, 친구들이 놀러오면 하다못해 새우깡 한봉지 값이라도 들어야 하는게 아까워,만나는 친구하나 없이 이십대 청춘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5년을 보내던 해. 노동조합 대의원 선거가 있던 겨울이었습니다. 주변에 같이 일하시던 아저씨들이 "니는 처자식 멕여살릴 걱정도 없고, 찍혀봐야 우리보단 헹펜이 안 낫나. 니가 총대한번 메봐라" 하시면서 대의원 출마를 권유하실 때만 해도 귓등으로 들어 넘겼습니다. 그런건 노동법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남 앞에서 말도 잘하는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거라 생각했지, 저 같은 건 언감생심 꿈도 못꿀 일이었거든요.

그때 제가 일하던 배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작업중이던 갑판위에서 동료한분이 수십미터 바닥으로 떨어져 뇌가 수박처럼 쪼개져 즉사를 했습니다. 발도 얼고 손도 얼고 몸이 꽁꽁 얼어붙어 손발이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을 만큼 그렇게 추운 날이었습니다. 아. 전 그때의 그 추위를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요. 안전과에서 관리자들이 ?i아오고 사고보고서를 작성한다고 목격자들의 진술을 받더군요. 바람도 많이 불고 몹시 춥고, 그래서 바람막이 하나없는 바다위 갑판작업은 무리였다는 얘기는 하나도 없고 그저 그들이 작성해온 문구는, 사고자가 옷을 너무 많이 껴입어서 행동이 둔해서 추락한 걸로 적혀 있고 거기에 지장만 찍으라더군요.

비오는날 감전사고로 숯덩이처럼 새카맣게 그을은 주검, 족장위에서 바다로 떨어져 일주일만에 찾아낸 퉁퉁불은 주검, 떨어지는 철판에 깔려 형체도 알아보지 못할 주검. 일년에도 수차례의 그런 동료들의 주검 앞에 그런 보고서가 작성 되었을거고, 제가 그렇게 죽어도 저런 보고서가 작성되려니 생각하니 그저 남의 일일수만은 없었습니다.

가족들이 시신을 회사문 앞에 갖다놓고 울부짖어도 그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본인 부주의에 의한 실족사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습니다. 목격자들이 다 있는데 어디와서 생트집이냐고, 죽은 시체놓고 한 밑천 잡으려 한다고. 고추장에 비벼놓은 퉁퉁불은 라면처럼 쏟아져 나와 뒹굴던 그분의 깨진 뇌수가 며칠을 눈앞에 어른거려 라면봉지만 봐도 토악질이 났습니다.

보상이라도 제대로 받게 해드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린애들 학교라도 마치게 하는게 그분의 마지막 소원을 지켜드리는 일 같았습니다. 자식들 만큼은 높은 학교 보내서 애비처럼 험한 고생시키지 않겠다는게 노동자들의 한결같은 소원이니까요. 제 주위 분들 중에는 자식들 상고는 보내도 절대 공고는 보내지 않는게 무슨 불문율처럼 돼 있거든요. 상고를 보내면 볼펜을 굴리지만 공고 보내봐야 공돌이 밖에 더 되겠냐며-.

그렇게 해서 대의원에 출마를 했습니다. 순진했었죠. 대의원 등록부터 우여곡절과 흑백논리의 시작이었습니다. 대의원 등록 서류를 가지러 노조에 가니까 노조에서 그러더군요. 니네 부서엔 이미 출마할 사람 다 정해져 있다고. 사실 그렇게 해왔습니다. 저도 5년동안 대의원 선거라곤 제가 출마하던 해에 처음 해봤으니까요.

자기네들끼리 이름써서 올리면 그게 대의원이고, 그중에서 돈 좀쓰면 간부되고 더 쓴 놈이 위원장 되는거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현장 노동자들은 몇년가야 노조가 어디 있는지 위원장이 누군지 알 수도 없고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투표가 끝나고 대의원에 당선되어 대의원대회에 참석을 하니 전부 완장(관리자들) 일색이었습니다. 몇번을 손을 들어도 발언기회가 주어지지도 않고 일사천리였습니다. 회의가 끝나자 일제히 송도횟집으로 모셔져 진탕먹고 간부라는 사람들은 어디서 데려왔는지 색시들과 쌍쌍이 춤판이 벌어지고-.

물론 현장에선 조합원들이 죽음을 넘나들며 작업을 할 시간이었죠. 돌아오는 길에 차비나 하라며 봉투를 하나 건네 주더군요. 좋은게 좋은거라며-. 집에 와 열어보니 10만원이 들어있었습니다. 기본급 13만6천1백원이던 86년도에.

아무 소리도 안하고 자기들 하는대로 박수치면 따라서 치고, 손 들라면 손이나 들어주고 그러면 최소한 이런건 보장되겠구나 하는 갈등이 없진 않았습니다. 아니 좀더 솔직해져야 겠군요. 밤새 천장에 새파란 종이돈이 왔다갔다 하고 가슴이 벌렁거리고 그랬습니다. 그래도 그돈을 받으면 저를 대의원으로 뽑아준 아저씨들을 똑바로 쳐다볼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평생을 짓밟히고 억눌려 살아온 그분들의 기대를 배신하면 죄 받을것만 같아 결국 그돈을 돌려줬습니다. 그 돈은 수십명 조합원의 목숨값이었거든요. 그날로 찍힌 거죠.

노동조합의 예산결산 보고서는 그야말로 코메디 각본이었습니다. 멀쩡히 살아계신 저희 아버지도 돌아가신 걸로 되어 상조비가 지출되어 있고, 10년전에 환갑이 지난 분이 작년에 환갑경조비를 타먹고, 돌아가신 분이 환생을 해서 환갑을 치루고, 국민학교 다니는 딸내미가 결혼을 해서 축의금을 타먹고.(이런 사실은 이미 폭로가 되어 신문에 기사화된 적도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조합원 중에 산재를 당하면 노조에서 지급하게 되어있는 위로금은 장부상으로는 분명히 지출이 되었음에도 막상 당사자는 그런게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조합원 삼천명을 26년동안 그렇게 우롱해온 것입니다. 조합원의 권익단체인 노동조합에서.

점심식대가 개인당 630원씩 부담이 되었었는데 쌀이나 부식은 노조에서 결정을 하는대로 지급되었는데 식사의 질은 형편없고, 하다못해 안전화,작업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부상으로는 만원짜리를 구입한걸로 해놓고 실제적으론 팔천원 짜리를 지급하는 식으로-.

공식적으로 징수되는 조합비를 착복하는 걸로도 모자라 온갖 명목과 구실로 조합원들의 목숨을 갉아먹던 노동조합은 비리의 온상 복마전이었습니다.
그런 사실들이 하나하나 폭로되고 저에겐 부서이동이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영도 공장에서 버스로 한시간도 넘게 걸리는 우암동에 있는 직업훈련소로 가라더군요. 조합원들은 영도에 있는데 우암동 직업훈련소로 발령을 내는 건(당시 직업훈련소에는 강사들만 15명정도 근무를 했고 그중 조합원은 8명) 노조활동 탄압이라고 거부하다가 명령불복종으로 해고 되었습니다. 86년 7월 전두환 군사정권시절의 일이었죠.

노조간부들을 싸그리 잡아다 삼청교육대에서 병신 만들어 내보내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이런거 저런거 다알고 세상물정에 휜했다면 저도 비겁해졌겠죠. 그땐 몰랐어요. 정말 아무것도.
다만 제가 옳다고 생각했고 기름범벅 손으로 제 등을 두드려 주시던 조합원들의 손길이 천군만마일 뿐이었습니다.


86년 7월14일 해고통지서를 받아들었을때 그냥 다. 전부 다. 쏴아 빠져나가는 느낌. 모든게 와르르 소리내며 무너지는 느낌. 하늘이 무너지면 그럴까요. 습관처럼 회사로 갔습니다. 매일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6시30분이면 출근타각을 찍었던 오래된 습관 그대로 회사엘 갔습니다. 막더군요. 노조간부들이랑, 관리자들이랑, 경비아저씨들이랑.넌 이제 이 회사 사람이 아니라며. 그 땐 그말이 그렇게 가슴에 사무칠수가 없었어요. 넌 이 회사사람이 아니란 말.

철조망이 쳐진 담장안 저 곳에 내 꿈이 있고 내 청춘이 고스란히 있는데...
내 손때가 묻은 용접홀더, 깡깡망치,화이바,불똥맞아 끈 떨어진 안전화,테이프로 누덕누덕 기운 작업복이 그대로 있는데... 난 저길 들어가야 한다고 ...제발 좀 들어가게 해달라고...아스팔트 바닥에 내동댕이 쳐 지면서도 또 ?i아가 매달리고...웃도리 단추가 다 떨어지고 바지 지퍼가 다 뜯어져도... 눈물 콧물 범벅이 된채 발버둥치며 울부짖었습니다.세상에서 할줄 아는 일이란 그것밖에 없고,그 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두달동안...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용접을 하는 게 대단하다고,불량 안내고 일 잘한다고, 연탄가스에 중독된채 출근한날은 회사에 도착해서 쓰러지자,다들 저런 애사심을 본받아야 한다고,당신들 입으로 그러지 않았냐고, 그러던 당신들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수가 있냐고,내가 뭘 잘못했냐고...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어 목이 쉬도록 버둥거리다 돌아오면 손가락 하나 꼼지락거릴 기운도 없이 온종일 누워있다, 떨어진 단추 달고 바지 기워서 꿰입고 다음날 아침 또 나가고...

회사앞에서 장사하시는 아줌마들까지 나오셔서 그러시더군요.그래 뚜디리 맞으면서 말라꼬 맨날 오냐고,그러다가 진짜로 빙신이라도 되면 내만 서러븐 거 아니냐고,막말로 니 하나 죽어도 눈하나 깜짝할 놈들이 아니라고,내 같으면 더러버서라도 잘묵고 잘살아라하고 치아삐리겠다고,니 몸띠가 쇳덩어리라 캐도 저래 큰 회사하고 싸워가 이길수 있을거 같냐고,회사는 권력이 다 뒤를 봐주고있다고...

이튿날 부턴 닭장차까지 와서 막더군요. 그리고는 매일 영도경찰서로 실려 갔습니다.
도로교통법 위반이라더군요. 그래도 갔어요. 아무데도 갈데가 없었거든요. 맞아죽더라도 ,도로교통법을 자꾸만 위반해서 사형을 당하더라도 거기 밖엔 갈데가 없었거든요.

표창장을 받고, 잔업을 100시간 이상씩 하면서 희망을 가꾸어가고, 그 희망에 빨간 빛도 칠해보고 파란색도 입혀가며 무지개빛을 만들어 가던 곳. 거기 말고 어딜가란 말입니까.

한달도 아니고 두달도 아니고 일년도 아니고 이년도 아닌 꽉채운 5년인데.
눈매가 선하던 아저씨들. 그저 등을 토닥여 주는 것만으로 백마디 말을 대신 하던 아저씨들. 눈을 감으면 그 아저씨들의 얼굴이 선하고 눈을 떠도 천장엔 온통 그분들의 까만 얼굴들 뿐인데-.

그날 이후로 전 어딜가나 3자 였습니다.
88년 한진중공업 노조에서(87년 7월 노동자들의 대투쟁때 한진에서도 파업을 통해 어용노조 집행부를 몰아내고 민주집행부를 마침내 세웠습니다) 해고자 복직문제로 파업을 할때, 안건이 안건이니 만큼 제가 참석해서 해고자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이번 기회에 확실히 단결해서 기필코 해고자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조합원들을 선동했다고 3자개입으로 90년 구속이 되었었습니다.

3자. 그게 참 우습더군요. 해고된 당사자가 복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데도 3자라더군요. 약5개월동안 감옥안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전 그 논리를 이해하기가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최근 들어선 3자 개입법이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부당성이 제기된다는 말을 듣고 이해못하는 사람이 나말고도 또 있구만 하는 생각이 들어 내가 머리가 나빠 그런 것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더군요.

저는 악법도 법이니까 지켜야 한다는 쪽 보다는,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하는 나쁜 법은 자꾸 문제제기를 해서 깨버리자는 논리에 더 수긍이 갑니다. 사실 3자 개입금지법은 그동안 노동자 쪽에만 일방적으로 적용이 되어 노사형평의 원칙에도 많이 어긋나고 그로 인해 단결권이 제약 받아온게 엄연한 현실이거든요. 오죽하면 다른 나라에서까지 남의 나라 법을 가지고 입을 대고 그러겠습니까.

여기저기서(사용자만 빼고) 다 나쁘다는 법은 이미 법으로서의 권위를 잃고, 그 법을 적용해봐야 개과천선을 기대하거나 평화를 도모하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아. 어느덧 3자개입법 쪽으로 흘러가 버렸군요. 그 말씀은 나중에 말미에서나 언급을 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제가 연행될 당시의 제 사정말씀을 좀 드려도 될까요? 많이 길어졌는데 그래도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려니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올해 4월달에 부산노동자연합 의장직을 사퇴했습니다. 6년동안이나 해왔고 여러가지 정세가 많이 변하고 있는데 역량이 전혀 발전하지도 못한, 그런 노력도 못해온 제가 그 자리를 계속 맡고 있기는 참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렇더라도 전 노동운동만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가꾸어 나가고 발전시켜나간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추악한 정치인들이나 돈가진 사람들만 살았다면 우리나라는 벌써 망해버렸을 겁니다. 묵묵히 일하고 성실하게 땀흘리는 노동자들이 있고 그 노동자들의 힘이 있기에 썩어들어간 환부를 도려내고 닦아내고 새살이 채워진다고 생각하거든요.

95년 들어서면서 제가 세운 목표는 다시 일하는 노동자로 살자는 것과 한달에 20만원 정도는 저금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취직을 하기로 한거죠. 나이가 들어 더 건강이 안 좋아지더라도 주변 동지들 한테 더 이상 짐이 될수도 없고 노후대책(?)으로 방 한칸은 마련하기로 한 것입니다.

해고자 생활 만 10년 입니다. 일정한 수입도 없고 그러니 생활이 불안정하고 한진 노조에서 생계보조비가 약간씩 지급되긴 하지만 그 역시 조합원들의 목숨값이고, 저도 몸뚱아리 움직여 월급봉투를 받고 그돈으로 고생하는 동지들 밥도 한번씩 사주고, 몇년이 걸릴진 모르겠지만 제가 열쇠를 따고 들어가는 골방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하는게 몇년동안 유예돼온 아주 간절한 바램이었거든요.

취직은 예상보다 휠씬 힘들었습니다. 용접경력 하나만 믿고 찾아갔던 몇군데의 철공소같은 공장들은 제 기대를 무참히 깨버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루 만칠천원의 일당, 열한시간의 노동, 물론 연장수당이나 초과근로수당 같은 건 없구요.

며칠 일했던 감전동 새벽시장 부근의 어떤 공장에서 일하시던 아주머니는 자기 딸네 회사는 생리휴가가 다 있다더라면서 여자가 생리를 하는데도 회사에서 수당을 다 준다면서 웃으시더라고요. 그곳에선 며칠 일하고 3일을 꼬박 몸살을 앓았습니다.

벼룩시장이나 문전옥답 같은 정보지를 보고 몇군데 신평쪽까지 가봤습니다만 사정은 비슷비슷하더군요. 그래도 월급이 좀 왠만하고 근로기준법 대로만 지켜져도 그럭저럭 다닐 수 밖에 없었겠지요. 다닥다닥 붙은 그런 공장들은 그야말로 무법천지였습니다. 법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 그들은 제가 그랬던 것 처럼 지금도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것 조차 모르고 살겠지요.

노동조합만 있어도 그 정도는 아니었겠지요. 저는 비겁했습니다. 감옥에 앉아서 생각을 하니 그때 제가 그런 현실들을 외면하고, 나 혼자만 좀더 나은 밥벌이를 찾아 헤맨게 결국 벌받은 거라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너댓명 혹은 열명. 그런데 들어가서 노동조합을 만들 엄두도 안나고, 설사 만들었다해도 사장과 싸우고(노동조합에 대해 선선히 받아들이는 사장은 아직 이땅엔 없으니까요) 그런 과정에 또 업무방해니, 뭐니 해서 코가 걸릴 건 뻔하고,이 나이에 감옥살이를 또하고 출감해서도 기다리는 건 해고통지서.... 어휴,그 짓을 .... 도저히 엄두가 안나더군요. 그런 상상만으로도 아득해지더란 말입니다.

법적으론 하나도 없지만 현실적으로 너무나 많은 그런 공장들을 몇군데 옮겨 다니면서 저는 분노하기 보다는 무력감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노동운동을 해왔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민주노조가 있는 사업장들은 그 정도는 아니니까, 설마 그런곳이 아직까지 있으랴 싶었어요.국민소득 만불을 넘었다는 대한민국에-.

이 시간에도 그분들은 여전히 그렇게 사시겠지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일이 밀리면 자연히 잔업하고, 명절에도 보너스가 아니라 참치통조림이나 미원 선물셋트 한 상자씩 주면 입이 벙그러져 사장님 칭찬에 침이 마르면서-. 검찰에서 저를 조사하셨던 분에게 그런 말씀을 드렸더니, 에이, 지금이 뭐 60년대요?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검찰에서도 모르고 계시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람들이야 찬밥 뜨신밥 가려먹을 형편이 되겠냐고,근로기준법 위반 사업장이라고 안 가고 그런 형편이라도 되면 오죽이나 좋겠냐고,노동쟁의조정법으로 구속되는 노동자는 숱하게 봤어도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사용자는 몇명이나 되느냐고...

여기는 정말 마지막이다 하는 심정으로 벼룩시장 보고 찾아간 곳이 큰 제과점의 빵공장이었습니다. 아침 7시30분 작업시작 시간은 있는데 마치는 시간은 없는 곳. 그냥 일 끝나는 시간이 퇴근 시간인거죠. 저는 음식을 만드는 곳이라 상당히 위생적이고 청결할 줄 알았는데 그 곳 역시 분위기는 다른 공장과 다를 바가 없더군요. 온종일 서서 일하며 무릎 한번 구부릴 여유가 없어 점심먹으려고 앉으면(하루 중에 유일하게 앉는 시간입니다) 무릎에서 뚝 소리가 납니다. 빵을 굽는 철판을 한개도 무거운데 열개씩 포개 나르고, 상자에 빵을 담고, 담겨진 빵상자를 키보다 높게 쌓아서 곡예를 하듯이 나르고, 조금만 늦으면 빵이 산더미 처럼 쌓여 혼을빼고.

거긴 점심시간도 따로 없어요. 빵굽는 가마 보는 아저씨들이 밥먹으러 가서 빵 나오는게 잠시 주춤하면(그 아저씨들도 교대로 식사를 해서 온전하게 비는 시간은 없습니다) 뛰어가서 밥을 후루룩 마시고는 또 ?i아 올라와야 합니다. 점심시간이라고 늘어지면 쌓이는 빵을 감당을 못하거든요. 한달내 일해야 쉬는 날이라곤 매월 둘째주 화요일 정기휴일과 한달에 한번 비번날 두번뿐이었습니다. 그곳 노동자들 소원은 하루라도 남들 노는 일요일날 노는 거래요.

그렇게 일하고 제가 받기로 한 월급은 40만원이었습니다. 그것도 한두달 일하는거 봐서 정식직원으로 채용이 되면 지급한다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일이 위낙 힘드니까 대부분 며칠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이 위낙 많고, 그렇게 소소하게 나가는 돈도 아까워서 그런 모양이예요.

일을 잘한다고 포장하고 운반하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오늘부터 반죽하는 일을 배우라고 해서 어깨가 빠져라 반죽을 돌리다가 밀가루 범벅이 되어 빵 모양을 한 채 저는 연행되었습니다. 저항하기는 커녕 마음이 홀가분해지더군요.

내일부턴 여길 다신 안와도 되는구나. 발바닥이 부어서 어기적거리면서도 전쟁터에 나가는 것 처럼 뛰어서 출근하는 그걸 안해도 되겠구나. 40㎏짜리 용접홀더 보다 무거운 빵 철판과 키를 넘는 빵상자를 들고 곡예를 하는 그 짓을 이젠 안해도 되겠구나. 그일보다는 차라리 감옥생활이 편하지 싶더라구요.

발바닥이 부르튼거 보다 전 발가락에 동상든게 휠씬 나아요. 동상이 든건 신발을 좀 큰걸 신으면 그런대로 걷는데 큰 지장이 없지만,발바닥이 아프니까 정말 죽겠더라고요.

그나마 간신히 얻은 직장마저 더 이상 다닐 수가 없게 돼 버렸으니 또 어딜 알아보고 무슨 일을 해야할 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하는군요. 출감하고 삼사일은 그저 기쁘고 정신없기만 했는데.

재판장님. 혹시 노동자를 직접 구속해 본적이 있으세요? 그런 경우가 있으셨다면 물론 법을 집행하시는 분이시니까 법리적 해석과 현명하신 판단에 따라 결정을 하셨겠지요. 저 한몸 잘되고 호강하자고 하는 일도 아닌데 그들이 왜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투쟁을 하는지도 물론 생각해보셨겠지요.

저는 감옥안에서 노태우씨 도자금 문제를 지켜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돈의 주인은 노동자들 아니겠어요. 노태우씨가 강제로 빼앗았든 알아서 상납을 했든 결국은 해당기업체에서 뼈빠지게 일했던 노동자들의 몫이 아니었을까요. 이 사회에서 유일하게 재화를 생산해 내는 건 노동자들 뿐이니까요. 그 돈만이라도 제대로 임자를 찾아갔더라면 저는 노동자들이 해마다 줄줄이 감옥으로 끌려가는 숫자가 휠씬 줄었을 거라고 감히 확신을 합니다. 노동자들은 3만원 혹은 5만원의 임금인상 때문에 투쟁을 하고, 그로 인해 해마다 줄지않는 굴비두름의 참담한 행렬이 감옥으로 향할 수 밖에 없는게 현실이거든요. 3만원 혹은 5만원의 돈이 일년동안 그들의 생계에 숨통을 트이게도 하니까요.

열포기 밖에 못했던 김장을 올해는 열 다섯포기 할수도 있고, 작년 추석에는 고향갈때 정종 한병 밖에 못사갔는데 올해는 소고기 두어근 묵직하게 들고 갈 수도 있고, 그게 고향에 계신 부모님들에겐 다음 명절까지 내내 자식자랑이 되기도 하고 그렇거든요. 임금인상이 제대로 안되면, 물가는 자꾸 오르고 명절이 돌아오는 것도 무섭고, 애들 학교에서 운동회한다 해도 한숨부터 나오고 그러는게 그들의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해마다 서슬퍼렇게 엄단을 해대고 그 칼날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노동자들의 투쟁이 끊이질 않는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엄마마저 돈벌러 나가고 없는 집을 지키다가, 친구가 다니는 유치원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 친구 나올때까지 기다리며 하루를 보냈다는 작은 아이에게 노란 유치원 가방을 당당하게 매주고 싶어서이고, 애들이 우리 김밥은 안먹는대 하며 소풍도시락을 그대로 들고 와서는 내팽개치는 큰 아이의 소풍날, 속으론 울면서도 야단을 쳐야만 하는 못난 부모가 아니라 올봄 소풍날엔 우리 아이 김밥에도 쇠고기 볶아넣고 햄도 큼지막하게 썰어넣어주고 싶어서 입니다. 고무공장에서 신발 밑창에 풀칠을 해대느라 갈라터진 아내의 손바닥을 볼때마다 죄스러움으로 외면하는게 아니라, 가슴 떳떳하게 펴고 이제는 정말 그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요. 저는 5년전에도 똑같은 죄목으로 구속된 적이 있는 전과잡니다.
대통령은 바뀌었어도 노동자를 둘러싸고 있는 노동현실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게 이유라면 지나친 자기 합리화일까요?

제가 3자개입 할 수 밖에 없었던 동래봉생병원 노동조합은 합법적 절차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당연한 수순처럼 탄압이 따랐지요. 동래봉생병원은 유독 그 정도가 심했습니다. 저는 전국병원노동조합연맹 소속도 아니고 병원쪽 상황에 대해선 사정이 어둡습니다.

93년 이었죠. 9월쯤이었나. 봉생노조라면서 전화가 왔더군요. 노조설립을 해서 노조전임자와 노조사무실 문제를 놓고 병원측과 교섭을 하는데 정의화 원장은 교섭석상에 한번도 안나오고 계속 관리자들을 통해서 조합원 탈퇴공작을 일삼고 있으니 지역에서 원장 면담요청을 해서 원장을 한번 만나봤으면 한다구요. 노동조합에선 아무리 보자해도 콧방귀도 안뀐다면서-.

그때 당시 공투본이라는 지역 노동조합들의 한시적 연대기구가 결성되어있을 때라 면담대표는 공투본 중심으로 구성이 되었었고 ,저는 상황도 파악할 겸 전화를 받고 안가볼수도 없고 털레털레 가 봤습니다. 저는 이미 그동안 그런 상황은 백번도 더 봐온 일이기에 긴장도 없고 분노도 없고 그저 강건너 불구경 가듯이 갔었습니다. 예정시간보다 한시간이나 늦게 도착을 하니 원장실이 있다는 입구계단에 조합원들이 쭉 앉아있더군요. 면담대표들은 원장실 복도 앞에 한시간 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원장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아무 응답이 없다면서......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그저 끼리끼리 앉아 잡담도 하고 음료수도 마시고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그리고 며칠후 아침에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동래봉생인데 파업현장에 관리자들이 쳐들어와 대자보를 뜯고 조합원들을 폭력적으로 끌어내고 그래서 여러명이 다쳤다고-.

또 갔습니다. 첫날 가 봤을때 조합원 대부분이 나이어린 아가씨들이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제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예상보다 휠씬 처참했습니다. 노란티셔츠가 여기 저기 뜯겨 머리를 산발을 한 채 끌려나와 밖에서 서로 얼싸안고 우는 아가씨들이 제일 먼저 보이고, 그들의 파업 농성장이었다는 병원로비에선 그때까지 병원측 남자관리자들의 광란의 현장이었습니다. 바닥에 깔았던 스치로폴을 뜯어내 폭격맞은 전쟁터같은 그곳에서 그들은 닥치는대로 뜯어내고 깨고 부수고 밥을 해먹었던 밥그릇,수저,김치쪼가리 등이 그들의 발길에 이리저리 채이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기운이 남아 울부짖으며 매달리던 조합원 아가씨들의 머리채를 잡고 짓밟는 그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손아귀에 잡혀있는 아가씨들을 빼내는 것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었습니다. 그냥 놔두면 마음먹고 달려든 그들의 손에 누군가가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칠 수 밖에 없는 다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찢기고 밟히고 채여 만신창이처럼 짓이겨진 조합원 아가씨들의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져 주는데 머리카락이 한웅큼씩 빠지더군요. 그 머리카락들을 수북이 모아놓고는, 이거라도 가발공장에 팔아 치료비나 보태쓰자는 누군가의 울음기 가시지 않은 코맹맹이 소리에 허탈하게 웃기도 했습니다.

노조사무실 마련, 전임자 인정, 그리고 임금인상. 이 요구조건의 어디에 병원측 남자관리자들을 대거 동원하여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어내고, 스물몇살 채 피지도 못한 꽃봉우리들을 우악스럽게 짓밟아야할 이유가 있단 말입니까.

담당검사님은 그러시더군요. 병원에서 폭력을 휘둘렀다면 사진을 찍어놨다가 고발을 하지 그랬냐고. 물론 노조측에서도 사진을 찍었지요. 역시 카메라는 빼앗겨서 박살이 났구요. 그들 숫자가 휠씬 많았고 힘도 휠씬 셌으니까요.그중 심하게 다친 조합원들 10명이 전치 10일에서 4주까지 진단서를 첨부해서 폭력을 주도했던 병원측 관리자 21명을 고발도 했구요.

그러나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더군요. 노조측에선 13명이 사법처리 당하고 3명이 구속되었었는데도 말입니다. 새삼스럽게 법은 만인앞에 평등해야 되는 게 아니냐며 흥분하려는 건 아닙니다. 제가 겪은 법은 늘 그래왔으니까요. 그걸 다시한번 확인했을 뿐이었습니다. 아주 생생하게.

그래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하라는 검사님의 충고도, 목적이 아무리 옳아도 불법에 대해선 처벌할 수 밖에 없다는 판사님의 지엄하신 판결에도 얼른 고개가 끄덕여지질 않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구구절절한 항소이유서를 쓰는거구요.

계란으로 바위치기래도 할 수 없고 대답없는 메아리래도 어쩌겠습니까. 힘이 약해 맨날 당하고 깨지기만 하는 약자들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알아보고 그렇게라도 서로에게 힘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을-.

조합원 대부분이 스물을 갓 넘은 아가씨들인 70여명의 작은 노동조합. 병원측의 잔인하고도 악랄한 탄압과 일상적인 폭력을 그들만의 힘으론 도저히 막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 그들과 함께 했고 저의 작은 힘이나마 보태 노조가 지켜졌다면 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낸거라는 생각으로 오히려 가슴이 뿌둣합니다.

이 땅 어느 구석에선가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가 탱크앞에서 맨주먹으로 자기는 노예가 아니라고 외치며 대항할때, 우리가 외면한다면 도대체 우린 무엇이란 말입니까.

정의화 원장은 이미 좌천동 봉생병원 역시 노조를 무력화시킨 전력이 있는 사람이고, 합법적인 노조활동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다면 도대체 법의 테두리라는 건 어디서 어디까지란 말인지요.

병원은 대부분 학연과 혈연으로 구성되어 있더군요. 학교선배인 수간호사를 통한 끊임없는 탈퇴압력, 친척인 관리자의 보증으로 입사를 한 조합원에게 집안까지 동원한 관리자들의 탈퇴압력은 차라리 고문이었다더군요. 어떤 조합원은 노조가입 한달만에 몸무게가 4㎏이 빠졌다며 그런 압력을 받을때보다 차라리 까놓고 두들겨 맞는게 속은 훨씬 편하다더라구요. 몸이 고달퍼서 그렇지.

전 왜 제가 폭력으로 꼬인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맞긴 우리가 휠씬 더 맞았는데 .힘있는자가 휘두른 폭력은 합법이고 한대라도 덜 맞기 위해 몸부림쳤던 약자의 방어가 불법이란 논리가 성립되는 것도 아닐텐데. 성공한 쿠데타는 합법이라더니 무조건 싸워서 이기기만 하면 합법인가요?

이제 마무리를 해야겠군요. 참, 면회왔던 봉생친구들에게 들으니 조합원이 1/4로 줄어있다더군요. 끊임없는 탄압의 성과라면서-. 제가 그랬어요. 그래도 그게 어디냐고. 내가 봉생건으로 구속되었는데 노조가 아예 와해되었다면 얼마나 부끄럽고 민망할 뻔 했냐고-.

이 글을 쓰고있는동안 뉴스에서 5.18 특별법을 제정하기로 결단을 내리셨다는군요. 제가 감옥살이 하는 동안에도 에지간히 시끄러운 것 같더니만-.
옆에서 뉴스를 듣던 친구가 오징어를 질겅거리며 검찰은 ×됐네, 하는군요.도대체 어느 장단이 옳은 가락인지 한동안 또 혼란스럽게 생겼습니다. 법이 노동자에 대해서 단호한 만큼 권력에 대해서도 그렇게 냉정하고 단호했으면 좋겠어요. 노동자들에 대해선 가차없기가 추상같지 않습니까. 맨날 힘없는 사람들에게만 호통치지 말고 진짜 단호할데서 단호했더라면 이 땅에 부정과 비리는 애초에 근절되지 않았겠습니까. 정말 국가의 기반을 흔드는 싹은 다른 곳에서 열심히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데. 제가 아직도 너무 순진한건가요?

사법부가 권력의 시녀니 어쩌니 해도 전 막상 법앞에 서면 겉으론 안그런 척 해도 속으론 많이 떨려요. 이번에 선고 받을때도 판사님 말씀 하나하나가 제 운명이고 인생이라 생각하니 그저 공자님 말씀이 따로 없고 하느님이 따로 없으니 그저 하느님! 왼눈이라도 살짝 떠서 부디 굽어 살피소서 하는 기도가 저절로 나오더라구요. 끝내야지 하면서도 자꾸 미련이 남아 질질 길어지는군요.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릴께요. 법이 곧 정의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같이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이 배가 둥가죽에 붙어가면서 정의를 소리높여 외치지 않더라도 그저 법이 정의이기만 하다면. 그렇다면......

항소이유서는 난생 처음 써보는거라 그냥 편하게 편지쓰듯이 썼는데 이렇게 써도 되는 건지 지금도 잘 모르겠네요. 더러 외람되기도 하고 사족이 많이 달려있더라도 쳐내지 않으신다면 제 인생에 또 다른 계기로 삼겠습니다.
너무 길어서 죄송하구요, 끝까지 읽어주셨다면 정말 감사드립니다.

1995. 11. 27.

Posted by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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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얇은 이모양의 매뉴얼대로 소설쓰기
2006.02.25 08:00

실용적 글쓰기에는 분명한 매뉴얼이 있다. 기획안을 작성하는 법 혹은 논문을 쓰는 법에 대해서라면 주변 사람의 가르침이나 관련 서적 한권만 읽어도 요령을 깨칠 수 있다. 실용적 글쓰기를 위해서는 머릿속에 언뜻 떠올랐다가 사라지기 일쑤인 영감을 기다리는 것보다 엑셀이나 파워포인트를 잘 쓰는 게 훨씬 도움이 된다.

창조적인 글쓰기는 어떨까. 불행히도 열 사람에게 물어보면 열 사람 다 다른 말을 하고, 자기 안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면 요령을 알아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탁석산의 글짓는 도서관>은 황석영이 고등학생일 때 <입석부근>으로 <사상계>에서 신인문학상을 받은 예를 들며 대가의 경우는 처음부터 남다르다고 일침을 놓는다. 하지만 창조적 글쓰기를 하는 모든 사람이 황석영이나 셰익스피어를 꿈꾸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은 이야기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기 위해 서투르지만 진심어린 문장을 하나씩 써가는 사람들을 위한 가볍고 즐거운 가이드다. 창조적 글쓰기에 관한 많은 책이 시중에 나와 있지만, 어느 책부터 읽어야 할지, 글쓰기 책을 읽으면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몰라 두손 놓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콩트이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것. 하고 싶은 얘기가 아무리 많아도, 소재가 독특해도, 재능이 뛰어나도 당신이 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창조적 글쓰기는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최고의 슬로 푸드다.

멋지게 골대 안으로 휘어져 들어가는 박지성의 프리미어리그 데뷔골을 보고, 백수지망생 이양은 소설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중에 혹시라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1할만큼이라도 유명해지면 그렇게 말하는 게 멋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흐뭇해진 이양은 박지성의 활약 소식을 전하는 스포츠 뉴스를 보고 또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소설의 첫 문단을 쓰려다가 이양은 깨달았다. 소설을 읽고 즐기는 법은 깨우쳤으나 쓰는 법은 아무도 알려준 적이 없었다. 유난히 귀가 얇아 홈쇼핑에서 “매진 임박”이라는 말만 들으면 무의식적으로 전화기를 드는 이양은, 소설 쓰는 법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인들에게 물어보고 발품을 판 끝에, 이양은 창조적 글쓰기에 관한 책들을 몇권 찾아내 읽었다. 그리고 노트북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1. 영감님, 영감님, 대체 어디 계신거에요?

‘영감’님이 도무지 살갑게 말을 걸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하던 이양, 일단 슈퍼에서 소주를 한병 사와 술기운으로 ‘영감’님을 불러내보려 했다. 그런데 이양은 뜻밖의 말을 듣는다. “당신이 진정으로 불후의 명작을 완성시키고 싶다면 위스키를 마셔서는 안 된다. 대신에 셰익스피어와 테니슨, 키이츠, 네루다, 홉킨스, 밀레이, 휘트먼…. 이들의 글을 소리내어 읽고 또 읽어 당신 몸을 그들의 운율에 맞춰 춤추게 만들어야 한다.”(<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나탈리 골드버그 지음|한문화)

불후의 명작을 쓰겠다는 마음은 없지만 술 마시지 말라는 충고에 바짝 긴장한 이양은 다시 넋놓고 있다가 ‘영감’님이 어디에 계신지 알게 되었다.

“좋은 책은 한창 배움의 길을 걷는 작가들에게 문체와 우아한 서술과 짜임새있는 플롯을 가르쳐주며, 언제나 생생한 등장인물들을 창조하고 진실만을 말하라고 가르친다. (중략) 독서는 작가의 창조적 삶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다. 한번에 오랫동안 읽는 것도 좋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읽어나가는 것이 요령이다.”(<유혹하는 글쓰기>|스티븐 킹 지음|김영사)

이양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사랑했던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같은 책이라면 정다운 벗이 되어주리라. 하지만 이게 웬걸. 책을 1/3도 읽지 않아 이양은 좌절하며 책을 집어던졌다. 이런 명작을 읽어봐야 이런 글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어! 이양은 다시 소주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글쓰기 책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발견했다, 소주를 대체할 수 있는 충고를.

“제일 좋은 글은 당신의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이 실린 글이다. 작품을 쓰다가 세상으로 나갈 때는 당신의 모든 것을 데리고 나가라. 아주 상식적인 생각에서부터 부처와 같은 마음까지. 그리고 지나가는 거리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주면 절대 길을 잃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라. 나는 내일 다시 글쓰기로 돌아갈 수 있으며, 한 마리 동물이 되어 거리를 쏘다니고 있는 지금도 나의 글쓰기는 계속되고 있다고.”(<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이양은 자신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쓰기로 결정했다. 어느 날 밤에 겪은 일을 쓸 참이었다. 그녀는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박남일 지음|서해문집)이라는 책까지 펼쳐놓고 뭔가 대단한 시작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2. 절망 또 절망… 나는 더 잘 쓸 수 없는걸까?

나는 살을 빼기로 결심했다. 체중이 많이 나간다고 부모님의 타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헬스클럽에 등록할 돈이 아까웠던 나는, 홈쇼핑에서 판매하는 3만9900원짜리 스태퍼를 구입했다. 아침에는 늦잠을 자야 하니까 시간이 없고, 점심 때는 친구들을 만나느라 시간이 없었다. 그런 장애 조건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음을 대나무처럼 굳게 먹었다. 가족이 모두 잠든 밤, 나는 TV를 켜고 스태퍼에 올라갔다. 브라운관 속에서는 꽃처럼 예쁜 문근영이 출연하는 <댄서의 순정>이 한창이었다. 10분 뒤, 스태퍼 위에서 100m를 완주한 육상선수처럼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부모님 깨시기 전에 조부비면서 현관문을 열었는데,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혹시 지금 무슨 운동 같은 걸 하시나요? 아래층에서 왔는데 시끄러워서요.” 나는 스태퍼의 끼익끼익하는 소음을 기억해냈다. 나는 불쑥 내뱉었다. “아, 아뇨. 무슨 소리였을까. TV 소리를 좀 줄일게요.” 단 하루 만에 스태퍼 운동을 포기한 나는 당황해서 머리를 긁적거리며 현관문을 굳게 닫고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땀범벅인데다 숨이 차 헉헉거리는 내가 보였다. “나, 운동했소”하고 이마에 네온사인이 반짝인다. 아랫집 아저씨는 얼마나 웃겼을까, 빌어먹을. 이건 정말 웃기지도 않은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양은 여기까지 쓰고 흐뭇한 얼굴을 해 보였다. 시작은 비장하지만 끝은 욕설이다. 자신의 부덕하고 난폭한 습성이 녹아 있는 글을 보며 이양은 우울해졌다. 하지만 스티븐 킹은 “여러분도 자기가 잘 아는 것들을 통하여 독특한 작가가 될 수 있다. 용기를 가져라. 적진을 살피고 돌아와 거기서 알아낸 것들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라”며 이양을 독려했다. 글쓰기에서 정직은 문체의 수많은 결점들을 상쇄해주는 미덕이라지 않는가. 좋은 소식은 그게 다였다.

“70년대 초반, 여성의 언어에 대한 논문 하나가 발표되었다. 그 논문은 나에게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겼고, 결과적으로 글쓰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 내용 중 하나는 여성들이 자신이 했던 말에 인증이나 확인을 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면 ‘베트남 전쟁은 끔찍해. 그렇지 않니?’ (중략) 세상이란 언제나 흑백으로 갈라지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작가가 되고 싶다면 분명하고 확실하게 진술하는 것이 필요하다”(<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이양은 깨달았다. 자신이 쓴 글의 마지막 문장이 조금 전에 읽은 문제점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자신은 웃기다고 생각하지만 독자가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을까봐 소심하게 적은 “그렇지 않은가?”가 화근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말버릇까지 문제가 될 줄이야. 이양은 엄격한 글쓰기 스승들의 말에 주눅들기 시작했다. 내 주제에 무슨 소설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쉽게 물러설 수는 없었다.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이양의 목표는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니고 불후의 명작을 쓰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글을 통해 다른 사람과 작으나마 소통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제부터 이양은 저 짧은 한 단락에서, 이미 발견한 것 말고도 무수한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면서 글을 통한 소통의 가능성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3. 스티븐 킹한테 한 수 배우다

“가장 흔한 잘못은- 이런 함정에 빠지는 것도 대개는 독서를 충분히 하지 않은 탓이다- 상투적인 직유나 은유나 이미지 따위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내달렸다, 그녀는 ‘꽃처럼’ 예뻤다.”(<유혹하는 글쓰기>)

아뿔싸! 가장 흔한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왜 이양은 문근영을 ‘꽃처럼’ 예쁘다고 생각한 것일까? 이양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에 많이 있었다. ‘햇반처럼’ 아름답다든가(엄마의 손맛보다 행복하게 해주므로), ‘너구리처럼’ 황홀하다든가(이양은 너구리 라면을 제일 좋아하므로) 하는 식으로 썼으면, 스티븐 킹이 이양을 타박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킹씨는 무심하기도 하지, 주눅든 이양을 더욱 코너로 몰아붙였다.

“이런 짓은 하지 말기 바란다. 제발, 제발, 부탁이다. 가장 좋은 대화 설명은 ‘말했다’이다. (중략) 래리 맥머트리는 감정적인 위기를 맞이하는 장면에서도 ‘그가 말했다’ 또는 ‘그녀가 말했다’를 철저히 고수한다. 부디 그대들도 그렇게 하라.”

저속한 삼류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장이라니, “나는 불쑥 내뱉었다”라는 문장을 쓴 건 손이 미끄러졌기 때문이라고, 이양은 몇번이나 되뇐다. “현관문을 굳게 닫고”라는 대목도 문제다.

부사를 많이 쓰는 작가는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할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킹의 말에 따르면 부사는 민들레와 같아서, 한 포기가 돋았을 때 뽑아버리지 않으면 곧 민들레 밭이 되어버린다고 했다. 다행히 킹은 욕설 사용에는 후한 점수를 주었다. 그 자신이 욕설을 자주 쓰기 때문이다. 잘 안 쓰이는 말을 어렵게 꺼내 쓴 것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지만.

“어휘력을 키우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할 필요는 없다. 글쓰기에서 정말 심각한 잘못은 낱말을 화려하게 치장하려고 하는 것으로, 쉬운 낱말을 쓰면 어쩐지 좀 창피해서 굳이 어려운 낱말을 찾는 것이다. 그런 짓은 애완동물에게 야회복을 입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4. 스승님들의 가르침대로 퇴고를 마치다

이양이 걸레가 된 이 짤막한 문단에 절망해 글쓰기를 포기했냐고? 신만이 아실 노릇이지만, 당분간 (혹은 영원토록) 당신이 이양의 소설책을 서점에서 볼 수 없을 것은 자명해 보인다. 흠흠.



글을 잘 쓰는 Tip
움베르토 에코의 충고 11가지

움베르토 에코는 <미네르바 성냥갑>(열린책들)에서 글을 잘 쓰는 법에 관한 일련의 지침을 소개한다. 에코의 원래 글은 총 37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었으나 그중 일부를 발췌해 여기 소개한다. 반어적인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을 명심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에코의 충고를 읽어보자.

_접속사를 피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오히려 필요할 때는 쓰도록 한다.
_기성품 문장들을 피하라. 그건 ‘다시 데운 수프’와 같다.
_괄호는 (꼭 필요해 보일 때도) 담론의 흐름을 방해한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라.
_말줄임표들의…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라.
_가능한 한 따옴표를 적게 사용하라. 그것은 ‘목표’가 아니다.
_외국어는 절대 엘리건트한 스타일을 만들지 않는다.
_인용을 줄여라. 에머슨이 올바르게 지적했듯이 “나는 인용을 증오한다. 단지 네가 아는 것만 말하라”.
_지나치게 과감한 은유들을 조심하라. 그것은 뱀의 비늘 위에 돋은 깃털과 같다.
_쉼표는, 정확한, 곳에, 넣도록, 하라.
_과장하지 마라! 감탄 부호를 적게 써라!
_철자를 ‘자새’하게 확인하라.

Posted by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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