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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8.08.20 글 잘 쓰는 법 정민 표정훈
  3. 2007.02.07 [펌]문체, 혹은 양파에 대한 생각

 성질 급한 지원자와 독특한 면접 
[나의 민주노동당 잠입기①] "내 영혼이 원하는 것을 찾아"
 
 
이 글의 필자는 <레디앙>에 '프랑스 남자와 결혼 않고 살아가기'를 연재를 한 바 있습니다. <레디앙>은 연재됐던 내용을 포함 필자의 새로운 원고를 추가해서 책으로 낼 예정입니다. 이 글은 출간될 책 가운데 '나의 민주노동당 잠입기' 편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이 글은 필자 개인의 견해와 입장을 중심으로 써내려간 것이지만, 민주노동당을 바라보는 의미있는 시각, 내부자이면서 일정한 거리두기를 하면서 바라본 당의 속내가 솔직하게 표현돼 있어, 민주노동당에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용에 대한 찬반을 넘어서 좋은 거울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레디앙>은 앞으로 6회에 걸쳐 그 내용을 전재합니다. <편집자 주>


현재 난 민주노동당 문화담당 정책연구원이다. 출산으로 휴직했던 1년을 포함하여 3년 넘게 여기서 일하고 있다.
만만치 않은 야망을 가졌거나, 왠지 순수하지 못한 기회주의자일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정당인'에 대한 일반적 선입견에 '민주노동당'이라는 날선 이름을 합해 놓은 내 명함은 받는 사람들에게 잠시 표정관리를 놓치게 할 만큼 자극적이다.

스카프와 집시풍의 긴 치마 그리고 내 명함

더구나 당에 온 이후로, 특히 희완과 함께 살게 된 후론 그의 지지에 힘입어 더 자주, 나풀거리는 스카프며, 집시풍의 긴치마, 베트남에서 사온 알록달록한 옷들을 자유분방하게 걸치고 다니는 나의 겉모습과 주저 없이 사변적인 느낌들을 표출하는 캐릭터가, 얌전히 있어도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내 명함과 빚어내는 대비는 “황당” 혹은 “정리 안됨”의 효과를 종종 유발한다. 명함을 건네는 나는 이 의도하지 않은 코믹 상황을 견디느라 입가의 웃음을 배시시 베어 물게 된다.

그러나 의심의 여지없이, 현재 내가 지닌 직함은 일찍이 내가 지녔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비로소 나는 긴 모색 끝에 나의 지향과 노력이 만나고 있는 지점에 서 있고, 눈이 땅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던 시절을 지나, 내리는 눈은 소복히 땅을 덮으며 두께를 더하고 있다.
더 이상 적어도 정체성의 균열이나 혼선 따위로 방황하지 않고, 앞에서 다가오는 거센 역풍을 온몸으로 딛고 서 있을 필요도 없으며, 내가 선 이 자리엔 늘 눈덩이를 굴리기에 넉넉한 함박눈이 내려온다.

절망의 골짜기에 우두커니 머물러 있던 내 인생의 한 시기에, 불교신자인 한 친구는 “세상에 나쁜 경험은 없다”란 말로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쓰든 달든 지나고 나면 모든 경험은 약이 된다는 차원에서 그 말은 여전히 옳고 실제로 내가 겪었던 모든 사회적, 개인적 경험은 결국 오늘의 선택을 하는데 십시일반으로 다리를 놓아준 셈임을 충분히 인정한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한참 가다보니 “이 길이 아닌가 봐” 하며 방황을 거듭하는 고달픈 인생을 살아갈 순 없는 노릇이다.

물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방황해 볼 겨를도 없이 세상이 정해준 가치와 서열에 자신의 욕망을 맞추어 살아가는 인생보다는 방황하는 인생이 훨씬 아름답지만, 비로소 내 길을 찾아 이율배반에 시달리지도 영혼을 배반하지도 않고 소복이 그 안에 자신을 담을 수 있는 삶을 누리는 기쁨에 비할 바는 아니다.

영혼을 배반하지 않는 삶의 기쁨

직장에서 내 눈앞에 꽂혀 있는 모든 자료들이 모조리 진정한 개인적 관심사이며, 아무리 재미없는 문체로 써 있어도, 밤새 그 자료들을 읽는 일이 별로 고통스럽지 않다.
아침에 출근하여 인터넷을 켜면, 간밤에 타전된 갖가지 뉴스들에 대해 자리에 앉아 한두 마디씩 던지는 각 연구원들의 멘트들 중에 - 그중에는 꼭 한 대 갈겨주고 싶도록 한심한 생각을 유포하는 인간들이 꼭 끼어있는 여타의 사회집단에서와 달리 -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타 영역에서의 진보적 판단들로 나를 이끄는 키워드가 톡톡 튀어나오는 따위의 멋진 일들.
그리고 주말 저녁, 아이랑 깔깔대고 있을 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한 지방의원이 내게 전화하여, 문화정책에 관한 자문을 구해오면, 그것이 귀찮기는커녕, 오히려 문화에 관심 갖는 민주노동당의 '동지'를 만난 기쁨에 허둥대며 즐거워하는 그런 일들이 지금 내가 뿌리내리며 살고 있는 숲에서 벌어지는 전경이다.

프랑스에서 어학을 하던 시절, 퐁피두센터 내의 도서관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꺼내 읽은 나의 첫 전공서적, 『프랑스 문화정책』의 첫 장을 펼치며, 아직 어설픈 불어로도 선뜻 눈에 들어오던 그 책의 모든 목차들. 그 날렵하고 감각적인 어휘들로 적혀진 모든 챕터들을 순간 꼭꼭 씹어 먹고 싶은 욕구가 강렬하게 솟구치면서 난 비로소 내가 그토록 도달하고 싶던 그 숲에 왔다는 걸 처음 감지할 수 있었다.
문화와 예술이 충만하게 살포된 이 나라의 공기가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길 줄 아는 시민정신을 낳았고, 그 속에선 훨씬 더 쉽게 숨쉬고, 훨씬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걸, 책과 일상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의 선택은 잠깐 동안의 발레단 외도를 제외하면, 그 연장선 위에 있는 셈이다.

작가주의 영화와 민주노동당

세상에는 상업 영화가 있고 작가주의 영화가 있다. 상업영화는 쉽게 말해서 이거 먹히겠다 싶어서 만드는 영화다. 작가주의 영화는 이 얘기를 세상에 꼭 하고 싶어서 만드는 영화다. 물론, 작가주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동시에 “먹히기도” 하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은 한다. 그러나 제작의 동기는 다른 곳에 가 있다.  
민주노동당은 흥행을 목적으로 만든 영화가 아니다. “먹히겠다” 싶은 정책이나 공약을 내놓으며 인기몰이를 하지 않는 유일한 정치집단이다. 지금 당장 사람들이 찬동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한 정책을 설정하고 그것을 할 수 있는 만큼 설득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민주노동당은 영화로 말하자면, 지금 당장 대박을 목표로 하지도 않고, 그렇게 포장할 물적 토대도 없으며 오로지 진정성으로 승부하고자 하는 투박한 다큐 영화에서, 이제 좀 사정이 나아져서 얼굴이 알려진 배우 몇 명이 등장하는 저예산 영화다. 약간의 세련미, 표현의 미학까지 곁들여져 있다면 훨씬 폭넓은 대중의 지지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있는.
당이 후자의 미덕까지 갖추지 못한 아쉬운 점이지만, 정당을 통해 문화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민주노동당은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당이었다.

어쩌면 민주노동당 당원들뿐만 아니라 당직자들도 대부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민주노동당의 문화강령은 당의 목표 중 하나를 문화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첫머리에 적고 있다.
문화산업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너저분한 자본주의 사회의 욕망들을 나열해 놓은 다른 당들의 그것과 비교해, 민주노동당의 문화강령은 누군가 내 꿈을 조금 어려운 말로 적어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내가 꿈꾸는 문화정책의 방향과 일치하고 있었다.

내 꿈을 어려운 말로 적어놓은 것 같은 문화 강령

내가 아는 직장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광고를 보고 이력서를 낸 후 시험과 면접 등을 보는 일이다. 적어도 민주노동당에 들어오기 전까진 그랬다. 프랑스에 가기 전, 그런 방법으로 두개의 직장에서 각각 4년과 3년 동안을 일했었다.

처음 일했던 곳은 관광공사였다. 관광엔 아무런 뜻도 없었고, 대학 4학년이 되었지만, 하고 싶은 일은 초등학교 때만큼이나 많고 뭘 덥석 집어 들기엔 조심스러워서, 고심 끝에 좀 더 생각해보기로 하고, 영리추구를 하는 대기업이 아니라는 것에 약간의 위안을 삼으며 전공 살려 들어간 곳이었다. 내 전공인 러시아어를 하는 사람도 뽑았기 때문이었다. 영어, 러시아어 필기시험에 원어민과의 오럴테스트까지 받고 들어갔건만, 4년 동안 러시아어는커녕 영어를 쓸 일도 손꼽을 만큼이었다. 다행이도 문화축제 담당이었는데, 늘 두꺼운 장갑을 여러 겹 끼고 문화를 대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4년 내내 나갈 궁리만 하다가 내가 일할 곳은 적어도 문화예술 방면이란 걸 뼈 속으로 알고, 드디어 방향을 틀었던 것이, 대학로에 있는 동숭아트센터였다. 개관 이래 최초의 공채였다는데, 면접 결과 기다리는데만 한달 반이 걸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에 가있던, 대표의 전속 무당에게, 지원자들의 사진을 보내 관상 면접까지 거치느라 걸린 시간이었다. 관광공사 재직 경험이 마치 동사무소 방위를 했던 것 같은 느낌으로 남아있다면, 동숭아트센터에서의 경험은 대학원이라도 다녔던 것 같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연애와 많이 닮은 직장

처음 거길 다니게 되었을 땐, 구름 위를 떠가듯 기뻤다. 직장은 연애와 많이 닮아 있어서, 지긋지긋한 전 직장을 떠났을 땐, 그 해방감에 날아갈 듯하고, 꿈에도 그리던 새 직장으로 옮겼을 땐, 적어도 초기 3개월 정도는 “어쩜 이럴 수가...모든 것이 내가 바라던 그대로야”를 연발하게 된다.
드디어, 문화영역에서 두꺼운 장갑 벗어던지고 맨손으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이젠 숨이 탁 트이는 것 같았는데... 영리추구가 공간의 목적은 아니지만, 공간이 지속되기 위해서 최소한의 유지비는 나와야 했고, 입맛에 딱 맞는 공연과 예술영화만을 다루면서는 그마저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끊임없이 타협을 강요하는 현실과 스스로가 부여한 문화공간의 사명 사이에서 우리는 그 해답없는 딜레마를 부둥켜안고 질문의 구덩이를 파며 세월을 보냈다.

거기 있는 동안 그 공간을 드나드는 향기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던 건, 지금도 축복처럼 생각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그 향기로운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지, 그들 자신은 아니었다. 그러한 자각은 나에게 좀 더 연필심을 갈도록 충동질했다. 3년 만에 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기다란 질문 목록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은 이후 프랑스에서의 석사논문으로 이어졌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직후, 잠시 내가 여전히 한국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까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을 때, 그들이 구인광고를 냈고, 북한산에 올라가 깔고 앉은 신문에 그들의 구인광고가 있었던 인연으로, 몇 가지 키워드만 슬쩍 맞춰본 채, 지원했던 국립발레단에서의 짧은 경험 이후, 난 결심 하나를 하게 된다.
허울만 번지르르 했던 애인이던 발레단에서 내 영혼이 쨍하고 전율하는 경험 따위는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다시는 이렇게 얼렁뚱땅 적당한 상대를 고르지 말자. 내 영혼이 주저 없이 원하는 바로 그것을 찾고, 나의 확신으로 상대를 설득시켜서 그것을 쟁취하자.

내 영혼이 주저 없이 원하는 것을 찾아

정책을 공부한 만큼, 마침내 호랑이 굴에 들어갈 결심을 하고, 각 당들의 사이트를 들어가 이들의 문화에 대한 생각들을 들여다보았다. 민주노동당의 그것은 다른 어떤 당의 것과도 달랐다. 흑과 백. 하늘과 땅이었다. 어려운 이론서적의 한 구절을 통째로 갖다놓은 듯한, 소화 안 된 공약들도 있었지만, 그렇게 지향을 설정한다는 것 자체가 어딘가.
당명이 풍기는, 편협하게 노동의 가치에만 집중하는 듯한 인상과는 달리, 이 당은 매우 지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유럽 사민주의적 이상을 가진 정치집단이었다. 더 이상 좀 더 선명한 현실적 가능성과 물질적 안위를 위해 내 영혼을 구겨넣지 말자고 결정하고 나니, 판단은 아주 쉬웠다.

난 민주노동당의 17대 총선 문화공약을 분석하고 이에 평가와 보완, 대안을 제시한, 리포트를 써서 우편으로 보냈다. 그리고 며칠 뒤 전화를 걸어, 일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머지않아 공개채용 계획이 있고, 그 때가 되면 함께 심사하겠노라는 대답이었다.
정책정당을 표방하는 민주노동당은 보좌관을 비롯한 분야별 정책연구원을 1~2명씩 뽑을 계획을 갖고 있었다. 아직 공채계획이 구체적으로 잡히기도 전 불쑥 지원을 해버린, 이 성질 급한 지원자에 대한 면접은 따로, 좀 독특한 방식으로 - 여의도 공원에 앉아 장장 3시간 동안 - 이루어졌다.

그리고 한 달쯤 뒤, 희완과 합천 해인사에 들러 먼발치에서 답답하게 팔만대장경을 구경하고 내려오던 길에, 울리던 핸드폰을 통해 합격통보가 날아들었다. 5대 1의 경쟁률이었다는데, 감사하게도 날 선택해준 것이다. 문이 열리길 기다리지 않고, 내가 먼저 길을 만들어서 갔던 그 첫 시도가 멋지게 성공한 것이다.
  

실종된 원칙, 그래도 떠나지 않은 이유 
[나의 민주노동당 잠입기②] "위대한 두가지의 부재"
 

위대한 두가지 부재 : 위계와 학벌

나중에 듣자 하니, 공동으로 면접을 치른 사람들에겐 대학교 때 운동을 했느냐는 질문이 던져졌다고 한다. 난 그 질문을 듣자마자 “아뇨. 연애만 했는데요.” 라고 서슴없이 대답했을 터이고, 당장, 족보를 따져 묻는 듯한 그 우문에 심사가 뒤틀려 나머지 질문들도 제대로 답했을지 의문이다.
딴에는 젊은 날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던진 질문이라고 하는데, 학력고사 점수가 몇 점이었냐고 묻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질문이다.
운동을 직업적으로, 혹은 포교하듯이 행하던 무리들을 난 경계했고, 그들의 파시스트를 닮은 태도를 무시했다. 대학 1학년 때, 내가 다니던 대학의 학생회장이자, 전대협 의장이었던 사람은 현 여당 국회의원 오영식이다.

파시스트 닮은 운동권 수괴들 지금 뭐 하나

“민족의 태양” 운운하며 사회자가 과장스럽게 그를 소개하면 그는 신나게 올라와 웅변대회 나온 아이처럼 흥분된 일장 연설을 했다. 운동을 출세삼아 했는지, 하나같이 수권정당이나 우파정당에 들어가 권력의 노른자를 떠먹고 있는 자들이 우리 세대의 운동권을 대표하는 자들의 현주소다.
그런데 여기서 또 운동족보를 들먹이다니. 사실 '운동권'이라는 어휘 자체가 어처구니 없다. 과시적으로 대열에 서지 않으면 시대에 대한 고민도 실천도 하지 않는 자라는 건가? 운동권과 비운동권. 그런 단순한 이분법으로 사람을 가르는 집단이란 걸 나에게 진작 알려주었더라면, 지원을 안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가 개척한 길로 따로 들어온 덕분에-불행인지 다행인지-일어났을 지도 모를 초입에서의 갈등을 피할 수 있었다.
첨엔, 당연히 모두가 의욕에 차 있었다. 우리들 뿐 아니라, 기자들도 그랬다. 기자들이 그랬다는 건 일반대중의 시선 또한 그랬단 얘기다. 지지율 12%로 17대 국회에서 10명의 의원을 당선시킨 민주노동당은 국회입성 직후 25%까지 치솟은 지지율에 현기증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연히 민주노동당 최초의 공채 연구원들과 보좌관들에 대한 취재열기도 대단했다. 나만해도, TV를 비롯 서너 군데의 신문과 잡지에서 연신 인터뷰를 가졌다. 심지어는 MBC에서 인물 다큐멘터리가 기획되기도 했었다.(진행되다 엎어졌지만)
MBC 텔레비전과 가졌던 생방송 인터뷰에서 “민주노동당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 부모님 반응이 어땠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나는 “널 알아보는 걸 보니, 똑똑한 집단인가보다” 라고 하셨던 엄마의 답변을 그대로 전했다. 실로 엄마가 내게 던진 생애 최고의 찬사였다.
진작부터 민주노동당 당원이었던 언니는 물론, 엄마도 나의 선택을 믿고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셨다. 이미 지난 총선에서 나와 언니의 강력한 요청으로 비례대표는 민주노동당을 찍으시기도 했다.

어색하던 '동지' 호칭이 좋아지기 시작하고

여기선 서로를 OOO동지! 라고 부른다. 첨엔 그렇게 불리는 것만으로도 어색해서, 그렇게 불리고 나면 표정이 수습이 안돼, 어벙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호칭을 강요하지 않았고, 내가 다른 사람들을 OO씨라고 부르는 데에 대한 무언의 압력도 전혀 없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이란 의미의 단어인 '동지'는 민주노동당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였다. 그 의미의 정당성 때문에 난 오래지 않아 이 단어를 받아들이고 좋아하게 되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지만 가장 흔하게 쓰이는 이 표현이 우리들 사이에 각별한 동류의식을 불어넣음은 물론이다.
멀쩡한 공당에 월급 받고 다니는 거지만, 마치 비밀요원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고 그게 은근한 재미를 선사한다. 무엇보다 이 명칭은 연령의 고하나 직위의 상하를 희석시키는 수평적 구조를 자연스럽게 구성하게 만든다.

특이한 성 때문에 어딜가나 존재하는 “목!” 이라는 호칭에서부터, 목수정 동지, 목수정씨, 목수정 연구원 여러 가지 표현이 공존하지만 중요한 건 그 모든 표현과 그 표현을 둘러싼 관계들은 수평적이라는 점이다.
대리, 계장, 과장 등의 별로 듣기 좋지도 않은 직함들이 도토리 키재기 하듯이 사람을 수직적인 관계에 놓으면서 피곤하고 재미없게 만드는 관행이 사라진 그 자리엔 생각보다 큰 의미가 자리한다.  

출신 교 질문이 없는 곳

또 하나 날 즐겁게 한 '부재'는 출신학교에 대한 질문의 부재이다. 정책연구원들은 각각 명확한 자기 분야가 있기 때문에 전직이 뭐였는지, 어떤 분야를 공부했는지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약사, 회계사, 노무사, 사회복지사 등 사자로 끝나는 직업을 전직으로 가진 사람들이 반 정도 되고,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정도를 취득하고 각자 전문분야의 연구원 혹은 사회단체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간혹 박사들도 있지만 극소수다. 그런데 들어온지 3년이 넘었어도,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모르는 연구원들이 대부분이다. 아주 최근에서야 옆자리에 앉아있는 연구원이 나와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걸 알았을 정도다. 그런데 알고도 그냥 “그렇구나”하고 서로 무덤덤했다. 다른 집단에서였다면 어느 쪽에서든 또 누구누구가 같은 학교며 한 번 같이 만나자는 둥 하는 쉰소리가 오고 갔을 것이다.

출신학교부터 물어보면서 말을 트기 시작하던, 대부분의 우리사회의 인간관계들이 가지는 그 속 보이는 천박함에 비해, 여기에선 금기까지는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그런 걸 궁금해 하는 태도가 촌스럽게 느껴지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이 지긋지긋한 학벌사회에서 은근히 서로를 서열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그런 종류의 질문이 조직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대학서열을 폐지하려는 정당으로서 최소한의 실천이지만, 뿌리 깊은 한국사회의 관행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매우 위대한 실천이다.
 
파삭 깨져버린 원칙, 석달만에 한산해진 기자실

한 달간의 어수선한 연수가 끝나고 우린 각자의 자리를 찾아 떠났다. 보좌관과 정책연구원 두 갈래 길이 있었다. 보좌관은 정책 담당과 정무 담당이 따로 있는데, 정무담당은 주로 의원과 호흡을 같이 해 오던, 당직자들이 맡았고, 정책보좌관은 공채를 통해 주로 채워졌다.
40여명의 정책연구원들은 여의도 당사 5층에 자리 잡았다. 비좁은 책상, 빽빽한 좌석 배치. "여기 고시원이에요? 우리 텔레마케터에요?"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지만, 그 불만을 듣는 기존 당직자들은 미동도 않는 기색이었다.
우린 기차를 타고 단체로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희망과 꿈에 가득찬 여행을 떠나는 중이었는데, 그들은 '그래 한 번 가봐' 하는 표정들이었다. 저건 뭘까 싶었다. 악의적이진 않지만, 저 심드렁하고 밋밋하며 피식 웃는 듯한 저 표정은.

심드렁하고 밋밋한, 심상치 않은 표정들

심상치 않아 보이는 의문을 뒤로 한 채, 난 일속으로 한걸음씩 들어가기 시작했다. 정책연구원의 일이란... 말 그대로 정책을 연구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일년에 한두 편 두꺼운 논문을 써내는 일이 우리의 주된 업무는 아니었다. 담당분야에 상임위를 둔 국회의원의 정책담당 보좌관과 해당 영역에서 발생하는 정책적 사안들을 적절히 배분하여 일한다.
보좌관들은 의정활동의 흐름을 타며, 의사일정에 맞게 법안심사나 발의, 국정감사, 예결산 등에 주력한다면, 정책연구원들은 조금 더 장기적 호흡으로, 당이 제시해야 할 정책의제들을 만들어 내고, 길지 않은 논문들을 작성하여 논리를 만들어낸다.

관련 분야의 시민단체들과 정기적으로 네트워크를 꾸리며 의견을 청취하고, 공동으로 토론회나 워크샵을 진행하기도 하며, 해당분야에 중요한 사안이 발생하였을 때, 당을 대변하는 입장을 정리하여, 정책논평을 작성하기도 한다.
선거 때 공약을 만들어내는 일 또한 정책연구원의 고유 업무이며,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지방의회 의원들이 필요로 하는 정책자문이나 조례 등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 국회에 제출한 법안을 만드는 일도 정책연구원이 의원실과 함께 진행하는 일이다.

언뜻 보기에 재미없을 것도 같은데, 문화정책과 관련된 일이라면, 한순간에 재미와 의욕을 재깍 충전받을 수 있어서 내게는 진정으로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정책은 상상력의 산물"

민주노동당의 정책통으로 불렸던 이재영씨가 정책연구원들 앞에서 했던 말처럼, “정책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게다가 우리의 현실과 미래를 개선시키고 변혁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상상력이다. 그러니 잘만하면 정말 흥미진진한 일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입성 첫 해에, 나는 내가 꿈꾸었던 그 어떤 거대한 실천도 하지 못했다. 마음에 쏙 드는 성실하고 실력있는 정책보좌관과 한 팀이 되어서 계류 법안들을 차곡차곡 검토해가고, 함께 문화 영역에서 열리던 토론회에 참석하여 문화계 정책 현안들을 파악하던 어느 날, 그녀는 뜻하지 아니하게 사직서를 내게 되었던 것이다. 일하기 시작한지 한달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권위적 성향을 지닌 국회 쪽의 한 보좌관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 똑똑한 정책보좌관을 민주노동당 답지 않게 짖누르고 협박성 발언을 한 것이 발단이 되어 결국 정책보좌관의 사임으로 이어진 것이다. 나를 비롯한 몇몇 연구원들은 사태의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데 서너 달을 훌쩍 보냈다. 그 사이 해당 의원실의 다른 보좌관들도 한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떠나갔다.
문제의 그 보좌관이 스스로 다음 해에 사직서를 내고 물러났을 때에야 싸움은 종료되었고 의원실은 그제서야 비로소 정상화되었다. 출산을 위해 휴직을 했던 나는 파리에서 그의 사직 소식을 들었다.

당에 발을 딛자마자, 내가 알고 있던 정책정당의 찬란한 원칙이 파싹 깨지는 현장을 마주쳤다. 마치 내 뼈가 단단한 쇠사슬로 옥죄어져 바삭하고 으깨지듯 괴롭고 허무한 시간을 보내야했다.
그즈음, 문득 시선을 들어 주변을 돌아보니, 17대 국회 초기, 고3 교실처럼 빼곡히 차던 기자실에는 점점 사람이 줄어들어 서너명이 보일까 말까 했다. 떠나간 기자들의 숫자는 떠나간 국민들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불과 서너달 만에 밀물처럼 다가왔던 기대와 관심은 썰물처럼 사라졌다.

불과 서너달 만에 썰물처럼 빠져나간 기자들

그리고 다른 연구원들, 다른 의원실들도 모두가 우리처럼 심각한 갈등을 빚지는 않았지만, 크고 작은 문제들을 겪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기차는 예상만큼 멀리 나가지 못했고, 예기치 않게 발생하는 문제들에서 작동해야 할 원칙들은 '정치적 해결' 이라는 화딱지 나는 방식에 밀려나면서 당은 처음부터 여기저기서 삐그덕 소리를 냈다.
그러다 보니, 다음 역에서 하차하는 성급한 승객들도 생겨났다. 멀리서 보기에 아름다웠던 경치가, 가까이서 보니, 시커멓게 탄 상처와, 뻥뻥 뚫린 구멍들, 때로는 돌무더기와 쓰레기더미도 있었던 거였다. 덩치는 갑자기 커졌는데, 문제를 거르는 자정 장치가 없거나 작동하지 않아, 순식간에 당은 너무 많은 오염물질로 뻑뻑해 지기 시작했다.
처음 우리가 책상 크기를 가지고 투정을 부릴 때 보았던 그 모호한 심드렁함은 ‘뭐 그 정도를 가지고 그러시나, 아직 멀었는데’ 하는 뜻의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이들의 묵언의 답변이었다.

그러나 내가 믿고 있던 원칙이 작동되지 않는 걸 보면서도 당을 떠날 생각은 금방 들지 않았다. 실망스런 지점에 봉착할 때, 우리가 비난하는 당은 정해진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유기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원칙이 있는데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원칙을 지켜내기 위해 싸워야 하는 것이지, 그 사람들 때문에 내가 떠날 필요는 없는 거다. 원칙을 위해 싸워야 할 사람들이 모두 떠나면 원칙을 엿가락처럼 주무르는 사람들이 남고, 당은 그들의 것이 될 뿐이다. 영아사망의 전통을 깨고 기적처럼 의회에 발을 딛은 이 진보정당의 실험은 계속되어야 하고, 죽 쒀서 개주는 일은 웬만하면 하지 말아야 하므로.
 

뉴라이트에 쫓기고 경찰 보호받고 
[나의 민주노동당 잠입기③] "일심회 그리고 정파의 늪"
 
 
1년간의 휴직을 끝내고 다시 당에 돌아왔다. “어, 다시 돌아왔네?” 가 주된 반응이었다. “안 올 줄 알았는데”라는 말이 생략된. 다시 돌아 왔다. 8개월 된 아이와 그 아이의 아빠를 이끌고. 들어온 첫 해엔 변변히 일도 못해봤고, 두 번째 해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프랑스에서 보냈다. 세 번째 해에야말로 제대로 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한편으론 늦게 엄마가 된 흥분을 몸소 실천하고픈 마음 또한 간절하여, 아이와 살 부비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고 싶었다. 기꺼이 몸 바쳐 충성하고 싶은 두 가지 사이에서 모든 일하는 엄마들의 딜레마를 겪으며 내 몸은 지옥의 스케줄을 견뎌야 했다.

파리에 들려온 우울한 당 소식들

스스로 한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느슨하게 출근하면서도 정시에 퇴근해 아이와 몸 바쳐 놀았다. 못다한 일은 아이가 자고난 밤과 새벽에 해야 했다.
파리에서 간간히 들어왔던 당에 대한 소식은 대체로 우울할 뿐이었다. 조승수 의원이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의원직을 상실하였고, 그의 지역구였던 울산 북구에서 열린 보궐선거에서, 승리를 자신하던 당은 패배하였다. 이미 두 번이나 구청장을 민주노동당에서 낸, 당의 가장 만만한 텃밭에서의 패배는 당에게 심각한 타격을 안겼다.
당대표를 비롯한 최고의원들이 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총괄 사퇴를 하였고, 2기 지도부가 출범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소위 NL이라 불리는 자주파는 그간 확장된 세력을 선거에 집중시켜, 사무총장, 정책위원장을 포함한 주요 당직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2005년 12월, 다시 돌아온 당에 의외로 사람들은 아직 떠나지 않고 있었으나 무겁게 가라앉은 패배감과 싸늘한 자조, 소통을 어긋나게 만드는 불신에 휘감겨 있었다.

일심회 사건

민주노동당에서 일하면서 가장 곤혹스러웠던 시기는 소위 간첩단 일심회 사건이 터졌을 때였다. 처음엔 모두가 조작이나 당에 대한 탄압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북핵 사태에 대한 적극적 해결책으로 지도부의 방북이 계획되어 있던 시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간첩 행위로 규정할 수 있건 없건, 당의 현직 간부가 북한 조선노동당에게 일정한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 검찰 발표로 드러나자 당 내부는 심각하게 양분되기 시작했다.

최모 전사무부총장에게 씌워진 혐의는 민주노동당 당직자 350여명의 신상을 북한에 유출했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이 정도 사안이 국가기밀 누설에 해당되는지 심히 의심스럽지만, 심상정 의원이 지적한 바 있듯이, 이는 간첩행위 이전에 “심각한 인권 침해이고, 진보운동의 일탈 혐의”임에 분명하다.
더욱이 민주노동당으로선 조선노동당이라는 타당에 당직자의 신상을 알린 일종의 프락치 행위를 한 내부자가 있었던 셈이니, 더욱 좌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최대 피해자는 민주노동당 그 자체

그러나, 당론은 국가보안법의 존재에 모든 탓을 돌리며, 최모씨를 옹호하는 입장과 인간적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안에 대해서는 냉정한 비판의 입장에 섰던 두 가지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당은 공식적으로 민주노동당에 대한 공안 탄압이니, 국가보안법을 철폐해야 한다느니 하는 원론적인 얘기만을 반복하다가 뒤늦게 대국민 사과를 하고 사태에 대한 자체 진상조사를 벌일 것을 결의했으나, 끝내 당내 진상조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주파 중심인 최고위원회에서 진정으로 조사의 진행을 바라는 사람은 적었던 탓이다.

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분명 민주노동당었다. 이후 민주노동당 깃발만 보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의 수는 더 많아졌고, 혐오를 드러내는 표현은 더 노골화 되어갔다. 대선을 앞두고 매우 부담스런 짐을 지게 된 셈이었다.  
이 사건은 안 그래도 민주노동당을 향해 빨갱이라는 비판을 서슴지 않는 수구보수 세력들에게 그 물증을 가져다 준 격으로, 그들은 우리를 노골적으로 '간첩당'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당사 앞에는 연일 뉴라이트 회원들이 장사진을 치고, 삭발을 하고, 농성을 하며 북한으로 꺼져버리라고 고함을 쳐댔다.

참으로 유치하게도 그들은 “민주노동당은 악마”라는 사뭇 유아적이고 조금은 종교적인 냄새까지 풍기는 플래카드를 당사 주변에 걸어놓기도 했다. 그들이 물러난 뒤에도 한동안 그 희한하기 그지없어 화도 나지 않는 그 플래카드는 당사주변에서 너덜 거렸다.

출근길에 전경들이 우리를 지켜주느라 연일 당사 1층 로비에 들어차 있었다.
우린 전경들이 우리를 지켜주는 이 진기한 세상을 만끽하며, 오늘도 뉴라이트는 계속된다는 것을 확인하며 출근하곤 했다. 뉴라이트 회원들의 항의 시위는 사실 우리를 괴롭히는 일에 속하지는 않았다.

뉴라이트의 공격과 전경의 보호 

조폭 비슷한 외모의 아저씨들이 내지르는 저 거칠기 이를 데 없는 언사들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해줄 뿐이었다. 그들이 내지르는 과격한 구호, 삭발, 혈서 등은 그 대상만 반대일 뿐, 모두 80년대 학생운동 세력이 해오던 그것이었다.
일련의 행위들이 전해주는 소름끼치는 폭력성을 보면서 비로소 시대정신은 저런 과격함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음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더니, 우리가 할 때는 사회를 위한 것이고 그들이 할 때는 추태로 보이는 것은 아마 그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 가는 길에 가해지는 과격한 행위, 더 이상 이런 모순이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다.  

간첩단 사건 직후 감행한 민주노동당 지도부의 북한 방문에서 실제로 이들은 조선노동당이 아닌 조선사민당 위원장을 만나고 왔고, 다른 정당들에 이들이 갖추어온 정당한 예우조차 받지 못하고 별다른 성과없이 귀국했다. 실제로 민주노동당과 조선노동당은 끈끈한 연대를 구성할 아무런 근거도, 실체도 없는 두 개의 상이한 정체성을 지닌 당이다.
일심회 사건으로 당은 심각하게 들끓었다. 당 홈페이지의 당원게시판에 가장 활발하게 분당론이 개진되었던 것도 이 때였다. 새는 좌우로 날고, 역사는 정반합 변증법을 통해 진화하지만, 같은 당 내에 공존하는 이 두 방향의 생각은 진화 이전에 당을 갈갈이 찢어놓을 듯했다.

당직자들은 당시 난데없이 친구들이나 친척들로부터 잘 있냐는 전화를 받았고, 성질 급한 부모님들은 다짜고짜 그만 다니라고 종용해 오기도 하셨다. 택시기사들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가도 "민주노동당사 앞에서 세워주세요"라는 말이 나오면 싸늘하게 대화가 식어버리곤 했다.
심지어는 민주노동당 조끼를 입고 뉴라이트 회원들 앞을 지나가다가 몰매를 맞을 뻔한 사람도 있었다. 뒤에서 "저 놈 잡아라" 하고 달려오는 뉴라이트 회원들을 피해 잽싸게 국회 쪽으로 달음박질 쳐서 봉변을 면했다.
그 무렵 나도, 집에 들어올 때면, 누군가 (혹 국정원 직원 같은 이가) 내 뒤를 밟는 건 아닌지... 뒤를 돌아보곤 했었다. 실제로 몇몇 당직자들의 집에는 국정원에서 사람들이 다녀가기도 했다. 의혹의 눈초리로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면, “우리야 말로 피해자라구...” 외치고 싶었다.

정파의 늪

사실 난 당에 들어오고 나서야, 아직도 NL이니 PD니 하는 정파가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엔 ‘어른들이 되게 할 일 없네. 대학교 때 하던 그 유치찬란한 싸움을 아직도 하구 있어?’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철이 안 들었다는 건 아직 싸울 용기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건 좌파의 필수적인 숙명이었다. 철드는 순간, 시퍼런 투쟁의식은 녹슬기 시작한다.
그들은 다행이도 아직 철이 안 들었고, 운동도 놓지 않았지만, 정파도 버리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당에서 발생하는 많은 갈등의 근본 원인이 정파 갈등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모든 정당에는 정파가 존재한다. 조선시대에도 시기를 불문하고 피 튀기는 당파 싸움은 숙명이었으니, 정치조직에 정파가 있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정파는 정당의 동생'이다. 오히려 정당이 존재하기 위한 필수 요소라 부르는 것이 맞다.
각각의 정파가 서로를 견제하고 경쟁하면서 건강한 조직문화를 형성할 수 있을 때, 정파의 존재 의미를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치 종교단체처럼 비판과 분석, 합리적인 토론이나 공개적인 논의를 거부하며 금기의 영역을 만들어가는, 상식과 이해를 넘어서는 정파가 있고 그들에겐 당보다 정파의 이해가 우선한다면, 이는 당의 암적인 존재밖에 될 수 없다.

합리적 토론과 공개적 논의를 거부하는 정파

여의도 시절, 4층(사무처가 있는 곳-편집자)에 내려가면 왜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처럼 생겼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던 나는 오래지 않아 북한 사람들을 닮은 그들의 분위기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그 동안 당에서 느꼈던, 저 오만할 만큼의 자유로운 지성과 비권위와 비형식이 약간의 냉소와 함께 맴도는 젊고 가난한 엘리트집단의 분위기는 자주파를 거의 포함하고 있지 않은 5층 정책위원회만의 것이었음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사실 난 자주파로 불리는 사람들의 사고의 중심에 민족통일이 있다는 것 이외에 자세한 그들의 생리는 알지 못했다. 민주노동당에 들어온 이상, 민주노동당이 주창하는 대원칙에 합의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고, 나 스스로가 정파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니, 정파적인 편가르기를 피하고 함께 정책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화정책과 관련한 논의를 진행할 때, 자주파 쪽 사람들은 두 시간이 지나도록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듣고만 있는 광경을 연거푸 연출했다. 그러다가 '남북' 문화교류 같은 단어가 나오면 그제서야 눈을 반짝 뜨고 반가워하고. 논의가 끝날 무렵, 몇 시간 동안 아무 말도 안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민망스러워 "한 말씀 하시죠" 하면 그 사람 좋은 얼굴로 "오늘 많이 배웠습니다"라고 언제나 이야기하곤 했다.

이러한 현상은 3년이 지나도 전혀 달라지는 법이 없었다. 이게 개인적인 현상인지 어떤지 알 길이 없어 주변에 물었더니, '이쪽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라는 것이 답이었다.
더 재미있는 건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의 핵심에 해당하는 주체사상이란 단어를 결코 입 밖에 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자주파는 현재 당내 최대 정파임에도 그들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 사항이다. 그들이 갖고 있는 논리를 공개적으로 토론해서 서로 공유할 것은 공유하고 버릴 것은 버리도록 하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진정으로 순진하게) 생각하였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의 세계는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돌고 있지만, 정작 사고의 핵이 되는 그 사상은 논쟁과 토론을 거부하는 금기의 벽장 속에 가둬 두고 있었고, 이러한 태도는 그들을 점점 어리석고 비타협적인 집단으로 몰고 갔다. 금기와 우상에 사로잡혀 있는 집단이 교조주의에 사로잡히지 않는 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민주노동당 '까페 투쟁'을 아십니까?
[나의 민주노동당 잠입기④] 공간에 정확히 반영된 권력구조
 
 
'다니다'는 민주노동당 당직자들을 위한 '문화감성 충전 프로그램'이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문화 프로그램 하나를 정하여, 가고 싶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가이드가 될 만한 전문가 한 사람과 함께 가서 보고, 토론하고, 밥이나 술을 먹는 그런 느슨한 (그러나 속내는 야심찬) 모임이다.

당직자들의 문화감성 충전 프로그램

상상력의 산물인 정책을 생산해 내는 사람들에게는 상상력을 건드려줄 다각도의 자극이 필요하고, 정책을 팔아서 장사를 해야 하는 사람들도 민주노동당 당사에 갇혀 해가 지고 달이 뜨는 일상을 벗어나, 발랄한 감수성 솜털이 피부 위에 돋아나는 경험을 하는 것이 분명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문화부를 상대하다보면, 그들로부터 "예산을 올렸는데 기획예산처에서 다 잘렸다"는 얘기를 흔히 듣는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경제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 전체의 문화적 수준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생각을 매번 해오기도 했다. 민주노동당의 문화에 대한 무관심과 건조한 인식은 당내 설문조사를 통해 공인된 바 있다.

어느날 온 국민들이 대오 각성하여, 갑자기 민주노동당에 권력을 쥐어준다면, 그 때 기획예산처, 재경부, 산자부, 노동부 등에 가서 국정을 다룰 민주노동당의 사람들은 그럼, 문화적인가? 문화는 문화부만의 영역이 아니며, 삶의 모든 영역에 명사적인 대상으로서 뿐 아니라, 형용사적인 가치로서 스며들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잘 스며 있는 사회가 우리가 흔히 일컫는 선진사회일 것이다.

문화(Culture)란 단어의 라틴어 어근을 들여다보면, 경작하는 거다. 밭을 경작하고 그리고 나를 경작하는 거다. 문화를 소유한다는 것은 다독다독 잘 다져진 풍요로운 땅을 소유하는 거다. 문화는 꽃이 아니라 토양이다. 그 땅에서 어떤 나무, 어떤 꽃이 피고 어떤 열매가 맺힐지는 나중의 일이며 각자 선택의 몫이다.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임하는 자들이 마르크스만큼 향기롭고 풍요로우며 문화를 즐길 줄 아는 매력적인 인간이었다면, 마르크스주의가 20세기 말에 와서 이렇게까지 푸대접 받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세상에서 가장 하고 싶어하는 일은 셰익스피어를 한없이 읽는 것이었음을 그의 딸들은 증언하고 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로 시작하는 공산당 선언의 유령은 햄릿에 등장하는 그것과 일치하고 있음을 자크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les spectres de Marx)』이란 책에서 또 얼마나 명민하게 간파해 내고 있는지.(보라, 마르크스와 셰익스피어가 주고받은 저 위대한 상상력의 유희를!!)

민주노동당 사람들이 자신의 문화의 토양을 일구어 가며, 위대한 상상력의 뿌리를 그 속에 내리게 되길 기대하며 난 조촐한 작업을 하나 시작하였다. 나와 비슷한 문화적 열망을 갖고 있던 의원실의 보좌관 한 사람과 모임의 초동 주체가 되어, 약간의 예산도 의원실에서 마련해 주었다.

피카소, 박제된 천재에서 살아 숨쉬는 인간으로

의원실의 보좌관들과 중앙당 당직자들을 모아서 한 달, 혹은 두 달에 한 번씩 박물관, 뮤지컬 공연장, 전시장, 극장 등을 함께 다녔는데 기껏해야 10명 안팎의 작은 인원이었다. 가겠다는 사람은 꽤 있지만, 결국 그 날이 오면, 언제나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들이 우리 발등 위에 무수히 떨어지고, 반쯤은 자신의 문화적 감성을 내려놓는 선택을 한다.

그 중에 가장 만족스러웠던 기억은 함께 피카소 전을 보러갔을 때였다. 이 때에는 희완이 우리의 가이드가 되어 주었다. 마치 피카소 옆집에 살았던 이웃처럼, 세세히 그의 모든 작업과 고민과 각각의 작품들이 갖는 관계들을 입체적으로 드러내주며, 온 몸으로 눈앞에 그리듯 설명해주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천재도, 괴상한 사기꾼도 아니고, 하루하루 예술 작업이라는 실천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확장해간 공산주의자이자 예술가였던 피카소의 삶은 '천재'라는 박제된 이미지에서 벗어나 비로소 우리에게 인간의 모습으로 걸어나왔다.
희완의 설명과 나의 통역으로 진행된 두 시간 남짓한 우리의 관람에는 일반 관람객들의 긴 행렬이 더해져서, 나중엔 큰 무리를 이루기도 했다. 그들이 따랐던 집단이 민주노동당이란 걸 아는지 모르는지... 희완은 그것이 예술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예술 작업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예술가들이 그것을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모든 진정한 예술작품은 시대를 튕겨져 나가 저항하고 조롱하고 비판하며 앞서나간다.

우파는 오른쪽으로 가기 보다는 주어진 길을 가는 사람들. 좌파는 현상을 뒤집어보고 까보고 다른 각도에서 삐딱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철학을 하고 예술하는 자세와 같다. 우파는 사람들을 얌전히 성냥갑 속에 넣어놓고 통제하려 하고, 좌파는 어떻게 해서든 그 통제의 틀에서 뛰쳐나오려 한다.
평등에 초점을 맞추던 좌파의 태생적 관점은 점점 자유 쪽으로 그 무게 중심을 옮겨왔다. 그러나 자본의 무한한 자유를 허락하는 '신자유주의'의 도래로 말미암아 이는 부언이 필요한 난감한 설명이 되어버렸다.

최근 들어 깨닫는 가장 명확한 좌와 우에 대한 설명은 전자는 생명을 지향하고 후자는 죽음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살아있고 깨어있으며 무한한 정신의 자유를 추구하고 모든 살아있는 것과의 조화로운 상생을 꿈꾸는 것이 좌파라면, 텔레비전 앞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보내면서 영혼을 일찌감치 무덤 속에 파묻으며 보수언론의 선동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개발의 미명하에 생태를 파괴하는 것을 발전이라 여기는 쪽은 우파다. 우파가 가장 싫어하는 좌파의 부류가 생태주의자들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우연일까.

우리에게 까페를 달라

2006년 12월, 당은 여의도 당사를 떠나 문래동 당사로 이전하게 되었다.
여의도 당사는, 전엔 집권 직전의 김대중이, 지금은 차기 집권을 노리는 이명박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명당 자리였다. 구구한 이유들이 있었지만, 핵심은 경비 절감이었다. 국회와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당연히 여의도에 머물러 있는 것이 효율면에서 유리했다. 새로 이사 온 문래동 당사 주변에는 수백 개의 철공소가 있었다. 그 밖에는 철공소 사이사이에, 자리에 앉으면 백반을 자동적으로 주는 밥집 몇 개, 배달을 전문으로 하는 다방 몇 개가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에 맞게 노동자들 옆으로 왔다고 했지만, 우리가 말하는 노동자가 육체노동자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면, 노동자는 어디에나 있다. 굳이 철가루 휘날리는 철공소 밀집 지역이 최적의 사무공간이라고 우길 필요는 없는 거다.
이번 당사 이전은 국회 입성 이후, 쉼없이 퇴보해온 당의 지지율만큼,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민주노동당의 명백한 퇴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숨막히는 계파간 갈등과 소통의 부재는 점점 더 명백하게 당으로부터 활력을 앗아가고 있었고, 나는 숨 막혀 죽기 전에 이사를 계기로 내가 할 수 있는 시도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새로 이사가는 당사에 까페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이것은 소통과 휴식과 상상력 충전을 위한 공간이었다.
이전 당사에는 소위 담배방만 하나 있을 뿐, 휴게실 개념의 공간이 없었다. 부서와 일하는 층을 떠나 중앙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섞여서 대화 나누고, 잡지나 만화책도 뒤적이고, 음악도 들으면서 잠시나마 히피처럼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을 꿈꾸며, 난 예산과 함께 계획표를 짜서 당에 제안했고, 그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약속됐던 까페는 이사 당일 없었던 것으로 되고

새로운 당사에 까페를 위한 공간은 당연히 없었지만, 평면도를 보면서, 두 층 사이에 나있는 내부 계단을 막아, 그 자리를 까페로 만들자는데 합의할 수 있었다.
건축 담당 연구원이 내부 인테리어 구상을 맡기로, 화초를 좋아하는 에너지 담당 연구원이 실내 조경을 맡고, 희완에게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할 벽화를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까페는 책과, 잡지가 그득한 북까페로 꾸며질 예정이었다.
서가는 각 당직자들의 기부를 받아 채워지고, 꾸며지는 것으로 구상되었다. 오호... 이렇게 신나는 일이. 난 잡지, 인터넷을 통해 샘플이 될 북까페들의 사진들을 열심히 수집하면서 이사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내부 집기를 위한 약간의 예산까지 확보된 상태였다.

그런데 이 까페는 이사 당일 사라졌다. 정작 이사를 와 보니, 도면상으로 예상했던 것보다 공간이 좁다는 게 이유였다. 까페 자리에는 사무실이 들어찼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런 기도 안차는 주먹구구. 무책임. 무대책에 난 소위 뚜껑이 열려버렸다.
집단의 철학은 공간이 그대로 반영한다. 반대로 공간이 담고 있는 철학은 집단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일할 공간도 없는데 무슨 까페냐”는 논리로 약속했던 까페는 없어졌건만, 대표, 정책위의장, 사무총장은 독방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았다.

당사 내부 공간배치와 민노당의 철학

권력구조를 공간 구성을 통해 정확히 반영해 낸 것이다. 더구나 이들의 사무실은 햇빛이 잘 드는 남쪽 창가를 차지하고 앉았다. 당의 '일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차지한 방과 사무 공간 사이를 완강하게 막고 선 석고보드에 햇빛이 차단당한 채, 좁을 뿐 아니라 차갑고 암울한 분위기를 나눠가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권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독방들을 없애고, 그 자리에 공동의 공간을 만들며, 벽면을 투명 혹은 반투명으로 바꾸고, 소통을 위한 까페를 만들어 달라는 주장을 담은 글을 써서 당 내에서 서명을 돌렸다. 4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서명을 했다. 서명을 한 사람과 안한 사람. 거의 정확하게 정파로 갈렸다.

서명된 문서는 대표와 사무총장과, 정책위 의장에게 전달했다. 아무런 답변도 들을 수 없었다. 이 무렵 당 내에 노조가 만들어졌고, 노조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요구는 공문으로 전달되었으나, 우린 나중을 기약하는 무성의한 답변을 받아보았을 뿐이다.
대신 NL쪽 색깔을 대변하는 것으로 알려진 매체들, NL을 대변하는 당원게시판의 논객들에게서는 일제히, "정책연구원들, 웬 웰빙타령인가" 하는 비아냥들이 쏟아졌다.
결국 또, 까페 논쟁도 정파적인 싸움으로 읽혀, 의견은 이분되었으며, 아무 것도 실현되지 않았다. 삶은 정치이며 당 안에서 모든 사안은 정파적으로 해석되고 결정된다는 진리를 다시 입증한 셈이다.

단언컨대, 민주노동당사 안에 내가 구상했던 그 북까페가 들어서고, 당직자들이 그 안에서 음악을 듣고 잡지를 뒤적이고, 그림을 그리며, 업무영역과 무관하게 사적인 대화를 주고받으며 낄낄거릴 수 있게 되고 그것이 당 사람들의 우울하고 딱딱했던 감성을 말랑말랑하게 자극해 주는 순간, 당의 지지율은 뛰어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너, 아직도 거기 다녀?" 
[나의 민주노동당 잠입기⑤] 멋진 구상과 한심한 꼬락서니
 

연애와 직장이 닮아 있는 또 하나의 구석은, 한 가지에 반해 선택하게 되면 나머지 모두를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랑에 눈멀 때, 우린 그 사람의 한 가지를 사랑하면서 나머지 모든 것에 기꺼이 윤색과 도취의 작위를 범한다.
그리고 서서히 사랑의 환각에서 벗어나면서 아름답지만은 않은 진실을 직면할 때, 환멸을 내 손으로 보듬어 살로 채워내는 것은 사랑을 지속하는 유일한 방법이자, 내 최초의 선택에 대한 존중을 통해 스스로 성숙해지는 길이기도 하다.

난 민주노동당이 갖고 있는 저 황홀한 문화강령과 감히 아무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급진적인 정책 의제들의 그 발칙함을 보았을 뿐,다른 그 어떤 잡다한 현실에도 눈 두지 않고 기꺼이 이 세계에 발을 담궜다. 내가 생각하는 진귀한 가치를 오로지 민주노동당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조건에 대해서도 재고해 볼 수 없었다.

그의 비듬을 털어주고, 주름진 눈가에 입맞추며

그것은 희완이 자신의 생물학적 나이와 무관하게, 시퍼렇게 젊고 타협을 불허하는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사람인 것에 압도당해, 그가 가진 다른 그 무엇에 대해서도 한 점 고민 없이 그와 함께 삶의 질주에 나서게 되었던 것과 비슷하다.
옆에서 말하지 않으면 씻는 것도 옷 갈아 입는 것도 늘 잊고, 세상 모든 존재에 대해 정치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믿으며, 이러한 믿음을 옆 사람과 꼭 공유하고 싶어하는 진지함과 돌멩이 하나 놓치지 않고 세상사를 다 이해해야 하는 완벽주의로, 종종 사람을 지치게도 하는 그이지만, 기꺼이 그의 셔츠에 언제고 앉아 있는 비듬을 털어주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긴 식탁에서의 토론 사이, 핸드폰을 삽입시켜, 나만의 쉬어가는 방법을 마련해 가며, 그의 까칠한 손등과 주름진 눈가에 입맞춰가며 살고 있는 것처럼.

이 소화도 이해도 안 되는 정파 갈등의 늪에 빠져 있는 정당. 노조를 슬금슬금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고, 금년 들어서는 임금 체불도 대수롭지 않게 하면서 미안해 하지조차 않는, 참 기가 찬 소위 진보정당. 당직자로 하여금 심심찮게 "일하는 사람의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야"라는 푸념을 서슴없이 늘어놓게 만드는 나의 직장 민주노동당에 대해서도 난 기본적으로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가진 한 가지가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였기 때문에, 이젠 내가 그를 살찌우고 나의 새로움으로 당을 신선하게 만드는 데 설탕 한 스푼만큼 기여할 수 있다면, 난 이 곳에서 내 존재의 이유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당에서 일한 지 3년째 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내게 “아직 거기 다녀?” 라고 묻는다. 바깥사람들이 묻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당 안 사람들조차 종종, “왜 계속 다니는데?” 하고 허심탄회하게 물어온다. "아니, 그럼 당신은?" 하고 되물으면 “넌 좀 자유롭잖아”는 답변이 돌아온다.
물론, 머리도 몸도 자유롭다. 대학시절부터 운동하면서 십여 년을 비슷한 사람들과 저 멀리 나부끼는 희미한 희망의 불빛 같은 것을 바라보며, 현실의 부대낌을 견디며 살아온 많은 동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 긴 역사를 함께 해온 동지도 없고 따라서 배신할 대상도 없다.

다 아는데... 난 신문 보고 안다

때론 이 점이 당에서 일하는 데 핸디캡이라 느껴지기도 했다. 모두가 빤히 들여다보는 정황을 혼자만 못 읽고 신문 보고 나서야 이해하는 일들이 종종 발생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난감함을 굳이 극복할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그 정황이라는 것이 내 머릿 속을 단순하게 만들기 때문에, 좀 노력하면 알 수 있는 내막들에 대해서도 대충 귀 닫고 지낸 편이다.
비록 운동하며 박힌 군살은 없지만, 삐딱한 모난 돌로 세상을 관통해온 세월은 있기에, 또 다른 시선과 접근을 당에게 제공할 수 있다고 믿어 보고, 동종교배가 열성인자를 낳는 건 불멸의 법칙이라 되뇌이며, 완전한 자유의지로 난 여전히 민주노동당에 여전히 남아 있어야 할 이유를 발견한다.

첫번째의 지극히 실용적인 이유는, 민주노동당은 내가 만든 문화분야의 공약을 받아줄 유일한 정당이기 때문이다.
나는 문화가 교육처럼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이자 국가가 일정한 수준까지는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는 공공서비스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인간은 정신의 양식을 갖고 있고, 그것을 일궈내는 일은 그만큼 존재하는 일이 된다. 하나의 인간에게서 문화적 정체성을 소유한다는 것은 비로소 그가 정신적인 개별적 자아를 구축한다는 의미와 같다.

한 개인에게서 뿐 아니라 한 사회에게도 이 사실은 공통으로 적용되며 이 생각은 민주노동당 문화공약의 근간을 이룬다. 문화정책에 자본의 논리를 대입시켜, 마치 문화가 산업자원부의 문화섹션인양 취급하는 현 정부, 그보다 한술 더 떠서, 문화를 표방한 개발 정책에만 골몰하는 우파 정당의 문화정책과는 완전히 반대의 지향점을 지닌다, 민주노동당은.

둘째, 적어도 현재까지 민주노동당은 한국사회에서 진보적인 생각들을 담는 유일한 큰 그릇이다.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주장하고 녹색정치선언을 통해 유기농법과 대체에너지, 환경파괴를 저지하기 위한 정책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폭발 직전의 지구 위에 더 이상 성장이란 이름으로 토목공사가 남발하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를 제시한다.
현대판 노예제도 비정규직을 철폐해야 한다는 주장도 민주노동당만이 하고 있고, 미국의 명분없는 전쟁에 우리의 젊은이들을 내모는 파병에 반대하는 유일한 정당도 민주노동당이다. 사회양극화를 가속화시키고 경제주권, 문화주권을 송두리째 빼앗기에 할 한미자유무역협정을 결사적으로 막고자 하는 것도 오로지 민주노동당 뿐인 것이다.

그런데, 주장과 일상의 간극에 민주노동당의 허점이 있다. 민주노동당이 제시하는 미래사회에 대한 구상은 나무랄 데 없지만, 자기 자신 현재의 꼬락서니는 한심한 수준이다. '민중'의 삶을 불타는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때로는 '가열찬' 투쟁을 전개하고 있지만, 눈 앞에 있는 자신의 동료와 자기 자신의 삶을 보살필 줄 모른다.

민주노동당은 사람들의 가슴에 파편을 꽂는다

2007년 초에 만들어진 노조가 그 문제점을 지적하기 전까지, 당에서 임금은 예산집행 순위의 최하위에 있었다. 잔치를 벌일 넘쳐나는 풍성함이 없더라도, 투명하고 평등하며, 합리적이기만 해도 모두가 감사히 누릴 자세가 되어 있는 민주노동당에서, 대의를 향한 아름다운 원칙들은 당내의 일상으로 돌아오면, 산산이 파편이 되어 자취를 감추면서 사람들의 가슴에 그 파편을 꽂는다.
여자인 내가 1년 간 육아를 위해 휴직할 때에는 잠잠했던 사람들이, 다른 남자 동료가 육아휴직을 하려고 하자, 끊임없이 간접적인 압력을 행사하여, 그로 하여금 육아휴직을 실천하는 일을 거대한 운동을 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그 남자동료의 1년은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서 나오기도 했다.

다른 세상에 대한 실험이 우리 내부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은 명백하다. 실험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으면서 권력을 잡아 하루아침에 세상을 바꾼다는 거짓말은 나부터 믿을 수 없다. 실천하지 않는 만큼 우리의 미래는 더 멀리로 내달린다.
늘상 비어있는 독방들을 그래도 기어이 유지해야만 자신들의 권위가 선다고 생각하는 지도부가 있는 상황. 지도부들도 당 내에서 각자 다른 자기 역할을 맡은 동지일 뿐임을 망각하고 이들이 다른 당직자들보다 열 배쯤 넓은 공간을 차지해야 할 이유를 은근슬쩍 인정한다면, 어마어마한 관성의 무게와 자본주의의 선동에 사로잡힌 집단적 맹목의 상태를 극복해야 할, 대학평준화를, 비정규직 철폐를 어떻게 남들에게 설득해낼 수 있을까.

“잘난 놈들은 더 누릴 권리가 있다. 억울하면 일류대학 가고, 정규직이 되라.” 이 논리를 극복하기 위해선, 평등한 세상의 탄력을 체험하여 몸에 밴 자신감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하지 않을까.
 
 
눈 뒤집힌 나, 노조사무국장 되다 
[나의 민주노동당 잠입기⑥] "아름다움, 내 발길 향하는 곳"

행복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남에게 행복을 나눠줄 수 없고, 자유를 누려보지 않은 사람이 더 큰 자유를 다른 사람들에게 허락할 수 없다. 하물며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집단이 더 건강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주장을 세상은 얼마나 진실하게 들어줄 수 있을까.

우울증 앓는 사람들

민주노동당 당직자들은 1년에 한 번씩 건강검진을 받는다. 의사 당원들의 병원에 가서 소변검사부터 내시경까지 비교적 꼼꼼하게 받는 건강검진이다. 이 검사에는 정신건강에 대한 항목도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가벼운 우울증 증세에 대한 진단을 받는다. 육체건강에 대해서도 결과는 비슷하다.
종합적인 진단이 붉은색, 노란색, 녹색으로 나타나는데, 아주 건강하다는 뜻인 녹색을 받은 사람은 주변 당직자중 나 혼자 뿐이었다.

좌파정당으로서, 언제나 지는 싸움을 익숙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 세상 모든 사건들에 대해 가장 적나라하고 격렬한 시선으로, 부패한 주류언론을 뚫고 제 목소리를 내야 하는 고달픔, 거기에 가장 치명적으로, 하루하루 들려오고, 눈앞에 펼쳐지면서, 쓰린 가슴을 추스르게 만드는 당 내부의 모순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지내는 건 사실 내는 건 엄청난 자기관리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민주노동당이 갖는 이 자기모순은 나에게 또 하나의 떠나지 않을 이유를 부여한다. 민주노동당에게 “민중을 말하기 전에, 먼지 우리 꼬라지부터 살펴보자. 우리의 삶과 주장을 일치시키자” 라고 말하며 자기모순을 타파하게 하는데 앞장 설 소위 당내 개혁을 모색할 사람이 절실히 필요하다.
얼마 전, 난 민주노동당 당직자 노조의 사무국장으로 임명되었다. 내가 생각해도 점입가경이고 희대의 아이러니다.

내가 사무국장? 남한테 사기치는 것 같은 기분

아이를 가졌을 무렵, 한 친구가 “그처럼 판타지를 많이 품고 사는 네가 어떤 엄마가 될 수 있을지 상상할 수 없어”라는 문자를 보내온 적이 있다.
몽상가에다 이상주의자 심미주의자, 개인주의자. 냉정하고 치밀하며 꼼꼼해야할 노조 사무국장이 지녀야 할 덕목과는 정 반대의 것들을 줄줄이 자발적 특징으로 가지고 있는 나다.

4주 정도 지났지만, 아직도 새로운 직함으로 나를 소개할 때, 음절 하나하나를 똑바로 조심스럽게 발음하면서 천천히 말한다. 웃음이 나오려고도 하고, 꼭 남한테 사기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사실 여전히 한번도 걸쳐보지 않은 어색한 옷이어서 어떻게 여미는지도 잘 모르겠고, 계속 옷걸이에만 걸어놓고, '저게 지금 내꺼란 말이지' 하고 암시하는 중이다.

사연은 이렇다. 금년 상반기 들어서, 임금은 계속해서 체불되고, 이미 집행한 사업들에 대한 사업비 지급이 서너 달 째 동결되면서도 설명없이 막연히 사람을 기다리게만 하는 당을 보며, 난 당이 처한 자기모순에 급격히 눈을 떴다.
갑자기 부채가 18억으로 늘어났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예기치 않은 엉뚱한 사업들에는 목돈이 펑펑 들어가기도 했다. 이 상황에서 갑자기 늘어난 적자에 대한 명확한 원인 분석도, 투명한 내역도 공개 안하고 당직자들한테 세액공제 사업만이 대안이라고 윽박지르는 당 지도부는 한마디로 피식 비웃어주기에 딱 적합했다.
가난하다면 정직하고 평등하기라도 해야지 우리가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기는 법이다. 그런데 당의 태도는 그 먼 나라에 미뤄둔 '대의'를 위해 이 모든 것을 쓰레기통에 쳐넣고 있었다. 내 눈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내 눈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칙 없이 좌충우돌하는 당 지도부를 신나게 공격하며 실력 발휘를 해야 할 적기에 미온적으로 대응하는 노조 집행부를 들들 볶아대는 가장 극렬한 조합원의 한 사람이 나는 되어갔다. 정보통신과 지적재산권 담당 연구원인 노조위원장의 자리가 내 자리에서 두 발자국 앞에 있었던 정황도 한몫 했다. 지나다닐 때마다 벌침처럼 아프게 한마디씩 쏘아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심각한 얼굴로 내게 다가온 위원장이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사무국장 맡아줄래요” 하는 거다.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라는 말을 꺼낼 때, 나는 “이제 그만 좀 할래, 너무 아프거든”. 하는 말을 할 줄 알았다.
어쩌면 실제로 그는 두 가지를 다 원했는지도 모른다. 활활 타오르는 나의 공격 의지를 양분삼아, 그의 말대로 강성노조로 전환하고자 하는 뜻도 있었던 한편, 내가 집행부에 들어오고, 대응에 대한 고민을 함께 짊어지면 좀 덜 아프게 그를 찔러대지 않을까 하는.
마침 전임 사무국장이 개인적 사정으로 휴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문제제기한 사람이 총대 매는 게 당의 철칙이거든” 하면서, 이 해괴한 결정을 부추겼다. 그렇게 나는 노조전임자를 뽑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라는 단서를 달고, 사무국장이 되었다.

 마음 속 불씨 하나 의지해서 어둔 길에 나서다

가보지 않은 어둑컴컴한 길을 마음속에 있는 불씨 하나에 의지해서 더듬거리며 가는 기분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직함이 내게 당장 눈앞에 펼쳐 주는 일들은 평생을 해도 적응 안 될, 저 저주스러운 공문 따위를 만드는 일이다. 뜻은 눈앞에 있지만 과정을 고달프고 길은 멀다.
그러나 한편으론 세상에 대한 가득한 불만을 옆 사람 하고만 토로하며 씩씩대다가, 민주노동당에 발을 딛고, 세상을 향해 새로운 대안들을 날려 보낼 수 있게 된 일이 기뻤던 것처럼, 소위 진보정당이 명쾌하게 뛰어넘지 못한 자기모순의 덫에 대해 냉소와 자학을 일삼다가, 여기에 정면으로 대응하며 “똑바로 하시지” 하고 잽을 날릴 수 있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 즐겁기도 하다. 그러나 그 뿐이다. 멍석을 펴주니, 나 역시 잽을 날리기는 커녕, 제 정신도 못차리겠다.

노조의 상급단체인 공공연맹의 조직실장을 만나러 가는 자리에, 오페라에 가는 사람처럼 화사하고 여성스런 옷차림을 하고 나서자, 희완이 “그 사람이 너의 옷차림이 제시해주는 통념을 극복하고 너를 다시 보는데 1년이 걸릴지, 2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야. 세상 사람들은 생각보다 명석하지 않거든”. 하며 온건한 어조로 나를 만류했다.
난 오페라와 민주노동당 노조, 유함과 강함, 여성적 화려함과 남성적 공격성을 병렬하는 정반합의 논리로 스스로에게 합을 향해가는 주문을 외고 싶었고, 극단의 대비가 주는 상상력을 공중에 날리고 싶었으나, 이번엔 그의 조언을 따랐다. 생각보다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아름다움이 구원할 것이다

모순의 틀을 깨기 위해서 계속해서 또 다른 틀을 만들어 보지만, 새로운 틀을 만드는 순간 조직이 갖는 고질적인 병폐는 하나 둘씩 우리의 발목을 잡고,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또 다른 내부의 싸움은 시작된다. 그러면서 태초의 순결한 의지는 내부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에너지로 소진되어 버린다.
그 속에서 개인의 번잡한 욕망 따위야 꽃피어날 틈도 없이 사회적 대의란 무거운 흙더미 속에 묻혀버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흙더미를 뚫고 피어나는 꽃도 있고 풀잎도 있다. 난 그 꽃들에 물을 주고, 눈을 맞추며, 종종 노닥거릴 뿐이다. 결국 세상은 아름다움이 구원할 것이고, 나의 발길은 오로지 날 자극하는 신선한 향기를 내뿜는 곳을 향해서만 움직일 터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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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tille@naver.com 목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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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가 귀띔한 글 잘 쓰는 법

형식이 다를 뿐 글의 목표는 모두 같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그리고 깔끔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글쓰기는 본질적으로 통한다. 그렇다면, 글쓰기의 달인으로 꼽히는 정 교수가 생각하는 글 잘 쓰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스승 이종은 교수와 얽힌 에피소드를 먼저 들려주었다. 오래전, 정 교수가 한 한시를 번역할 때 이야기였다. 空山木落雨○○ 정 교수는 이렇게 번역했다. "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이종은 교수는 정 교수에게 대뜸 "야 사내자식이 왜 이렇게 말이 많아?"라고 면박부터 줬다. 남은 문장은 "빈 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
정 교수는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불필요한 것들만 줄여도 글이 달라진다고 강조했다. 그 역시 제자에게 글쓰기 조언을 할 때 "글에서 부사와 형용사를 30% 정도만 줄여보라"고 늘 말한다. 글쓰기는 전달력이 중요한데, 이 전달력은 문장을 줄일수록 늘어난다는 점이 그의 글쓰기 지론이자 글 잘 쓴다는 말을 듣는 비결이다.

종결어미: 이다는 잽, 것이다는 스트레이트: 잽이 기본, 스트레이트는 결정타. 그런데 것이다 자주 쓰면 짜증나는 글. 있다는 긴장감이 없어지는 약점.
김흥호 선생의 책 "생각 없는 생각" : 힘이 넘치는 문체. 있다와 것이다 쓰지 않음. 콤마가 들어가지도 않는데 강한 힘.


표정훈이 말하는 글을 잘 쓰게 되는 법

표씨의 강점은 폭넓은 주제와 다양한 성격의 글을 빠른 시간 안에 쓸 수 있는 힘이다. 이런 힘을 갖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 표씨는 뜻밖에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던 소설 덕분"이라고 말한다. 끼낑대며 1500매에 이르는 글을 써 본 것이 그에게 자신감을 가져다준 것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혼자서 이야기를 써본 덕분에 호흡이 길거나 분량이 많거나 주제가 바뀌어도 두려움을 덜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첫번째 실패는 그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던 셈이다.
그래서 그는 글 잘 쓰는 법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소설이든 아니든 1천매짜리 원고를 책 쓰는 심정으로 먼저 써보라"고 권한다. 원고지 1천매는 300쪽 안팎의 책 한권 분량이다. 책 한 권을 써보는 첫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런 경험의 유무는 글을 쓰는데 있어 하늘과 땅의 차이가 된다.

+구본준, 한국의 글쟁이들, 2008, 한겨레출판
+임의로 잘라낸 문장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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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 혹은 양파에 대한 생각
로쟈 알라딘 2006-03-19 12:20

'김훈-김규항-고종석의 문체에 대한 생각'이란 제목으로 재작년 6월 모스크바통신에 올렸던 글을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둔다. 고종석에 대한 부분만 따로 떼내어 보강하려다가 '자료' 차원에서 글 전체를 다시 옮겨놓기로 한 것이고, 대신에 이미지들을 보강해 넣기로 한다. 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가 정의한 바대로 문체가 '양파' 껍질 같은 것이라면, 내가 여기서 다루려고 하는 것은 김훈, 김규항, 고종석이라는 세 종류의 양파가 되겠다.

문체에 대한 나의 몇 가지 생각을 적고자 한다. 먼저, 자신만의 독특한 ‘얼굴’ 혹은 ‘손가락’을 가진 작가로 제일 먼저 손꼽을 수 있는 사람이 김훈이다. 그는 소설가이기 전에 에세이스트였고, 에세이스트이기 전에 언론사 기자였다. 그는 자신의 직업과 표정을 그렇게 변화시켜가고 있지만, 나에게 소설가로서의 김훈은 좀 낯설다. 문학판의 각광에도 불구하고(그는 두번째 장편으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고, 첫번째 단편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런 건 그들만의 ‘비즈니스’이다. 작품이 있으니까 상을 주는 게 아니라, 상이 있으니까 작품을 찾는 것이 문학/출판계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소설가의 손가락’이 아니라 ‘에세이스트의 손가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주제를 모른다거나 어리석은 것은 결코 아니다. 에세이로서는 ‘밥벌이’를 할 수 없는 나라가 한국이며, 그는 ‘밥벌이’의 신성함을 누구보다도 ‘지겹도록’ 맹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현재 오랜 기자생활을 그만 둔 그에게 소설쓰기는 그의 밥벌이, 즉 그의 비즈니스이다. 도둑질을 하거나 사기를 치는 게 아닌 이상 남의 밥벌이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은 좀 우스운 일이다. 그건 각자의 문제이다. 그래서 예컨대, 화장실 청소원에게 혹 “그것도 밥벌이냐?”고 묻는 것은 우스운 일을 넘어서 아주 무례한 일이다. 세상의 밥벌이에는 귀천(貴賤)이 없으므로.

나는 김훈의 에세이들을 ‘숭배’하지만(나는 그것들이 국어교과서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소설들은 아직 한편도 읽지 않았다. 그의 에세이들은 출간되자 마자 사들였지만(어떤 건 몇 권씩),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칼의 노래>, <현의 노래> 세 장편 소설에 대해서는 무심하게 대했다. <빗살무늬>는 품절된 이후에야 사려고 돌아다녔는데, 결국 내가 샀는지 못 샀는지도 기억나지 않으며, <칼의 노래>는 대폭 할인할 때에야 ‘싼 맛’에 샀고, <현의 노래>는 사두지 못한 채 모스크바에 왔다. 그러니 내가 그의 소설들에 대해서 말할 ‘지분’은 별로 없는 셈이다.

대신에 나는 북매거진 <텍스트>(2004년 4월호)에서 <현의 노래>에 대한 두 편의 서평을 읽었고, 이 소설에 대한 그림을 대충 그려볼 수 있었는데, 그건 읽지 않은 상태에서 그린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이하의 인용은 모두 두 서평으로부터의 재인용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는 그를 잘 안다고도 말할 수 있다(하긴, 소설을 제외한 그의 글과 인터뷰 대부분을 찾아 읽었으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장편소설’이라고 표지에 박혀 있더라도, 그런 걸 세 권이나 냈더라도 그는 아직 단 한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 그가 쓴 건 에세이스트의 손가락이 쓴 역사 ‘에세이’이고, 혹은 그에 대한 ‘판타지’이거나 ‘모노드라마’들이다. 그건 박상륭의 ‘잡설’들이 ‘소설’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어떻게 해도 감추어지지 않는, 그의 ‘문체’ 때문이다. 흔히 ‘아름답다’ 혹은 ‘현란하다’고 일컬어지는 것 말이다. 요컨대, 그의 문체는 소설이란 장르, 품위 없고 잡스러운 장르가 요구하는 바 일상적 디테일, 저자거리의 언어를 담기에는 너무 고상하며 품위가 넘쳐난다. 그래서 어색하다. 마치 장미희가 떡장사를 연기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가 아무리 “소설이요!”라고 외쳐도 내겐 “똑 사세요!”로 들린다.

<텍스트>의 두 서평은 ‘모노톤의 복화술’(김용필)과 ‘문체의 아름다움이 놓친 몇 가지’(조은영)란 제목으로 돼 있는데, 서평자들이 지적하는 바나 내가 지금 얘기하는 거나 같은 얘기이다. 그의 소설은 ‘모노드라마’이며, 문체의 아름다움 때문에 소설을 ‘망쳤다’는 얘기니까. 조은영 기자의 서평은 “그렇다면, 김훈의 진정한 3인칭 소설, 최초의 3인칭 소설은 아직 씌어지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라는 조심스러운 진단으로 마무리되고 있는데, 나는 그것이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물론 신중함은 기자로서의 조건이다). 그는 3인칭 소설은커녕, 소설 자체를 쓴 일이 없고, 앞으로도 별로 쓸 일이 없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예컨대, 김훈은 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한다: “악기를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그 구멍과 줄과 떨림판과 건반 어디에도 소리의 흔적은 없다. 악기는 소리의 집이지만, 소리는 그 집에서 살지 않는다. 소리는 어디에 있느냐. 소리는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에서 죽느냐. 나는 소리의 거처를 알지 못하지만, 소리는 악기와 그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의 몸 사이에서 아날로그 방식으로 태어나고 죽는다.”(<밥벌이의 지겨움>, 19쪽) 이런 건, 그의 에세이들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사유이고, 문장이지만, 소설로는 옮겨질 수 없는 문장이다(뿐만 아니라 번역되기도 곤란한 문장들이다. 박상륭의 잡설들이 번역 불가능한 것처럼, 김훈의 에세이들도 번역 불가능하다).

그것이 <현의 노래>에서 “소리는 몸속에 있지 않다. 그러나 몸이 아니면 소리를 빌려올 수가 없다. 잠시 빌려오는 것이다. 빌려서 쓰고 곧 돌려주는 것이다. 소리를 곧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 자리는 적막이다. 그 짧은 동안만 흔들리고 구르고 굽이치는 것이다. 소리를 거스를 수 없다.”라는 우륵의 말로 가장(假裝)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게 김훈의 목소리임을 이미 알고 있다. 요컨대, 그의 소설의 언어는 에세이의 언어를 “잠시 빌려오는 것이며, 빌려서 쓰고 곧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그 에세이의 자리는 그가 <풍경과 상처>나 <자전거여행>에서 적었듯이 물론 ‘적막’이다(이 적막으로는 밥벌이가 되지 않는다!). 나는 그가 “짧은 동안만 흔들리고 구르고 굽이치다가”(빨리 한몫잡고서!) 곧 제자리, 에세이스트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에세이를 거스를 수는 없다.” 그 정신, 그 문체, 그 손가락, 그 적막을!

김훈의 보수주의를 이문열의 보수주의와 비교하는 시각도 있는데(하긴 쿤데라와 이문열도 양립 가능하다고 동렬에 놓는 시각에서라면야), ‘보수주의’에 대한 얘기를 잠시 미뤄두고, 일단 ‘소설가’ 김훈과 이문열을 비교하는 것 자체는 흥미롭다. 일단 둘 다 ‘소설가’가 아니라는 점, 즉 ‘소설가’를 연기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김훈은 이제 막 소설로 밥벌이하고 있으며, 이문열은 소설로 밥벌이를 할 만큼 하자 딴짓을 하고 있다(사실, 한때 소설가이긴 했지만, 요즘도 소설가 이문열 운운하는 것은 좀 우습다. 그의 대표작은 <삼국지>이며, 이번에도 동아일보에 <초한지>인가를 연재하는 듯하던데, 그걸로 미루어도 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그의 본업은 ‘고전 번역가’이다). 근래엔 둘 다 내가 아직 읽지 않은 소설들만 썼다는 것도 공통적이고, 그 소설들이 ‘에세이 정신’으로 충만해 있다는 점도 공통적이다(가령, 이문열의 <선택> 이후의 ‘소설들’). 차이라면, 문체에 있어서, 품위에 있어서, 그리고 언변에 있어서 김훈이 한 수 위라는 것 정도(그런 이문열도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다!).

그리고, 보수주의. 요즘 좀 특이한 한국사회의 풍경은 자칭 보수주의자들, 즉 ‘자각적인’ 보수주의자들이 (특히 젊은 세대에서) 늘어나고 있는 것과 동시에 한편에서는 ‘B급 좌파’들이 ‘보수주의자’란 딱지를 마치 이전에 ‘보수꾼’들이 ‘빨갱이’(혹은 ‘사회주의자’)란 딱지를 적대자들에게 갖다 붙이듯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술어논리에 의하면, ‘B급좌파’나 ‘보수꾼’이나 똑같게 된다). 그런 식으로 보수주의나 진보주의(혹은 사회주의)의 외연이 넓어지는 것은 ‘언어의 경제’상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보수주의’나 ‘진보주의’란 말의 의미가 불분명해지는 탓에 앞에다 수식어를 더 붙여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노무현 정부는 한쪽에서 보기엔 좌파 사회주의 정부이고, 다른 쪽에서 보기엔 우파 보수주의 정부이다. 그런 ‘딱지’들이 가리키는 바는 대개 “당신은 우리편이 아니다!” 내지는 “우리는 당신이 싫다!”는 정서적 상관물이자 자기정체성의 확인이지 지시적 연관성을 갖는 논리가 아니다.

김훈과 이문열의 보수주의란 말도 마찬가지이다. 그건 대국적 견지에서의 ‘통찰’이긴 하지만, 섬세하지는 않다. 김훈은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허무주의자이기 때문이다(이문열도 허무주의자인가?). “아마도 소리와 병장기는 같은 것인 모양이구나”(<현의 노래>)라는 통찰, 즉 악기와 무기는 등가이며, 펜과 칼은 같은 것이라는 그의 주장 혹은 자기암시는 대립물의 통일이라는 변증법적 논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그게 그거라는 허무주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허무주의야 말로 모든 것을 ‘풍경’의 자리에 갖다 놓는 그의 에세이스트 정신에 부합한다. 풍경의 자리에 놓일 때,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연의 사계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충만하며 허무하고 부질없다. 역사 또한 그는 그 ‘풍경’의 자리에다 놓고 묘사할 따름이다.

<현의 노래>의 한 장면에서 김훈이 “이 질퍽거리는 구멍은 대체 무엇인가? 이 빨아당기는 속살이 어째서 왕의 무덤 속에 들어가 쇠와 함께 썩어야 하는가. 야로는 식은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하였다.”(117-8쪽)라고 묘사할 때, ‘야로’는 김훈 자신이며, “이 질퍽거리는 구멍”이야말로 그의 ‘허무주의’의 근거이고, 그의 표현을 빌자면, 풍경의 ‘적막’이다. 그는 언제나 그 풍경 앞에서, 허무 앞에서, 적막 앞에서 기진맥진하였고, 그러면서 마치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이 험난한 사투 끝에 돛새치의 뼈다귀만을 건져 올리듯이 자신의 문체를 길어냈다. 언제나 칼로 깎은 연필을 손가락에 쥐고 원고지에 쿡쿡 눌러써가면서 말이다(왜 칼과 펜이 등가가 아니겠는가!). 때문에, 그의 ‘기진맥진’에, 그의 ‘문체’에 나는 언제나 경의를 표한다.

반복하자면, 내가 보기에 김훈에게서 더 핵심적인 건 그의 보수주의가 아니라 허무주의이다. 그가 ‘보수주의자’라면, 그에겐 ‘보수’나 ‘진보’가 무의미하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가 가부장(家父長)적인 사고의 틀을 고수한다는 의미에서일 뿐이다(언젠가 이 때문에 ‘김훈 파동’이 한번 있었다). 그는 무어라고 말하는가?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 언어를 다루는 일의 힘겨움을 생각한다면 등에서 식은땀이 날 지경이다.” 이 고백에 그의 진실이, 핵심이 담겨 있다.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가 뜻하는 바는 말의 허무주의, 의미의 허무주의이다. 그래서 그에겐 그러한 의미(=기의)보다 말의 뼈(=기표), 말의 잔해, 말의 화석이 더 중요하다. 그가 일상적 시간(=밥벌이의 시간)이 아닌, 역사적 시간, 더 나아가 지질학적 시간에 언제나 매혹되며 거기에 붙들려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예컨대, <현의 노래>의 구상 또한 국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우륵의 가야금에서 얻어졌다고 하지 않는가? 그 천년의 ‘적막’이 곧 그의 ‘질퍽거리는 구멍’이다.

작가는 ‘천년의 적막’을 탐사하고 있지만, 사실 그의 문체를 낳은 허무주의는 좀더 실제적인 기원을 갖고 있다.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고백한바 있지만, 그는 5공 때 한 일간지의 젊은 기자로서 군사정권에 대한 ‘용비어천가’에 앞장섰던 경력이 있다. 그가 신념(=이즘)을 갖고 그 일에 나섰던 거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것이 ‘신념’이 아니라 ‘처세’였더라도 마찬가지이다(그랬더라면 이후에 다른 ‘기자들’처럼 금배지라도 달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를 그 일에 내몬 것은 ‘신념’도 ‘처세’도 아닌 ‘체념적 자학’이고 ‘허무’였다. 당당하게, 폼나게 사표를 던질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의 논리는 좀 다르다. 그 대신 다른 누군가가 결국 그 일을 해야 했을 거라는 것. 즉, 한 사람이 폼나는 대가로 또 다른 누군가가 오물을 뒤집어써야 하는 것이다. 그럴 거라면, 자신이 하겠다는 것이 그의 논리이다.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라는 건 그러한 ‘자발적 부역’에 대한 변명의 논리이다. 그의 ‘부역’은 오직 그가 문장에서 ‘의미’를 버릴 때에만 가능했다. 그것이 그의 의미론적 허무주의의 기원이다.

한편으로, 대장부의 길과 가장(家長)의 길은 좀 다른 길이다. ‘질퍽거리는 구멍’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달리 식구(食口)들의 ‘입구멍’이다. 한 가장이 해야 할 최소한이란 그 구멍을 채워 넣을 밥벌이를 하는 것이다. 유구한 일이지만, 대장부의 ‘명분’은 우리를 한번도 밥 먹여주지 않았다(밥 먹여주기는커녕 죽이지만 않아도 다행이겠다. 오, 계백이여!) 후배 박래부 기자와 한국일보에 연재되었던 <문학기행>이 책으로 묶여 나왔을 때, 김훈이 썼던 서문에는 그의 가족사 한 자락이 들어있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그의 아버지는 아주 엄하고 혹독한 분이었는데, 자주 ‘세상을 저버린 자’처럼 세상에 대한 분노와 허무를 무지막지한 술로 달랬다. 그리고 그런 날 새벽이면, 소년 김훈은 해장국 심부름을 가야 했다고. 어느 추운 겨울날 새벽에도 그는 해장국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그만 뚝배기를 바지와 길바닥에 다 엎지르고 말았다. 새벽녘 길바닥에서 그는 목놓아 엉엉 울면서 절대로 아버지와 같은 삶은 살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아버지와 같지 않은 삶? 그건 대장부의 삶이 아니라 충실한 가장의 삶이다.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라는 것은 대장부의 논리가 아닌 바로 가장의 논리이며(대장부는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지만, 가장은 한 입으로 두 말 해야 할 때가 있다), 가장으로서의 김훈이 발명해낼 수밖에 없었던, 발명해내지 않으면 안되었던 논리이다(자신의 아들에게 주는 편지에서 그가 가장 강조하는 바도 ‘자기 밥벌이’라는 건 그런 의미에서 지극히 당연하다. 그 ‘밥벌이’에 그의 오욕과 영광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허무주의는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장(家長)의 허무주의’이다. 그 허무주의는 결코 겉멋이나 잘난 체가 아니며, 젊은 치기나 늙은 달관도 아니었다. 그것은 기자 김훈이 밥벌이를 하기 위한, ‘유능한’ 가장이 되기 위한 허무주의였다. 어찌 그의 허무주의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지금도 나는 6하원칙의 신성함을 믿는다. 다만 6하의 가치와 존엄을 인정하되, 6하로서 충족될 수 없는 진실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뿐이다.”라고 그는 또 말한다. 복습하자면, 그가 말하는 ‘6하원칙’이란 ‘밥’과 동의어이다. 기자 김훈은 어떤 원칙의 신성함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밥의 숭고함과 밥벌이의 신성함을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기자의 밥벌이란 ‘6하원칙’에 맞게 기사를 쓰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또한 ‘6하원칙’이라거나 ‘밥벌이’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건 앎일 수도 있고, 직관일 수도 있고, 양심일 수도 있다. 그것은, 정신분석학의 개념을 가져오자면, ‘죽음 충동’이라 지목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 죽음충동은 삶 혹은 생존에의 의지를 ‘전부가 아닌(not-All)’ 것으로 잠식하며, 거기에서 기자 김훈이 아닌 에세이스트 김훈이 태어난다.

가장은 자기 식구들의 밥벌이를 하는 것으로 충분히 존엄하지만, 한편으로 세상은 그가 다 먹여 살릴 수 없는 ‘구멍들’ 천지이다. 그 구멍들 앞에서, 어느 봄날 전군가도(全群街道)에 무지막지하게 흩날리는 ‘사쿠라’ 꽃잎들 앞에서, 그는 할딱이며 기진맥진이고 속수무책이다. ‘6하’로 기술될 수 있는 세상의 진실들은 몇십 년 기자생활의 ‘짬밥’으로 어떻게든 카바한다지만, 그걸로 충족되지 않는, 그걸 넘어서는 진실들은 다 어찌한단 말인가? 에세이스트 김훈은 그 ‘충족될 수 없는 진실’들을 (‘가부장적’ 책임의식을 가지고!) 기록하고자 분투하지만, 그의 자백대로 언제나 ‘백전백패’이다. 그의 문체는 그 싸움에서 얻어진 전과이되, 패장(敗將)의 그것이어서 아름답지만 속절없다. 아마도 김훈 자신이 그걸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에세이스트 김훈의 허무주의는 기자 김훈의 그것과 같이 ‘가장의 허무주의’이되, 이 대책 없는, ‘무능한’ 가장의 허무주의이다. 어찌 그 허무주의가 안쓰럽지 않겠는가? 하여 그 ‘허무주의들’에 비하면, 보수주의란 딱지는 사소하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사르트르에 의하면, 현실과 지시적 연관을 갖는, 그러니까 현실을 ‘앙가제’하고, 현실에 ‘앙가제’하는 문학은, 곧 소설은 ‘어떻게’가 아닌 ‘무엇을’에 복무해야 한다(그는 총구를 제대로 겨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무엇을’을 달리 ‘의미’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순수한 음악의 상태, 무의미의 상태를 지향하는 시와는 달리, 산문(=소설)은 무엇보다는 ‘의미’해야 하며, 의미-지향적이어야 한다(그것이 시와 산문의 차이이다). 비록 그 의미가 단선적이거나 독백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카뮈와의 논쟁에서 사르트르-장송이 지적했던 바는 카뮈의 아름다운 문체가 ‘앙가주망’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달’이 아니라 ‘손가락’만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훈의 소설에도 똑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그의 아름다운 문체, 그리고 그걸 뒷받침하는 허무주의적 세계관(“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은 소설에 적합하지 않다. 소설가의 문체는 적당히 아름다워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적당히 지저분해야 한다. 그것이 ‘산문적 일상’을 묘사/기술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즉 소설가가 자신의 얼굴, 필체, 문체를 갖는 건 바람직하며, 동시에 좋은 소설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긴 하지만, ‘너무 아름다운 문체’이어서는 안된다(<내겐 너무 예쁜 당신>이란 프랑스 영화의 문제의식이기도 한데, ‘너무 아름다운 여자’는 ‘아내’로서 적합하지 않다. 결혼생활은 ‘산문적’이기 때문이다).

<현의 노래>의 서평이 들어 있는 <텍스트>(4월호)에는 ‘여성’을 주제로 한 서평들도 여러 편 모아져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한국어로 ‘아름다운 페미니스트’란 부제를 달고 나온 <글로리아 스타이넘>이다. 플레이보이의 바니걸로 위장취업할 정도로 미모가 뛰어난, 미국의 이 대표적인 ‘스타’ 페미니스트 운동가의 평전인데, 스타이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녀의 ‘너무 아름다운 외모’는 페미니즘에 혼란과 지장을 초래한다. “곧 그녀는 페미니스트이기에는 너무 예쁜 여성인 것이다.” 그래서 튄다. 다르게 말하면, 그녀는 ‘문체적/문채적’이다. 가령, 그녀의 50세 생일파티 풍경. “보스턴의 부동산 부호가 파티준비를 돕겠다고 나섰고, 파티 장소는 월도프 아스토리아호텔 그랜드볼륨이었다. 베트 미들러의 축하공연이 있었으며 스타이넘의 어린 시절과 젊었을 적 사진이 실린 생일 책이 전시되었다. 언론 또한 이 파티를 크게 다루었다. 스타이넘은 일에서나 개인적으로나 인생의 정점에 서 있었다.”

페미니스트의 삶의 불행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성공적인’ 페미니스트란 건 뭔가 어색하다. 결국 페미니즘은 그녀의 미모와 상승작용하며 스타이넘이란 한 여성에게 ‘성공한 삶’을 가져다 준 것이지만, 그것이 전체 페미니즘, 혹은 억압받는 여성 전체의 삶과는 과연 얼마만큼의 관계가 있을까? 그녀를 비판하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주장대로, 차라리 스타이넘이란 ‘스타’ 없는 페미니즘이 더 낫지 않았을까?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못생겨야 할 필요는 없지만, 적당히 못생길 필요는 있다(그래야 얼굴을 보는 게 아니라, 주장을 듣는다). 즉 적당히 예뻐야 한다. 그건 다른 모든 ‘산문적’ (정치적)운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시적인’ 외모는 ‘산문적’ 일상에 적합하지 않다.

이건 너무 ‘마초적인’ 생각인가? 가부장적인 김훈은 ‘마초적’이란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그 자신은 거기에 굳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념적으로 그와는 좀 거리가 먼 ‘B급 좌파’ 김규항조차도 똑같이 ‘마초적’이란 비판을 받곤 한다는 점이다(술어논리에 따르면, ‘보수주의자’ 김훈과 ‘진보주의자’ 김규항은 똑같다). 그건 그가 성모순보다 계급모순이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데서, 그리고 그런 생각을 공개적으로, 공격적으로 드러낸 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사실 나로선 그의 비판자들보다는 그의 의견에 공감하는 바가 더 많다. ‘중산층 페미니즘’, 즉 “계급과 사회구조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 페미니즘은 ‘허드렛일을 대신해줄 누군가(다른 여성, 빈민, 식민지인)’를 착취하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벨 훅스, <행복한 페미니즘>)는 의견에 동의하기 때문이다(<텍스트>의 서평에서 인용).

그런 의미에서 이 페미니즘은 민주주의와 똑같은 딜레마를 갖고 있다. 민주주의 또한 허드렛일을 대신해줄 누군가를 착취하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민주주의의 기원으로서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바탕은 노예제였다). 미국, 프랑스, 영국 등 대부분의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경영국가, 제국주의 국가였던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라크 침공을 거론하면서 이런 것이 미국의 민주주의냐고 비판하는 것은 따라서 예리하지 못하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반민주주의적, 제국주의적 행태이기 때문이다.

다른 데서 착취해야지만, 자국의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한국의 민주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국내적 ‘평등’은 국외적 ‘차별’에 의해서 지탱된다). 민주주의가 고상하고 고급스런 제도라는 건 그런 뜻에서이다(어느 정도의 경제적 바탕, 가령 1인당 국민소득 1만불 이상이라든가 하는 토대가 마련돼야지만, 민주주의란 제도는 작동한다). 이러한 사정은 ‘고상한’ 페미니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고상한 것들이란 원래 그 모양이다). 나는 다른 민주주의, 다른 페미니즘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며, 자신할 수 없다.

내가 김규항을 처음 알게 된 건, 그러니까 그의 글을 처음 읽게 된 건 <씨네21>의 ‘유토피아/디스토피아’ 지면을 통해서였다. 공동으로 연재하던 몇 사람의 필자들 가운데에서 유독 그가 눈에 띄었는데(그는 아마도 ‘유토피아/디스토피아’ 지면이 낳은 최고의 ‘스타’일 것이다), 그건 그가 자신의 ‘문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의 이름이 공개되지 않더라도 그의 문장들은 ‘김규항’을 입증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비유컨대, 김훈의 문체가 아름답고 유장한 ‘패장(敗將)의 문체’라면, 김규항의 문체는 ‘자객의 문체’이다. 백전백패를 ‘자랑하는’ ‘패장의 문체’와는 달리, ‘자객의 문체’는 ‘무엇을’에 ‘어떻게’가 복무하는 문체이다. 마치 자토이치의 검술처럼, 그는 짧게 끊어서 군더더기 없이 급소들만을 공격한다. 그래서,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때에라도 그의 문장(=수사학)에는 매료되었다. 이후에 내가 가급적이면 그가 쓴 모든 글을 챙겨 읽고자 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최근에 인터넷에서 그가 쓴 글을 읽고 다소 실망했다. 유시민에게 보수주의자란 딱지를 붙이는 글이었는데, 내용에 실망한 게 아니라(“나는 유시민을 보수주의자로 본다”는 데 어쩔 것인가?), 문체가 예전의 문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했다. 온라인 글쓰기의 특수성을 고려한다고 해도(설마 그런 류의 글들이 공식적으로 출판되는 걸까?) 그의 글은 더 이상 김규항의 ‘얼굴’도 ‘필체’도 보여주지 못했다. 덕분에, 나는 ‘손가락’ 대신에 글의 ‘내용’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보게 되었다.

김규항의 문체를 ‘자객의 문체’라고 했는데, 그의 칼끝이 유독 예리하게 겨냥하는 것은 우파(=보수주의자)가 아니라 자신이 유사-좌파(=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그것이 좌파 전체의 ‘이익’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유시민을 전여옥과 ‘똑같은 놈’이라고 배제함으로써, 좌파는, 혹은 민노당은 어떤 이익을 챙기는지) 모르겠지만, 유사-좌파들을 걸러내는 일을 이 ‘B급 좌파’는 자신의 소명으로 간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하지만, 단순하게 말해서, 민노당을 지지하지 않은 90% 국민들, 혹은 요즘 지지율이 좀 올라갔다고 하니까 한 70%의 ‘불순한’ 국민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들을 어떻게 걸러내고 순화/훈육/계몽해야 하나?). 그것은 한국의 논객 중 가장 ‘좌파적’이라 할 만한 자신의 입지/주장을 ‘B급’이라고 공언하는 그의 ‘결벽’에 이미 새겨져 있기도 하다. 그는 자신을 좌파의 ‘최소한’이라고 간주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기준에 미달한다면, 모두 ‘보수주의자’란 딱지를 뒤집어써 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준에 따를 때, 제도권 좌파, 즉 개량주의적 ‘의회주의 좌파’는 진정한 좌파인가? 동급의 의원으로서 한나라당 의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의정을 논할 민노당 의원들은 과연 좌파다운 좌파인가? 대학에 몸담고 있는 제도권 좌파, 자칭 ‘좌파’ 교수들은 과연 진짜 좌파이며 진보주의들인가? 일부일처제를 고수하면서 ‘아빠’로서 자녀들의 교육을 책임지는 일(“너희는 이렇게 바르게 살아라!”)은 진정 얼마나 좌파적인가? 혹은 한국의 자본주의라는 ‘식인체제’ 하에서 구차하게 계속 살아가는 일은 과연 얼마나 좌파적인가? 등등.

‘자객식’으로 말하자면, 사실 “살겠다고 버둥거리는 놈들”은 전부 보수주의자이고, “죽지 못해 안달인 놈들”이 진보주의자이다. 유기체의 생존은 ‘항상성(호메오스타시스)’이라는 걸 조건으로 한다. 항상성이란 건 ‘기브 앤 테이크’, 즉 주고받는 타협을 통해서 유지된다. 단칼에 자결하지 않고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는 일은 언제나 그러한 ‘타협’을 전제로 한다. 그것이 인간조건이다. 그럴 경우, 급진적인 진보주의 혹은 절대적 진보주의(‘숭고한 A급 좌파’란 게 있다면)란 그러한 타협과 인간조건으로부터의 ‘단절’을 뜻한다. 즉, 결코 타협하지 않으며, 죽음을 무릅쓸지언정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것(지젝 같은 좌파가 ‘죽음충동’에 그토록 매혹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당연하다. 그에게 유일한 ‘행위(act)’는 상징적 ‘자살’이다). 지젝과 네그리 같은 좌파들은 모두 기계-인간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바, 그것은 현재의 인간조건이 극복되어야지만 진정한 ‘진보’가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김규항도 그러한지?).

사실, 새로운 사회를 위한 ‘새로운 인간’이란 테마는 러시아문학에서는 이미 고전적인 테마이다.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1863)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가 정면충돌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문제를 둘러싸고서이다. 1917년 혁명 이후에 역사는 한동안 체르니세프스키의 편이었다. 사회주의 인간형, 혹은 공산주의 인간형이 인민들에게 요구되었고(그러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벌레’로 낙인찍혔다), 인간개조론이 제기되었다. 요컨대, 일차적 본성이든(공병호가 얘기하는), 이차적 본성이든(아도르노가 얘기하는), 현재의 ‘이기적인’ 인간본성을 가지고는 사회주의 유토피아(=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공산주의는 ‘인간들’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천사들’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에서 왜 누구는 대학교수를 하고, 누구는 탄광노동자를 해야 하는가? 그걸 누가 결정하는가? 제비뽑기로 결정하는가? 혹은 로테이션을 하는가? 그런 질문들을 허용해서는 사실상 사회주의 건설이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자발적인 ‘의무감’에 따라 마치 ‘기계’처럼 처리되는 수밖에 없다. 즉 인간-기계, 기계-인간들을 만들어내는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좌파적 휴머니즘’이란 말은 ‘듣기 좋은 소리’이거나 넌센스라고 생각한다(그런 얘기를 들먹이는 좌파를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C급이다). 휴머니즘을 가지고는 ‘좌파’를 할 수도 없고, ‘좋은 세상’을 만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진보가 변화/변혁에 대한 요구를 의미할 때 가장 먼저 변화/변혁되어야 할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며, 인간조건 자체이다(기계-인간이 되기 전이라도 최소한 ‘강철 인간’은 돼줘야 한다. ‘스탈린’이란 이름에 새겨진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인간복제라거나 유전자 조작을 가장 앞장서서 환영해야 할 사람들은 라엘리안들이 아니라 좌파들이다. 그리고, 인간본성 운운하며, 인간복제에 반대하는 하버마스 같은 철학자야말로 유사-좌파, 즉 보수주의자이다. 진정한 좌파가 되기 위해선, 모성을 버리고, 부성도 버리고, 인간성 자체를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유토피아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리라(모스크바-유토피아의 ‘새로운 러시아인’들처럼). 좌파, 혹은 ‘에덴의 기계들’에게 입력된, 프로그래밍된 행복!

말이 좀 길어졌다. 요점은 보수주의자니, 진보주의자니 하는 딱지 붙이기가 얼마만큼의 준거성, 혹은 의미연관성을 갖는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급진적 환경주의자들에 따르면, 환경문제의 해결은 이 지구의 암종인 인간이란 종이 완전히 사라질 때에야 가능하다. 거기에 무슨 타협의 여지가 있는 게 아니다. 그러한 관점에 서면, 좌파니 우파니 하는 구분은 사소하다. 좌파 박테리아와 우파 박테리아가 아웅다웅하고 있는 것이기에. 빨간색이건 파란색이건 박테리아는 박테리아일 뿐이다. 거꾸로 그런 게 아니라면, ‘작은 차이’를 중요하게 간주해야 한다. 좋은 사회, 혹은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하는 강박관념이나 순수에의 결벽에 들려 있지 않다면 말이다.

김훈과 이문열은 다르며, 유시민과 전여옥도 다르다. 그리고 전두환과 김대중이 다르며, 노무현과 이회창도 다르다. 그리고 부시와 케리도 다르다. 그들은 아주 조금 다를 뿐이지만, 그 다름을 인정하는 게 내 상식이고 정치적 감각(이기 이전에 일상적 감각)이다. 나는 우리사회가 ‘더 좋은 사회’가 될 거라고 믿지 않지만 적어도 ‘덜 나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덜 나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러한 상식과 감각이 필요하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덜 나쁜 사회’의 의의를 가르쳐준 이는 기자(요즘은 편집위원이던가?)이자 에세이스트이며 소설가인 고종석이다(자칭 ‘자유주의자’인 그가 복거일의 제자를 자처하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 또한 ‘문체’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 문체는 화려하지도 간결하지도 않으며 그저 담백하다. 그리고 상식적이다. 그는 허무주의자(혹은 보수주의자)도 아니고, B급 좌파도 아니다. 그는 개인주의자이고, 자유주의자이다. 이념의 스펙트럼 속에 굳이 자신을 분류해 넣어야 한다면, 나는 그와 같은 칸에 분류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즉 나의 정치적 입장은 그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그것은 내가 그만큼 그에게서 감화를 받은 바가 많은 탓일 것이다(그에 따를 때, 외모에 의한 서열화는 지성에 의한 서열화보다 더 나쁘거나 억지스럽지 않다. 이것도 마초적인가?).

김훈, 김규항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는 고종석의 (모든 글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글들을 읽었고, 읽고자 했다. 전라도 사람으로서의 ‘서얼의식’은 갖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특별한 트라우마나 결벽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그의 사유는 논리적이지만, 모나지 않고 둥글다. 따라서, 그런 그의 문체가 소설이란 장르와 잘 어울리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김훈이 소설을 못 쓰고, 김규항이 소설을 안 쓰는 데 반해서, 고종석은 소설을 잘 쓴다(이 세 ‘글쟁이’를 내 식대로 분류하자면, 김훈은 ‘예술가’이고, 자칭 ‘출판인’이어서 ‘출판운동’을 하는 김규항은 ‘운동가’이며, 고종석은 ‘지식인’이다). 더불어, 그에게선 기자와 에세이스트와 소설가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아름답지도 날카롭지도 않지만 담담하면서 유려한 그의 문체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체는 그렇게 그 사람이 된다…

앞에서, 김규항은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즉 내가 단어와 단어를 꿰고 이어 붙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유는 단지 세상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다"라고 적었지만, 이 마지막 문단에 의거할 때 그건 그의 문장론으로서 불충분하며 부정확하다.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고 할 때 '문장'은 '삶'과 등가화되고 있으며, 그럴 때 '문장'은 단지 수단에만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그의 삶이다. 그러니, "문체는 곧 사람이다"(뷔퐁)라는 고전적인 명제에 기대지 않더라도 나는 그가 '문체주의자'라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 또한 'B급 좌파'이면서 동시에 '양파'인 것이다.

덧붙여 지적하자면, '양파'는 롤랑 바르트의 그것처럼 그저 텅빈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러시아 정교회 사원 지붕들에서 보듯이 신성함에의 의지와 염원을 담고 있다. 내가 문체주의자들을 존중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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