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은 ‘정책’을 집어치워라 ①
전사 - 서럽던 눈물과 무거운 어깨

의원단, 코너에 몰린 진보가 잡은 돌파구


2004년 4월, 진보진영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2006년 10월, 지금 시점에서 그날을 되돌아보면 입맛이 쓰다. 기대가 과했던 것일까. 전략의 문제였을까. 기대야 어차피 과할 수밖에 없었고, 전략은 애당초 없었다.

노동운동은 1997년 마지막으로 이겼다. 그뒤 제도개선투쟁에서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 때때로 단위 사업장에서 승전보가 울리기도 했지만, 대세는 기울었다. 1987년에서 1997년까지 노동운동과 진보진영이 쌓았던 승리는, 10년이 지난 지금 정파와 관성, 사회적 조롱으로 변질돼 있다. 마지막 남은 사회적 명분과 조직적 성과가 2004년 4월 국회로 '파견'됐지만, 2년6개월 동안 우리는 전진한 것인가 후퇴한 것인가. 다시 되짚어보자. <편집자 주>

연재순서
1. 전사 : 서럽던 눈물과 무거운 어깨
2. 사라진 야성, 지키지 못한 의리

3. 거품은 꺼지고, 결국 한줌만 남았다


2003년 1월9일. 권영길 당시 민주노동당 당대표는 김해공항에 내리자마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두산중공업의 노동자 배달호가 죽었다는 소식이다. 9일은, 2002년 12월 대선을 마친 권영길이 다시 당력을 추스르기 위해 전국순회에 나선 첫날. 대부분의 일정을 취소됐고, 권영길은 창원 두산중공업으로 향했다.

배달호는 죽었고, 권영길은 말이 없었다

두산중공업 노동자광장은 참혹했다. 이날 새벽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른 배달호의 시신 위에는 천이 한 장 덮여있을 뿐이었다. 텅빈 광장에서 배달호는 홀로 죽었다. 불은 그의 몸에서 더 탈 것이 없을 때까지 꺼지지 않았다. 사지는 구부정하게 하늘로 향해 있었고, 입은 크게 벌린 상태였다. 숯이 된 신발만 천 밖으로 삐죽 나와 있었다. 고통스런 죽음이었다.

고인이 분신한 장소는 생전에 함께 일했던 보일러공장 조합원들이 통근버스에서 내려 작업장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길목이었다. 해고자들이 선전물을 나눠주던 장소였다

권영길은 시신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9일 공장은 정상조업 중이었다. 시신 주변에는 200명 정도의 늙은 노동자들이 지키고 있었다. 울지도 못하고 있었다.

배달호는 2002년 두산중공업 파업투쟁으로, 그해 7월23일 구속됐다. 두 달 뒤인 9월17일에 출소했으며 집행유예(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기간 중이었다. 사측과 법원에 의해 2천만원 상당의 재산과 임금이 가압류된 상태였다.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받고 2002년 12월26일 현장에 복귀했다.

배달호는 매일 새벽 6시에 집을 나서 6시30분 해고자들과 수배자들이 농성중인 노동조합 1층을 찾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는 파업 당시 교섭위원이었다. 사측의 일방적인 교섭안을 받을 수밖에 없던 상황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나이 51세, 그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의 아버지였다. 배달호는 해고자들을 보며 마음 아파했다. 배달호의 시신을 보며, 노동자들은 죄책감에 말도 못했고, 울지도 못했다.

1996년 겨울, 권영길은 명동성당에서 삭발을 했다. 민주노총 위원장이었던 권영길의 파업지침에 따라, 방송국이 섰고, 공장 라인이 멈췄다. 1997년 1월, 노동자들은 크게 이겼다. 당시의 승리는 1987년 이후 욱일승천했던 노동자들의 ‘마지막 승리’였다. 2003년 초입, 늙은 노동자는 몸에 불을 살랐다. 1997년 권영길이 이끈 승리는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창도 방패도 없는 상황에서 한 늙은 노동자는 죽었다.

9일 밤, 권영길은 창원 두산중공업 공장 밖으로 나왔다. 차 안에서, 권영길은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 비서에서 물었다. “배달호가 (민주노동당) 당원이었나?” “네, 당원이었습니다.” 다시 권영길은 입을 다물었다.

2004년 4월 총선에서, 권영길은 창원을에서 이겨, 국회의원이 됐다.

이용석이 죽고, 단병호는 머리를 숙였다

2003년 가을, 이용석이 죽었다. 10월26일 종로에서 집회에 참석하던 중, 자신의 몸에 불을 놓았던 이용석은 병원 중환자실에서 5일을 버티다가 31일 죽었다. 그는 근로복지공단에서 일하던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이용석이 죽던 날, 근로복지공단 초입에선 장례식인지 시위인지 분간되지 않는 집회가 열렸다.

이용석의 영정은 국화로 장식됐고, 그 앞에서 사람들은 울었다. 추모사가 이어지던 동안,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의 이상엽 사무처장이 무대 위로 올라갔다. 주변 사람들이 말렸지만, “용석이를 이렇게 못 보낸다”며 그는 기어이 무대 위로 올랐다.

“용석아 춥지? 내 투쟁조끼를 줄게. 단체협약서를 너에게 보여줄 때가지는 너를 찾아오지 않을게. 이해할 수 있지. 단체 협약서 몇장 때문에 간 너한테, 단체협약서를 들고 반드시 찾아갈게.” 울음인지, 넋두리인지, 젊은 간부의 말은 질기게 이어졌다. 근로복지공단 초입은 눈물바다였다.

단병호는 앞줄에 앉아 있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울음을 참았지만, 눈물은 계속 나왔다. 이날 단병호는 마이크를 잡고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용석은 근로복지공단 사업비에서 일용잡급 명목으로 월급을 받았다. 공단 전체직원 3,300여명 가운데 1,200여명이 비정규직이며, 700여명이 비정규직노조 조합원이었다. 임금을 ‘사업비’에서 '급여항목 인건비‘로 전환하라는 게 그들의 중심 요구였다. 또한 정년보장과 1년 이상 계약자의 정규직화를 요구했다.

2003년 늦가을,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민주노총 뒤편 천막에서 농성을 하며, <철의 노동자> 가사를 막 외우고 있었다.

단병호는 노동운동을 시작하고, 8년5개월을 구속자와 수배자로 살았다. 혹자는, “이 땅 노동자 중 단병호에게 신세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전투적 노조의 상징이며, 투쟁하는 노동자의 얼굴이었다. 그가 상징하는 전투적 노동운동은 이용석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그는 이미 모든 노동자의 상징이 되지 못했다. 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는 동안 그가 상징하던 조직은 무기력했다. 안간힘을 썼던, 죽을 힘을 썼던, 현실에서 민주노총은 무기력했다.

단병호는 앞줄에서 울었고, 죄송하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2004년 4월 그는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2번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김주익이 죽고, 심상정은 서럽게 울었다

심상정은 2003년 10월22일, 부산역 앞에서 울고 있었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은 김주익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장을 추도했다. 김진숙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민주노조 하지 말 걸 그랬다”며 울었고, 심상정도 울었다.

김주익은 죽고 싶지 않았다.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에서 129일 동안 농성을 하며 그는 유서를 두번 썼다. 9월9일 그의 부친의 기일에 한번 썼고, 10월4일에 또 썼다. 유서를 쓸 때마다, 그것이 유서가 되지 않기를 빌고 빌었을 것이다. 85호 크레인 바로 옆 4도크에서, 사측의 대체인력 투입을 통해 배가 나갈 때, 파업 집회 참가자가 200명도 안 모였을 때, 그는 죽지 않을 방법을 찾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1994년 한진중공업이 LNG 선상파업을 할 당시 담당변호사였다. 그는 부산에서 ‘인권변호사’ 활동을 하하며, 한진중공업 노사분쟁에 관련된 사건을 많이 다뤘다. “한진중공업 사측의 문제는 우리보다 노무현이 더 잘 안다”는 게 노조활동을 오래한 조합원들의 말이었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 벌어진 김주익의 장기 고공농성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1991년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목숨과 시신을 빼앗겼다. 그후, 20년 동안 그들의 싸움은 이슈도, 처지도 달라지지 않았다. 2003년 가을, 노무현 대통령은 이라크 파병과 신행정수도 이전 문제로 머리가 복잡했다. 김주익은 85호 크레인 위에서 청와대를 바라보지 않았다.

심상정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촉매’였다. 그는 1985년 구로동맹파업의 핵심 조직가였다. 현재 민주노조 운동의 ‘선봉’인 금속노조는 그의 손에 의해 디자인됐다. '금속'은 그의 손에서 ‘제련’됐고, 민주노조의 기둥이 됐다. 금속노조는, 그 산하조직의 대표였던, 김주익 지회장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1987년 6월, 당시 거리를 메웠던 사람과 세력들이 권력을 잡았다. 같은 해 7~8월 공장 라인을 세웠던 사람들은 작은 초소하나 꾸리기도 버거워하고 있었다.

2003년 가을, 1987년 6월과 1987년 7~8월은 이렇게 결별했다. 심상정의 울음은 그것의 상징이었다. 그는 2004년 4월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1번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강기갑의 정계진출은 눈물과 함께 시작했다

2004년 2월28일 밤, 전농 상무위원회, 각 도연맹 의장들과 총연맹 지도부가 모여 앉았다. 이 자리에서 문경식 전농 의장은 결단을 내렸다. “강기갑 부의장을 후보로 내보내자.” 사실 이 결단은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민주노동당 지지를 놓고 전농 내부에서 이견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현직 부의장을 출마시킨다는 것은 또다른 반발을 불러올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도연맹 의장들은 즉각 반대 입장을 보였다. “2004년 당면한 쌀 투쟁을 앞두고 두명뿐인 부의장 가운데 한명을 당으로 보내면 어떻게 투쟁을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는 게 주된 반대 이유였다. 문경식 의장은 다시 말했다.

“전농은 지난해 11월 민주노동당 지지를 결정했다. 그리고 우리 후보를 국회의원으로 만들 것을 결정했다. 우리 내부도 어렵다. 현직 부의장을 보내는 것이 잘못된 결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전농이 정치세력화를 결정했으면 전농답게 결정하자.”

강기갑은 이날 울었다. 그의 앞에는 온통 넘어야 할 산만 있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의 선거 상황은, 비례대표 4번까지가 안정권이었다. 1, 3번은 여성할당이었고, 최소한 2등을 해야 국회로 갈 수 있었다. 단병호, 천영세, 노회찬…, 민주노동당 역사에서 핵심적인 얼굴들과 무명의 강기갑은 경쟁해야 했다.

만약, 민주노동당에서 농민 국회의원이 탄생하지 못한다면, 민주노동당을 중심에 둔 노동연대의 틀은 물론, 전농 지도부의 지도력마저 흔들릴 위기였다.

당선이 되더라도 문제였다. 지역기반을 핵심으로 하는 전농은, 단체장과 국회의원을 이미 배출한 바 있다. 그러나 결과는 상처뿐이었다. 농민 국회의원을 ‘제대로’ 한다면, “제 명 채우기 어렵다”는 게 대체적인 분위기였다.

전농은 1994년 WTO 체제와 싸우며 계속 졌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투쟁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썼지만 역시 졌다. 다른 돌파구가 필요했다. 면도날 같은 정세, 무겁기만 한 역사적 ‘결단’을 어찌 짊어질 것인가. 강기갑은 2004년 2월 28일 울었다. 강기갑은 2004년 4월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6번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노회찬은 ‘천하양분지계’를 주창했다

2004년, 4월15일에서 16일로 넘어가던 늦은 밤, 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노회찬은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8번이었다. 또한 당시 노회찬은 최고 주가를 달리는 TV 토론자였으며, 유명 정치인이었다.

그 밤에, 노회찬의 국회 입성 여부는 안개 속이었다. 결국 정당 득표율 0.179073329% 차이로 노회찬은 “서산을 붉게 물들이겠다”던 9선 의원 김종필을 이겼다.

새벽, 당선이 확정된 뒤에서 노회찬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나와, 밤새 마음을 졸이던 당직자들과, 자신의 팬클럽 회원들과 악수를 했다. 노회찬은 “하루 밤 사이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 한 기분”이라며 마음고생을 털었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4월 총선에서 13.1%의 정당득표율을 기록했다. 지역구 2곳을 포함해서, 10석의 의석을 챙겼다.

당시 총선에서 노회찬은 ‘천하양분지계’를 주창했다. 보수정치의 카르텔을 깨고, 진보와 보수로 한국정치를 양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겹살 불판을 갈아야 할 때”라는 그의 말은 대중의 코드의 정곡을 찔렀다. 당시 총선에서 대중은 새로운 것을 원했다. ‘탄핵 심판’이 총선 핵심이슈였던 상황에서, 새롭고 신선한 것은 표심과 직결됐다.

1997년 노동운동세력, 진보운동 세력은 마지막으로 이겼다. 그리고 계속 졌다. 자본과 권력은 총파업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민주노총의 명운을 걸고” 나선 제도투쟁에서 숫하게 졌다. 비정규직은 임금 노동자의 절반이 넘어섰다. ‘저지선’ 안쪽은 ‘귀족’이라는 놀림을 받았다.

배달호, 김주익, 이용석… 등이 죽임을 당했다. 마지막 남은 한줌을 모아, 2004년 총선국면에서 ‘베팅’을 했다. 대박이 터졌다.

2004년 5월31일, 민주노동당이 국회입성을 기념하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단병호는 “우리 국회의원이 한 두명이라도 있었으면…”이라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울었다. 그때 우리 모두는 새로운 정치가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민주노동당은 ‘정책’을 집어치워라 ②
사라진 야성, 지키지 못한 의리

투쟁의 정점에서 의원 얼굴을 찾기 어렵다


지난 9월15일, 민주노동당 단병호, 심상정, 이영순 의원이 주최하고 민주노총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본부가 주관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의 기대효과와 개선방향 토론회’가 무산됐다.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린 이날 토론회에 참석하려던 KTX 승무원 70여명을, 국회 사무처에서 막았기 때문이다.

경찰과 일반인이 붙으면 답은 뻔한 일. 고성이 오가고, 참석하려던 조합원들은 울고, 멱살잡이도 나오고…, 결국 국회 정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당시 토론회 현장에서, 단병호 의원은 전화기를 잡고 있었다. 단병호 의원이 국회 사무총장과 수차례 전화통화를 하며 출입 봉쇄를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심상정, 이영순 의원은 토론회장에 나오지 않았다.

당시 이 토론회의 실무를 담당했던 한 당직자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작전통수권 관련 토론회를 한나라당이 하는데, 재향군인회 사람들이 국회 정문에서 출입제지를 받았으면, 한나라당이 어떻게 나왔겠는가? 한나라당에서 사학법 개정 관련 토론회를 하는데,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정문에서 막혔으면 어떤 반응이 나왔겠는가?”

현실 정치의 구도 상, 제지당할 일도 없겠지만, 그려지는 상황이 있다. 한나라당 의원들과 당직자·보좌관들은 당연히, ‘폭도’로 변했을 것이다.

“정부 여당이 정당과 국회의원이 하는 정당한 토론을 막았다.” “야당 탄압”이라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아마도, 국회 사무총장, 국회의장의 사과를 받아내려고 했을 것이다. 한동안 국회 운영 또한 파행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대처는 ‘의연’ 했다. 민주노동당은 대변인 논평을 통해 “국회의원의 입법활동을 방해한 파렴치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과연 점잖게 대처할 만한 상황이었나?

의연하게, 점잖게

서울노동청은 지난 9월29일, KTX 승무원 문제에 대해 '적법도급' 판정을 내렸다. 이로써 ‘불법파견’을 무기로 싸웠던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투쟁은 예봉이 꺾였다. 비정규직 싸움의 중심 축인 간접고용 문제, 그 중 한 축인 ‘불법파견이냐-적법도급’이냐의 쟁점은 사라졌다.

또한 파견법 철폐 구호는 공염불이 됐다. 도급 쓰면 될 일, 굳이 규제가 많은 파견 노동자를 쓸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 울산5공장 비정규직 노동자,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 노동자,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문제 등 불법파견을 쟁점으로 투쟁의 불씨를 지피던 이들의 싸움이 도매금으로 넘어갔다.

9월29일 서울노동청장 입에서 “적법도급”이라는 말이 나올 것이라는 건, 이 문제에 관심이 있었던 모든 기자들은 다 알고 있었다. 기자들의 정보력이라는 게, (아주 가끔을 제외하면) 알 만한 사람 다 안 후에 주어 듣는 수준이다. 그러니 당연히, 민주노동당도 알고 있었다. 더구나, KTX 승무원들은 노동부의 판정 전, 마지막 거점으로 민주노동당사를 택해 농성 중이었다.

이 발표를 들은 민주노동당은 의연하게, “국정감사 때 두고보자”며 칼을 갈고 있다.

오민규 비정규직연대회의 국장의 말이다. “적법도급 판정으로 파견법 철폐는 이미 머릿속에서 지웠다. 망연자실하다. 적법도급 발표 당일, 의원들이 노동부에 가서 책상이라도 들어다 놓았다 해야 할 상황이었다. 발표 전날이라도, 찾아가 농성이라도 할 상황이었다. 앞으로 국회에서 폭로해 봐야, 폭로로 끝이다.”

김영삼의 야밤 활극

1979년 8월9일, YH 사업장의 여성 노동자 172명이 서울 마포 신민당사에 몰려와 농성을 벌였다. 당시 총재였던 김영삼은 이들에게 농성장을 제공하며, “여러분들이 마지막으로 신민당사를 찾아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한다”고 여성 노동자들을 얼싼안았다.

10일 밤, 경찰은 강제진압을 준비했고, 신민당과 김영삼은 “우리가 지키고 있으니, 경찰은 절대 당사로 못 들어온다”며 노동자들을 안심시켰다. 당시 YH 조합원들은 경찰이 들어오면 자결하겠다고 말하던 상황이었다.

김영삼은 당사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보안과, 정보과 형사들의 빰을 때리고, 멱살을 잡고, 발길질을 하며, 야밤 활극을 벌였다.

11일 새벽, 경찰이 “여공들을 내보내라”는 최후통첩을 했다. 이순구 당시 서울시경국장이 전화를 해 “총재를 바꾸라”고 하자 김영삼은 “건방지다”며 묵살하고, 당사 앞에서 작전을 지휘하던 마포경찰서장에게 "너희들이 저 불쌍한 여공들을 죽이려 하느냐"며 뺨을 올려붙였다.

이날 새벽 경찰 1천여명이 신민당사에 난입했다. 신민당 의원, 당직자들과 경찰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졌고, 진압됐다. 김영삼은 경찰차에 실려, 상도동 집으로 갔다. 진압과정에서 농성중이던 YH 조합원 김경숙이 사망했다. 이날 낮, 신민당은 의원총회를 열어, 강제진입을 규탄했고 항의농성에 돌입했다.

1979년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과 이를 '두둔'하는 정치인의 노력은 ‘영원할 것 같던’ 박정희 정권 몰락의 서곡이었다.

'민주노동당식' 지원 로드맵

포항에서 일이 터졌다. 건설 플랜트노조에서는 최초로 주5일제 근무를 요구하며 투쟁하던 건설 노동자 2,500여명은 발주처인 포스코 본사를 7월13일 점거했다. 그리고, 하중근 조합원이 7월16일 경찰진압과정에서 머리를 다쳐, 17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 결국 저 제상으로 떠났다. 16일 하 조합원이 경찰에 피격 당하던 현장에는 단병호 의원도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사건 초기부터 개입했다. 7월18일 단병호 의원은 이상수 노동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포스코가 불법으로 대체인력을 투입한 것이 본사 점거농성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문성현 당대표와 노회찬, 단병호, 심상정 의원이 7월19일 포항 현장을 찾았다. 포항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경을 헤매던 하중근 조합원을 문병했다. 집회에도 참석했다.

전국비정규직연대회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올해 구속된 노동자 155명(9월초 현재) 가운데 115명이 건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하중근 조합원 사망사건이 발생한 포항 건설노조가 62명(10월 현재 구속, 수배자는 68명)으로 가장 많고, 지난 6월 파업을 벌였던 대구경북지역 건설노동자들의 구속자 수도 26명에 달했다. 대구경북 건설노동자들의 죄목은 ‘공갈협박’인 것이 ‘특이’ 하다. 지난 4월 총파업을 벌였던 건설운송노조 덤프분과에서도 16명의 구속자가 나왔다.

화물연대에서도 14명의 구속자가 나왔고, 현대 하이스코 비정규직 지회와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지회에서 각각 6명의 구속자가 나왔다.

이들 구속자들을 유형별로 보면 건설일용, 사내하청 등 간접고용에서 117명의 구속자가 나왔고, 특수고용 노동자 구속자가 31명이다. 구속자의 95%가 ‘사용자 찾아 삼만리’ 중 감옥에 갔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구속자 숫자는 매년 증가 추세다. 터져 나오는 투쟁은 법과 제도의 틀 너머로 치닫고 있다.

한 비정규직 활동가가 한 말이다. “민주노동당은 사건이 터지면 처리하는 ‘로드맵’이 있다. 우선 진상조사하고, (사용자, 관료, 단체장) 면담하고, 의원들이 집회 때 연설한다. 중간 중간 논평도 낸다. 이 방식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다 안다.”

‘누구 편’인지 확실한 민주노동당 의원에게 중재를 맡길 사용자는 없다. ‘연설원으로 뛰는 것’을 제외하면, 민주노동당 의원단의 활동은 제도적 보완과 맹점을 찾아내는 것에 집중된다.

1988년 12월26일,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에 돌입했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노무현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 ‘명언’을 남겼다. “법은 정당할 때 지키고 정당하지 않을 때는 지키지 않아야 합니다.”

공무원노조의 가시밭길

중앙정부는 물론, 전 지자체와 관공서가 나서서 탄압하고 있는 전국공무원노조. 공무원 노동3권 보장을 주창하며, 법외노조로 남아 있는 만큼 정부 입장에선 환대하지 않는 것이 당연. 하지만, 백주에 전국의 기초지자체의 사무실을 강제폐쇄 하며, 전쟁터를 만들어 버릴 만큼 공무원노조가 위험한 존재일까?

더구나, 공무원노조는 정부와 대화를 거부한 바 없다. 명분만 있다면, 조건만 된다면, 대정부 대화를 하고 싶다는 의지를 항상 밝혀왔다. 항구적인 법외노조는 공무원노조도 원하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정부쪽에선 공무원노조와 말을 섞고 싶지 하지 않는다.

이 둘의 사이의 반목에는 역사적 맥락, 정치적인 맥락이 있다.

2002년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대선전을 치를 때만 해도, 공무원노조는 ‘노 캠프’의 포섭대상이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에도, 공무원노조쪽 관계자들은 인수위와 ‘우호적인’ 관계에서 논의를 했다. 공무원노조법의 제정은 양자 모두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다만, 법 체계와 기본권 보장 범위에 이견이 있었다.

2003년 공무원노조법 제정 논의가 진전되고 정부입법안이 마련될 무렵, 공무원노조는 정부안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공무원노조가 반대하면 입법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또한 김두관 행자부 장관 시절만 해도, 행자부와 공무원노조는 일상적인 교류가 있었다.

이것이 완전히 틀어진 것은 2004년 3월말, 전국공무원노조가 정치선언을 하면서부터다. 전국공무원노조는 4·15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여권의 한 주요인사는 공무원노조쪽에 “이제 우리 찾아올 필요 없다”고 전했다고 한다.

정부는 2004년 이전 논의되던 제정안에 비해 한참 후퇴된 공무원노조특별법을 입법발의 했다. 이 입법안은 2004년 12월31일 국회를 통과했다. 그 이후 오늘까지 전국공무원노조는 ‘고난의 행군’ 중이다.

전국공무원노조와 현 정부 사이에 ‘데탕트’가 형성된 초기 기간에 논의되던 입법안도, 노조 입장에서는 부족하고, 모자란 내용이었다. 정치권력과 공무원노조단체의 갈등은 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공무원 노동자가, 노동자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꼭 득실을 따져가며 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꼭 집어봐야 할 문제가 있다. 과연 민주노동당은 공무원노조의 지지선언 이후 얼마나 ‘의리’를 지켰는지에 대한 문제다.

예고된 전면전, 의원들은 국회에

행정자치부는 전국 지자체에 9월22일 오후3시를 기해 공무원노조 사무실을 폐쇄하라고 지침을 내렸다. 이 지침이 내려진 것은 이보다 열흘전인 9월13일. 피할 수 없는 ‘전면전’은 이미 예고된 상태였다.

노조는 ‘옥쇄투쟁’ 방침을 산하조직에 내렸다.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및 여러 사회민중단체에 도움을 청했다. 21일 밤, 전국의 공무원노조 간부들은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며, 농성전을 시작했다. 22일 새벽6시, 서울 구로구청(하필이면 20년전 대통령선거 부정선거규탄투쟁이 벌어졌던 그 구로구청이다!)을 시작으로 각 지자체는 경찰과 관리직원, 경비용역업체 직원 등을 동원해 사무실 폐쇄에 돌입했다. 이날 하루 동안 105개의 노조사무실이 강제 폐쇄됐고, 조합원 등 53명이 연행됐다.

민주노동당의 지역조직은 공무원노조 사무실 폐쇄에 연대하는 활동을 했다. 이수정 민주노동당 서울시의원, 김종철 전 서울시장 후보, 정경섭 마포지구당 위원장 등이 저지투쟁 과정에서 연행됐고, 김선동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은 국무총리실을 항의 방문했다.

9월22일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주요 일정은 이랬다.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오전9시에 국회 본청에서 의원단 총회를 열었다. 강기갑 의원은 10시에 농해수위 법안심사소위에 참석했다. 권영길 의원은 오후4시에 의원실 내 국감 점검회의를 했다.

노회찬 의원은 한 신문과 ‘진보대담’을 했다. 오후4시에는 한양대학교에서 강연을 했다. 심상정 의원은 아침8시에 한-브라질포럼 예비모임을 했고, 오전10시에는 ‘공적자금투쟁 금융기관 처리방안’ 토론회에 참석했다. 오후 3시30분에는 민주노총 여성노동자학교에서 강연을 했다.

현애자 의원은 오전10시에 보건복지위 전체회의를 했고, 오후2시에는 여성농업인리더 강연을 했다. 오후4시에는 서귀포시 지역사회협의체 간담회를 가졌다. 천영세 의원은 오전10시에 문화관광부 FTA 관련 보고를 들었다. 단병호, 최순영 의원은 권승복 공무원노조 위원장이 단식농성 중이던 광화문 열린시민공원을 방문했다. 이영순 의원은 이라크 방문 중이었다.

민주노동당이 밝힌 이날 일정에 따르자면, 공무원노조 사무실 폐쇄와 관련한 일정을 계획한 의원은 단병호, 최순영 단 두명이다. 그나마 두 의원이 방문한 곳은 충돌이 벌어지고 있는 지자체 사무실이 아닌, 권승복 위원장의 단식 농성장이었다.

2년 동안 무엇이 달라졌나?

민주노동당의 한 당직자의 말이다. “의원 9명을 각 광역별로 배치해서, 사무실 폐쇄 저지에 나설 상황이었다. 실제 저지에도 도움이 됐을 것이고, 여론의 주목도 받을 것이다. 또한 공무원 노동자 표심을 굳히는 데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명분도 좋고, 공무원노조에 도움도 되며, 표도 되는 활동이 됐을 것이다.” 한가지 부연하자면, 지킬 ‘의리’도 있었다.

더해서, 9월22일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동선은 2년 전 그들이 취했던 태도와도 다르다.

2004년 11월8일, 공무원노조가 총파업 찬반 투표를 할 당시, 정부는 찬반투표에 대한 원천봉쇄 방침을 내렸다. 당시 민주노동당 각 지역조직은 각 지자체 공무원노조의 투표를 지원하기 위해 몸으로 싸웠다. 민주노동당 의정지원단에는 비상상황실이 마련됐고, 각 지역에서 벌어지는 투표 진행 여부가 실시간으로 의원단에 보고 됐다. 몇몇 의원들은 비상대기를 하며, 투표를 방해하는 지자체를 방문했고, 연행자가 있는 경찰서를 방문했다.

며칠 뒤인, 11월14일 공무원노조가 사상 첫 총파업을 할 때도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동선은 역동적이었다. 당시 공무원노조는 파업 전야제 장소가 원천봉쇄 될 것을 우려해, 마지막까지 집회장소를 정하지 않았다. 14일 저녁 광화문 모처에서 비상대기 하고 있던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공무원노조가 연세대에서 모일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꺼번에 이동했다.

공무원노조 조합원들이 연세대에 도착하기 이전에 민주노동당 의원 전원이 연세대에서 파업전야제 장소를 지키고 있었고, 이날 공권력은 파업 전야제를 위협하지 못했다.

그후로 2년, 2006년 9월22일, 정부가 사무실 강제폐쇄라는 초강수를 두는 동안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국회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공무원노조 사무실은 폐쇄됐다. 이 2년 동안 혹시라도 공무원노조가 민주노동당을 배신한 적이라도 있었던 것인가?



민주노동당은 ‘정책’을 집어치워라 ③
거품은 꺼지고, 결국 한줌만 남았다

담장 안, ‘뚝방의 전설’은 없었다


꼭 한가지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이미 민주노동당에는 전당적인 집행력, 조직력, 기획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안타깝지만, 민주노동당은 당의 이름으로 전략을 잡고, 그에 맞게 당 조직을 개편하고, 당력을 모아 사업을 집행할 능력을 상실했다.

당은 세류를 타지 못했다

이전에 민주노동당은 정세에 맞게 자신의 조직을 개편해 왔다. 창당 초기 지부체계의 조직을 지구당체계로 변화시켰고, 지구당 산하 분회의 조직과 활동을 강조하기도 했다. 현재 민주노동당의 지역조직체계는 중앙당-광역시도당-시군구 지역위원회체계로 구성돼 있다. 시대가 변하면 조직도 변해야 한다. 이 기능이 상실 된다면, '정치', 다시 말해 지지자의 눈물과 피와 땀을 먹고 사는 정당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된다.

조직체계 개편 논의가 진지하게 진행된 것은 지난 2005년 10월26일 재보선에서 참패한 이후다. 당 최고위원회가 총사퇴 하고 꾸려진 비상대책위원회는 당 조직개편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이때 나온 말이, “지역조직을 비정규직센터”로 개편하자는 것이다. 이 주장은 '노회찬 의원발'로 시작됐다. 문성현 당대표가 비대위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때, 당직선거 후보 때, 취임 초기 모두 강조하고 또 강조했던 사안이었다.

여러 형태의 안들이 제출됐다. 유럽의 진보정당들이 사용했던 ‘노동자의 집’ 모델을 차용하자는 것도 있었고, 노무상담 중심의 권리 찾기를 중심으로 사업을 꾸려야 한다는 말도 있었다. 몇 지역을 전략지역으로 삼아, 집중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비정규직센터로 개편 논의의 중심은 당의 ‘차세대 성장동력’에 대한 문제였다. 조직된 노동자·농민, 운동권 향수층 등으로 제한돼 있는 민주노동당의 핵심 지지층을 넓히자는 것이다. 빈곤층과 미조직 비정규 노동자를 당 지역조직이 나서서 조직하고, 그들을 당의 핵심 지지층으로 끌어올 일상 활동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당원관리와 연대활동에 머물던 당 지역조직의 새로운 활동의 모델을 제시하자는 것이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이유는 지구당 활동이 금지되고, 유급 상근자의 수가 제한된 ‘신정당법’에 맞게, 당 지역조직을 바꿀 필요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6년 10월, 비정규센터는 어디 있는가? 당 비정규직 운동본부가 사업공모 정도를 하고는 말조차 사라졌다. 한발 늦은 조직혁신 논의는 그나마 때를 놓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흉한 꼴을 보게 됐다.

비정규센터는 어디 있는가?

2006년 8월11일, 여의도 중소기업회관에선, 당 지도부와 시도당 위원장들이 모여 확대간부회의를 열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이 지역조직에 불법으로 정당 상근자를 운영하며, 급여를 지급하고 있다는 혐의에 대해 선관위가 조사 중이었다. 이미 중앙선관위는 민주노동당 내부제보를 통해 급여지급 대상자와 액수를 파악한 상태로 알려졌다.

중앙선관위가 선거법을 엄정하게 적용할 경우, 민주노동당은 국고보조금의 두배에 달하는 돈을 토해내야 할 위기였다.

당에 비상이 걸렸다. 11일은 선관위측에서 민주노동당에 만나자고 연락을 준 날이었다. 확대간부회의는 비공개, 그러나 복도에서 곁눈질만 해도 안에서 어떤 ‘난장’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짐작이 어렵지 않았다.

선관위를 만나서 협상을 해야 한다는 의견, 만나봐야 할 말 없으니 가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 책임 공방…. 결국 선관위측과 약속시간이 훨씬 지난 후에야 민주노동당 김선동 사무총장과 김창현 전 사무총장 등이 과천 중앙선관위로 향했다. 그나마 실무자는 누가 갈지를 두고는, 차를 타기 직전까지 쭈뼛거리며 싸웠다. 가야 할 사람은 명확했지만, (불편하고, 덤태기 쓸지 모르는 자리에) 가고 싶은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선관위는, 민주노동당의 문제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저, 2006년에도 ‘연래행사’처럼 1억7천만원의 국고지원금을 삭감하고는 끝냈다. 현재 민주노동당이 지역조직과 상근자를 유지하고 있는 방식은 ‘비합법 투쟁형’이라기보다 ‘편법형’에 가깝다. 정치권력이 언제든 이 약점을 꺼내 쓸 수 있다. '호구 잡혔다'는 말이다. 그리고, 지역에서 오랜 기간 투쟁하고 조직하며 진보의 깃발을 지킨 이들은, 어느덧 천덕꾸러기가 돼 있다.

혜안과 통찰은 고사하고

민주노동당은 8만 당원, 200여 지역조직을 거느린 전국정당이라고 자랑할 입장이 아니다. 뼈대와 근육은 손상됐고, 거동은 불편하다.

당기위원장 선임 문제, 당사 이전 문제, 보좌관의 음주 뺑소니 사고 문제, 당 소속 지역의원의 음주운전 문제, 상설연대체 참여 및 북한 핵실험을 둘러싼 정파갈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논쟁할 생각 없다) 문제 등등. 분쟁 말고는 세간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없다. 이 상황이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정당 운동세력이 현재 입각해야 할 현실이다.

다시 국회의원으로 돌아오자. “당직공직 겸직이 금지돼 있다. 의원들이 당에 대한 책임을 느낄 구조가 아니다.” 복수의 민주노동당의 전략가들이 한 말이다. “그건 이제 식상한 이야기다. 언제까지 그 말 할 건가”라는 반문에 전략가들은 “그건 그렇다”고 인정했다. 연재의 앞선 순서에서 말했듯, 1987년부터 1997년까지 진보노동운동 세력의 한줌 역량이 모두 국회로 투자됐다. 책임의 범위는 무한한 것이다.

누가 초소로 보냈나?

한 전직 보좌관의 말처럼, 현재 민주노동당 의원실은 초소다. 초소는 전방주시와 대응이 주된 임무다. 적 방향에서 사안이 발생하면, 대응하고, 사안이 없으면 없다고 보고하는 게 초소의 임무다. 각 의원실은 상임위라는 초소 안에서 자체 교범에 맞게 전투를 수행 중이다. 또한 초소와 초소를 이어 전선을 만드는 것은 당의 임무일지 모른다. 하지만 전선을 만들 능력이 당에는 없다는 것을 이미 말했다. 또 한가지, 누가 의원들에게 초소를 지키라고 명했나를 살펴보자.

민주노동당의 의원 활용전술 즉 원내전술과 관련한 진지한 논의는 17대 국회 개원 직전인 ‘당선자 연수’에서 이뤄졌다.

2004년 5월 민주노동당 의원 당선자 10명은 남원연수원에 모여, ‘거대한 소수’ 전략을 기본으로 한 ‘개혁 네트워크’ 구성 전술에 공감대를 이뤘다(당선자 연수는 결론을 낼 권한이 없었다). 이후 이뤄진 2004년 첫 정기국회까지 이 전술은 각 의원들의 활동에 기본 틀로 자리 잡았다.

2004년 첫 국감에서,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진보에서 개혁 사이에 속한 모든 시민사회노동민중단체들의 의견을 구했다. 정책위는 개혁네트워크 구성을 위한 워크숍을 40회 넘게 진행했다.

“의원이 상임위 직원이냐?”

의견이 교류되던 장은 상임위였다. 정보와 의제를 들고 오는 사람들도 상임위의 틀에 맞게 들고 왔고, 받아들이던 당도 상임위 내에서 소화할 방법을 찾았다. 2004년 민주노동당 국정감사의 슬로건은 ‘참여·민생·정책국감’이었다

각 의원의 활동은 급속히 상임위 내로 빨려 들어갔다. 상임위로 의원단의 활동은 분절됐다. ‘선택과 집중’, ‘의원단의 통일된 활동’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초병들은 초소 내 문제와 초소 전방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개혁 네트워크’ 전술을 제안했던 당의 전략가들도, 이 전술은 한계가 명확한 전술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등원 전이었고, 국회에 식당이 어딘지도 모른 상태에서 나온 전술이었다. 오류는 필연이었다. 전술·전략은 수정하면 될 일.

2004년 5월 이후에 민주노동당은 ‘의원 활용방안’에 대한 어떤 진지한 논의도 진행한 바 없다. 매년 당대회에 의원단의 사업기조가 제출되지만, ‘몇대 원칙 몇대 과제’식의 현안 나열을 벗어나지 못했다. 초소로 들어간 의원들은 나올 줄 몰랐다. 각자의 활동영역이 굳어진 상황에서 굳이 어려운 말을 나눌 필요가 없었다. 민주노동당 의원단 내부 분위기는 ‘원로원’처럼 변했다.

국회를 오래 출입한 한 정치부 기자는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상임위 직원 같다”고 비꼬았다.

상임위에서 피감기관의 실수를 잡아내고, 법안을 발의하고, 타당 의원이 발의한 법안을 검토하고, 상임위 분야의 현안에 대응하는 게 ‘정책 활동’, ‘정책 국회의원’이라는 말로 포장됐다. 당은 한번도 상임위를 중심으로 한 의정활동을 결정하지 않았다. 그저 흘러갔을 뿐이다.

뚝방의 전설은 없다

을지문덕이 역사적 인물인 까닭은?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이 명장면인 까닭은? 병사가 많고, 보급이 잘되는 군대가 이기는 게 당연한데, 가끔 소수가 이기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아주 가끔 벌어진다. 단병호 의원실에서 일하던 강문대 변호사는 보좌관으로 일하던 당시를 이렇게 비유했다.

“저쪽이 로마 병정이라면, 우리는 원주민이었다. 정규군이 줄 맞춰서 공격해오는데, 돌 몇개 던지던 꼴이었다.”

290대9의 구도에서, 각 상임위별로 ‘17대1’의 양상으로 싸움이 진행됐다. ‘뚝방의 전설’은 생기지 않았다.

단병호 의원은 2월27일 환경노동위에서 비정규법이 처리될 때, 국회 경비에게 손발이 잡힌 채, “3월에 합시다. 꼭 오늘 안한다고 하늘이 무너집니까”라며 절규했다.

심상정 의원은 지난 13일, 재벌 총수 등으로 구성된 자신의 국정감사 증인요구를 철회하며, 울먹였다. 증인신청 여부를 재경위에서 표결을 해봐야 승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은 원내 진출 이후에, 2006년 상반기까지 232건의 법안을 발의했다. 대부분의 법안이 상임위에 계류 중이며, 원안 가결된 법안은 7건, 수정가결된 법안은 2건이 있다. 대안 폐기돼거나, 폐기된 법안은 15건이다.

통과되고 반영된 법안의 주요내용은 △학교보건법에서 건강검진과 관련된 조항 △파산으로 인한 불이익 금지조항 △장애인 이동권과 관련된 조항 △최저임금법 중 기준 산정과 관련된 조항 △에너지 기본법에서 보편적 공급 기여에 대한 조항 △학교급식법의 일부 조항 등이다. 민주노동당이 제도권 정치에 새로 등장시킨 의제들도 있다. 하지만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통과될 만한 법안’이었기 때문이다.

그이외의 법안은 사실, 현실 법리체계 안에 반영되기 어려운 정책보고서에 가깝다. 원내 세력관계는 이미 2004년 4월15일에 결정됐다.

실력행사의 방식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국회에서 여러차례 농성과 실력행사를 했다. 2004년 등원 직후에 김선일씨가 이라크에서 피살되자 첫 농성을 벌였다. 그후, 같은해 겨울 국가보안법 개·폐정안 ‘연내처리’와 민생법안 처리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환노위 소회의실은 단골 농성장이었다. 법사위원회와 통일외교통상위 회의실도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농성장으로 쓰인 적이 있다. 우선 의원들이 장기 단식을 한 경우를 살펴보자.

첫번째는 권영길 의원이 2004년 11월29일부터 12월5일까지 단식을 했다. 경찰은 11월24일 창원에 있는 권영길 의원 사무실에서, 피신해 있던 공무원노조 파업 주동자 2명을 경찰이 잡아갔다. 사무실에서 강제 연행됐다. 권 의원은 7일간 단식을 했고, 이해찬 당시 국무총리가 사과하는 것을 계기로 단식을 풀었다. 당시 단식 슬로건은 “민주주의를 구하겠습니다”였다.

두번째 단식은 강기갑 의원이 2005년 10월27일부터 11월24일까지 29일간 단식했다. 강 의원의 단식은 깔끔하게 끝나지 않았다. 강 의원은 단식 끝에 실신해 병원으로 실려가, 병원에서 영양제를 맞고 다시 국회 본청 단식농성장으로 왔다.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강 의원의 단식 재개를 강력하게 말렸다.

당시 의원들은 강기갑 의원의 건강이 우려돼서 말렸을까? 11월24일, 국회 본청 민주노동당 회의실에선, ‘단식을 계속하겠다’는 강기갑 의원과 ‘그만 해야 한다’는 다른 의원들이 3시간 동안 입씨름을 했다. 당시 강기갑 의원은 복식을 시작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29일 동안 단식을 한 사람의 건강이 정말 우려됐다면, 3시간 동안 입씨름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의원들은 “영양제를 맞으면 단식은 끝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미 전술적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도 했다. ‘병원에서 돌아온 후 단식 재개’, 이게 추문의 범주에 들어가는 문제일까? 원내 진출 이후 쌓아온 몇가지 이미지와 관념이 강 의원의 단식과 맞지 않았던 것이다.

강기갑 의원은 당일, “왜 안 된다는지, 이해가 안 된다”면서 곤혹스러워했다. 당시 전농을 비롯한 농민단체들은 마지막 조직력까지 짜내며 투쟁하고 있었다.

과격한 게 문제였나?

민주노동당은 수차례 걸쳐 환노위 회의장을 점거했다. 점거가 거듭될수록 의원들은 곤혹스러워했다. 대중투쟁은 받쳐주지 않았다. 양대노총 지도부들은 의원들이 점거를 하는 동안, 국회에 들어와 있었다. 국회 밖에는 깃발 몇개와 몇명 안 되는 시위대가 있었다. 곤혹스러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왜 점거를 하는지가 명확치 않다는 것이다. 대안 입법이 목적이었나? 어차피 17대 국회의 의석구조상, 민주노동당이 발의한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안은 처리 불가였다. 이미 양대노총과 경총, 노동부와 정치권이 함께한 협상은 결렬된 상황이었다. 입구제한과 출구제한, 고용의제와 고용의무, 기간의 문제 등 여러 쟁점 중 한가지만 어긋나도 민주노동당은 동의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저지가 목적이었나? ‘협상 가능한’ 대안입법안이 없는 상태에서 저지전술을 오래 쓰면 ‘곤혹스런 상황’은 당연히 닥치게 된다.

저지든, 대안입법이든 민주노동당이 확실한 전술이 섰다면, 권리보장 입법안을 주장하는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싸움의 현장으로 국회를 택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막상 환노위를 통과하던 날, 단병호 의원은 “꼭 오늘 처리해야 하냐”며 고함을 쳤다. 상황은 애절했으나, 말을 이해하긴 어려웠다.

한나라당은 사학법 문제, 국가보안법 문제와 관련 자당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국회를 자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국회 본회의장은 자주 한나라당 의원들에 의해 점거됐다. 장외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국회 파행은 한나라당의 중요한 협상카드였다.

2004년 12월, 과반수 이상인 152석을 가진 집권여당의 의원들도, 국가보안법을 개정해야 한다며 국회 본청에서 농성을 했다.

일 잘하는 의원이 필요했나?

민주노동당은 과연 그들보다 과격했나? 그리고 과격할 땐, 정교했나? 그 모든 것은 국회 담장 안에서 이뤄졌다.

대중은 17대 국회에서도, 그 이전에도 국회와 정치에 신물을 느끼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의 ‘정책’은 도매금으로 처리된다.

창당 초기부터 지역에서 활동하던 한 지역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비례대표 의원들은 다음 총선에서 지역구로 나와 ‘일 잘하는 국회의원 다시 한번 뽑아 달라’고 선거운동 슬로건 뽑을 것인가? 이미 그런 의원은 국회에 차고 넘친다.”

'일 잘하는 국회의원', 그것이 정책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런 국회의원은 이미 국회 담장 안에 차고 넘친다. '일 잘하는 국회의원', 그것이 민중의 호민관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런 국회의원은 민주노동당의 의원단을 포함해서 아직까지도 국회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민주노동당의 미래의 지지자들은 어떤 국회의원을 보고 싶어할까.

민주화가 됐다지만 아직도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세상이다. 열명밖에 되지 않는 민주노동당 의원단은 법(=정책)을 만들 힘이 업다. 운동권이 몰락한 게 합리성(=정책)이 결여돼 대중설득논리가 결핍되어서인가. 유권자가 보고 싶어한 것은 다른 정치였고, 그것은 처음에는 주먹과 억지로 시작되는 것이다.

정용상 기자 ysjung@labortoday.co.kr
2006-10-18ⓒ매일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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