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 보내준 한국사람 인도주의에 깊이 감사”
전문공개 김정일 국방위원장 인터뷰
문명자(Julie Moon)│U.S.Asian News 주필
재미언론인 문명자 주필이 세계 최초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인터뷰했다. 6시간에 걸쳐 진행된 인터뷰에서 김 국방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 의의와 전망, 서울방문, 조미관계, 주한미군 철수, 조일관계 등 주요 현안들에 대해 거침없이 견해를 피력했다. 문 주필은 “이번 인터뷰에 대한 일부 외신보도가 김 국방위원장의 발언과 나의 관측을 혼동해 보도했다”면서 “월간 <말> 지면을 통해 정확한 전문을 공개한다”고 밝혔다.
2000년 6월 30일 오전 9시 50분 원산초대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현관 앞까지 나와 환한 웃음으로 필자를 맞이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김 위원장과의 ‘세계 최초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지난 몇 년간 필자는 계속 북측에 김 위원장과의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러나 답변은 항상 “때가 되면”이었다.
김 위원장 인터뷰를 신청한 것은 필자만이 아니었다. ‘미국 일본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언론사들 모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언론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과연 누구와 가장 먼저 인터뷰할 것인가는 전세계 언론계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였다.
그가 그 기회를 같은 민족인 필자에게 준 것에 깊이 감사한다. 그것은 개인적인 이유만은 아니다. 생각해보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처음으로 인터뷰한 언론이 예를 들어 CNN 같은 서방언론이라면 이는 민족사적 견지에서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물론 한국언론들이 그 위치에 서는 것은 화해와 통일을 위해 대단히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간 남북당국간의 오랜 대결의 역사로 인해 북측은 한국언론에 대해 그만한 신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는 앞으로 한국의 언론인들이 꾸준히 개선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라 하겠다.
CNN방송 나오는 원산초대소 면담실
지난 5월 27일 필자는 남북정상회담 취재차 평양을 방문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남북정상회담 예비회담의 최대 난제는 취재기자를 80명으로 할 것인가 40명으로 할 것인가였다. 이 또한 한국기자에 국한된 것이고 외신기자들은 일체 받지 않겠다는 것이 북측의 입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필자는 외신 중 유일하게 정상회담 취재를 허가받았던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이 성공리에 끝나고 김대중 대통령과 수행원, 취재단들이 돌아간 후에도 기자는 계속 평양에 머물고 있었다. 정상회담 이후 북의 표정을 후속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내심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세계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이번에야말로 그를 인터뷰할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그 자신의 결정에 달린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확신은 없었다. 마침내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로부터 인터뷰가 결정됐다는 사실을 통보받았을 때 필자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장소는 원산의 한 초대소였다. 김 위원장이 원산 인근의 해군기지 현지지도차 계속 그 지방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그곳은 전날인 6월 29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주영 회장을 접견한 장소이기도 했다.
평양에서 원산비행장까지 30분, 그리고 비행장에서 초대소까지 자동차로 20분이 걸렸다. 원산초대소는 풍광 좋은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현관에 나와 있던 김 위원장은 특유의 ‘잠바옷’ 차림이었다. 그는 활짝 웃으며 활달하게 손을 내밀었다.
함께 면담실로 들어갔다. CNN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인터뷰에는 김용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이 배석했다.
김용순 위원장과 내 자리에는 ‘성천’ 담배와 재떨이가 놓여 있었는데 김 국방위원장 앞에는 물컵뿐이었다. 그는 담배를 끊었다고 했다.
“문 선생님께서는 혈압이 높으시다고 들었는데 의사들이 담배 끊으라고 하지 않습니까?”
“끊으라고 하지만 담배만큼은 죽을 때까지 포기 못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고혈압에는 소금온천과 유황온천이 좋습니다. 그곳에서 요양하면 혈압이 10도 가량 내려간다고 합니다. 이 다음에 오시면 한번 가보십시오.”
그는 탁자 위의 ‘성천’ 담배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이 담배는 지난 72년 북남회담 때 김영주 조직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선물로 보낸 담배입니다. 박 대통령이 즐겨 피웠다고 들었습니다.”
“통일 향한 첫발 내디뎠다”
외신 중 유일하게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취재를 허가해주시고 이처럼 단독인터뷰를 위해 귀한 시간을 내주신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가 다른 외신기자들은 모두 사절해도 문 선생은 부르라고 했습니다. 우리민족으로서 화해와 통일을 위해 정력적인 기자활동을 하고 계신데 마땅히 초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정말 귀한 자리를 마련해주셨는데 전세계가 궁금해하는 문제들을 한가지씩 질문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6월 정상회담에 대해서입니다. 말 그대로 전민족적 열광 속에서 진행되었는데 그 성과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우리민족의 힘으로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는 데 가장 큰 의의를 두고 싶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민들의 간절한 염원이고, 나 자신으로선 수령님의 유훈을 계승한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우리속담에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루빨리 통일을 이룩할 수 있도록 북과 남이 함께 노력할 때가 되었습니다.”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비행장까지 나가서 맞이하셨는데 이는 외교의전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파격적인 조치였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결심을 하셨습니까.
“내 스스로 결심했습니다. 통일 후에도 미군이 계속 주둔해야 한다는 발언이나 통일운동가 구속, 장기수를 돌려보내지 않는 일 등이 보도되어 사실 김 대통령에 대한 인민들의 인상이 좋지 않았습니다. 김 대통령께서 어려운 결심을 해서 통일을 위해 평양까지 오시는데 분위기가 그래서는 안 되겠기에 예정에 없이 공항에 나갔습니다.”
6월 13일 아침 10시 필자는 평양비행장에 나가 있었다. 김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 공항에 환영나온 군중들은 손에 손에 꽃을 들고 조용히 도열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스피커에서 “장군님께서 비행장으로 들어오고 계십니다”하는 방송이 나왔다. 곧이어 김정일 위원장의 모습이 나타났고 환영 군중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한 최측근 인사는 “장군님께서 공항에 나오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에 대한 인상은?
“이번 수뇌급회담에서 합의된 5대 공동선언은 민족의 통일대헌장이라 할 정도의 의의를 가집니다. 한꺼번에 다할 수는 없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실천돼야 합니다. 나는 김 대통령께서 이를 차근차근 실천해 나가려는 의지와 성의를 가진 분이라고 믿습니다.”
“김 대통령은 처복이 있는 분”
김 위원장은 “사람의 5대 복 중 하나가 처복이라는데 김 대통령은 처복이 있는 분이다”라면서 이희호 여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체구도 크지 않은 분이 여성계지도자로서, 또 남편의 석방을 위해 그처럼 강인하게 투쟁했다는 데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6월 14일 만찬석상에서 김 위원장께서 이희호 여사를 김 대통령 옆으로 부르셨지요?
“그날은 한국측 초청만찬이었기 때문에 자리배치를 남측에서 했습니다. 제가 가보니 남자 여자를 갈라서 앉혔는데 이희호 여사도 여자들과 함께 멀리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여사를 모셔오라고 말했지요. ‘이거 통일을 하자는 뜻입니까. 안 하자는 뜻입니까. 가족을 갈라 이산가족을 만들어놓아서야 되겠습니까.’”
김 위원장은 다시 물었다.
“김 대통령은 가톨릭신자이신데 이희호 여사는 가톨릭입니까? 기독교신자입니까?”
남편을 따라 개종을 했는가라는 의미인 듯했다.
“여성계지도자가 남편 따라 개종하면 되겠습니까. 이 여사는 기독교신자입니다.”
필자는 후에 이희호 여사가 회담을 마치고 돌아가는 날 평양비행장으로 향하는 승용차 안에서 내내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해할 만한 일이다. 지난 30년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가시밭길을 걸어온 남편이, 정치인으로서 최후의 과제로 상정한 통일문제에서 역사적인 성과를 거두고 돌아가는 길이 아닌가.
그동안 역사를 보면 남북관계가 전향적으로 풀렸다가도 다시 대결구도로 돌아간 일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현재도 그런 점을 우려하는 이들도 있는데 6.15공동선언의 실현전망을 어떻게 예측하십니까?
“이번 5대 공동선언은 반드시 실천되어야 합니다. 비전향 장기수 송환시기가 합의보다 늦춰지는 등 다소 차질이 발생하고 있는데 앞으로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5대 공동선언의 실천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뒤에 북측의 한 고위관리는 “우리는 이산가족 서울방문 준비를 이미 다 끝냈다”라고 밝혔다.
남쪽에서는 김 위원장님의 서울방문에 대한 기대가 큰 것 같습니다. 언제쯤으로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5대 공동선언의 실천과정을 보면서 결정할 것입니다.”
정상회담 직전에 중국을 방문하셨는데 중국식 개방에 대한 견해는?
“경제성장에서 긍정적이었습니다. 인민들을 잘 살게 해야 할 것입니다.”
남북관계에 획기적인 진전이 있는데 반해 조미관계는 주춤한 느낌입니다.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미국에서 페리가 특사로 왔으니까 우리가 뽈을 던질 차례가 되었습니다. 곧 고위급에서 대표를 파견할 것입니다.”
현재까지 서방에서 대미특사로 거론해온 급보다 더 고위급 인사를 보내신다는 의미입니까?
“그렇습니다.”
필자는 고 김일성 주석이 94년 CNN과의 인터뷰에서 “워싱턴을 방문해 낚시도 하고 사냥도 하겠다”고 밝혔던 일을 거론했다.
“시기만 잘 선택하면 워싱턴의 포토맥 강에서는 청어를 양동이로 건져 올릴 수 있습니다. 또 사냥터에서 꿩, 노루는 물론 곰까지 잡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때 주석님께서 워싱턴을 방문하셨다면 조미관계는 이미 오래 전에 급진전되었을 것입니다. 그처럼 급작스럽게 서거하셔서 정말 유감입니다.
“동감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일본과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될 준비돼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번 남북정상회담 과정에서 “주한미군의 즉각적인 철수는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점을 설명해서 김 국방위원장께서 완전한 동의는 아니나 일부 납득했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동안 미군더러 나가라고 했지만 그들이 당장 나가겠습니까. 우선 미국 스스로가 생각을 달리해야 합니다. 그들은 분단에 책임이 있는 만큼 통일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지난날 닉슨도 카터도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했는데, 주한미군 문제는 우선 그들 스스로가 우리민족의 통일을 적극적으로 돕는 방향에서 알아서 결정해야 합니다.”
제10차 조일 국교정상화 회담이 지난 5월로 예정됐다가 취소된 후 아직 다음 회담날짜가 발표되지 않았습니다. 조일관계는 어떻게 풀어나가실 예정입니까?
“일본을 흔히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하는데 우리는 일본과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가 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웃이 마치 지구 양극에 사는 것처럼 지내는 것보다 가까운 친구로 지내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우리는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원하지만 그것은 일본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자면 일본인들은 우선 납치니 뭐니 하는 얘기를 치우고 과거 청산 등 근본문제를 풀기 위해 성의와 진실을 가지고 노력해야 합니다.”
12시.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차림표에는 ‘더운 음식’난에 ‘야자제비둥지상어날개탕’ ‘소고기 철판구이’ ‘감자만두 튀기’ ‘김치무우장’ ‘잣죽’, 찬 음식에 ‘게사니 향료 찜튀기’ ‘꽃게 살라드’ ‘록두묵’ 등이 적혀 있었다. ‘야자제비둥지상어날개탕’은 반 자른 야자에 담긴 수프였는데 김대중 대통령 초청만찬 때도 대접했던 음식이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말했다.
“문 선생님, 제일 먼저 록두묵을 간장에 찍어서 드시고 식사를 시작하십시오. 록두묵은 우리 몸 안의 독성물질들을 해독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그는 식사를 잘했다. 반찬 중에 ‘콩나물 김치’가 이채로웠다. 김 위원장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이라고 했다.
콩나물인데 김치맛이 나네요.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콩나물을 슬쩍 삶거나 데친 후에 파 마늘 생강 고추를 넣어 김치처럼 숙성시키면 이런 맛이 납니다.”
그는 봉사원에게 “문 선생님께 콩나물 김치 만드는 법을 한 장 찍어다 드리시오” 했다. 덕분에 필자는 ‘콩나물 김치’ 조리법을 문서로 얻었다.
김 위원장은 “빈대떡이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떡이라는 뜻의 ‘빈자떡’에서 유래했다는 얘기를 이희호 여사에게 들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잣죽이 나왔는데 죽이 다소 빡빡했다. 김 위원장이 요리사를 불렀다.
“잣죽은 이렇게 빡빡하게 끓이는 게 아닙니다. 물을 좀더 넣어 훌훌 마실 수 있게 하십시오.”
아니 국방위원장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요리에 조예가 깊으십니까?
“건강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나라 음식들은 모두 건강식이라 참 좋습니다.”
94년 대홍수 이후 경제문제가 심각했는데 그 시기를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지난 5년간 어려운 시기 속에서 2천만의 운명에 대해 참으로 고민 많이 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식량을 보내준 한국, 미국, 일본 등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인도주의에 깊이 감사합니다.”
“지난 5년간 2천만의 운명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지도자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은 무엇입니까?
“인민이 지지하지 않는 지도자는 있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수령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인민들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인민과 지도자의 단결을 방해하는 것이 관료주의인데 우리는 그것이 없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식사중에 전날 만난 정주영 회장의 건강을 걱정하기도 했다. 그간 정 회장이 해온 역할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번에 현대가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금강산 특구 등 원하는 것을 파격적으로 허용해주었다”고 했다. 남북경제협력의 미래를 확신하는 듯 “북에는 개발할 자원이 많다.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개발한다면 통일 후 우리나라는 잘 살게 될 것”이라고 역설하기도 했다.
인터뷰 내내 ‘김대중 한국대통령’ ‘한국’ ‘한국국민’이란 용어를 일관되게 쓰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단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여전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김영삼씨만 빼고 전직 대통령들 누구든 초청하겠다’고 김 대통령께 말했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물었다.
정상회담 후 남에서 ‘김정일 쇼크’ ‘김정일 신드롬’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던데요?
“그동안 왜곡보도가 많아 인상이 매우 나빴는데 본인이 화면에 나타나니까 뿔 달린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나 봅니다.”
9시 50분에서 오후 3시 30분까지 장장 6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 기자의 눈으로 본 ‘지도자 김정일’은 강하면서도 소탈한 인물이었다. 목소리는 아버지보다 맑았지만 그의 자세와 손짓은 지난 92년과 94년 필자가 두 차례에 걸쳐 인터뷰했던 고 김일성 주석을 연상시켰다.
변한 것은 누구인가
국내외적 현안에 대해 거침없이 답변하는 것은 물론, 식사중에는 가톨릭과 기독교, 고혈압과 유황온천, 피자와 녹두빈대떡 등등 무궁무진한 화제가 쏟아져 나왔다. 필자가 평양에서 새로 해 입은 치마저고리에 대해 “문 선생님은 양복이 더 당당하고 어울립니다”하는 솔직한 평도 잊지 않았다.
새 옷이 다소 불편하던 차에 나는 그 말을 기화로 “화장실 좀 빌려주세요”해서 문제의 치마저고리를 평소 입던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이 때문에 김 위원장과 함께 찍은 사진에 필자의 복장이 두가지로 나타난 것이다.
인터뷰를 마친 후 김정일 위원장은 다리가 불편한 필자의 손을 잡고 자동차에 오를 때까지 배웅해주었다.
원산비행장으로 달리는 차안에서 필자는 생각했다. 전세계가 지금 ‘김정일 쇼크’에 빠져 있다. 그런데 과연 누가 변한 것인가. 그가 이번에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한 것일까. 그는 원래 그런 모습이었는데 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변함으로 인해 그가 다르게 보이는 것은 아닌가. 분명한 것은 북의 지도자 김정일을 제대로 읽기 위한 연구가 새롭게 시작돼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본 김정일 총비서
재미언론인 문명자 특별기고
문명자
나는 지난 90년 2차 고위급회담 취재차 최초로 방북한 후 지난 10년 간 꾸준히 북을 취재해 왔다. 그간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라면 아마 다음과 같은 것일 것이다.
“북의 최고 지도자 김정일은 어떤 인물입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이미 나름의 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다지 정확한 답은 아니었다.
지금 누구도 더 이상 ‘북한 붕괴론’이나 ‘김정일 건강 이상설’을 얘기하지 않는다. 미국 대북정책의 최종판이라 할 ‘페리 보고서’도 북의 체제가 안정되어 있음을 인정했다. 거기에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까지 예정되어 있다.
‘내성적’이 아니라 대단히 남성적
이제 김정일 총비서에 대한 그간의 의문에 나름대로 답변해 보고자 한다. 북의 과거·현재·미래를 알기 위해서는 김 총비서라는 인물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김정일 총비서와의 면담을 포함해 김일성 주석의 언급, 측근들의 증언, 주변 취재, 북한 인민들과의 대화 등을 통해 그의 진면목에 다가서 보고자 했다.
김 총비서와의 첫 만남은 1994년 7월 14일 김일성 주석의 장례식 시기였다.
비록 국장의 마당이었지만 나는 조문객들을 맞이하는 그를 세밀하게 관찰했다. 나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렇게 멀리서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몸가짐은 정중했고 목소리에는 무게가 있었다. 최은희·신상옥 부부의 주장과는 달리 말을 더듬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얼굴은 여위고 눈자위가 붉어져 있었지만 손은 따뜻했고 손아귀에 힘이 있었다. 전혀 건강에 이상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나는 92년 4월 김일성 주석을 인터뷰했다. 오찬을 겸한 인터뷰였는데 식탁 가운데에 김정일화가 장식되어 있었다. 김 주석은 그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꽃을 개발한 일본 사람의 요청에 따라 ‘김정일화’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했는데 사실 저 꽃이 너무 고와서 조직비서 성격하고는 맞지 않는단 말이오. 우리 조직비서는 통이 크고 사나이답거든.”
김 주석은 아들을 꼭 ‘조직비서’라고 불렀다. 나는 내심 갸우뚱했다. 서방에 알려진 ‘내성적인 영화광’이라는 평과는 다른 얘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식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부모다. 계속 연구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나는 김정일 총비서의 생일 명절인 2·16 기간에 북을 방문한 일이 있다. 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되었지만 본인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전에도 자신의 생일 행사에 나타난 적이 없다는 얘기였다. 그 시기 그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그 점이 궁금했는데 뒤에 알게 되었다. 그는 매해 그 무렵이면 백두산을 찾는 듯했다.
특히 99년 2월에는 백두산 천지를 등반한 후 2월 16일 갑무(갑산~무산) 경비도로를 달리다 차에서 내려 10리를 걸었다고 한다. 갑무 경비도로는 길 양편으로 하늘을 찌를 듯 곧게 뻗은 한대림이 끝없이 이어진 풍치 좋은 길이다. 그러나 이 무렵의 백두산 지역은 영하 40도를 오르내린다. 혹한 속에서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걸으며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겨울이며 특히 백두산의 겨울을 좋아한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의 급서 후 나는 당시 북미 회담의 북측 대표이던 강석주 외교부 부부장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국가원수가 서거하셨는데 회담에 차질이 없겠습니까.”
“물론 회담은 수령님의 결재로 진행되어 왔지만 장군님께서 직접 지도해 오신 사업이기 때문에 차질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지금은 상식으로 되어 있지만 그 때만 해도 김정일 비서가 북미 회담을 진두지휘하고 있다는 사실은 뉴스였다. 다시 그 점을 확인하자 강 부부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에는 두 태양이 없다고 하시면서 (김정일 비서가) 절대 표면에 나서지 않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그런 사실을 잘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 사후에도 김 총비서는 외교 의전 일선에 나서는 시기를 계속 미루어 왔다. 서방의 관측통들은 그 이유를 그의 ‘내성적인 성격’ 때문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의 측근 인사인 김용순 비서는 그를 “박력 있고 한 번 한다면 하는” 성격의 소유자라 평했다. 나의 인식도 그에 가깝다. 어쨌든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세계의 평자들은 그의 진면목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스스로 획득한 카리스마
김일성 주석 사후 대부분의 평자들은 김정일 정권의 앞날을 비관적으로 점쳤다. 짧으면 3개월, 길어야 3년 안에 붕괴한다는 것이다. 그 유력한 논거 중 하나가 북의 새 지도자 김정일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후계자가 되었을 뿐 아버지만큼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페리 보고서조차 ‘김정일 정권의 안정성’을 공언하는 것을 보면 이 같은 문제는 해소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지난 95~97년 사이의 ‘고난의 행군’ 시기에 김정일 총비서는 대내외적으로 자신의 지도력을 입증한 것이다.
그의 정책 결정의 특징 중 하나는 ‘의외성’이라 할 수 있다. 김일성 주석의 장지가 금수산기념궁전이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현재 금수산기념궁전은 북의 사회 통합의 구심이 되고 있다.
권력 승계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필자는 지난 95년 봄 “오는 10월 10일에 주석직 승계”라는 기사를 썼다. 그것은 당시 북의 지도급 인사들을 취재한 결과 필자가 내린 판단이었다. 그들은 연내 권력 승계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본인의 결심에 달린 문제”라고 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직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1년 이상 비워둘 수 있겠는가. 필자는 그 같은 ‘상식적’ 판단에 따라 ‘연내 권력 승계’를 예상했다. 그러나 기사는 여지없이 오보가 되었다. 1년은 3년이 되었으며 그나마 주석직은 폐지되고 김일성 주석은 유일무이한 주석으로 남았다.
98년 8월 북이 발사한 물체는 우리를 놀라게 했다. 며칠 후 북이 그것을 인공위성이라 발표했을 때 세계는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문제의 인공위성은 한반도의 정세를 뒤바꾸어 놓았다. 미국에게 북은 ‘붕괴시켜야’ 하거나 ‘변화를 유도해야’ 하는 대상에서 ‘있는 그대로의 체제를 인정해야’ 하는 대상으로 변화했다.
물론 심각한 식량난 속에서 막대한 외화를 들여 인공위성을 개발했어야 하는가라는 비판도 있다. 이에 대해 북의 한 인사는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
“우리에게 그 같은 능력이 없었다면 미국은 우리를 이라크나 유고처럼 대했을 것이다. 그것은 조선반도에서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이었다.”
북의 인민들은 김 총비서의 정책적 의외성을 ‘누구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들을 해 나가는’ 강점으로 인식하지만 서방에서는 ‘예측불가’라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내가 아는 김 총비서는 다양한 방면에 대해 화제가 풍부한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이 같은 측면이 성격적 대담성과 맞물려 정책의 ‘의외성’을 빚어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아버지와 아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총비서. 나는 종종 두 인물을 비교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물론 차이가 있다.
소년 김정일은 대단히 영리했던 것 같다. 해방 직후 월북해 소련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김일성 수상의 집에서 기거했던 몽양 여운형의 딸 려원구 조국전선 의장은 “김정일 소년이 다섯 살 때 글을 깨우쳐 북조선 기관지들을 읽었다”고 증언했다.
김일성 수상은 이런 아들을 몹시 사랑했던 것 같다. 려원구 의장에 의하면 그는 출근할 때마다 아들을 안아서 위로 높이 세 번 올려 주었고 저녁 늦게 돌아와서도 이미 잠든 아들을 똑 같이 위로 세 번 올려 주었다고 한다.
김정일 비서는 아버지를 꼭 ‘수령님’이라 불렀다. 그런데 김정일 비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라 외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94년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였다.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고무된 김일성 주석은 김영삼 대통령을 맞을 준비로 분주했다. 7월 한여름 더위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대통령이 들르게 될 묘향산 특각을 직접 돌아보기 위해 평안북도로 떠났다. 묘향산 인근 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하고 묘향산 특각에 도착한 김 주석은 김영삼 대통령 부처가 묵게 될 방의 냉장고 문까지 열어 보았다고 한다.
연일 계속되는 강행군에 노인의 건강을 염려한 김정일 비서는 김일성 주석에게 전화를 걸어 평양으로 돌아올 것을 계속 권유했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 성공의 일념에 가득 차 있던 김 주석은 말을 듣지 않았다. 계속 설득하던 김 비서가 마침내 전화통에 대고 소리쳤다.
“아버지! 제발 돌아오십시오.”
김정일 총비서가 스타일상 김 주석과 다른 점이라면 표현 방식의 차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김 주석과 달리 김 총비서는 노기를 표현하는 인물이다. 그만큼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북이 공식적으로 ‘고난의 행군’ 시기가 끝났다고 선언한 98년, 김정일 총비서의 한 측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인민들은 울고만 있고, 큰물이 져서 먹을 것은 없고, 미국은 합의를 지키지 않고 우리 목을 조르면서 우리 체제가 무너지는 날만 기다리고 있지요, 우방들마저 다 등을 돌렸습니다….”
북은 그 시기 여러 우방 국가들에 식량지원을 요청했다. 북의 고위 관리가 베트남을 방문해 10만톤의 쌀을 요청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베트남은, 과거 전쟁 시기 수많은 전쟁고아들을 평양에 데려다 공부시켜 주는 등 북으로서는 식량지원을 요청할 만한 나라였다. 그러나 베트남은 김영삼 정부의 남북대화`―`식량지원 연계 정책을 의식해 대규모 식량지원을 거절했다. 베트남측은 미안했던지 “우리의 성의이니 1천톤이라도 가져가라”고 했는데 북측은 “우리는 거지가 아니다”라 외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고 한다. 북측 관리는 울면서 평양으로 돌아왔다.
“그런 때에 참으로 초인적인 의지로 인민들을 이끌고 우리 체제를 지켜 내신 분이 바로 그 분이십니다.”
그에게도 인간적 고민이 없었을 리 없다. 측근에 따르면 그 시기, 그는 종종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한다.
“이렇게 어려울 때 수령님께서 계신다면 얼마나 좋겠소.”
“신라의 3국 통일은 통일이 아니다”
김일성종합대학에는 ‘김정일 사적관’이 있다. 전국에서 유일한 곳이라 한다. 이 곳에서는 김정일 총비서의 대학시절을 잘 볼 수 있다.
김정일 총비서는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기 한 해 전인 1959년 모스크바대학을 방문했다고 한다. 그 때 모스크바대학 관계자는 김정일 학생에게 “역사가 길고 규모가 크며 세계적인 수재들이 유학 온다”면서 모스크바대학에 유학 올 것을 권유했던 모양이다. 그 때 그는 “나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하겠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당시 모스크바대 유학생으로서 김정일 학생을 만났던 한 인사는 “그가 상당한 수준의 러시아어를 구사해 놀랐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사적관에서 필자는 그가 재학 중 쓴 「3국통일 문제를 다시 검토할 데 대하여」라는 논문을 특히 관심 깊게 보았다. 핵심내용은 “신라의 3국 통일은 통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시대 조선반도에 발해라는 다른 주권국가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신라는 영토를 넓히려는 야심만 있었을 뿐 통일국가를 세우려는 지향이 없어서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국가를 멸망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최초의 민족통일은 3국 중 통일 지향이 가장 강했던 고구려를 이어받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라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1961년 9월 조선노동당 4차 당대회는 대대적인 평양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모든 평양시민들은 평양시 곳곳의 구역을 배정받아 건설사업에 동원되었다. 오늘날 평양시민들이 거리를 지나다가 “이 곳은 내가 건설했다”고 무용담을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 때 김일성종합대학은 국제관계대학, 농업대, 상업대와 함께 평양시 서성구역 와산동에서 룡성구역까지의 도로공사를 맡았다. 당시 정치경제학과 2학년 1반 김정일 학생도 이 공사에 참여했다. 사적관에는 목고(짐을 매달아 두 사람이 함께 져나르는 통나무 도구)를 지고 가는 김정일 학생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이처럼 역사의 현장에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지도자로서 그의 자산이라 할 것이다.
사적관에는 김정일 학생과 그의 동료들이 군사강의, 사격훈련, 점호, 야간습격전투훈련, 군사야영훈련등 다양한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모습도 전시되어 있다.
김 총비서의 대학동창이면서 현재 한 공장기업소의 지배인으로 일하는 한 인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자신은 아무래도 정치를 해야 할 것 같다면서 나에게는 과학자가 되라고 권유했다. 나뿐만 아니라 여러 우수한 동기들에게 여러 전망 있는 분야로 진출할 것을 권하곤 했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이 현재 중요한 위치에서 사업하고 있다.”
사적관에 전시된 사진들을 보다 보면 재미난 공통점이 발견된다. 학급 동료들과 함께 찍은 여러 장의 사진에서 김정일 학생은 사진의 가운데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의 모습은 항상 맨 뒷줄 한켠에서 발견된다.
가장 좋아하는 꽃은 목화꽃
김일성종합대학을 17회로 졸업한 그는 64년 6월 19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지도원으로 당 사업을 시작했다. 총비서에 이르기까지 37년 간의 당 사업에서 그는 여러 가지 일화를 남겼다.
업무스타일과 관련해 가장 유명한 것은 ‘한밤중의 전화’다. 나는 북의 여러 고위인사들로부터 이 같은 얘기를 들었다. 김 총비서는 “서류를 결재하던 중 의문이 생겨 늦은 시간이지만 부득이 전화했다”면서 낮에 올린 결재 서류에 대해 보다 자세히 묻곤 한다고 한다. 그가 반드시 묻는 말 중의 하나가 “인민들이 뭐라고 하겠소?”라는 것이다.
그러니 부하들 역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듯하다. 김용순 비서 역시 수면부족으로 인해 눈이 충혈되어 있곤 했다. 김 총비서는 밤늦게까지 일하고 이동시간을 이용해 쪽잠으로 수면을 보충한다는 것이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도 김 총비서 업무스타일의 한 특징이라 한다. “새로 작곡된 음악을 틀어 놓고 평가하면서 눈으로는 결재 서류를 검토하는 한편 전화로는 누군가에게 업무 지시를 하는” 식이다.
최근 김 총비서는 일꾼들에게 ‘거친 일뽄새’를 경계하라는 지시를 많이 하고 있다. ‘창조적 열정’을 높이 사는 한편 “사색을 게을리하는 사람은 쓸모 없다”고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북의 당일꾼들에게서 사업을 “예술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남쪽식으로 말하자면 합리적이고 모양 좋게 처리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김정일 총비서는 서구식 양복을 입지 않는다. 주로 ‘잠바옷’(위는 잠바, 아래는 정장 바지 형식의 옷) 차림이고 정장을 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닫힌 깃 양복’(끝이 둥근 셔츠 칼라에 목선에서부터 단추로 여미게 되어 있는 북의 정장)을 입는다. 그가 서구식 양복을 입지 않는 이유를 물었을 때 한 측근 인사는 “화려한 옷차림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라는 말씀이 계셨다고 했다.
가장 좋아하는 꽃이 목화꽃이라는 점은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목화꽃은 화려하지 않으나 유용하다.
김정일 총비서에 대해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일 중 하나는 월북 인사들의 운명에 대한 그의 역할이다. 내게는 전쟁 때 북으로 간 여고 동창생이 있다. 그녀는 월북 후 시인으로 활동했다. 방북취재 초기부터 나는 그 친구를 만나 보려 했으나 기회가 닿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도 고려호텔 식당에서 그녀와 마주쳤다. 감격적인 재회였다.
그의 지난 얘기를 들으며 나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70년대 초반 정치보위부가 생기면서 김병하 보위부장의 좌경적 방침으로 여러 남쪽 출신 인사들이 지방으로 쫓겨가는 등 고초를 겪었다는 것이다.
그 때 자신도 농장으로 내려가 고생하고 있었는데 자신을 평양으로 돌아오게 해 준 것이 바로 김정일 비서였다는 것이다.
그 후 나는 한 저명한 월북 학자의 자제로부터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당시 정치보위부는 남쪽 출신의 유수한 인사들을 변경의 농촌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켜 노동에 종사시키면서 김 주석이 그들을 찾으면 “지방에 출장 갔다”는 식으로 얼버무렸다는 것이다. 그는 “보위부의 좌경적 방침을 비판하면서 지방으로 쫓겨가 있는 남쪽 출신 인사들을 하나하나 찾아 평양으로 불러 올린 것이 김정일 비서였다”고 했다.
미국식 영어 구사하는 김정일 총비서
평양에는 평양제1고등중학교라는 ‘수재교육기관’이 있다. 인민학교에서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만을 뽑아 자연과학 기술 분야에서 인재로 양성하는 학교다. 이 학교뿐만 아니라 1999년 평양에는 30개의 수재교육 학교가 생겼다. 이는 평양 시내 전체 고등중학교의 10%에 달한다. 남쪽 식으로 말하자면 북의 ‘영재교육’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 ‘수재교육’ 정책을 강력히 밀고 있는 것이 바로 김 총비서라고 한다. 84년 최초의 ‘수재교육기관’인 평양제1고등중학교의 설립을 주도한 것도 그였다는 것이다. 인재양성과 관련한 그의 사고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김 총비서는 지난 92년 청소년 교육과 관련해 흥미 있는 교시를 발표했다. “청소년들에게 코카콜라가 아니라 들쭉 단물을 먹이되, 전자오락은 지능과 창의성 개발에 도움이 되므로 장려하라”는 것이다.
이미 그 무렵 그는 컴퓨터, 인터넷의 확산과 관련한 세계적인 추세를 이해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의 측근들은 “김 총비서가 컴퓨터를 잘 다루며 인터넷을 이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2000년 1월 국가과학원을 현지 지도했을 때 김 총비서는 컴퓨터 분야에 대해 전문가들도 놀랄 정도의 이해도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는 현재 여전히 어려운 경제사정 속에서도 정보통신 분야를 투자우선 순위에 올려 정력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평양에 있는 조선컴퓨터센터에는 정신노동하는 연구원들의 휴식을 위해 실내 정원까지 만들어져 있을 정도다. 이는 다가오는 정보통신 시대에 대한 그의 인식과 대처 태세를 보여 주고 있다.
서방과의 교류가 많지 않은 북의 지도자 김 총비서가 세계적인 추세를 제때에 파악해 나가는 수단은 무엇일까.
김 총비서가 서방의 방송, 영화를 많이 본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히 영화를 좋아해서라기보다는 서방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나는 특히 그가 영어를 이해하는 것으로 느꼈다. 특히 그가 구사하는 것은 전통적인 영국식 영어가 아니라 현대 미국어였다.
“우리 민족의 손으로 통일문제 풀어야”
남북정상회담이 발표되던 4월 10일 나는 평양에 있었다. 4일부터 8일까지 계속된 제9차 조일회담 취재차 방북했다가 역사적인 뉴스에 접하게 됐던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김 총비서의 한 측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분단 이후 여러 차례 최고위급 회담 성사를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특히 94년에는 수령님의 서거로 최고위급 회담이 무산되었는데 이제 드디어 성사되었으니 우리 민족의 손으로 통일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장군님께서는 지금 회담 준비로 대단히 바쁘다. 그 분의 건강을 지켜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는 특히 “지난날 조문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며 이번에는 아무런 전제 없이 서로가 일단 부딪쳐 보자”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오는 6월 12일 역사적인 만남을 갖게 될 남북의 두 정상. 그 한 당사자인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나는 30년 간의 취재 파일을 바탕으로 지난해 책을 한 권 출간한 바 있다. 나의 눈에는 두 정상의 성격은 상당히 대조적으로 보인다. 단적으로 말해 한 쪽이 원칙론자라면 다른 한 쪽은 타협론자다. 오는 정상회담에서 이 두 대조적인 캐릭터가 어떻게 어우러져 분단 50년의 역사를 청산해 나갈지 기대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