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모음/have to know'에 해당되는 글 37건

  1. 2005.11.06 김정일 통치 10년 주요 일지
  2. 2005.10.23 北 연형묵 국가장의위 명단
  3. 2005.10.06 조선노동당 60년

김정일 통치 10년 주요 일지

1994년

7.8 = 김일성 주석 사망

9.10 = 김정일에 '위대한 수령' 공식 호칭 사용

10.21 = 북미 제네바 기본 합의문 채택

1995년

2.15 = 중앙보고대회, 김정일 생일을 민족 최대 명절로 지정

3.30 = 일본 연립여당과 북일 수교재개를 위한 합의서 채택(평양)

9.7 = 러시아, '조ㆍ소 우호조약 및 원조조약'(1961년 체결) 폐기 발표

12.15 =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KEDO)와 경수로 공급협정 체결

1996년

4.20-21 = 제1차 북미 미사일 회담(베를린)

7.19-8.4 = 제26회 하계올림픽 참가(미국 애틀랜타)

7.26 = 정전협정 조인일(7.27)을 국가명절로 지정

9.13-15 = 라진ㆍ선봉 국제투자포럼 개최

1997년

2.11 = 유엔(UN), 북한에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 서명 촉구

2.12 = 황장엽씨 망명

9.9 = '주체연호' 실시

10.8 =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로 추대

11.11-14 = 일본 연립여당 대표단 방북

1998년

3.1 = 동해상 비행정보구역(FIR) 개방

4.18 = 김정일, 민족대단결 5대방침 발표

6.16 = 정주영 명예회장 방북, 소 500마리 북송

8.31 =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리에서 '광명성 1호' 발사

9.5 = 사회주의 헌법 개정(권력구조 전면 개편,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 재추대)

10.26~29 = 정주영 명예회장 2차 방북, 소 501마리 북송

11.18 = 금강산 관광 유람선 현대 금강호 첫 출항, 평양-남포 고속도로 착공

1999년

3.16 = 북미 고위급 회담(뉴욕), 금창리 지하시설 현장조사 협상 타결

4.7-9 = 최고인민회의 제10기 2차회의, 인민경제계획법 채택

5.25-28 = 윌리엄 페리 미 대북정책 조정관 방북

6.15 = 1차 서해교전 발발

9.2 = 인민군 무력부, 서해 북방한계선(NLL) 무효화 선언

9.7-11 = 북미 고위급 회담(베를린), 미사일 시험 발사 유보(북)와 대북경제 제재 완화(미) 합의

9.15 = 윌리엄 페리 대북 정책 조정관, 페리보고서 제출

12.14 = 일본, 대북 제재 해제 발표

2000년

2.9 = 북러 '친선ㆍ선린 및 협조에 관한 조약' 서명(평양)

5.29-31 = 김정일, 중국 비공식 방문(장쩌민과 정상회담)

6.15 = 6ㆍ15남북공동성명 발표

7.19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방북, 정상회담 후 공동선언 발표

9.2 = 비전향장기수 63명 송환

9.18 = 경의선 복원 기공식(임진각)

10.6 = '국제테러에 관한 북미 공동성명' 발표

10.9-12 =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김정일 특사 자격으로 방미

10.23-25 =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 방북, 김정일 면담

2001년

1.15-20 = 김정일, 비공식 중국 방문

3.15 = 남북 첫 이산가족 서신교환

5.14 = 유럽연합(EU), 북한과 수교 결정 발표

7.26-8.18 = 김정일, 러시아 공식 방문(8.4 모스크바선언 발표)

9.3-5 =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 방북

11.22 = 새 경제구호 '라남의 봉화' 제시

2002년

1.29 =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

7.1 = 경제개혁(7.1경제관리개선조치), 물가 및 임금 현실화

8.20-24 = 김정일, 러시아 극동지역 방문

9.17 =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방북, 평양선언 발표

9.29~10.14 = 제14회 부산아시안게임 북측선수단 참가(668명)

10.17 = 제임스 켈리, 방북(10.3-5) 후 북한 핵무기 개발계획 시인 발표

11.14 = KEDO, 북한에 중유지원 12월부터 중단 결정

11.20 = 개성공업지구법 채택

12.22 = 제네바 합의 이후 동결됐던 핵시설에 대한 봉인과 감시카메라 제거

2003년

1.10 =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

4.23-25 = 북ㆍ미ㆍ중 북핵 논의 3자회담 개최

8.27-29 = 제1차 북핵 6자회담 개최(베이징. 공동발표문 채택 없이 폐막)

8.20 =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 북한 선수단 김해공항 도착

9.3 = 최고인민회의 제11기 1차회의, 김정일을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선출

10.23~26 = 분단 이후 첫 민간 행사, 제주도 민족평화축전

2004년

2.25-28 = 제2차 북핵 6자회담 개최(베이징. 의장성명 채택)

4.15 = 제60차 유엔인권위원회, 북한인권결의안 통과

4.19-21 = 김정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첫 정상회담

4.22 = 평안북도 룡천역에서 폭발사고 발생

5.22 =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방북. 피랍 일본인 가족 5명 귀환

6.12 = 서해상 첫 시험통신 실시

6.23-26 = 제3차 북핵 6자회담 개최(베이징. 의장성명 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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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연형묵 국가장의위 명단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최선영 기자 =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와 국방위원회는 22일 연형묵 국방위 부위원장의 사망과 관련해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장의위원회를 구성했다.

23일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국가장의위는 조 제1부위원장과 함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박봉주 내각 총리, 김영춘 국방위 위원 겸 군 총참모장을 비롯 당.정.군의 고위인사 49명으로 구성됐다.

리을설.백학림 군 차수 등 항일빨치산 1세대와 정하철 노동당 비서, 업무정지 처벌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장성택 노동당 제1부부장은 국가장의위원회에 포함되지 않았다.

다음은 연 부위원장 국가장의위원회 명단.

위원장 조명록.

위원

김영남(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박봉주(내각 총리), 김영춘(군 참모총장),김일철(국방위원 겸 인민무력부장), 전병호(노동당 비서), 리용무(국방위 부위원장),

최태복(노동당 비서), 양형섭(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 최영림(최고인민회의 상임위 서기장), 김기남.김중린(노동당 비서), 홍성남(함경남도당 책임비서-전 총리), 곽범기.로두철.전승훈(내각 부총리),

김영대(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장), 류미영(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백세봉(국방위원),

박용석(노동당 검열위원장), 박남기.리광호.채희정(노동당 부장), 리용철.리제강.리재일.주규창(노동당 제1부부장), 김정임(노동당 역사연구소 부소장),

김양건(국방위 참사), 주상성(인민보안상), 리명수.현철해.김기선.박재경(군 대장), 김양점.박승원(군 상장), 최부일(군 중장) 리태원.심상대(군 상장),

리태남(평안남도당 책임비서), 김평해(평안북도당 책임비서), 김락희(황해남도당 책임비서), 로배권(황해북도당 책임비서), 김경호(량강도당 책임비서), 박도춘(자강도당 책임비서),

김경호(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제1비서), 렴순길(직업총동맹 중앙위원장), 강창욱(농근맹 중앙위원장), 박순희(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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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노동당 60년① `건설'과 `투쟁'으로 점철된 역사


※편집자 주 = 10월10일(월)은 북한의 조선노동당 창건 6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에 따라 <조선노동당 60년>이라는 큰 제목 아래 ①`건설'과 `투쟁'으로 점철된 역사 ②왜 `노동당'으로 이름지었나 ③노동당 누가 움직이나 ④선군정치에 위축된 노동당의 앞날 ⑤후계구도 `아직은 먼 일' ⑥노동당 60년 주요일지를 송고합니다. 제작에 참고하십시오.


(서울=연합뉴스) 조계창 기자 = 1945년 10월10일 개최된 조선공산당 서북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에 공식적 연원을 두고 있는 조선노동당은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을 이끌고 있는 영도 기구로서 사회주의권 붕괴라는 대외 정세의 급격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원칙의 고수를 주된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조선노동당 역시 창당 이래 대.내외적 정세 변화에 발맞춰 당의 지도이념에서도 꾸준한 변화를 모색해 왔다. 특히 이런 변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일지도체계 확립과 후계 승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조선노동당의 역사는 권력투쟁으로 점철된 역사이기도 하다.

▲ 당창설기(1945.10∼1956.8) = 조선노동당의 실질적 모태는 45년 10월10∼13일 평양에서 김일성의 주도 아래 통일적 독립국가건설이라는 목표로 내걸고 열린 조선공산당 서북5도 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결성키로 결정한 데서 출발한다.

북한은 이 때를 기념해 10월10일을 당 창건 기념일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조선노동당의 뿌리를 1926년 10월 만주 화전(樺甸)에서 김일성이 결성한 `타도제국주의동맹'(약칭 ㅌ.ㄷ), 당조직의 원류는 1930년 창춘(長春) 카륜에서 김일성의 주도로 결성됐다는 `건설동지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북조선 분국의 결성은 미.소 양국의 군대가 각각 남북에 진주하고 있다는 특수성을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었지만 당시 서울에 박헌영이 주도하는 당 중앙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김일성은 45년 12월 17∼18일 북조선 분국 제3차 중앙확대집행위원회에서 책임비서로 선출되면서 분국 내에서 1인자로 부상하게 된다.

이후 북조선 분국은 46년 8월28일 김두봉이 이끄는 조선신민당을 사실상 흡수해 북조선노동당을 창설했으며, 49년 6월30일 남쪽에서 와해 직전에 있던 남조선노동당과 합당하면서 조선노동당의 기틀이 완성된다.

하지만 자신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박헌영과 함께 당을 이끌게 된 김일성은 한국전쟁 시기에 잠재적 경쟁자를 차례로 숙청시켜 나가면서 단일지도체계 확립을 시도한다.

김일성은 50년 12월21일 강계시에서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제3차 천원회의에서 전쟁 수행 과정에서 오류를 범했다는 이유로 당 간부 및 군 지휘관을 대대적으로 비판한 것을 계기로 제2군단장 무정을 철직시키고 51년 11월 당 중앙위 제4차 전원회의에서 당 조직부장 허가이 를 좌천시키면서 당내 주도권을 장악했다.

특히 박헌영으로 대표되는 남로당 계열의 몰락을 가져온 52년 12월 당 중앙위 제5차 전원회의는 김일성이 당내 권력기반을 공고하게 만드는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김일성은 이 회의에서 자유주의적 경향과 종파주의 잔재와의 투쟁을 역설한 결과 이듬해 초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계 핵심인사들 13명을 반국가, 반혁명 간첩죄로 무더기로 체포됐으며 55년 12월 박헌영에 대해 사형이 선고되면서 남로당 계열에 대한 숙청은 마무리됐다. 정전 직후인 53년 8월5일 개최된 당 중앙위 제6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전후 복구건설의 방향을 놓고 중공업 우선을 주창했지만 소비재 중심의 경공업 및 농업 발전을 고집한 일부 당내 인사의 반발에 부딪치게 된다.

특히 56년 2월 개최된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를 비판한 것이 영향을 미치면서 김일성은 자신의 권력기반에 대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어수선한 대외 정세 속에서 열린 56년 4월 제3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 문제가 핵심 쟁점으로 부각되지 못했으며 오히려 중앙기관 선거에서 김일성 계열 인사들이 핵심 요직을 장악하는 결과가 나왔다.

한편 제3차 당대회에서는 당규약 개정을 심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당 지도이념으로 명문화하고 `전국적 범위에서 반제.반봉건 민주혁명 완수'를 목표로 내세웠다.

비록 김일성의 측근들이 핵심 요직을 장악하면서 외형적으로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것처럼 보였지만 제3차 당대회에서 봉합된 갈등은 56년 8월30일 평양예술극장에서 열린 당 중앙위 전원회의 에서 마침내 폭발하고 만다.

이른바 `8월 종파사건' 이라고 불리는 이 회의에서 상업상을 맡고 있던 윤공흠이 총대를 매고 당에 대한 김일성의 독재를 강력히 비판했지만 오히려 대다수 중앙위원들로부터 역공을 받고 자신을 비롯한 서휘, 리필규 에 대해서는 출당 조치가 내려지고 최창익과 박창옥 에 대해서는 당직이 박탈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김일성에게는 `8월 종파사건'이 자신에 대한 당내 지지기반을 확인시켜주고 오히려 단일지도체계 확립을 앞당기는 계기로 작용했다.

▲ 유일지도체계의 확립시기(61.9∼67.5) = 전후 중공업 우선을 내세운 북한은 사회주의권의 외부 원조 및 내부 동원에 힘입어 53∼60년 7년간 공업 부문에서 비약적 성장을 이뤄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잠시 주춤하는 듯했던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 조짐이 서서히 부활하기 시작하더니 61년 9월11∼18일 개최된 제4차 당대회를 거치면서 김일성의 1인 권력은 더욱 공고화됐다.

제4차 당대회를 전후로 북한에서는 빨치산 회상기 및 김일성 저작에 대한 학습운동이 광범위하게 벌어지면서 김일성 유일지도체계 확립을 위한 사상적, 문화적 기반을 마련되기 시작했다.

제4차 당대회는 이런 경향을 반영해 제3차 당대회에서 당 지도이념으로 확정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항일무장투쟁의 혁명전통 을 추가시키고 대내적 목표로 사회주의 제도의 강화발전을 목표로 내걸었다.

특히 66년 10월 당 중앙위 제4기 14차 전원회의에서 당 중앙위원장 및 부위원장직을 폐지하고 총비서 및 비서제를 신설하면서 김일성은 유일지도체제 관철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67년 1월 중국의 문화혁명을 주도했던 홍위병들이 김일성을 수정주의자로 비난하고 박금철, 김도만, 허석선, 이효순 등 이른바 `갑산파'들이 과도한 개인숭배 경향에 제동을 걸고 나서면서 김일성은 또한번 도전에 맞닥뜨렸다.

하지만 김일성은 아들 김정일의 도움으로 67년 5월4∼8일 당 중앙위 제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갑산파를 숙청하고 68년말 민족보위상 김창봉과 허봉학대남총책 등 군 수뇌부에 대한 숙청까지 끝내면서 유일지도체계 확립에 필요한 확고한 권력 기반을 마련했다.

김일성 유일지도체계는 70년 11월2∼13일 제5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제도의 승리를 최종 목표로 내걸고 당 지도이념으로 김일성 주체사상을 표방, 사상적 기반까지 마련돼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으로 자리 잡았다.

▲ 후계구도의 완성(66.6∼80.10) = 김정일이 66년 6월19일 당 중앙위 지도원으로 당무를 시작하면서 김일성은 권력승계에 대한 구상을 하나씩 실천해나기기 시작했다.

특히 김정일은 67년 5월 갑산파에 대한 숙청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당내에서 문화예술 부문을 장악하는 한편 유일지도체계 확립 운동을 전국적 범위로 확장시킨 공로 등을 인정받아 74년 2월13일 개최된 제5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 중앙위 정치위원에 선출되면서 후계자로 내정됐다.

김정일은 정치위원 피선 직후인 2월19일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를 선포하고 그해 4월14일에는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 10대 원칙' 을 발표했다.

이런 식으로 급속히 당권을 장악해 나가던 김정일에 대한 견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김정일은 76년 6월 개최된 당 중앙위 정치위원회에서 항일유격대 출신으로 당 정치위원 겸 비서였던 김동규 비판을 받고 잠시 주춤했지만 77년 가을 김동규 및 그의 지지세력을 숙청하고 위상을 회복했다.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이어지는 권력승계 구도는 제5차 당대회 이후 10년만에 80년 10월10∼14일 개최된 제6차 당대회에서 공식화됐다. 이 당대회에서 김정일은 정치국 상무위원, 비서국 비서, 군사위원회 군사위원 등 당 3대 권력기구에 모두 선출됨으로써 부친에 이어 실질적인 2인자로 부상했다.

특히 제6차 당대회 결정서는 "혁명의 세대가 바뀌는 현실은 혁명전통을 계승 발전시킬 데 대한 문제를 더욱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다"며 혁명전통의 계승발전을 강조함으로써 후계체제 확립을 80년대의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한편 제6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 방안을 주창했으며 전국적 범위에서서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완수라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후 김정일은 91년 12월24일 개최된 당 중앙위 제6기 19차 전원회의에서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93년 4월9일 국방위원장으로 각각 선출 되면서 군권을 완전 장악했다.

김정일은 부친 사후인 97년 10월8일 노동당 총비서 로 추대되면서 형식적으로도 권력승계를 완전히 마무리했다.


조선노동당 60년② 왜 '노동당'으로 이름지었나


(서울=연합뉴스) 함보현 기자 = 북한은 왜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와 달리 '공산당'이 아니라 '노동당'을 당명으로 삼았을까.

북한이 조선노동당 창건일로 기념하고 있는 1945년 10월10일은 '조선공산당 서북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결성된 날이다.

조선공산당은 1924년 서울에서 조직된 이후 일제의 계속된 탄압으로 박헌영의 '서울콤그룹'만 지하조직으로 명맥을 유지하다 해방과 함께 재건됐다.

30년 이상 사회주의 계열의 구심 정당 역할을 맡았던 조선공산당이 조선노동당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1946년이었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그해 4월 '북조선공산당'으로 명칭을 변경한 데 이어 8월에는 중국 연안파(延安派)가 중심이 된 조선신민당과 합당, '북조선노동당'이 탄생했다.

남측의 조선공산당은 1946년 11월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과 함께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했다. 두 노동당은 1946년 6월 통합돼 조선노동당으로 거듭났다.

북조선공산당은 1946년 8월28일 신민당과 합당 당시 노동자, 농민은 물론 근로인텔리 등 각계 각층을 아우르는 동시에 이전 사회주의 계열의 당파성.이합집산의 이미지를 떨쳐 버리려 애썼다.

조선노동당출판사의 '김일성전집 4권'(1992)에 따르면 고(故) 김일성 주석은 1946년 8월29일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 당시 '근로대중의 통일적 당의 창건을 위하여'라는 보고에서 "두 당의 합동(합당)은 노동자, 농민, 근로인텔리의 광범위한 대중을 튼튼히 결속시키는 데 있어 커다란 전진"이라고 평가했다.

또 "근로대중이 분열되는 것은 최대의 위험"이라며 "근로대중의 통일적인 참모부, 근로인민의 유일한 전투적 선봉대를 꾸리는 문제는 오직 노동당을 창립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김 주석은 같은 날 '노동당의 당면과업에 대하여'라는 연설에서도 "노동당은 어디까지나 맑스-레닌주의를 지도이론으로 삼을 것"이라고 못박은 뒤 "우리는 좌.우경적 경향과 무자비하게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주석은 '인텔리당'으로 불릴 정도로 지식인과 유산계급이 주축이 된 신민당과 합당을 통해 노동자.농민뿐 아니라 각계 각층을 포괄, 더욱 확고한 지지기반을 구축하려 했다.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조선전사 23권'(1981)도 "근로대중을 대표하는 여러 정당들의 통합은 절실한 문제였다"며 "공산당이 좁은 계급적 울타리를 벗어나 다른 근로자당과 합당해 광범위한 근로대중을 묶어 세울 수 있는 대중적 당으로 발전하는 것은 당시 조성된 정세와 당 및 혁명 발전의 합법칙적 요구였다"고 설명했다.

북조선공산당의 '끌어안기 전략'은 한반도 북쪽에서 친소련파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소련의 이해관계와 맞아 떨어졌다.

이는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에서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주석단 귀빈으로 대회를 지켜보던 소련의 이그나치예프 대령은 "김일성 동무를 추대하는 것이 정해진 사실이다"라는 공산당측 간부의 말에 신민당 대표단이 술렁이는 것을 보고 즉각 의장단에 '휴회 쪽지'를 보냈다.

그는 이어 양당 지도부를 불러 "위원장이 반드시 김일성이어야 한다는 철칙은 없다"는 것을 속개 본회의에서 발표하도록 지시해 신민당측의 불만을 가라앉히는 '세심함'까지 보였다.(김창순 저 '북한 15년사', 1961)
1948년 공산당원(약 27만명)이 신민당원(9만명)보다 절대 우세에 있었음에도 위원장직을 신민당 당수인 김두봉에게 양보한 배경에는 지지기반 확대와 안정이라는 김 주석과 소련의 의도가 있었던 셈이다.

이항구 통일연구회장은 "북조선공산당 지도부는 보다 폭넓은 사회계층을 지지세력으로 망라하기 위해 신민당과 합당을 적극 추진하고 당명까지 바꿨다"며 "공산당과 노동당의 본질적인 성격은 같다"고 말했다.


조선노동당 60년③ 노동당 누가 움직이나


(서울=연합뉴스) 문관현.정연식 기자 = 올해로 창건 60년을 맞는 조선노동당은 정부보다도 3년 일찍 태어나 북한 정치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고(故)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1990년 중반 밀어닥친 경제난 속에서 당의 기능이 예전같지 않다는 분석이 잇따르고 있지만 노동당은 여전히 북한 사회에서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정치조직이다.

'혁명의 주력군'이라고 불리며 정치.사회적 영향력이 크게 증대되고 있는 인민군도 상층부에 노동당의 집행기구인 군 총정치국이 있고, 중대 단위까지 당조직(정치부)이 설치돼 있다. 군내 당조직을 총괄하는 총정치국의 책임자 조명록 차수 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이어 군 서열 2위로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처럼 권부 핵심에 있는 노동당은 누가 움직이고 있을까.

국방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는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를 정점으로 중앙위 위원과 후보위원들이 노동당 정책을 다루는 정치국과 비서국, 검열위, 중앙검사위, 중앙군사위 그리고 중앙위 산하 전문 부서 에 포진, 노동당을 이끌고 있다.

노동당은 1980년 10월 제6차 대회에서 중앙위 위원 145명과 후보위원 103명 등 248명을 선출했으나 사망과 은퇴 등으로 많은 변동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노동당 창건 때부터 당을 이끌었던 김 주석을 비롯해 정치국 상무위원이었던 오진우 전 인민무력부장 등 이른바 `혁명 1세대'급 인사들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속속 세상을 떠나면서 권력은 '혁명 2세대'로 이동했다.

현재 계응태.전병호.한성룡.최태복.김기남.김국태.연형묵.정하철 등 2세대 대부분은 70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국과 비서국, 전문부서에서 당의 핵심으로 활동하면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내각을 비롯해 북한 권력기관이 실무형 중심으로 3-4세대로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는 것과 달리 노동당 핵심간부들의 연령대가 높은 것은 조직을 통한 주민통제 및 사상교육에 주력하고 있는 노동당의 역할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노동당에는 조직지도부, 선전선동부, 국제부, 과학교육부, 군사부, 군수공업부 등 20여개의 전문부서가 설치돼 있으며 그중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는 북한 사회 전반에 대한 당의 영도와 통제를 실현하는 데서 김 위원장의 양팔 역할을 하는 부서다.

특히 조직지도부는 김 위원장이 조직비서 및 조직부장을 모두 겸임하고 있어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조직지도부는 김 위원장의 매제인 장성택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 최근 주변의 견제로 업무정지 처벌을 받고 사실상 실각한 가운데 리제강 제1부부장 이 발빠르게 그 자리를 메워 2인자로 등극했다.

리 제1부부장은 장 제1부부장의 업무분야를 포함해 사실상 노동당내 업무를 총괄하고 있어 주변에서는 '총독'으로까지 불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내에서 떠오르는 인물은 비교적 젊은 나이의 황병서 조직지도부 부부장과 리재일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으로, 이들은 최근 김 위원장의 각종 시찰에 동행하면서 신실세로 부상하고 있다.

노동당내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이며 당의 건재를 과시하고 있는 곳은 대남부서.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전후로 김용순 노동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이 대남 업무를 총괄해 왔으며 2003년 10월 그의 사망으로 제 자리를 찾지 못하던 대남업무는 림동옥 제1부부장 의 득세 속에서 남북관계 정상화로 이어지고 있다.

한때 폐암설이 나돌기도 했던 림 제1부부장은 올해 김 위원장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6.17면담에 배석하면서 각종 대남 업무를 총괄적으로 지휘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여기에다 1986년부터 2003년까지 내각 국가계획위원장 을 맡아 경제시찰단을 이끌고 남측을 방문하기도 했던 박남기 전 최고인민회의 예산위원장은 노동당 중앙위 부장 에 기용돼 북한 경제를 이끌고 있다.

또 최근에는 세대교체 바람을 타고 리광호 당 과학교육부장을 비롯한 실무와 이론을 갖춘 비교적 젊은 인사들이 전문부서 책임자나 실무급인 부부장 등 자리를 서서히 자리를 메워가고 있다.


조선노동당 60년④ 선군정치에 위축된 노동당의 앞날


(서울=연합뉴스) 장용훈 기자 = '선군정치(先軍政治)' 군을 앞세운다는 북한의 정치이념은 환갑을 맞아 흔들리고 있는 조선노동당의 정치적 입지를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고(故) 김일성 주석이 생존하고 있던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노동당은 '수령의 혁명사상을 실현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정치적 조직'으로 '혁명의 참모부'로 평가받았다.

노동당을 '전체 근로대중 조직체 중에서 최고형태의 혁명조직'으로 규정한 당규약은 노동당이 북한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체임을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1994년 이후 식량난과 경제난으로 사회질서가 붕괴되는 가운데 노동당은 더 이상 최고권력의 정치체로 역할하지 못하고 있다.

제3차 7개년 경제계획의 실패를 시인한 1993년 12월 전원회의 이후 당중앙위 전원회의가 여태껏 열리지 못하고 있는 점은 정책결정과정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북한 노동당의 위상을 보여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6년 12월 김일성종합대학 창립 50주년 연설에서 "당조직들이 맥을 추지 못하고 당사업이 잘 되지 않다보니 사회주의 건설에서 적지 않은 혼란이 조성되고 있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국방위원회가 북한 내 최고결정기관으로 자리잡으면서 당의 위상은 더욱 약화되고 있다.

국방위원회는 단순히 국방 관련 사안뿐 아니라 조명록 제1부위원장의 방미, 중소형 발전소 건설로 부각된 연형묵 부위원장, 외교전문 관료인 김양건 전 당 국제부장의 참사 기용 등에서 볼 수 있듯 외교와 경제정책 등 북한 내 각종 현안 해결의 최고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정책결정 과정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당의 기능이 점차 축소되고 군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각종 건설현장에 젊고 싱싱한 노동력을 보유한 군대가 동원되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는 '혁명적 군인정신'이 따라배워야 할 모범으로 자리잡아가고 있고 "모든 당원들과 근로자들은 인민군대가 창조한 정신과 도덕, 투쟁기풍, 문화를 적극 따라 배워야 한다"는 신문사설이 쏟아지고 있다.

여기에다 미국과 대립이 고조되면서 전쟁 억제력으로서 군의 역할은 더욱 중시되고 있을 뿐 아니라 경제분야에서도 국방공업 우선노선이 나오고 있다.

또 경제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도 과거 당이 정책결정의 중심에 섰다면 1998년 제10기 1차 최고인민회의 이후에는 내각의 기능이 강조되면서 당의 역할은 축소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노동당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군이 당보다 우위에 있다거나 당의 기능이 무용지물이라는 지적은 성급한 판단으로 보인다.

북한군은 당의 군대로 규정되고 있어 군대가 당보다 우위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당창건 60주년을 맞아 노동신문 편집국이 4일 발표한 논설도 "혁명투쟁에서 당과 군대는 뗄 수 없이 연결돼 있다"며 "군대는 혁명의 향도적 역량인 당을 받드는 기둥이고 강력한 당은 반드시 강위력한 군대를 전제로 한다"고 지적했다.

결국 군대의 중요성을 지적하면서도 군대는 노동당을 뒷받침하는 세력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 것이다.

경제 발전과 체제보위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북한의 상황에서 `혁명의 주도세력' 조선노동당이 군, 내각과 관계에서 어떻게 위상을 정립할지 주목된다.

특히 1980년 제6차 당대회 이후 우리의 전당대회격인 당대회가 열리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당창건 60주년을 계기로 언제쯤 제7차 당대회를 열어 변화된 남북관계를 반영한 당규약 개정, 후계자 결정, 각급 당조직의 권한과 임무 변화 등을 추진할 지 여부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조선노동당 60년⑤ 후계구도 `아직은 먼 일'

(서울=연합뉴스) 최선영 기자 =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구도는 언제쯤 가시화될 것인가.

일각에서는 당창건 60돌을 계기로 김 위원장의 후계자가 결정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이미 김 위원장의 후계자로 차남 정철(24)이 정해졌다는 등 갖가지 관측이 무성하다.

올해 63세인 김정일 위원장도 1974년 김일성 주석이 62세였던 때에 후계자로 공식 추대됐던 만큼 이미 후계자가 결정됐거나 가까운 시일 내에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정보당국과 전문가, 북한 내부사정에 밝은 소식통은 김 위원장의 후계자가 결정되지 않았고 아직은 먼 장래의 일이라는 분석에 무게를 두고 있다.

우선 김 위원장이 후계자로 내정됐던 1970년대 분위기와 비교할 때 현재는 후계자 내정 움직임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이유로 꼽고 있다.

김 위원장이 후계자로 내정되던 당시에는 북한당국이 내정에 앞서 전 주민에게 김 주석의 후계자가 김 위원장이라는 점을 조직적으로 교양하고 그를 '당 중앙', '친애하는 지도자' 등으로 부르게 하는 사전 정지작업을 대대적으로 진행했기 때문이다.

작년에 사망한 김 위원장의 부인이자 사실상 북한의 퍼스트 레이디었던 고영희씨가 1990년대말부터 자기가 낳은 정철(24)과 정운(21) 중 하나를 후계자로 정하기 위해 측근들과 함께 군부대를 중심으로 `옹립작업'에 나선 적이 있었지만 이 사실을 뒤늦게 안 김 위원장이 즉각 중지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일부 대북 소식통들은 고씨의 사망을 전후로 권력층 내부에서 추진됐던 후계자 옹립 움직임마저 최근에는 거의 사라진 상태라고 주장하고 있다.

후계자 선정에 대한 김 위원장의 '무관심'에다 고씨의 사망으로 구심점을 잃은 뒤로는 권력실세들이 더 이상 후계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이 권력승계작업을 서두르지 않고 있는 배경에 대해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김 주석으로부터 권력을 이어받은 경험과 연계지어 보고 있다.

김 위원장이 이복형제인 김평일 현 폴란드 주재 북한 대사 등과 치열한 권력투쟁을 통해 1974년 김 주석의 후계자가 된 뒤 북한 권력은 10년 간 김 주석과 김 위원장의 쌍두마차 체제를 갖췄고 1980년대 중반부터는 김 위원장에게 장악됐다.

이 같은 경험에서 김 위원장은 후계자가 결정되는 순간부터 권력의 중심이 후계자로 옮겨지고 나중에 자신은 모든 실권을 내놓게 될 수 있다는 레임덕 현상을 우려해 서둘러 후계자를 정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한 대북소식통은 "김 주석과 달리 김 위원장은 권력을 물려받은 경험이 있는 만큼 상징적인 위치에 머물렀던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북 소식통들은 그러나 북한 체제의 특성상 김 위원장의 아들 중 누군가가 후계자로 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삼남인 정운을 주목하고 있다.

정운은 아직 아무런 직책을 맡고 있지 않지만 어머니 고씨의 영향을 받아 일찌감치 권력에 눈을 떴고 세 아들 중 유일하게 김 위원장의 군부대 시찰 등을 동행??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의 요리사를 지냈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씨는 자신의 수기에서 정운의 후계 가능성을 유력하게 거론하면서 김 위원장이 자신과 여러모로 닮은 그를 가장 마음에 들어한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차남 정철은 일부 외신의 보도와 달리 그 어떤 직책도 갖고 있지 않으며 최근에는 호르몬 과다분비증으로 목소리가 여성화되는 등 이상 증상이 나타나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故) 성혜림씨가 낳은 장남 정남(34)은 이혼녀의 아들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는 데다 이미 오래 전에 김 위원장의 마음에서 멀어졌다고 대북 소식통들은 전했다.

일부에서는 김 위원장이 아들을 후계자로 등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도 내놓고 있다.

아들을 후계자를 선정할 경우 봉건왕조 세습이라는 국제적 비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데다 자신이 김 주석의 후계자로 된 정당성까지 훼손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김정일의 후계자는 패밀리 구도로 가지 않을 것이고 3대에 걸친 세습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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