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위원장-언론사 사장단 대화록] "서울 먼저 가야죠"
2000-08-14 12:54

방북 언론사 대표단은 12일 낮 12시부터 3시30분까지 평양시 중국 목란관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오찬을 하고 대화를 나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대로 이뤄진 이날 오찬에는 북한측에서 <>최태복 최고인민회의 의장 겸 노동당 과학교육 비서 <>김용순 노동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 <>정하철 선전선동부 부장 <>김양건 국제부장<>강능수 문화상 <>최칠남 '로동신문' 책임주필(사장) <>차승수 조선중앙방송위원회위원장 등 북한의 당.정.언론계 고위 인사 30여명이 참석했다.

우리측에서는 최학래 한국신문협회 회장, 박권상 한국방송협회 회장을 비롯해 동행중인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 김영용 한국경제신문사장 등 방북 언론사 대표단 56명 전원이 참석했다.

◆통일문제

△김위원장=통일문제는 지금까지 양측 모두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북남 공히 과거 정권 탓입니다.

체제유지를 위해 양측 정부가 통일문제를 모두 이용해 왔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의 결단으로 이뤄진 6·15 선언 이후 많이 달라졌습니다.

남측 언론 비판도 그렇고 야당 비판은 강하지만.

남측은 관료가 그렇게 힘이 있는 것 같지 않더군요.

△방북단=서울 답방은 언제쯤 하시겠습니까.

△김위원장=적절한 시기에 답방하겠습니다.

빨리 해야 할 텐데….

△방북단=남북 정상을 시드니 올림픽에 초청할 경우 시드니에 가시겠습니까.

△김위원장=시드니에 가서 배우 노릇하는 것보다 서울을 먼저 가야죠.

김 대통령에게 빚을 져서 서울을 먼저 가야 합니다

◆대남 언론관

△김위원장=내가 남측 TV를 보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기 3주 전부터입니다.

그리고 남측 신문을 쭉 보다가 8년전부터 눈이 나빠져 지금은 잘 안봅니다.

KBS는 섭섭한게 많지만 이젠 나무라지도 않겠습니다.

과거에는 본의 아니게 그랬을 것입니다.

TV는 화면으로 딱딱 집어서 보여주는 것이라서 거짓말은 안됩니다.

그런데 남측 보도로는 내가 와인만 한잔 먹어도 술을 많이 먹는다고 합니다.

과장을 많이 합니다.

북조선 언론도 한라산 해돋이를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도 경쟁에서 북측 언론이 질 수 있으나 정확성에 관해서는 남측 언론 못지 않습니다.

우리가 훨씬 정확합니다.

TV는 나는 KBS만 봅니다.

◆노동당 규약 개정

△김위원장=노동당 규약도 고정불변의 것은 아닙니다.

언제든 바꿀 수 있습니다.

김 대통령이 북조선에 와서 당대회를 언제 하느냐고 물어 가을쯤 할 생각이라고대답을 했습니다.

김 대통령이 당대회를 열면 할 일이 많겠습니다라고 얘기해서 그렇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런데 준비했던 당대회가 남북정세가 급히 바뀌어 모든 걸 다시 준비하게 됐습니다.

△방북단=규약을 개정한다면 남쪽의 보안법 개정과 연계시켜 정상회담 때 말씀하셨습니까.

△김위원장=아닙니다.

보안법은 남조선 문제입니다.

과거에도 규약은 고쳤으나 45년에 만들어진 강령은 안바꿨습니다.

그런데 이 강령은 해방 직후 40년대 것이어서 과격하고 전투적인 표현이 많이 있습니다.

당 간부들 가운데는 주석님과 함께 일하신 분들도 많고 연로한 분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쉽게 바꿀 수 없습니다.

강령을 바꾸면 이 자리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숱하게 물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강령을 바꾸면 내가 숙청한다고 그럴 것입니다.

남조선 국가보안법은 남조선 법이고 우리와는 상관없습니다.

◆현대 아산문제

△김위원장=현대에 개성관광단지와 공업단지를 꾸밀 수 있도록 개성을 줬는데 이건 6.15선언 선물입니다.

그래서 서울 관광객들을 개성까지 끌어들여야 겠습니다.

공업단지도 해주보다 개성에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했습니다.

관광 공업단지가 생기면 이것 저것보고 사람들이 많이 몰리지 않겠느냐, 이렇게얘기를 해줬더니 정몽헌이 입이 찢어져 갔습니다.

현대는 맨 먼저 우리와 거래를 했고 또 영감님이 1천5백마리 소도 가지고 왔는데 성의를 무시할 수 없지 않겠습니다.

온 김에 부지를 보고 가라고 했더니 보고 갔습니다.

현대에 특혜를 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남관계를 제일 먼저 뚫고 소도 아버지가 가져왔는데....

개성에는 고적들이 많습니다.

고려 왕건과 관련된 것도 그렇고 선죽교도 있고 박연폭포도 있습니다.

서울서 오기도 쉽습니다.

거기가 거기죠.

◆당나귀 고기

△김위원장=(스테이크가 나오자) 이 고기가 하늘소 고기입니다.

당나귀라고 부르던 것을 주석님이 기분 나쁘다고 하늘소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장명수 사장, 남쪽에 남존여비가 있습니까?

△방북단=네. 약간 있습니다. (웃음)

북한에도 남존여비가 있습니까?

△김위원장=많이 있지요.

남녀평등이란 말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남존여비가 있다고 봐야죠.

봉건 유교사상을 얘기 하면 중국보다 한국이 셉니다.

유교 본토인 중국보다 중국이 유교 사상을 수출한 나라에서 오히려 위세가 더 강합니다.

◆막걸리

△김위원장=우리 군대가 전쟁 때 낙동강까지 갔었는데 집집마다 동아리에 막걸리가 있어서 두세 발씩 먹고 비리비리 하는 바람에 전쟁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의사가 술을 많이 안된다고 해서 그만 먹고 포도주를 먹습니다.

그런데 이태리는 우리가 포도주 원조라고 하고 그리스도 수페인도 우리가 포도주 원조라고 하는데,역시 포도주는 프랑스 산이 최곱디다.

◆문화산업

△방북단=만화영화와 컴퓨터 온라인 게임은 국제적 수준입니다.

공동으로 중국에 진출하면 돈을 많이 벌 수가 있습니다.

△김위원장=북남이 함께 영화나 제작물을 만들면 남쪽이 50가져가고 북측이 50을 가져가고,돈이 다 우리 땅에 떨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때문에 다른 나라와 만들어야 합니까.

◆경의선 철도 연결

△김위원장=남측이 먼저 착공하세요.

그러면 즉시 우리도 착공하겠습니다.

상급 회담에서 착공날짜를 빨리 합의하십시오.

내가 대통령과 임동원 국정원장에게도 말했는데 날짜가 합의만 되면 우리는 38선 분계선 2개사단 3만5천명을 빼내서 즉시 착공하겠습니다.

◆서울 답방문제

△방북단=금년 안에 서울을 방문 하시겠나요. (재차 묻자)

△김위원장=언론사 사장들이 톱 뉴스만 빼 갈려고 그러는구만.

나는 이번 가을에 러시아에 갑니다.

푸틴이 간절히 원해서 블라디보스톡 주지사가 푸틴 대통령과 중국 주석 또 나를 초청해서 큰 미팅을 하고 꼭 연설 한 마디씩만 해달라고 해서 가겠다고 약속을 해 줬습니다.

그런데 이 주지사가 푸틴 대통령에게 일본에 대해 자극적인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푸틴 대통령이 블라디보스톡에서 일본에게 큰 소리를 치고 나서 9월에 일본을 그냥 갈 수 있겠느냐고 얘기했죠.

일개 주지사보다 사실 러시아 대통령 초청이 더 중요합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빚을 졌기 때문에 서울을 가야합니다.

국방위원회와 외무성이 토론 중인데 아직 보고를 못받았습니다.

남한과의 광케이블이 결정되면 일초도 안 돼서 남쪽에 알릴 것을 알려줄 수 있게 됩니다.

푸틴 대통령이 한국에 가죠.

가을에 가나요.

◆직항로 문제

△방북단=서울서 평양올 때 북경에 갔다가 다시 돌아 왔는데 무엇때문에 돈 더 들이고 시간 더 걸리고 그렇게 해야 합니까.

곧바로 올 수있도록 할 수 없겠습니까.

△김위원장=직항로 문제는 정부 내에서는 문제 될 것이 없고 군부가 문제인데 군대 문제는 내가 말해야 직항로가 열리게 돼있습니다.

큰 대표단은 직항로로 곧바로 오십시오.

남북모두가 휘발유를 사서 쓰는데 무엇때문에 멀리 돌아서 다니면서 중국에게 돈 써가며 굽신거리나...

직항로를 하면은 비행기에서 특수카메라로 다 시진을 찍는다고 군부에서 반대를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미 인공위성이 다 우리 사진을 찍고있는데 비행기 타고 찍는다는게 문제될 게 있는가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다음부터는 직접 다닐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에너지도 없는 나라에서 남측이나 북측이나 모두 휘발유를 사서쓰는데 무엇 때문에 서해로 나가서 돌아가지고 서울과 평양을 다닐 필요가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우리가 돈을 주고 멀리 돌아다니고 중국에 아쉬운 소리해 가면서 돈을 주나요.

(박장관에게)가수 이미자 김연자 이런 사람을 좀 데리고 오세요.

내가 초면에 쑥스러워 이사람들과 뭐라고 인사를 하나...

구면인 박 장관이 함께 있어야지.

◆김위원장 건강비결

△방북단=어떻게 건강을 유지합니까.

△김위원장=나는 사무실에 앉아서 우울하게 보내지 않습니다.

인민 속에 들어가 노래하며 즐겁께 함께 보냅니다.

간부들을 만나면 틀거리를 합니다.

간부들을 보면 신경질나요.

이 사람들은 고정된 틀 속에서 잘 변화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평소에 수영도 하고 말도 일주일에 한두번 탑니다.

시속 60km까지 달립니다.

11살부터 하루 약 8km이상씩 40-60km 시속으로 말을 타 왔습니다.

그런데 보통 말을 내가 타면 다리가 부러질 것입니다.

러시아의 올로브 종자가 나에겐 좋습니다.

수면시간은 하루 네시간 정도입니다.

나는 모든 업무보고를 새벽 3시까지 받아 반응을 다 종합해서 주석님께 보고를드리고 나면 새벽 4시가 됐었습니다.

이런 조직비서 생활을 20년간 해와서 그게 버릇이 됐습니다.

◆통일시기 문제

△방북단=통일시기는 언제쯤 될까요.

△김위원장=그건 내가 맘 먹을 탓입니다.

적절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지요.

이런 표현은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말입니다.

◆판문점에 대한 시각

△김위원장=판문점은 50년 산물인데 개성 동업단지도 조성이 잘 되고 하면 우리가 새로 길을 내야 합니다.

판문점은 50년도 산물로 열강의 각축의 상징인데 판문점은 그대로 남겨 놓고 새로운 길을 경의선 따라 내야 합니다.

조선문제는 민족끼리 동조해서 새 길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경의선 철길 따라 개성에 새 길이 나는 의미가 있는데 언론도 여기에 동참해 주세요.

그리고 금강산과 설악산 관광을 연결하는 것은 2005년에 할 일입니다.

◆남측언론보도

△김위원장=남측 텔레비전 대담을 내가 보는데 KBS가 어떨 때 보면 북남관계 일이 있자마자 금새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찬성이냐 반대냐 라고 얘기들을 하는데 내가 보면 북조선 실정 전혀 모르고 책만 보고 딴 소리를 하더군요.

데려오시오.

쭉 데려와서 이런 사람들이 북조선을 보게 해야 합니다.

북에 뿔난 놈들 없으니 와서 봐야지요.

◆금강산과 현대

△김위원장=금강산에 있는 절들이 다 부서졌습니다.

정몽헌이가 내금강 관광권을 달라고 요구를 해와서 절을 다시 잘 지어주면 내금강까지 연장해 준다고 했죠.

◆박정희 전 대통령

△김위원장=박정희 전 대통령 평가는 후세들이 해야지 동참자들이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 그 환경에서는 유신이고 뭐고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위 민주화도 무정부적 민주화가 돼서는 곤란합니다.

◆미.일 수교문제

△방북단=미국과의 수교는 언제쯤 될까요.

△김위원장=내말 떨어지면 내일이라도 미국과 수교합니다.

미국이 테러국가 고깔을 우리에게 덮어씌우고 있는데 이것만 벗겨주면 그냥 수교합니다.

그런데 일본과의 수교문제는 복잡합니다.

과거문제도 있고 청산해야할 문제도 있지요.

일본이 부당한 해명을 요구하는데 그렇다면 명치유신때부터 따져야죠.

일본은 일제 36년을 우리에게 보상해야 합니다.

나는 자존심 꺾이면서 일본과 수교는 절대로 안 합니다.

작은 나라일수록 자존심이 있어야 합니다.

영사 대사 관계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나는 주권국가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켜나갈 것입니다.

미사일 개발

△김 위원장=로켓 개발의 조상은 소련입니다.
러시아가 로켓 원조 국가인데, 미국이 NMD다 뭐다 해서 소련을 제쳐놓고 우리만 미사일을 개발한다고 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푸틴 대통령은 당연히 반대지요.
푸틴이 서울 가게 돼 있는데, 서울 가면 잘 물어 보세요.
남측 언론이 나를 정신분열증 환자라고까지 했지요.
미사일 문제는 내가 만든 것입니다.
나라가 작을수록 자존심을 굳게 세우고, 열강 대국에 맞서야 합니다.
북남 인구 합쳐봤자 1억도 안되는데, 그럴수록 명예를 중히 해야지요.
대국에 비굴하거나 아첨하면 절대로 안됩니다.
남쪽의 경제 기술과 북쪽의 정신을 합작하면 강대국이 됩니다.
일본을 이기고 36년간의 못받은 보상도 받을 것은 받아야 합니다.
사람에 따라서 바늘로 찔러도 아프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 말도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큰 나라들을 찾아 다니나요.
내가 평양에 앉아 있어도 여러 열강에서 나를 찾아 오지요.
푸틴 대통령은 미국 정책에 동의하지 않고 있지요.
로켓 개발의 조상이 러시아인데, 미국이 그것을 하지 못하게 하면 되나요.
미국은 로켓 개발 기술을 소련에서 가져가 놓고 이제 와서 러시아는 개발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군력(군력)

△김 위원장=내 힘은 군력에서 나옵니다.
내 힘의 원천으로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모두가 일심단결하는 일이고, 두번째가 군력입니다.
외국과 잘 되려고 해도 군력이 있어야 하고 외국과의 관계에서 힘도 군력에서 나오고 내 힘도 군력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와 친해도 군력을 가져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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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리포트의 '한국대사관을 위한 특별 보고서'

(워싱턴=연합뉴스) 박노황 특파원 = 미국 워싱턴 외교가의 정보지인 넬슨 리포트가 지난 24일 e-메일을 통해 가입자들에게 배포한 '주미 한국대사관을 위한 특별보고서’는 조지 부시 행정부 및 의회의 한반도 정책 관련자들의 역학관계와 한반도 관련 기사를 다루는 미국 기자들의 성향 등을 분석하고 있다.
다음은 주요 내용.

부통령실북한과 동등한 조건에서 진지하게 협상하느냐는 것등을 포함한 한반도와 관련된 모든 결정은 딕 체니 부통령의 손에 달려있다. 체니 부통령은 자신의 동조자들외에는 바깥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으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와 중앙정보국(CIA) 등의 관리들과 협의해 독자적으로 판단을 내린다. 그의 오른팔인 루이스 리비 비서실장, 외교정책 보좌관인 스티브 예이츠 등 2~3명 정도가 측근이다.

백악관부시대통령에게 한국에 관한한 체니,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스티브 해들리 국가안보 담당 보좌관, J.D. 크라우치 부보좌관 등 외에 다른 비밀 브레인은 없다.

해들리 보좌관은 레이건 행정부때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리처드 앨런 씨와 제임스 릴리 전 주한 미국대사의 의견을 듣는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는 그의 자문단에서 벗어나 있다.

마이클 그린 선임국장은 그레그 전 대사, 돈 오버도퍼 존스홉킨스대 교수 등에게 자문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들의 자문이 정책에 반영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린 선임국장과 빅터 차 선임보좌관은 스콧 스나이더 전 아시아재단 서울사무소장, 고든 플레이크 맨스필드 태평양문제연구소장 등 2명의 젊은 외부 전문가와 마커스 놀랜드 미국 국제경제연구소 연구원의 의견을 때때로 듣는다.

NSC 비확산담당인 봅 조지프 씨가 국무부의 존 볼턴 군축담당 차관 자리로 옮긴 것은 한국에 좋은 소식이다. 그는 볼턴 차관 및 부통령실과 손잡고 전향적인 한반도 정책을 추진하려는 그린 선임국장의 시도를 번번이 차단해 온 인물이다.

국무부라이스 국무장관은 로버트 졸릭 부장관과 로버트 젤리코 고문(전 스탠퍼드대 동료), 니컬러스 번스 차관, 스티븐 크래스너 정책기획실장, 크리스토퍼 힐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 등과 같은 '브레인 트러스트'를 갖고 있다.

졸릭 부장관을 제외한 나머지 관리들은 최근 아시아 동향을 잘 알지 못하는 점을 동아시아 담당 베테랑 관리들은 우려하고 있다.

라이스 장관과 젤리코우는 '독일 통일'에 관한 책을 공동 저술했는데, 라이스는 한국 통일을 이와 유사하게 생각하는 것 처럼 보인다.

동아태 수석 부차관보에 한국 전문가인 리비어 에번스 대신에 고작 20년전 한국을 경험것 밖에 없는 캐슬린 스티븐스를 들어 않히는 등 힐 차관보가 라이스 장관의 재가아래 동아태국을 물갈이 한 것은 우려스럽다.

그러나 힐 차관보나 스티븐스가 한국 및 일본 전문가인 제임스 포스터 한국과장의 도움을 받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또한 '뉴욕 채널’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조셉 디트라니 대북협상특사가 '한국에 대해 반대하는' 그룹(딕 체니 그룹)의 전적인 지원을 받는 점도 한국에 좋은 소식이다. 그만큼 힘이 있다는 얘기다. 빌 클린턴 행정부 때의 잭 프리처드 특사는 발언권이 별로 없었다.

차기 주한 미국 대사로 지명될 알렉산더 버슈보 러시아 대사는 차분한 비확산 전문가이다.

국방부국방부내 한반도 정책에 직접 관여하고 세부적인 논의를 하는 일명 '리틀 테이블(Little Table)’의 고정멤버는 대변인인 로런스 디리타, 더글러스 페이스 차관, 피터 로드먼 차관 및 리처드 롤리스 부차관이다.

대표적 한국통이자 한국어에 능통한 롤리스 부차관은 자체적으로 코리아 팀을 운영하며 세부적인 사안들을 챙긴다. 마이클 피니건 육군 소령이 주한미군 재편 문제 등을 맡고, 스콧 피니 북한과장이 북한 쪽을 다룬다. 그외 미 국방대의 제임스 프리스텁 박사와 국방분석연구소의 한국계 케이티 오(오공단)씨 등도 자문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언론 창구로는 뉴욕타임스의 데이비드 생어 기자와 워싱턴 포스트의 글렌 케슬러 기자를 활용한다. 일본 도쿄에 주재하고 있는 프리랜서 리처드 핼로란 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의회하원은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부터 행정부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 강한 불신을 품어 왔다. 1994년 북-미 제네바합의에 대한 강한 의구심, 그리고 공화당 출신 뉴트 깅리치 의원이 하원의장으로 선출된 것이 직간접적인 이유였다.

당시 행정부가 중국 및 북한 정책 등에 대해 의회에 숨기는 것이 있다고 믿었던 하원은 CIA, 국방부, 국무부, 백악관 NSC 인사들로 일명 '블루 팀’이라는 비공식적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현 하원 내 한반도 정책 관계자들은 이같은 정서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상원에서는 리처드 루거(공화당), 조셉 바이든(민주당) 의원이 '골칫덩어리'급에 속한다. 이들의 보좌관인 케이스 루스 씨와 프랭크 자누지 씨는 북한을 두 번 방문해 상원외교위원회에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언론미국내 영향력있는 전국 뉴스 매체 종사자중 한국 전문가는 은퇴한 오버도퍼 교수(전 워싱턴 포스트)와 새너제이 머큐리 뉴스의 댄 스나이더 밖에는 없다.

한국어를 할줄 알고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 한국 대사(리처드 스나이더)의 아들인 그는 한국 문제를 깊이 이해하고 동정적이며 부시 행정부의 정책에 매우 비판적이다. 그렇지만 그린 국장과 차 보좌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만큼 '신중한 플레이어'이다.

생어 기자는 분석하기 어려운 케이스이다. 지칠줄 모르며 명석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신문의 1면에 실리기 위해 요구되는 것에는 매우 냉소적이다. 한국정책과 관련, 그는 끊임없이 훼손시키는 그리고 종종 맞지 않는 기사들을 "고위 행정부 관리가 말했다..."는 식으로 쏟아낸다. 데스크가 요구하기 전에는 자신의 기사를 약화시킬 것 같은 '반대적 입장의 전문가'들을 찾지 않는다.

워싱턴 타임스의 빌 거츠 기자는 '폭탄 투척자'로서, 중국과 북한에 대한 온건정책을 반대하는 반공 강경론자들의 연합인 '블루팀'의 에이전트 역할을 기꺼이 한다. 생어가 생략함으로써 부정직하다면, 거츠는 동조함으로써 부정직하다.
2005/06/3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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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창으로 본 오늘의 북한>-① 대외관계

※ 편집자주: 연합뉴스는 6.25전쟁 55주년을 앞두고, 북핵 위기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을 감안, 미 우드로 윌슨센터 냉전국제사프로젝트(CWIHP)가 옛 소련과 동구권, 중국 등 과거와 현재의 공산권에서 수집, 분석연구하고 있는 각종 기록 가운데 북한관련 기록을 모은 '뉴 에비던스(New Evidence)'의 주요내용을 소개한다.

CWIHP의 한반도 담당 캐스린 웨더스비 연구원은 최근 워싱턴 포스트 기고문에서 "현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 사고방식을 분석하기 위해 수십년전 아이젠하워 행정부 기록을 볼 필요는 없지만, 북한은 그동안 김일성(金日成) 부자에 의해서만 통치돼 왔으며, 이들 기록은 놀라울 정도의 부자 정권간 지속성을 보여준다"고 폐쇄사회인 북한의 행태 분석과 예측을 위해 비밀해제된 북한관련 과거 기록을 들여다볼 필요성을 강조했다.

CWIHP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때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 소장 한국전쟁 관련 기록 약 200건을 한국측에 넘겨주긴 했으나, 이 문서들은 편집된 것이고 원전은 아니라며, 냉전후 빛을 보기 시작한 북한관련 기록들에 대한 연구가 시작 단계라고 지적했다.

연합뉴스는 CWIHP가 영역한 과거 북한 관련 원전가운데 오늘의 북한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내용을 ①대외관계 ②대남관계 ③만성 경제난 ④사회상 ⑤공산우방의 대북 인식 ⑥재일교포 북송 6개 주제로 나눠 삽화(揷畵) 형식으로 소개한다.

이 가운데 '베른트 쉐퍼 논문'과 '선 즈화(Shen Zhihua) 논문'은 각각 독일과 중국 학자인 두 사람이 동독과 중국의 기록을 바탕으로 쓴 논문을 가리킨다>>

(워싱턴=연합뉴스) 윤동영 특파원 = 북한 김일성(金日成) 주석은 막역한 친분관계를 맺은 동독 에리히 호네커 공산당 서기장과 3차례 정상회담마다 북한 내부의 어려운 사정을 털어놓는 등 솔직한 대화를 나눴다.

특히 1984년 김일성이 동독을 방문, 2번째 가진 정상회담에선 "중국이 사회주의에서 이탈하는 것이 우리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이라고 말해 당시 개방.개혁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중국의 변화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와 관련, 김일성은 "인구 10억인" 중국과 무력충돌 위기가 1969년 있었던 사실도 설명하면서 "우리의 처지 때문에 참아야 했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80년대 "미국, 일본, 한국의 3각 군사동맹" 가능성에 대한 경계심도 표출하면서 이를 막기 위한 "대일 협력"을 강조하기도 했다.

아들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은 핵과 미사일 문제를 갖고 세계와 대결함으로써, 중국으로 하여금 한반도 비핵화 원칙에서 때때로 자본주의 국가들 편에 서도록 만들고 있고, 일본에 대해선 미국과 미사일방어체제(MD) 및 확산방지구상(PSI)에 적극 협력토록 만듦으로써 아버지가 가장 경계한 대외관계를 자초한 셈이다.

그러나 우드로 윌슨 센터 냉전국제사프로젝트(CWIHP)의 한반도 담당 캐스린 웨더스비 연구원은 동구권의 각종 외교문서에 나타난 기록을 바탕으로 김일성도 궁극적으론 중국과 소련을 못믿어 체제보장을 위해 독자적 억지력으로 핵무기를 추구했으며 그게 김정일로도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소련, 중국, 동구권 외교문서에서 나타난 북한과 중국의 혈맹관계 이면의 북한의 대중 갈등과 의심ㆍ불신은 최근 핵문제와 관련, 중국의 대북 영향력이 외부에서 보는 만큼 크지 않다는 중국과 미국 일부 전문가들 주장과 상통하는 면도 있다.


◇대중 관계


▲80년대 사회주의 이탈 우려 = (1984년 5월31일 김일성과 호네커간 회담 동독측 속기록. 호네커가 중국 정세에 관해 물은 데 대한 김일성의 답변)
호요방이 5월 북한을 방문했다. 오랜 친구인 등소평이 1982년 4월 나의 70회 생일 때 비공식 방문해 호요방을 신임 당 총서기라며 소개했다. 첫 인상이 좋았다.

호요방은 (1982년 방북 때) 중국은 진정 소련과 관계개선 의사가 있다며 소련 지도부에 전해달라고 말했다. 그는 올해도 이 점을 재확인했다.

나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 체르넨코에게 중국이 전쟁을 원치 않으며, 경제에 대한 문화혁명의 영향을 극복하는 데 모든 자원을 쏟아야 하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의 대미 관계개선은 소련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고 이미 모택동과 주은래도 대미 국교수립 때 나에게 말했다. 그들은 일본 및 미국과 만날 때마다 유일한 목적은 발전된 기술과 자금을 빌리기 위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왜 저 중요한 중국 시장을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넘겨주나. 중국을 자본주의 국가들에 맡겨두면 중국이 다시 유사 식민지가 될 위험이 있다.

우리는 중국과 접경하고 있고, 미국 및 일본과 대적하고 있다. 그때문에 우리가 가장 두려운 것은 중국이 사회주의를 고수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중국이 계속 사회주의 길을 계속 따르도록 해줘야 한다.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은 중국과 경제관계를 발전시키고 중국에 투자도 해야 한다. 내가 소련에 핵발전소 건설 지원을 요청할 것이라고 호요방에게 말했더니 호요방은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구입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며 환영했다.

▲60년대 무력충돌 위기 = (같은 속기록. 김일성의 말) 1969년 우수리강에서 중ㆍ소분쟁이 있었을 때, 시골에서 정양하고 있는데 보안성상이 전화로 중국군이 두만강을 도하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필요하면 우리 땅에서 (중국군을) 치도록 쏘지 말고 놔두라고 지시하고 우리 군을 파견했다. 그러자 중국군은 철수했다. 중국은 우리를 5년간이나 수정주의라고 비난했으나 우리의 처지 때문에 참아야 했다.

(1977년 12월6일 김일성과 호네커간 회담 동독측 보고서. 김일성의 말) 문화혁명기엔 중국과 관계가 험했다. 북한은 북쪽(중국)과 남쪽 양쪽에 대규모 군대를 배치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문화혁명이 끝난 이래 중국과 관계 개선 노력을 했다.

(베른트 쉐퍼의 논문) 북한은 1961년말 중국의 목표가 북한을 종속국(dependent)으로 만드는 데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중국이 대북 원조의 용처 감시를 위한 위원회 설치를 요구하자 북한 지도부내에 반중 역풍이 일었다.

▲6.25때 김일성과 팽덕회 언쟁 = (선 즈화 논문. 1951년 1월10,11일 대화 기록) 중국의 팽덕회 인민지원군 총사령이 1951년 1월 서울을 재점령한 뒤 1월8일 재정비와 보급을 위해 진격 중지령을 내리자 북한은 극도의 불만을 표시했다.

1월11일 김일성, 박헌영, 팽덕회가 회동, 격론을 벌이다 김일성이 미군은 철수 명분을 찾고 있으므로 밀어붙이면 될 것이라며 신속한 남진을 거듭 요구하자 팽은 "당신들은 꿈꾸고 있다"며 6.25 개전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던 김일성의 오판을 맹성토했다.

"당신은 미국이 결코 파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군이 참전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지금 또 미군이 분명히 철수할 것이라고 얘기하는데 철수하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귀하는 그저 빨리 이기기만 바랄 뿐 구체적인 준비는 하지 않고 있다.

이는 전쟁만 연장시킬 뿐이다. 요행수만 바라며 인민의 운명을 갖고 도박하고 있다. 준비가 되기전엔 단 1개 사단도 남진시킬 수 없다. 내 임무를 제대로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내 목을 치고 군법회의에 회부해도 좋고 죽여도 좋다"


▲6.25 때 합동사령부 지휘권 갈등 = (선 즈화 논문) 북ㆍ중관계가 '입술과 혀의 관계'로 묘사돼 왔으나 실제론 6.25전쟁 중에도 갈등이 고조됐었다. 중국은 대북 지원 용의가 있었으나 북한이 유엔군의 38선 돌파로 어쩔 수 없게 될 때까지 안 받아들이려 한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1950년 4월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은, 중국의 지원도 받으라는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5월 베이징을 비밀 방문, 남침 계획을 설명했으나 모택동의 북한 접경지 중국군 배치, 무기와 탄약 제공 등의 제의에 사의를 표시하면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한은 6월25일 남침 개시를 중국에 사전 통보하지 않아 중국측은 외신을 통해 알았고, 북한은 중국 대사에게 전황 정보를 차단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후 중국이 다시 지원을 제안하자 북한은 소련의 재촉을 받고도 한참 후인 9월28일에야 정치국회의를 열어 수용했다.

중국군이 참전한 후에도 북한은 중국과 합동사령부 지휘권을 놓고 과거 중국에 대한 조공국으로서 오랜 역사를 의식, 주권에 대한 우려 때문에 중국측과 갈등을 빚다가 소련의 개입후에야 타결했다.


◇대일 관계


▲나카소네 "미국의 대포밥 안될 것" = (1984년 5월31일 김일성과 호네커간 회담 동독측 속기록. 김일성의 말) 호요방은 일본 방문 결과를 매우 자세히 설명했었다. 나는 중국과 일본간 관계 정상화를 지지한다.

일본에는 군국주의 부활과 미국과의 동맹을 열망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일반적으론 경제적 이유로 재무장에 관심이 없다. 일본의 모든 단체는 재무장에 반대한다.

일본에서 누가 권력을 잡느냐에 달려 있다. 호요방에 따르면 나카소네는 일본이 미국을 위한 대포밥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이 미국과 헤어질 수는 없겠지만, 종복이 되기를 원치는 않는다는 것이다.

미래를 위해, 나카소네가 총리직을 유지하느냐, 아베가 총리가 되느냐가 중요할 수 있다. 중국은 아베가 더 나은 선택안이라고 생각하고 아베에게 접근하고 있다.

일본과 협력해 일본에서 군국주의가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나는 때로 일본 군국주의를 혹독하게 비판하지만, 어쨌든 일본과 협력해야 한다. 무엇보다 미국, 일본, 한국의 3각 군사동맹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중국측에 20억달러 지원을 약속했다. 중국 경제에 좋은 일이다.


◇대소 관계


▲분단 소련 책임론 = (1959년 9월10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8월20일 헝가리 대사 주최 칵테일 파티에서 이추연(Yi chu-yon) 부총리와 소련 공사간 대화) 이춘연이 남북통일이 언제될 것 같으냐고 묻자 소련 공사는 뜬금없는 질문에 놀란 표정으로 평화통일이 역사적으로 짧은 시일내에 일어날 것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이는 몇년내가 아니라 사회주의의 전 세계적인 승리 과정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뜻이었다.

우리(헝가리 대사)가 보기에 북한 지도층은 한반도 분단이 소련 때문이므로 통일도 소련 책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소련 공사도 이를 의식해 그런 대답을 한 것이다. 즉 한반도 분단은 (소련 때문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어난 객관적인 역사적 사건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련이 우릴 버릴 때를 대비해야" = (이하는 소련의 스탈린 격하운동과 동서 평화공존론 등에 대한 북한의 반발 사례들이다. 1962년 8월27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6월말 타스통신 특파원은 북한의 자력갱생 슬로건 배경에 대해 노동당 관계자가 개인숭배 유지를 위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우리가 들은 정보로는, 김일성은 3월 당 중앙위전체회의에서 "우리는 소련이 알바니아를 버린 것처럼 우리를 버릴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1963년 5월11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북한 당국은 소련과 동구권 대사관의 전화를 도청하고 우편물 배달을 지연시켰다. 중국 외교관들에겐 채소와 고기를 공급했으나 소련이나 헝가리 외교관들에겐 공급하지 않았다.

(1963년 10월2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소련 대사는 최근 4차례 북한 대학생들이 소련 대사관에 정치망명을 신청했으나 (북한의 공작일 가능성이 있어) 거부했다고 말했다. 한 차례는 경찰의 도움을 받아 끌어내기도 했다. 소련 대사는 도발행위라며 북한 당국에 공식 항의를 제기했다.

(1964년 3월10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2월초 후루시초프가 이임하는 북한 대사를 면담한 자리에서 한 말. 북한 주재 소련 대사로부터 들은 내용) 김일성은 남한에 강력한 저항운동이 있다고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었는가. 그런데 월남과 달리 남한에선 왜 그렇게 조용한가.

(북한 대사가 주한미군의 원자무기에 남한 주민들이 겁먹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자) 현재 한국엔 핵무기가 없다. 서독에 갖다 놨다. 한국에 있다 하더라도 그게 이유가 못된다. 직접 충돌에선 원자무기를 사용못한다. 폭발과 후속 방사능 오염이 자신들에게도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북한이 다시 남한을 공격하면,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는 점은 가망성(probable) 이상이다. (북한측에 대남 평화공존 노선을 택하라고 주문한 것. 보고서는 북한 대사가 후루시초프의 "다시 남침"이라는 용어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고 특기했다)


▲황장엽 등장 = (1963년 1월7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한 소련 외교관은 황장엽을 포함해 김일성의 "두뇌 집단(brain trust)"을 "정치 게슈타포"라고 불렀다.

<과거의 창으로 본 오늘의 북한> ②대남관계

(워싱턴=연합뉴스) 윤동영 특파원 = CWIHP의 기록들을 보면, 6.25 전쟁 이후 소련과 그에 동조하는 동구 위성국들은 정치ㆍ경제적으로 북한의 대남 체제경쟁을 지원하면서도 후루시초프 이래 동서 평화공존 원칙에 따라 북한의 대남 침략이나 도발에 대해선 "모험주의"라며 고삐를 틀어쥔 것으로 나타난다.

북한은 60년대 초엔 전쟁 대비 군량미 비축을 위해 주민들에 대한 쌀 배급량을 절반으로 줄이고 70년대까지도 호전적인 군사도발 행위를 하는 등 간헐적으로 "모험주의" 성향을 보였으나 소련의 금지선을 넘지는 못했다.

특히 김일성은 6.25전쟁 이래 주한미군의 핵공격 가능성을 항상 의식하고 핵기술과 시설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길을 백방으로 알아보는 가운데 60년대만 해도 산악지형이 핵공격 위력을 반감시켜줄 것이라는 식으로 큰 소리 치다 80년대 들어선 핵폭탄 2개로도 북한을 파괴할 수 있다고 토로하는 변화를 일으켰다.

▲북한의 4.19 인식 = (1960년 6월27일 헝가리 외교부 고위 관계자가 북한 공사를 불러 남한의 4.19에 관해 의견을 물은 뒤 장관에게 보고한 북한 공사의 설명) 학생과 도시 프티부르조아가 주도했고, 노동자와 농민은 참여하지 않았다.

온갖 정당이 창당되고 있으나 지금까지 조선노동당과 북한 정부는 남한의 어떤 정당도 지원하지 않은 채 면밀하게 주시하고 있다.

▲조선노동당 대남부서 신설 = (베른트 쉐퍼 논문) 김일성이 1960년 5월 방중, 모택동을 만난 후 8월 소련을 방문하자 니키타 후루시초프는 김일성이 중국을 본뜬 천리마 운동을 중단하면 더 많은 경제지원을 할 것을 약속하고 동독처럼 남한에 유연한 접근법을 취할 것(평화공존)을 권고했다.

이에 따라 노동당은 남한 담당 특수부서를 설치하고 남한의 사회대중당(Socialist Mass Party)에 재정지원을 했다.(헝가리 주재 북한 공사의 설명과 달리 그후 북한이 당시 남한의 사회주의 이념정당에 접근했음을 말해준다)


▲미, 장면 정부 의심 = (1960년 11월30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미국의 지배 서클 일부는 장면 정권을 완전 신뢰하지 않고 다소 우려하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은 남한 당국이 판문점에서 북한 대표와 협상하려면 유엔사령관의 사전 동의가 필요하다고 천명했다.

▲북, 5.16 초기 긍정 평가 = (1961년 5월20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1961년 5월16일 북한 외교부 부부상 김태휘는 외국 대사들에게 박정희의 쿠데타는 (북한에) 유리한 상황전개라고 말했다.

일부 미국의 관측통처럼, 조선노동당 지도부 일각에선 1948년 여순반란사건과 관련, 이승만 정권에 체포됐던 박정희를 좌익으로 간주했다. 박정희의 초기 정책이 이런 견해를 확인하기도 했다.

(1961년 6월17일 헝가리 외교부 비망록) 북한은 비상상황에 대비해 노동당에 경계태세령을 내렸다. 남한 상황이 다소 불안정하다고 여겼다. 6월15일 백종원(Paek chong-won)은 박정희와 장도영간 갈등을 친일 대 친미파 장교들간 충돌이라고 불렀다.

(1961년 9월24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북한은 헝가리 언론에 남한 지도자들을 너무 심하게 비판말 것을 요청했다.(헝가리측 기록을 토대로 '김일성과 소련관계' 논문을 쓴 헝가리 학자 발라즈스 스잘론타이는 당시 남북간 비밀회담이 열린 때문이었으나 이 회담이 실패로 끝나자 김일성은 인내심을 잃었다고 분석)
(10월17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10월2일 유창식은 박정희가 남쪽의 통일 세력을 탄압했기 때문에 김일성은 남북협력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11월15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박정희의 방미이후 북한 언론은 박정희의 이름을 직접 들어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남 군사력 인식 변천 = (1963년 2월15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1962년 12월 당 중앙위에서 통과된 국방정책 결의에 따라 참호와 방공호 구축을 위한 대규모 공사가 전국에서 진행중이다.

소련 대사로부터 듣기로는, 김일성은 한국의 산악지형은 핵전쟁에 유리하다. 산들이 핵폭발력을 크게 줄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을 대파하기 위해선 핵폭탄이 많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1984년 5월30일 방독한 김일성과 호네커간 회담 동독측 속기록. 김일성 발언) 주한미군은 핵무기도 갖고 있다. 우리가 군사적으로 우위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들은 무기를 더 증강하기 위해 우리가 강한 것처럼 구실을 대고 있다. 우리가 그들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한을 계속 점령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

(1986년 10월18-21일 방북한 호네커와 김일성간 회담 동독측 보고서. 김일성 발언) 북한은 남한을 공격할 의도도, 능력도 없다. 1000기 이상의 미국 핵탄두가 남한에 있다. 겉으론 방어용이라고 한다. 그중 2개만으로도 북한을 파괴하는 데 충분하다. 고르바초프 동지의 블라디보스토크와 레이캬비크 제안을 지지한다. 소련과 미국간 관계 진전이 한국 문제를 푸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1988년 7월 동독 군사 대표단 김일성 면담 보고서. 김일성 발언) 북한은 남한에 있는 미군의 많은 핵무기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 때문에 이미 주한미군 철수와 핵무기 철거, 핵에서 자유로운 평화지대를 제안했다.

▲서울올림픽 대항 평양축전 고통 = (1988년 5월16일 동독 방북 대표단의 김일성 면담 보고서. 김일성 발언) 당과 나라 전체가 1989년의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위한 건설에 주력하고 있다.매우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든다. 소도시의 건설사업은 당분간 중단했다. 모든 것은 13차 축전 준비와 성공을 위해 이뤄지고 있다.

▲김일성 "미, 전두환 교체 루머있다" = (1984년 5월30일 김일성과 호네커간 회담 동독측 속기록. 김일성 발언) 주한미군 사령관은 베트남전 때 전두환과 함께 싸운 사람이다. 전두환은 레이건이 출마했을 때 대규모 선거자금 모금 행사들을 열어줬다. 레이건이 당선되자 전두환을 초청했다. 주한미군을 증강하기 위한 것이다.

전 남한 주민과 가톨릭도 전두환 정권에 격렬하게 투쟁하고 있다. 미국이 전두환을 교체하려 한다는 루머가 있다. 남한의 현 정세가 전두환에 반대하는 투쟁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창으로 본 오늘의 북한> ③만성적 경제난

(워싱턴=연합뉴스) 윤동영 특파원 = 북한은 주체와 자력갱생 명분에도 불구하고 소련을 비롯해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에 경제를 크게 의존했을 뿐 아니라 90년대 대기근 이전 50년대에도 아사자와 유랑자가 속출하는 등 경제난과 식량난이 만성적이었음이 이들 사회주의권 외교문서 곳곳에서 드러난다.

특히 60년대말까지는 북한 경제가 남한 경제보다 우월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적어도 일반 주민의 생활 수준에선 그렇지 않았다는 북한 주재 동구권 외교관들의 '증언'이 눈에 띈다.

동독측 기록을 토대로 북한과 동독간 관계에 대한 논문을 쓴 베른트 쉐퍼는 "1962년 10월 김일성은 '모든 것을 우리 힘으로 만든다'고 강조했지만, 이는 일반주민과 하급당원 용이고, 지도부는 실제론 외국으로부터 경제원조를 얻는 문제에 관한한 매우 실용주의적이었다"며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서든 자본주의 국가에 대해서든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얻어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지적했다.

북한이 동구권에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서도 평양주재 동구권 공관들에 대한 각종 비용 청구를 인상하자, 화가 난 체코 대사는 본국에 프라하 주재 북한 공관에 같은 액수를 물릴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동구권 의존 경제 = (베른트 쉐퍼 논문) 북한은 50년대 사회주의 국가들과 구상무역을 통해 지급해야 할 재화의 15-20%를 못주고 있었다.

북한은 그러나 1956년부터 소련이나 동구로부터 원조를 받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외국의 도움없이" 경제적 성공을 달성했다고 주장했다.

▲만성적 식량난 = (1955년5월10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식량 상황은 4월 더욱 악화됐다. 과도한 강제공출때문에 농촌에서 비축곡식이 동나고 있다. 쌀은 자유시장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국가와 공공기관 종사자와 가족들만 쌀을 배급받고 있다. 농촌에서 쌀 구하기가 불가능하다. 동북(함경북도) 지방이 가장 심각한 상황이어서 정부가 그곳에 쌀 10만t을 공급했으나 부족하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나가지만, 노인과 여성들은 형편이 다소 나은 남쪽으로 유랑하다 너무 쇠약해져 말그대로 굶어죽는다. 이렇게 죽었거나 죽기직전의 사람 20명이 4월초부터 사리원에 헝가리가 지어준 병원에 후송됐다.(보고서 작성 시점을 보면 한달 사이에 20명)
검시 결과 사인은 아사로 나왔다. 대부분은 유랑민이었으나 사리원 주민 1-2명도 포함돼 있다. 이들은 부양가족과 노인들이다.

도시의 노동 주민은 최소한의 배급을 받고 있으나 가판점 등 비국가 부문 노동자 가족은 어려운 상황이다. 그 결과 거지, 특히 어린이 거지 수가 급증했다. 강도 등 범죄가 크게 늘었고 치안이 악화됐다.

당국은 이런 상황을 감춘다. 이때문에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다. 노동신문 4월26일자는 이런 난국에 관해 기사를 썼다가 회수됐다.

5월초인 현재는 일부 개선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소련과 중국이 대북 곡식 수송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련대사 "남한 주민 생활 개선" = (1955년 8월17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헝가리 대사가 신임 소련 대사를 답방해 나눈 대화. 스탈린 사후 소련의 변화를 반영한 북한 비판이 보인다)
헝가리 대사 = 우리가 입수한 정보로는 남한 주민 형편이 나쁘다. 실업자가 200만명이 넘는다.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다. 각종 세금과 공출 할당제 때문에 농민 계층이 어렵다. 정부는 곡물을 싼값에 산다. 북한의 정보통과 남한 언론보도, 또 중립국 정전감시위원들에게서 들은 얘기다.

소련 대사 = 남한은 비료와 소비재를 대량 미국으로부터 원조받아 주민 생활이 어느 정도 개선됐다. 게다가 남한은 2모작이 경제사정에 도움된다. 소련도 북한에 소비재를 지원하겠다고 제안했으나 북한은 이를 거부하고 중공업 분야 장비만 달라고 요구하고 소련의 소비재 산업 육성 권고도 거부했다.

헝가리 대사 = 미국은 (원조를 하는 대신) 원료와 농산품을 대량 남한으로부터 일본으로 보낸다. 원료가 부족한 일본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미국은 이들 상품을 남한으로부터 매우 싼 값에 구매한다.

소련 대사 = 북한 동지들이 주민들의 물질적 여건 개선엔 큰 신경을 쓰지 않는것 아니냐. 북한 동지들이 심각한 실수를 하고 있다. 외교단이 어떻게 이런 문제를 북한 동지들과 논의하지 않느냐. 그랬다면 북한 동지들이 자유시장 폐지 등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헝가리 대사 = 외교단이 논의는 했으나 단체로 북한에 제기하지 못했다. 북한 동지들이 자신들의 실책에 매우 예민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말했어도 올바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 대사 = 북한은 주민의 생활여건 개선에 주된 관심을 기울였어야 한다. 남북한 주민들은 서로의 사정을 잘 안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인민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해야 하는데 북한 동지들은 모든 에너지를 중공업에 기울였다.

헝가리 대사 = 헝가리가 경공업과 다른 생활여건 개선 상품생산용 장비를 지원할 수 있는데도 북한 동지들은 헝가리에도 중공업과 공장 건설을 위한 장비만 요청했다. 북한 동지들이 계측기 공장 시설을 요청하기에 나는 농담으로 "먼저 잴 게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동구에서 일어난 난동도 생활여건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한 요인이었다.

소련 대사 = 북한 동지들의 실책을 최고 지도부 앞에선 제기하지 말되, 어떤 이슈의 경우 전체 외교단의 의견을 모아 알려주는 게 좋다. 가르치거나 지시하는 인상을 주지 않고 진지한 협력의 뜻임을 알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주면 소련이 북한 동지들에게 충고할 때 도움이 되겠다.

▲체코 외교관, "남한이 북한보다 잘 산다" = (1956년12월28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체코 대사관 참사관은 자신이 아는 한 남한 주민의 생활 수준이 북한보다 높다고 말했다. 남한은 미국의 실질적인 원조 덕분에서 일부 경공업 분야에서 일자리가 생겼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북한과 달리 중공업 부문에 많이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참사관은 말했다.

농민도 남한이 더 잘 산다. 경작지가 더 넓고 농사 여건이 더 낫고, 인공비료를 더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남한 사람들이 잘 산다는 게 아니라 상대적으로 북한보다는 낫다는 것이라고 참사관은 말했다.

▲소련, 대북 협상 어려움 토로 =(1964년 1월 독일 대사관 보고서) 1963년 10월 소련 대사가 동독,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관의 1등 서기관들을 면담했을 때 북한과 통상 협상에선 호혜주의에 기초한 합의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김일성 "중소분쟁의 최대 피해자는 북한" = (베른트 쉐퍼의 논문) 1965년 7월 북한 주재 동독대사에 따르면, 김일성은 중소분쟁의 최대 피해국은 북한이라고 주장했다. 1961년부터 4년간 중소분쟁에 따라 북한은 경제개발을 못하고 침체를 겪었다는 것이다.

▲김일성 "일본서 비공식 채널로 반도체 설비 도입" = (1984년 6월1일 방독한 김일성과 호네커간 대화 동독측 비망록. 김일성 발언) 동독이 반도체 공장시설을 넘겨주기로 한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우리는 이미 비공식 채널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반도체 설비를 구입했으나 불완전한 것이다. 우리는 동독의 전자산업 발전을 모르고 있었다. 우리 당 중앙위는 오래전 반도체 설비 구입 비용을 승인했었다.

동독이 품질좋은 인조고무와 제초제를 생산하는 것도 몰랐다. 과거엔 이것들을 모두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 샀다. 이제는 바꿀 것이다.

▲80년대도 여전히 "의식주가 문제" = (1986년 10월18-21일 방북한 호네커와 김일성간 대화 동독측 보고서. 김일성 발언) 북한은 의ㆍ식ㆍ주 3가지 기본문제를 안고 있는 개발도상국이다. 1987년 시작될 제3차 7개년 계획의 초점은 그 해결에 있다. (이어 동독에 지원을 요청하는 옷감 등 품목을 길게 나열)


▲86,87년 대홍수= (베른트 쉐퍼 논문) 김일성은 1988년 5월10일 베를린시당 제1서기를 맞아 북한이 구상무역의 북한 책임을 이행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외교사절에게 처음 털어놓는 얘기라며 1986년과 87년 이태에 걸친 대홍수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일성은 "이는 국제적으론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며 "마그네사이트 광산 시설과 철도, 도로가 완전 침수됐었다"고 말하고 이제 복구를 완료해 완전 가동하고 있으므로 북한측 의무를 이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과거의 창으로 본 오늘의 북한> ④사회상

(워싱턴=연합뉴스) 윤동영 특파원 = 50,60년대 북한에 주재한 옛 소련과 동구권 외교관들은 같은 공산국가인 북한의 사회상에 대해 "만연한 불신과 의심, 점증하는 긴장"이라고 표현했다.

특히 1960년대 초 중국의 농업 정책 실패로 인한 대기근으로 만주지역 조선족 3만명이 대거 북한으로 피난했다는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는 최근 중국으로 흘러드는 탈북자 대열과 대비된다.

▲미군 공습 피해에 미군포로 살해로 보복 = (1950년 8월23일 중국 주재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1950년 8월21일 베이징 주재 소련 대사는 북한 인민군이 미군 공습으로 민간인이 많이 죽자 격분해 사령부의 거듭된 지시를 어기고 미군 전쟁포로들을 살해했다고 솔직히 말했다.

▲헝가리, 북한 전쟁 고아 양육 = (1953년 3월4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김일성은 헝가리가 지난해 가뭄 때문에 어려운 사정을 감안해 올해는 고아들을 (헝가리에)보내지 않으려 했으나 헝가리 정부의 공식 요청 때문에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성은 헝가리에 보낸 우리 아이들이 매우 좋은 대우를 받고,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도 갖게 됐다고 사의를 표했다.

▲헝가리 북한 유학생 근면성 = (1957년 8월13일 헝가리 교육부 비망록) 교수들은 북한 학생들의 유난한 근면성을 강조했다.

▲동구권 유학생 소환 = (헝가리 발라즈스 스잘론타이 논문) 북한은 1956년말 공산 우방에 있던 대부분의 유학생을 학업도 마치기전에 소환했다. 해외경험 때문에 북한 상황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갖게 됐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1957-58년 많은 동구권 유학생 출신들은 외국인들과 서신교환도 불허됐고, 자격에 걸맞은 자리에 임명되지도 못했다.

▲북한 심판 편파성 = (1959년 5월18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북한 심판들이 눈에 띄게 북한팀에 유리하게 편파적 판정을 하는 바람에 외국 원정팀은 모두 불만속에 떠났다.

▲김일성의 대 언론 불만 = (1959년 12월16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12월 노동당 전체회의에서 김일성이 북한 언론에 대해 작은 문제들을 크게 중요한 것처럼 다루고, 연이어 매일 보도함으로써 국민여론을 오도한다고 격하게 비판했다고 소련 대사가 전했다.

▲함흥은 동독이 재건해준 '신도시' = (베른트 쉐퍼 논문) 김일성이 동독의 오토 그로테볼 총리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1955-1962년 그로테볼 총리의 동생(혹은 형)을 단장으로 한 동독 전문가와 기술자 457명이 북한 주민을 지휘해 함흥을 5천236채의 아파트와 공장, 발전소, 병원, 음식점, 오락시설을 갖춘 완벽한 도시로 재건했다.

동독이 북한 도시 재건 지원을 제안하자 김일성이 함흥을 지정했다. 김일성은 1956년 5월 함흥을 방문, 재건 상황을 시찰한 뒤 1962년 완공 때까지 수차례 더 방문하며 관심을 보였다.

북한 지도부는 함흥이 평양보다 더 발전하고 멋진 도시가 되는 것을 우려한 듯 상당량의 자재를 평양으로 빼돌렸다. (70년대 후반 청와대 중화학공업담당 수석비서관이었던 오원철씨는 함흥이 6.25때 완벽하게 파괴됐음에도 비료 공장 등이 신속히 복구된 것이 당시 소련 기술 수준으로는 어려웠다는 점에서 불가사의중 하나로 생각했다고 말했다고 경남대 유길재 교수는 전했다)


▲김일성, "외삼촌 강양욱은 좋은 목사" = (1960년 10월11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대사관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북한 노동당이 60년 봄 채택한 대중노선 결의는 국내 정치상황을 "복잡하다(complicated)"고 묘사했다.

결의는 이같이 복잡한 상황에 다음과 같은 요인들까지 더해 정치사업이 방해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1.거의 모든 주민들이 남한에 친척을 두고 있고 많은 경우 월남자들이다.

2.미국과 남한의 일시 점령기에 비록 강압 때문이긴 하지만 많은 사람이 각종 방식으로 점령군(국군과 미군)에 협력했다.

3.전쟁포로출신 일부도 문제의 요인이다.

4.많은 수는 아니지만 아직 프티 부르조아 잔재가 남아있다.

(1961년 6월8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북한 내각에 있는 당원인 지인으로부터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김일성의 3월27일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교시를 당과 내각의 중간선까지 듣고 공부했다.

김일성은 "주민의 0.5%만 남한에 가족이나 친척이 없거나, 일본과 미국에 부역한 사람이 없거나 소외계급(clss-alien) 출신이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99.5%를 적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30세 이상의 주민은 거의 모두 일제치하에서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했던 점을 고려해야 한다. 친일로 간주할 사람들은 시도의 고위직이나 공무원들, 기업 소유주들, 경찰 간부 등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종교인 가운데서도 미국에 부역한 목사들만 겨냥해야 한다. 내 할머니도 내가 빨치산 활동을 할 때 기도를 해줬다. 나의 외삼촌인 강양욱(Kang ryohg-uk)도 좋은 목사였다"고 말했다.

(1962년 4월5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함흥 당위원회에 있는 정보원에 따르면 지난달 "정치적 통제"가 강화됐다. 지방 당조직은 정기적으로 주민동향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외국을 방문했거나 소련에서 살았던 주민들은 "요주의" 계층으로 분류돼 별도 명단이 작성됐다.

(1964년 6월1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1960년 10월 보고서와 같은 내용이어서 북한 내부의 정치불안이 수년째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북한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만연한 불신과 의심, 점증하는 "긴장"이다.

이미 보고한 대로 2월 당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다양한 계층의 주민 사업" 문제가 논의됐다. 우연히 입수한 비밀문건에 따르면 놀랍게도 "다양한 계층의 주민"이란 본질적으로 "믿을 수 없는" 계층과 요소를 뜻한다.

그 비밀문건은 이들에 대한 교육과 재교육, 설득을 강조하고 있으나 결국은 토론이 아니라 조직 사업의 성격이다. 미확인 정보에 따르면 대규모의 조직적인 주민 재배치가 "수도 인구 분산"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인민 권력 20년째, 전후 10-12년째에도 인구의 상당 부분이 다음과 같은 기준에 따라 분류되는 게 드러난 것이다.

1.전쟁기간 월남자들의 가족.

2.북한이 점령된 기간 조직된 반혁명 단체들의 구성원과 가족.

3.전 (북한인민군) 전쟁포로와 중소 상인, 전 종교인, 그 가족.

4.월북자, 옛 지식인, 그 가족과 북송 재일교포.

북한이 분단국이라는 점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전 전쟁포로와 남한의 일시 해방기에 인민군에 자원입대한 사람들 까지 의심한 것은 이해할 수없다.

비밀문건은 이들을 사회주의 건설에 동참시켜야 한다면서도 "일상 생활을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특히 그 자식들을 주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상적 동원으로 인한 피로감 확산 = (1962년 4월5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정치적 통제 강화와 동시에 경제, 특히 공업 생산과 상품 공급 난이 있다고 함흥 당위원회의 정보원은 말했다. 생활수준이 후퇴했다.

주민 사이엔 지난 수년간 진행돼온 급속한 속도와 독려(천리마운동 등을 가리킨 듯)로 인해 피로감이 쌓였다.

1주일중 하루는 육체노동이 의무화됨으로써 이같은 피로감이 더욱 커졌다. 3월부터 평양의 각 기관과 사무실은 1주 5일 근무제로 전환하고 6일째는 육체노동을 해야 한다. 또 매일 2시간짜리 정치학습 외에 일요일 아침 강제 집단 정치학습도 있다. 외무성도 토요일엔 (육체노동을 위해) 근무하지 않는다.

▲탈중자(脫中者) 3만명 북한 유입 = (1962년 4월28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중국의 대약진운동으로 말미암은 기아로 인해 1961년 9월까지 약 3만명의 조선인이 만주를 탈출, 북한으로 흘러들었다.

▲소련파.연안파 집요한 제거 = (베른트 쉐퍼 논문) 김일성은 1956년 노동당내에서 개인숭배 등의 문제로 반란에 직면했으나 8,9월 2차례의 임시 전체회의에서 반대파를 제압했다.

일부 반대파가 평양 주재 소련대사관에 가서 김일성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자 소련은 김일성에게 이 사건들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고, 소련 뿐 아니라 중국도 대표단을 보내 (권력투쟁에) 공동 개입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그 결과 출당됐던 중앙위원 일부가 '재교육' 명목으로 복권됐으나 3주만인 1958년3월 숙청됐다.

소련 주재 이상초 북한 대사가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판했다가 강등당하자 소련에 망명했다. 소련은 북한의 송환 요구를 거부했다.

친중파인 연안파에 대해서도 1958년 3월 마지막 중국군이 철수하자 김일성은 제1 경쟁자였던 연안파 거두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제거했다.

1962년 (중국과 관계가 가까와지자) 김일성은 1956년 반당분자로 찍혀 중국에 망명했던 중앙위원 4명의 송환을 중국측에 요청, 중국으로부터 돌려받았다. 이들은 처형됐을 것으로 보인다.

▲군량미 비축으로 쌀 부족 =(1963년 2월15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최근 평양 주민들의 쌀 배급량이 과거보다 50% 줄고 옥수수와 감자로 대체됐다. 체코 대사 말로는 쌀을 군량미로 비축하기 위한 것일 것이라고 했다.

▲60년대 석유 발견 기대 = (1963년 8월26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김일성을 만난 루마니아 대사가 소련 대사에게 얘기해준 김일성의 말을 소련 대사가 헝가리 대사에게 다시 전한 것) 소련 지질학자들이 오랫동안 북한에서 석유를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우리 생각에, 고의로 석유가 없는 곳만 탐사한 것 같다. 그래서 루마니아 지질학자들에게 부탁한다. 우리는 루마니아 지질학자들을 최대한 지원할 것이다. 성공하길 바란다.

▲'혼혈 결혼(국제 결혼)' 터부시 = (1963년 6월22일 헝가리 보고서) 독일 대사는 국제결혼을 "한국 민족에 대한 범죄"라고 부른 한 북한 노동당 간부의 연설을 "(나치 독일의) 괴벨같다"고 평했다.

(1963년 10월2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북한 정부의 이른바 혼혈 결혼(mixed marriage)에 대한 태도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 북한인 남편을 평양에서 추방하고, 소련이나 다른 우방 출신 부인들의 여행을 제한한다.

소련 대사로부터 들은 얘기다. 9.9절 전 (북한 남성과 결혼한) 소련 여성 한명이 아이 둘을 데리고 소련 대사관에 나타났다. 옷은 헤지고 몸은 멍투성이었다. 그 여성은 소련으로 떠날 생각에 두달전 거주지에서 평양 여행 허가를 신청했다. 당국은 불허했으나 평양행을 강행, 기차를 탔다가 뒤쫓은 경찰에 의식을 잃을 정도로 얻어맞은 것이다.

(1964년 2월 동독 대사관 보고서) 북한 당국은 동구권 국민과 결혼한 북한인들을 평양에서 지방으로 추방하고 유럽 배우자들과 이혼을 강요했다.

▲동독 대사관에 대한 투석 = (1964년 4월3일 동독 외교부 기록) 평양주재 동독 대사관에 대한 투석, 절도 미수, 디나라는 이름의 대사관 애견 '납치' 사건 등이 잇따랐다.

▲쿠바 대사 봉변 = (1965년4월2일 동독대사관 보고서) 3월28일 쿠바 대사가 가족 등과 함께 평양 관광중 (6.25때) 건물 폐허를 찍으려 하자 수많은 군중이 몰려들어 차를 주먹으로 내리치고 나오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군중은 쿠바 대사를 깜둥이라고 불렀다. 쿠바 대사는 평양 주재 대사중 기본적인 한국어를 비교적 잘 구사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대사가 차에서 내렸다가 카메라를 빼앗겼을 때 보안부대가 도착해 매우 야만적으로 어린이를 포함한 군중을 해산시켰다. 차량에 달았던 쿠바 국기를 찾기 위해 보안군이 행인과 인근 주택을 검문검색할 때는 더 야만적으로 대했다.

쿠바 대사는 김일성 면담을 요구했다. 이틀 뒤 쿠바 대사를 만난 김일성은 피델 카스트로에게 유감을 전해 달라며 책임자 처벌과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쿠바와 쿠바 대사가 북한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졌음에도 이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북한 지도부가 북한 대중에게 얼마나 영향력이 작은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과거의 창으로 본 오늘의 북한> ⑤공산우방의 인식

(워싱턴=연합뉴스) 윤동영 특파원 = 옛 소련과 동구권 국가 외교문서들에선 북한의 실정과 그 정치ㆍ경제적 원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많이 눈에 띈다.

특히 소련이 앞서고 일부 동구권 외교관들이 이에 동조하는 양상이다.

그러나 소련 대사가 "북한의 문제는 모두 지나친 자존심에서 비롯됐다"라고 비판한 데 대해 헝가리 기록들을 분석한 헝가리 학자는 "약소국에 대한 초강대국의 오만의 표현"이라고 지적했다.

또 소련이 북한에 대해 중공업 부문 말고 농업과 광산 개발에 더 투자해야 하며 혼자 모든 것을 다 만들려 하지 말고 국제협력(분업)을 해야 한다고 주문한 것에 대해서도 북한의 경제계획이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은 맞지만 "북한 경제를 소련의 필요에 맞추려는 한 측면도 있다"고 분석했다.

▲북한 비밀주의에 동구권 정보 공유로 대응 = (베른트 쉐퍼 논문) 북한은 소련, 중국, 동구권 국가들에 의존하면서도 내부 문제에 대해 이들 나라에 비밀로 했다.

그러나 동구권 국가들은 평양주재 외교사절끼리 정보 조각의 교환을 통해 퍼즐맞추기를 했다.

동독 대사관은 과거 동독에 살았던 북한인이나 북한인과 결혼한 동독인들을 통해 북한 정권의 특징적 현상인 두려움, 불신, 빈곤, 무지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다.

(헝가리 발라즈스 스잘로타니 논문) 헝가리에서 교육받고 귀국한 북한인들이 헝가리 대사관과 접촉을 유지함으로써 헝가리 대사관은 북한의 내부 정책 정보 획득에서 소련에 필적했다.

▲동독 대사 "중국이 북한보다 솔직" = (1955년 10월26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동독 대사의 말) 북한은 중국과 완전히 다르다. 북한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할 수 없는 일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어떤 문제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파괴적인 전쟁(6.25전쟁)을 겪은 후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어려움과 단점들에 관해 우방 사이에선 거리낌없이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중국은 이 점에서도 북한보다 훨씬 앞서 있다. 중국 사람들은 훨씬 솔직하고 개방적이다.

▲소련 "개인 숭배가 모든 잘못의 근원" = (1955년 4월13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소련 고문관 A.M. 페트로프의 북한 내부 정세 분석) 북한 국내정치 문제는 비판과 자아 비판의 부재와 변함없는 개인숭배다. 비판은 하향식만 있고 상향식은 거의 없다. 비판은 김일성 동지만 한다. 김일성 동지가 아첨꾼과 출세주의자들에 둘러싸인 게 심각한 문제다. 개인숭배가 모든 실책의 주된 동시에 결정적인 요인이다. .
(예컨대) 1954년 곡물 작황이 과장보고를 근거로 300만t으로 추산됐으나 최근 북한 정부도 실제론 230만t에 불과하다고 인정했다. 이조차 정확치 않을 가능성이 있다.정부는 잘못된 보고를 근거로, 야만적인 힘을 사용해 법률상의 23-27%가 아니라 최대 50%까지 농민들로부터 현물세를 징수했다.

그 결과 여론이 급격히 악화돼 농민계층으로부터 강한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적대 분자들이 이런 불만을 부채질했다. 자살이 빈발했다.

북한 정부는 2월 대책을 비밀 논의, 중국과 소련에서 곡물을 샀고('우리가 알기로 20만t'이라고 헝가리 대사관은 보고), 강제 공출은 즉시 중단됐고, 공출된 일부는 농민들에게 대부 형식으로 돌려줬다. 문제가 완화되긴 했으나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협동조합화 속도 역시 너무 빠르다. 1년만에 농민의 30%가 가입했다. 강제력이 동원된 경우도 일부 있다고 북한 당국은 인정했다. (아마 훨씬 많을 것이라고 헝가리 대사관은 주석을 담)


▲동독의 북한 비판 = (베른트 쉐퍼 논문) 1956년 4월 동독대사관은 미리 받아본 노동당 강령안에 '평화적 방법'에 의한 통일 언급이 없는 점과 통일 방안에 관한 '피상적인' 개념을 지적하는 등 비판적인 보고서를 본국에 보냈다. 또 개인숭배 문제점에 대해 언급이 없는 점을 비판적으로 주목했다.

동독 외교부는 1962년 노동당 내부 소책자에 대한 평가에선 김일성이 백두산 항일 유격전을 날조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1963년 북한 노동당의 '무장 항일투쟁기 혁명 전통'이라는 제목의 당 내부용 소책자에 대한 해설에서도 '1930년에서 1945년 사이 한국 역사 왜곡'을 지적했다. 동독 대사관은 국제 결혼 터부시 등의 현상을 나치 독일에 비유했다.

▲소련 "북한의 지나친 자존심이 문제" = (1959년 12월16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소련 대사의 말) 북한의 실정 대부분은 단 한가지, 북한 사람들의 지나친 국가 자존심때문이다. 경제분야 실책도 거기서 비롯된다. 북한 동지들은 다른 나라의 경험을 따르는 것을 싫어한다. 조언을 원치 않으며, 자신들 방식대로만 한다.

소련공산당 제21차 당대회 후 후루시초프는 모스크바에서 김일성을 만나 북한의 제1차 5개년 계획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러한 거대한 계획을 오로지 노동자들의 역동성과 열정에만 의존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후루시초프는 북한 동지들이 우방과 협력을 배제한 채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자체 생산하려는 것을 비판했다. 북한 동지들은 어떤 조치를 취할 경우 사전에 소련에 알려주지 않았다. (헝가리 대사관은 헝가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보고)
시도 등 지방정부에서 당위원회 권력 확대는 결국 (관료의) 전문성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과거의 창으로 본 오늘의 북한> ⑥재일교포 북송(끝)

(워싱턴=연합뉴스) 윤동영 특파원 = 북한의 재일교포 북송사업은 냉전시대 치열했던 남북체제 경쟁의 대표적 사례였다.

북한이 지난 1959년 첫 북송선을 띄웠을 때 남한의 격렬한 반응과 그 이후 1974년 남한이 재일교포 모국방문 사업을 벌인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북한의 북송 사업은 1984년 사실상 중단됐고, 그때까지 북송된 교포는 8만-9만명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지난해 호주 국립대 스즈키 교수는 비밀해제된 국제적십자사 문서를 통해 일본 정부가 그동안 재일동포 사회와 북한의 요구에 따라 인도적 차원에서 북송을 승인해줬을 뿐이라고 주장해온 것과 달리 재일교포의 범죄율이 높고 빈곤한 가정이 많아 생활보호 재정 부담이 많은 점 때문에 북한의 북송사업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협력했음을 밝혀내기도 했다.

특히 북송자중엔 재일교포와 결혼한 일본 배우자들도 최소 1천500명 이상 포함돼 있는 것으로 동구권 외교문서에 나타나 있다. 북한과 일본간 일본인 처 귀환문제의 시발점은 수십년전 북한과 일본의 협력에서 비롯된 셈이다.

북한이 의기양양하게 북송사업을 시작했다가 수년만에 시들해진 것은 북한의 실상이 알려진 데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옛 평양주재 공산권 외교관들의 관찰로는 북송자들이 북한 내부에서 체제불안 요인이 됨에 따라 북한 스스로도 흥미를 잃은 측면도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북송사업 자신감 표명 = (1959년 5월14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김일성은 5월8일 헝가리 당 대표단에게 북한이 일본을 떠나려는 재일교포들을 수용할 만큼 충분히 강해졌다고 말했다.

▲소련 선박 지원 = (1959년 12월16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소련 대사관의 율린 동지 말로는 북한 적십자사와 소련 선박회사가 선박 3척에 대한 용선 계약을 체결했다. 이들 선박으로 약 3천명을 수송할 예정이다.

남한 정부가 12월13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남한 해군이 경계태세에 들어간 데 대해 소련 배의 선장은 배가 공격받으면 적십자사기와 소련기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 충돌 방지 부심 = (같은 보고서) 서울의 동양통신에 따르면 12월14일 남한 주둔 유엔군의 미군 사령관이 유엔군 소속 군인들은 북송 차단을 위한 (남한의) 어떤 행동에도 참여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미군 사령관은 남한 국방장관에게도 한국군에 대해 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일렀다.

▲북송교포 특혜 = (1960년 5월10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대규모 재일교포 북송이 계속되고 있다. 청년들은 대학에 등록했다. 전문 기술자들의 임금 수준은 북한의 다른 숙련공이나 기술자들 보다 훨씬 높다. 일부 공장에선 지배인보다도 높다.

북송 교포들은 거의 모두 신축 건물에 안락한 집이 주어졌다. 임대료나 전기세도 내지 않는다. 첫 몇달동안은 식품과 난방도 공짜다.

이들에게 좋은 식품을 공급하기 위해 북송교포 전용 특수상점이 평양에 여러 곳 생겼다. 다른 일반 백화점보다 상품이 풍부하다. 체코와 루마니아 동지들에 따르면 가격은 다른 곳보다 낮다. 도시거주 북송교포들은 공공 교통비도 내지 않는다.

▲북송자에 대한 반감과 동요 = (1960년 5월10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북송교포의 기술이 북한 숙련공보다 나은 것은 사실이나 임금이 그렇게 차이나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소련, 체코, 루마니아, 몽골 동지들과 얘기해보니 모두 북송교포에 대한 특혜가 북한 노동자들에게 나쁜 인상을 줬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노동자들은 조만간 생필품 공급과 임금 특혜에 문제를 제기할 것이며, 이미 그런 소리들이 들리고 있다.

북한 노동자들은 특히 북송교포중 애국심이 아니라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포함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북한의 조선노동당은 일부 파괴요소들이 잠입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북송교포를 사시해선 안된다고 달래고 있다.

(1960년 8월1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북한 노동자들은 실제로는 북송자를 별로 안좋아 한다. 북송자들에게 좋은 집을 주기 위해 자신의 집에서 쫓겨난 사람이 많다.

▲북송교포 분석 = (1961년 3월 동독 대사관 기밀보고서) 1960년말 무렵까지 북한은 북송 선박을 54차례 보내 약 5만3천명을 북송했다. 이들 중 94%는 남한 출신이다.

700명은 전문기술자, 300명은 과학자와 예술가, 4명은 의사나 약사. 재일교포 배우자인 일본인 1500명도 포함됐다.

자영업자와 중소기업 소유주들이 가장 잘, 그리고 가장 빨리 북한 생활에 적응했다. 이들이 가져온 공장 설비와 부품, 자동차 등은 높은 이윤을 냈고, 직장에서 최고직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는 등의 이점이 있었다.

전문기술자들도 사정이 좋다. 특수 전문기술이나 지식에 따라 고용됐다. 일본에서 높은 세금과 극도로 열악한 생활여건 때문에 가장 고통받던 계층이었던 농민들도 대부분 생활이 나아졌다.

▲일본의 북송 적극 권장 = (같은 보고서) 1961년 1월 북한의 신문과 라디오에서 북송 보도와 발표가 눈에 띄게 줄었다.

1961년 2월 3일 일본 적십자사는 북한 적십자사가 "독감 유행을 막기 위해 북송을 일시 중단한다"는 전보를 보냈다고 발표했다.

당일 일본 적십자사는 북한에 "55차 선박을 즉각 보내라. 니이가타에 735명이 기다리고 있으나 독감에 걸린 사람은 없다. 북송자들에게 예방접종을 해주겠으니 의사도 함께 보내라"는 내용의 답신 전보를 보냈다고 도쿄의 인터내셔널 라디오가 보도했다.

▲북송중단 배경 분석 = (같은 보고서) 북송이 중단된 실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북송자들이 일본 친지들에게 생활여건을 이유로 오지 말라고 편지를 보냈다.

2.북송자 통제가 힘들다. 우리 대사관은 북송 청년들이 떼지어 평양에 나타난 것을 봤다. 그들끼리 만나는 장소가 따로 있고, 경우에 따라선 말썽을 부렸다.

3.북송자를 통해 휴대용 라디오, 녹음기 등이 북한 주민에게 보급됐다. 특히 북한 청년 교육에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

4.북송 청년들이 자전거, 라디오, 시계, 가죽옷과 지갑, 양복, 녹음기 등을 판 돈으로 살면서 직장도 얻으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암시장'이 번성했다.

5.북한 당국은 북송자를 오지를 포함해 북한 전역에 분산배정했으나 이를 어기고 대도시로 이주한 사람이 많다.

6.여성 북송자들은 일본에서처럼 다양한 상품을 살 수 없어 불만이 커졌다.

7.안보와 방첩면에서도, 일본을 통해 공작원과 간첩을 침투시키려 하는 남한의 적에게 북송은 손쉬운 침투 기회가 된다. 또 휴대 라디오 등 간첩행위와 사보타주용 수단이 북한에 유입되는 기회도 됐다.

이같은 문제들을 북한 당국이 공개 시인한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 대사관 외교관들의 관찰과 대화ㆍ만남을 통해 확인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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