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은 ‘정책’을 집어치워라 ①
전사 - 서럽던 눈물과 무거운 어깨

의원단, 코너에 몰린 진보가 잡은 돌파구


2004년 4월, 진보진영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2006년 10월, 지금 시점에서 그날을 되돌아보면 입맛이 쓰다. 기대가 과했던 것일까. 전략의 문제였을까. 기대야 어차피 과할 수밖에 없었고, 전략은 애당초 없었다.

노동운동은 1997년 마지막으로 이겼다. 그뒤 제도개선투쟁에서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 때때로 단위 사업장에서 승전보가 울리기도 했지만, 대세는 기울었다. 1987년에서 1997년까지 노동운동과 진보진영이 쌓았던 승리는, 10년이 지난 지금 정파와 관성, 사회적 조롱으로 변질돼 있다. 마지막 남은 사회적 명분과 조직적 성과가 2004년 4월 국회로 '파견'됐지만, 2년6개월 동안 우리는 전진한 것인가 후퇴한 것인가. 다시 되짚어보자. <편집자 주>

연재순서
1. 전사 : 서럽던 눈물과 무거운 어깨
2. 사라진 야성, 지키지 못한 의리

3. 거품은 꺼지고, 결국 한줌만 남았다


2003년 1월9일. 권영길 당시 민주노동당 당대표는 김해공항에 내리자마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두산중공업의 노동자 배달호가 죽었다는 소식이다. 9일은, 2002년 12월 대선을 마친 권영길이 다시 당력을 추스르기 위해 전국순회에 나선 첫날. 대부분의 일정을 취소됐고, 권영길은 창원 두산중공업으로 향했다.

배달호는 죽었고, 권영길은 말이 없었다

두산중공업 노동자광장은 참혹했다. 이날 새벽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른 배달호의 시신 위에는 천이 한 장 덮여있을 뿐이었다. 텅빈 광장에서 배달호는 홀로 죽었다. 불은 그의 몸에서 더 탈 것이 없을 때까지 꺼지지 않았다. 사지는 구부정하게 하늘로 향해 있었고, 입은 크게 벌린 상태였다. 숯이 된 신발만 천 밖으로 삐죽 나와 있었다. 고통스런 죽음이었다.

고인이 분신한 장소는 생전에 함께 일했던 보일러공장 조합원들이 통근버스에서 내려 작업장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길목이었다. 해고자들이 선전물을 나눠주던 장소였다

권영길은 시신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9일 공장은 정상조업 중이었다. 시신 주변에는 200명 정도의 늙은 노동자들이 지키고 있었다. 울지도 못하고 있었다.

배달호는 2002년 두산중공업 파업투쟁으로, 그해 7월23일 구속됐다. 두 달 뒤인 9월17일에 출소했으며 집행유예(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기간 중이었다. 사측과 법원에 의해 2천만원 상당의 재산과 임금이 가압류된 상태였다.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받고 2002년 12월26일 현장에 복귀했다.

배달호는 매일 새벽 6시에 집을 나서 6시30분 해고자들과 수배자들이 농성중인 노동조합 1층을 찾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는 파업 당시 교섭위원이었다. 사측의 일방적인 교섭안을 받을 수밖에 없던 상황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나이 51세, 그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의 아버지였다. 배달호는 해고자들을 보며 마음 아파했다. 배달호의 시신을 보며, 노동자들은 죄책감에 말도 못했고, 울지도 못했다.

1996년 겨울, 권영길은 명동성당에서 삭발을 했다. 민주노총 위원장이었던 권영길의 파업지침에 따라, 방송국이 섰고, 공장 라인이 멈췄다. 1997년 1월, 노동자들은 크게 이겼다. 당시의 승리는 1987년 이후 욱일승천했던 노동자들의 ‘마지막 승리’였다. 2003년 초입, 늙은 노동자는 몸에 불을 살랐다. 1997년 권영길이 이끈 승리는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창도 방패도 없는 상황에서 한 늙은 노동자는 죽었다.

9일 밤, 권영길은 창원 두산중공업 공장 밖으로 나왔다. 차 안에서, 권영길은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 비서에서 물었다. “배달호가 (민주노동당) 당원이었나?” “네, 당원이었습니다.” 다시 권영길은 입을 다물었다.

2004년 4월 총선에서, 권영길은 창원을에서 이겨, 국회의원이 됐다.

이용석이 죽고, 단병호는 머리를 숙였다

2003년 가을, 이용석이 죽었다. 10월26일 종로에서 집회에 참석하던 중, 자신의 몸에 불을 놓았던 이용석은 병원 중환자실에서 5일을 버티다가 31일 죽었다. 그는 근로복지공단에서 일하던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이용석이 죽던 날, 근로복지공단 초입에선 장례식인지 시위인지 분간되지 않는 집회가 열렸다.

이용석의 영정은 국화로 장식됐고, 그 앞에서 사람들은 울었다. 추모사가 이어지던 동안,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의 이상엽 사무처장이 무대 위로 올라갔다. 주변 사람들이 말렸지만, “용석이를 이렇게 못 보낸다”며 그는 기어이 무대 위로 올랐다.

“용석아 춥지? 내 투쟁조끼를 줄게. 단체협약서를 너에게 보여줄 때가지는 너를 찾아오지 않을게. 이해할 수 있지. 단체 협약서 몇장 때문에 간 너한테, 단체협약서를 들고 반드시 찾아갈게.” 울음인지, 넋두리인지, 젊은 간부의 말은 질기게 이어졌다. 근로복지공단 초입은 눈물바다였다.

단병호는 앞줄에 앉아 있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울음을 참았지만, 눈물은 계속 나왔다. 이날 단병호는 마이크를 잡고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용석은 근로복지공단 사업비에서 일용잡급 명목으로 월급을 받았다. 공단 전체직원 3,300여명 가운데 1,200여명이 비정규직이며, 700여명이 비정규직노조 조합원이었다. 임금을 ‘사업비’에서 '급여항목 인건비‘로 전환하라는 게 그들의 중심 요구였다. 또한 정년보장과 1년 이상 계약자의 정규직화를 요구했다.

2003년 늦가을,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민주노총 뒤편 천막에서 농성을 하며, <철의 노동자> 가사를 막 외우고 있었다.

단병호는 노동운동을 시작하고, 8년5개월을 구속자와 수배자로 살았다. 혹자는, “이 땅 노동자 중 단병호에게 신세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전투적 노조의 상징이며, 투쟁하는 노동자의 얼굴이었다. 그가 상징하는 전투적 노동운동은 이용석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그는 이미 모든 노동자의 상징이 되지 못했다. 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는 동안 그가 상징하던 조직은 무기력했다. 안간힘을 썼던, 죽을 힘을 썼던, 현실에서 민주노총은 무기력했다.

단병호는 앞줄에서 울었고, 죄송하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2004년 4월 그는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2번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김주익이 죽고, 심상정은 서럽게 울었다

심상정은 2003년 10월22일, 부산역 앞에서 울고 있었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은 김주익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장을 추도했다. 김진숙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민주노조 하지 말 걸 그랬다”며 울었고, 심상정도 울었다.

김주익은 죽고 싶지 않았다.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에서 129일 동안 농성을 하며 그는 유서를 두번 썼다. 9월9일 그의 부친의 기일에 한번 썼고, 10월4일에 또 썼다. 유서를 쓸 때마다, 그것이 유서가 되지 않기를 빌고 빌었을 것이다. 85호 크레인 바로 옆 4도크에서, 사측의 대체인력 투입을 통해 배가 나갈 때, 파업 집회 참가자가 200명도 안 모였을 때, 그는 죽지 않을 방법을 찾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1994년 한진중공업이 LNG 선상파업을 할 당시 담당변호사였다. 그는 부산에서 ‘인권변호사’ 활동을 하하며, 한진중공업 노사분쟁에 관련된 사건을 많이 다뤘다. “한진중공업 사측의 문제는 우리보다 노무현이 더 잘 안다”는 게 노조활동을 오래한 조합원들의 말이었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 벌어진 김주익의 장기 고공농성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1991년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목숨과 시신을 빼앗겼다. 그후, 20년 동안 그들의 싸움은 이슈도, 처지도 달라지지 않았다. 2003년 가을, 노무현 대통령은 이라크 파병과 신행정수도 이전 문제로 머리가 복잡했다. 김주익은 85호 크레인 위에서 청와대를 바라보지 않았다.

심상정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촉매’였다. 그는 1985년 구로동맹파업의 핵심 조직가였다. 현재 민주노조 운동의 ‘선봉’인 금속노조는 그의 손에 의해 디자인됐다. '금속'은 그의 손에서 ‘제련’됐고, 민주노조의 기둥이 됐다. 금속노조는, 그 산하조직의 대표였던, 김주익 지회장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1987년 6월, 당시 거리를 메웠던 사람과 세력들이 권력을 잡았다. 같은 해 7~8월 공장 라인을 세웠던 사람들은 작은 초소하나 꾸리기도 버거워하고 있었다.

2003년 가을, 1987년 6월과 1987년 7~8월은 이렇게 결별했다. 심상정의 울음은 그것의 상징이었다. 그는 2004년 4월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1번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강기갑의 정계진출은 눈물과 함께 시작했다

2004년 2월28일 밤, 전농 상무위원회, 각 도연맹 의장들과 총연맹 지도부가 모여 앉았다. 이 자리에서 문경식 전농 의장은 결단을 내렸다. “강기갑 부의장을 후보로 내보내자.” 사실 이 결단은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민주노동당 지지를 놓고 전농 내부에서 이견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현직 부의장을 출마시킨다는 것은 또다른 반발을 불러올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도연맹 의장들은 즉각 반대 입장을 보였다. “2004년 당면한 쌀 투쟁을 앞두고 두명뿐인 부의장 가운데 한명을 당으로 보내면 어떻게 투쟁을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는 게 주된 반대 이유였다. 문경식 의장은 다시 말했다.

“전농은 지난해 11월 민주노동당 지지를 결정했다. 그리고 우리 후보를 국회의원으로 만들 것을 결정했다. 우리 내부도 어렵다. 현직 부의장을 보내는 것이 잘못된 결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전농이 정치세력화를 결정했으면 전농답게 결정하자.”

강기갑은 이날 울었다. 그의 앞에는 온통 넘어야 할 산만 있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의 선거 상황은, 비례대표 4번까지가 안정권이었다. 1, 3번은 여성할당이었고, 최소한 2등을 해야 국회로 갈 수 있었다. 단병호, 천영세, 노회찬…, 민주노동당 역사에서 핵심적인 얼굴들과 무명의 강기갑은 경쟁해야 했다.

만약, 민주노동당에서 농민 국회의원이 탄생하지 못한다면, 민주노동당을 중심에 둔 노동연대의 틀은 물론, 전농 지도부의 지도력마저 흔들릴 위기였다.

당선이 되더라도 문제였다. 지역기반을 핵심으로 하는 전농은, 단체장과 국회의원을 이미 배출한 바 있다. 그러나 결과는 상처뿐이었다. 농민 국회의원을 ‘제대로’ 한다면, “제 명 채우기 어렵다”는 게 대체적인 분위기였다.

전농은 1994년 WTO 체제와 싸우며 계속 졌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투쟁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썼지만 역시 졌다. 다른 돌파구가 필요했다. 면도날 같은 정세, 무겁기만 한 역사적 ‘결단’을 어찌 짊어질 것인가. 강기갑은 2004년 2월 28일 울었다. 강기갑은 2004년 4월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6번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노회찬은 ‘천하양분지계’를 주창했다

2004년, 4월15일에서 16일로 넘어가던 늦은 밤, 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노회찬은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8번이었다. 또한 당시 노회찬은 최고 주가를 달리는 TV 토론자였으며, 유명 정치인이었다.

그 밤에, 노회찬의 국회 입성 여부는 안개 속이었다. 결국 정당 득표율 0.179073329% 차이로 노회찬은 “서산을 붉게 물들이겠다”던 9선 의원 김종필을 이겼다.

새벽, 당선이 확정된 뒤에서 노회찬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나와, 밤새 마음을 졸이던 당직자들과, 자신의 팬클럽 회원들과 악수를 했다. 노회찬은 “하루 밤 사이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 한 기분”이라며 마음고생을 털었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4월 총선에서 13.1%의 정당득표율을 기록했다. 지역구 2곳을 포함해서, 10석의 의석을 챙겼다.

당시 총선에서 노회찬은 ‘천하양분지계’를 주창했다. 보수정치의 카르텔을 깨고, 진보와 보수로 한국정치를 양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겹살 불판을 갈아야 할 때”라는 그의 말은 대중의 코드의 정곡을 찔렀다. 당시 총선에서 대중은 새로운 것을 원했다. ‘탄핵 심판’이 총선 핵심이슈였던 상황에서, 새롭고 신선한 것은 표심과 직결됐다.

1997년 노동운동세력, 진보운동 세력은 마지막으로 이겼다. 그리고 계속 졌다. 자본과 권력은 총파업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민주노총의 명운을 걸고” 나선 제도투쟁에서 숫하게 졌다. 비정규직은 임금 노동자의 절반이 넘어섰다. ‘저지선’ 안쪽은 ‘귀족’이라는 놀림을 받았다.

배달호, 김주익, 이용석… 등이 죽임을 당했다. 마지막 남은 한줌을 모아, 2004년 총선국면에서 ‘베팅’을 했다. 대박이 터졌다.

2004년 5월31일, 민주노동당이 국회입성을 기념하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단병호는 “우리 국회의원이 한 두명이라도 있었으면…”이라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울었다. 그때 우리 모두는 새로운 정치가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민주노동당은 ‘정책’을 집어치워라 ②
사라진 야성, 지키지 못한 의리

투쟁의 정점에서 의원 얼굴을 찾기 어렵다


지난 9월15일, 민주노동당 단병호, 심상정, 이영순 의원이 주최하고 민주노총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본부가 주관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의 기대효과와 개선방향 토론회’가 무산됐다.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린 이날 토론회에 참석하려던 KTX 승무원 70여명을, 국회 사무처에서 막았기 때문이다.

경찰과 일반인이 붙으면 답은 뻔한 일. 고성이 오가고, 참석하려던 조합원들은 울고, 멱살잡이도 나오고…, 결국 국회 정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당시 토론회 현장에서, 단병호 의원은 전화기를 잡고 있었다. 단병호 의원이 국회 사무총장과 수차례 전화통화를 하며 출입 봉쇄를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심상정, 이영순 의원은 토론회장에 나오지 않았다.

당시 이 토론회의 실무를 담당했던 한 당직자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작전통수권 관련 토론회를 한나라당이 하는데, 재향군인회 사람들이 국회 정문에서 출입제지를 받았으면, 한나라당이 어떻게 나왔겠는가? 한나라당에서 사학법 개정 관련 토론회를 하는데,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정문에서 막혔으면 어떤 반응이 나왔겠는가?”

현실 정치의 구도 상, 제지당할 일도 없겠지만, 그려지는 상황이 있다. 한나라당 의원들과 당직자·보좌관들은 당연히, ‘폭도’로 변했을 것이다.

“정부 여당이 정당과 국회의원이 하는 정당한 토론을 막았다.” “야당 탄압”이라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아마도, 국회 사무총장, 국회의장의 사과를 받아내려고 했을 것이다. 한동안 국회 운영 또한 파행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대처는 ‘의연’ 했다. 민주노동당은 대변인 논평을 통해 “국회의원의 입법활동을 방해한 파렴치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과연 점잖게 대처할 만한 상황이었나?

의연하게, 점잖게

서울노동청은 지난 9월29일, KTX 승무원 문제에 대해 '적법도급' 판정을 내렸다. 이로써 ‘불법파견’을 무기로 싸웠던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투쟁은 예봉이 꺾였다. 비정규직 싸움의 중심 축인 간접고용 문제, 그 중 한 축인 ‘불법파견이냐-적법도급’이냐의 쟁점은 사라졌다.

또한 파견법 철폐 구호는 공염불이 됐다. 도급 쓰면 될 일, 굳이 규제가 많은 파견 노동자를 쓸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 울산5공장 비정규직 노동자,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 노동자,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문제 등 불법파견을 쟁점으로 투쟁의 불씨를 지피던 이들의 싸움이 도매금으로 넘어갔다.

9월29일 서울노동청장 입에서 “적법도급”이라는 말이 나올 것이라는 건, 이 문제에 관심이 있었던 모든 기자들은 다 알고 있었다. 기자들의 정보력이라는 게, (아주 가끔을 제외하면) 알 만한 사람 다 안 후에 주어 듣는 수준이다. 그러니 당연히, 민주노동당도 알고 있었다. 더구나, KTX 승무원들은 노동부의 판정 전, 마지막 거점으로 민주노동당사를 택해 농성 중이었다.

이 발표를 들은 민주노동당은 의연하게, “국정감사 때 두고보자”며 칼을 갈고 있다.

오민규 비정규직연대회의 국장의 말이다. “적법도급 판정으로 파견법 철폐는 이미 머릿속에서 지웠다. 망연자실하다. 적법도급 발표 당일, 의원들이 노동부에 가서 책상이라도 들어다 놓았다 해야 할 상황이었다. 발표 전날이라도, 찾아가 농성이라도 할 상황이었다. 앞으로 국회에서 폭로해 봐야, 폭로로 끝이다.”

김영삼의 야밤 활극

1979년 8월9일, YH 사업장의 여성 노동자 172명이 서울 마포 신민당사에 몰려와 농성을 벌였다. 당시 총재였던 김영삼은 이들에게 농성장을 제공하며, “여러분들이 마지막으로 신민당사를 찾아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한다”고 여성 노동자들을 얼싼안았다.

10일 밤, 경찰은 강제진압을 준비했고, 신민당과 김영삼은 “우리가 지키고 있으니, 경찰은 절대 당사로 못 들어온다”며 노동자들을 안심시켰다. 당시 YH 조합원들은 경찰이 들어오면 자결하겠다고 말하던 상황이었다.

김영삼은 당사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보안과, 정보과 형사들의 빰을 때리고, 멱살을 잡고, 발길질을 하며, 야밤 활극을 벌였다.

11일 새벽, 경찰이 “여공들을 내보내라”는 최후통첩을 했다. 이순구 당시 서울시경국장이 전화를 해 “총재를 바꾸라”고 하자 김영삼은 “건방지다”며 묵살하고, 당사 앞에서 작전을 지휘하던 마포경찰서장에게 "너희들이 저 불쌍한 여공들을 죽이려 하느냐"며 뺨을 올려붙였다.

이날 새벽 경찰 1천여명이 신민당사에 난입했다. 신민당 의원, 당직자들과 경찰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졌고, 진압됐다. 김영삼은 경찰차에 실려, 상도동 집으로 갔다. 진압과정에서 농성중이던 YH 조합원 김경숙이 사망했다. 이날 낮, 신민당은 의원총회를 열어, 강제진입을 규탄했고 항의농성에 돌입했다.

1979년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과 이를 '두둔'하는 정치인의 노력은 ‘영원할 것 같던’ 박정희 정권 몰락의 서곡이었다.

'민주노동당식' 지원 로드맵

포항에서 일이 터졌다. 건설 플랜트노조에서는 최초로 주5일제 근무를 요구하며 투쟁하던 건설 노동자 2,500여명은 발주처인 포스코 본사를 7월13일 점거했다. 그리고, 하중근 조합원이 7월16일 경찰진압과정에서 머리를 다쳐, 17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 결국 저 제상으로 떠났다. 16일 하 조합원이 경찰에 피격 당하던 현장에는 단병호 의원도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사건 초기부터 개입했다. 7월18일 단병호 의원은 이상수 노동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포스코가 불법으로 대체인력을 투입한 것이 본사 점거농성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문성현 당대표와 노회찬, 단병호, 심상정 의원이 7월19일 포항 현장을 찾았다. 포항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경을 헤매던 하중근 조합원을 문병했다. 집회에도 참석했다.

전국비정규직연대회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올해 구속된 노동자 155명(9월초 현재) 가운데 115명이 건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하중근 조합원 사망사건이 발생한 포항 건설노조가 62명(10월 현재 구속, 수배자는 68명)으로 가장 많고, 지난 6월 파업을 벌였던 대구경북지역 건설노동자들의 구속자 수도 26명에 달했다. 대구경북 건설노동자들의 죄목은 ‘공갈협박’인 것이 ‘특이’ 하다. 지난 4월 총파업을 벌였던 건설운송노조 덤프분과에서도 16명의 구속자가 나왔다.

화물연대에서도 14명의 구속자가 나왔고, 현대 하이스코 비정규직 지회와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지회에서 각각 6명의 구속자가 나왔다.

이들 구속자들을 유형별로 보면 건설일용, 사내하청 등 간접고용에서 117명의 구속자가 나왔고, 특수고용 노동자 구속자가 31명이다. 구속자의 95%가 ‘사용자 찾아 삼만리’ 중 감옥에 갔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구속자 숫자는 매년 증가 추세다. 터져 나오는 투쟁은 법과 제도의 틀 너머로 치닫고 있다.

한 비정규직 활동가가 한 말이다. “민주노동당은 사건이 터지면 처리하는 ‘로드맵’이 있다. 우선 진상조사하고, (사용자, 관료, 단체장) 면담하고, 의원들이 집회 때 연설한다. 중간 중간 논평도 낸다. 이 방식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다 안다.”

‘누구 편’인지 확실한 민주노동당 의원에게 중재를 맡길 사용자는 없다. ‘연설원으로 뛰는 것’을 제외하면, 민주노동당 의원단의 활동은 제도적 보완과 맹점을 찾아내는 것에 집중된다.

1988년 12월26일,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에 돌입했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노무현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 ‘명언’을 남겼다. “법은 정당할 때 지키고 정당하지 않을 때는 지키지 않아야 합니다.”

공무원노조의 가시밭길

중앙정부는 물론, 전 지자체와 관공서가 나서서 탄압하고 있는 전국공무원노조. 공무원 노동3권 보장을 주창하며, 법외노조로 남아 있는 만큼 정부 입장에선 환대하지 않는 것이 당연. 하지만, 백주에 전국의 기초지자체의 사무실을 강제폐쇄 하며, 전쟁터를 만들어 버릴 만큼 공무원노조가 위험한 존재일까?

더구나, 공무원노조는 정부와 대화를 거부한 바 없다. 명분만 있다면, 조건만 된다면, 대정부 대화를 하고 싶다는 의지를 항상 밝혀왔다. 항구적인 법외노조는 공무원노조도 원하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정부쪽에선 공무원노조와 말을 섞고 싶지 하지 않는다.

이 둘의 사이의 반목에는 역사적 맥락, 정치적인 맥락이 있다.

2002년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대선전을 치를 때만 해도, 공무원노조는 ‘노 캠프’의 포섭대상이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에도, 공무원노조쪽 관계자들은 인수위와 ‘우호적인’ 관계에서 논의를 했다. 공무원노조법의 제정은 양자 모두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다만, 법 체계와 기본권 보장 범위에 이견이 있었다.

2003년 공무원노조법 제정 논의가 진전되고 정부입법안이 마련될 무렵, 공무원노조는 정부안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공무원노조가 반대하면 입법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또한 김두관 행자부 장관 시절만 해도, 행자부와 공무원노조는 일상적인 교류가 있었다.

이것이 완전히 틀어진 것은 2004년 3월말, 전국공무원노조가 정치선언을 하면서부터다. 전국공무원노조는 4·15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여권의 한 주요인사는 공무원노조쪽에 “이제 우리 찾아올 필요 없다”고 전했다고 한다.

정부는 2004년 이전 논의되던 제정안에 비해 한참 후퇴된 공무원노조특별법을 입법발의 했다. 이 입법안은 2004년 12월31일 국회를 통과했다. 그 이후 오늘까지 전국공무원노조는 ‘고난의 행군’ 중이다.

전국공무원노조와 현 정부 사이에 ‘데탕트’가 형성된 초기 기간에 논의되던 입법안도, 노조 입장에서는 부족하고, 모자란 내용이었다. 정치권력과 공무원노조단체의 갈등은 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공무원 노동자가, 노동자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꼭 득실을 따져가며 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꼭 집어봐야 할 문제가 있다. 과연 민주노동당은 공무원노조의 지지선언 이후 얼마나 ‘의리’를 지켰는지에 대한 문제다.

예고된 전면전, 의원들은 국회에

행정자치부는 전국 지자체에 9월22일 오후3시를 기해 공무원노조 사무실을 폐쇄하라고 지침을 내렸다. 이 지침이 내려진 것은 이보다 열흘전인 9월13일. 피할 수 없는 ‘전면전’은 이미 예고된 상태였다.

노조는 ‘옥쇄투쟁’ 방침을 산하조직에 내렸다.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및 여러 사회민중단체에 도움을 청했다. 21일 밤, 전국의 공무원노조 간부들은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며, 농성전을 시작했다. 22일 새벽6시, 서울 구로구청(하필이면 20년전 대통령선거 부정선거규탄투쟁이 벌어졌던 그 구로구청이다!)을 시작으로 각 지자체는 경찰과 관리직원, 경비용역업체 직원 등을 동원해 사무실 폐쇄에 돌입했다. 이날 하루 동안 105개의 노조사무실이 강제 폐쇄됐고, 조합원 등 53명이 연행됐다.

민주노동당의 지역조직은 공무원노조 사무실 폐쇄에 연대하는 활동을 했다. 이수정 민주노동당 서울시의원, 김종철 전 서울시장 후보, 정경섭 마포지구당 위원장 등이 저지투쟁 과정에서 연행됐고, 김선동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은 국무총리실을 항의 방문했다.

9월22일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주요 일정은 이랬다.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오전9시에 국회 본청에서 의원단 총회를 열었다. 강기갑 의원은 10시에 농해수위 법안심사소위에 참석했다. 권영길 의원은 오후4시에 의원실 내 국감 점검회의를 했다.

노회찬 의원은 한 신문과 ‘진보대담’을 했다. 오후4시에는 한양대학교에서 강연을 했다. 심상정 의원은 아침8시에 한-브라질포럼 예비모임을 했고, 오전10시에는 ‘공적자금투쟁 금융기관 처리방안’ 토론회에 참석했다. 오후 3시30분에는 민주노총 여성노동자학교에서 강연을 했다.

현애자 의원은 오전10시에 보건복지위 전체회의를 했고, 오후2시에는 여성농업인리더 강연을 했다. 오후4시에는 서귀포시 지역사회협의체 간담회를 가졌다. 천영세 의원은 오전10시에 문화관광부 FTA 관련 보고를 들었다. 단병호, 최순영 의원은 권승복 공무원노조 위원장이 단식농성 중이던 광화문 열린시민공원을 방문했다. 이영순 의원은 이라크 방문 중이었다.

민주노동당이 밝힌 이날 일정에 따르자면, 공무원노조 사무실 폐쇄와 관련한 일정을 계획한 의원은 단병호, 최순영 단 두명이다. 그나마 두 의원이 방문한 곳은 충돌이 벌어지고 있는 지자체 사무실이 아닌, 권승복 위원장의 단식 농성장이었다.

2년 동안 무엇이 달라졌나?

민주노동당의 한 당직자의 말이다. “의원 9명을 각 광역별로 배치해서, 사무실 폐쇄 저지에 나설 상황이었다. 실제 저지에도 도움이 됐을 것이고, 여론의 주목도 받을 것이다. 또한 공무원 노동자 표심을 굳히는 데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명분도 좋고, 공무원노조에 도움도 되며, 표도 되는 활동이 됐을 것이다.” 한가지 부연하자면, 지킬 ‘의리’도 있었다.

더해서, 9월22일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동선은 2년 전 그들이 취했던 태도와도 다르다.

2004년 11월8일, 공무원노조가 총파업 찬반 투표를 할 당시, 정부는 찬반투표에 대한 원천봉쇄 방침을 내렸다. 당시 민주노동당 각 지역조직은 각 지자체 공무원노조의 투표를 지원하기 위해 몸으로 싸웠다. 민주노동당 의정지원단에는 비상상황실이 마련됐고, 각 지역에서 벌어지는 투표 진행 여부가 실시간으로 의원단에 보고 됐다. 몇몇 의원들은 비상대기를 하며, 투표를 방해하는 지자체를 방문했고, 연행자가 있는 경찰서를 방문했다.

며칠 뒤인, 11월14일 공무원노조가 사상 첫 총파업을 할 때도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동선은 역동적이었다. 당시 공무원노조는 파업 전야제 장소가 원천봉쇄 될 것을 우려해, 마지막까지 집회장소를 정하지 않았다. 14일 저녁 광화문 모처에서 비상대기 하고 있던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공무원노조가 연세대에서 모일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꺼번에 이동했다.

공무원노조 조합원들이 연세대에 도착하기 이전에 민주노동당 의원 전원이 연세대에서 파업전야제 장소를 지키고 있었고, 이날 공권력은 파업 전야제를 위협하지 못했다.

그후로 2년, 2006년 9월22일, 정부가 사무실 강제폐쇄라는 초강수를 두는 동안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국회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공무원노조 사무실은 폐쇄됐다. 이 2년 동안 혹시라도 공무원노조가 민주노동당을 배신한 적이라도 있었던 것인가?



민주노동당은 ‘정책’을 집어치워라 ③
거품은 꺼지고, 결국 한줌만 남았다

담장 안, ‘뚝방의 전설’은 없었다


꼭 한가지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이미 민주노동당에는 전당적인 집행력, 조직력, 기획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안타깝지만, 민주노동당은 당의 이름으로 전략을 잡고, 그에 맞게 당 조직을 개편하고, 당력을 모아 사업을 집행할 능력을 상실했다.

당은 세류를 타지 못했다

이전에 민주노동당은 정세에 맞게 자신의 조직을 개편해 왔다. 창당 초기 지부체계의 조직을 지구당체계로 변화시켰고, 지구당 산하 분회의 조직과 활동을 강조하기도 했다. 현재 민주노동당의 지역조직체계는 중앙당-광역시도당-시군구 지역위원회체계로 구성돼 있다. 시대가 변하면 조직도 변해야 한다. 이 기능이 상실 된다면, '정치', 다시 말해 지지자의 눈물과 피와 땀을 먹고 사는 정당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된다.

조직체계 개편 논의가 진지하게 진행된 것은 지난 2005년 10월26일 재보선에서 참패한 이후다. 당 최고위원회가 총사퇴 하고 꾸려진 비상대책위원회는 당 조직개편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이때 나온 말이, “지역조직을 비정규직센터”로 개편하자는 것이다. 이 주장은 '노회찬 의원발'로 시작됐다. 문성현 당대표가 비대위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때, 당직선거 후보 때, 취임 초기 모두 강조하고 또 강조했던 사안이었다.

여러 형태의 안들이 제출됐다. 유럽의 진보정당들이 사용했던 ‘노동자의 집’ 모델을 차용하자는 것도 있었고, 노무상담 중심의 권리 찾기를 중심으로 사업을 꾸려야 한다는 말도 있었다. 몇 지역을 전략지역으로 삼아, 집중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비정규직센터로 개편 논의의 중심은 당의 ‘차세대 성장동력’에 대한 문제였다. 조직된 노동자·농민, 운동권 향수층 등으로 제한돼 있는 민주노동당의 핵심 지지층을 넓히자는 것이다. 빈곤층과 미조직 비정규 노동자를 당 지역조직이 나서서 조직하고, 그들을 당의 핵심 지지층으로 끌어올 일상 활동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당원관리와 연대활동에 머물던 당 지역조직의 새로운 활동의 모델을 제시하자는 것이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이유는 지구당 활동이 금지되고, 유급 상근자의 수가 제한된 ‘신정당법’에 맞게, 당 지역조직을 바꿀 필요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6년 10월, 비정규센터는 어디 있는가? 당 비정규직 운동본부가 사업공모 정도를 하고는 말조차 사라졌다. 한발 늦은 조직혁신 논의는 그나마 때를 놓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흉한 꼴을 보게 됐다.

비정규센터는 어디 있는가?

2006년 8월11일, 여의도 중소기업회관에선, 당 지도부와 시도당 위원장들이 모여 확대간부회의를 열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이 지역조직에 불법으로 정당 상근자를 운영하며, 급여를 지급하고 있다는 혐의에 대해 선관위가 조사 중이었다. 이미 중앙선관위는 민주노동당 내부제보를 통해 급여지급 대상자와 액수를 파악한 상태로 알려졌다.

중앙선관위가 선거법을 엄정하게 적용할 경우, 민주노동당은 국고보조금의 두배에 달하는 돈을 토해내야 할 위기였다.

당에 비상이 걸렸다. 11일은 선관위측에서 민주노동당에 만나자고 연락을 준 날이었다. 확대간부회의는 비공개, 그러나 복도에서 곁눈질만 해도 안에서 어떤 ‘난장’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짐작이 어렵지 않았다.

선관위를 만나서 협상을 해야 한다는 의견, 만나봐야 할 말 없으니 가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 책임 공방…. 결국 선관위측과 약속시간이 훨씬 지난 후에야 민주노동당 김선동 사무총장과 김창현 전 사무총장 등이 과천 중앙선관위로 향했다. 그나마 실무자는 누가 갈지를 두고는, 차를 타기 직전까지 쭈뼛거리며 싸웠다. 가야 할 사람은 명확했지만, (불편하고, 덤태기 쓸지 모르는 자리에) 가고 싶은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선관위는, 민주노동당의 문제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저, 2006년에도 ‘연래행사’처럼 1억7천만원의 국고지원금을 삭감하고는 끝냈다. 현재 민주노동당이 지역조직과 상근자를 유지하고 있는 방식은 ‘비합법 투쟁형’이라기보다 ‘편법형’에 가깝다. 정치권력이 언제든 이 약점을 꺼내 쓸 수 있다. '호구 잡혔다'는 말이다. 그리고, 지역에서 오랜 기간 투쟁하고 조직하며 진보의 깃발을 지킨 이들은, 어느덧 천덕꾸러기가 돼 있다.

혜안과 통찰은 고사하고

민주노동당은 8만 당원, 200여 지역조직을 거느린 전국정당이라고 자랑할 입장이 아니다. 뼈대와 근육은 손상됐고, 거동은 불편하다.

당기위원장 선임 문제, 당사 이전 문제, 보좌관의 음주 뺑소니 사고 문제, 당 소속 지역의원의 음주운전 문제, 상설연대체 참여 및 북한 핵실험을 둘러싼 정파갈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논쟁할 생각 없다) 문제 등등. 분쟁 말고는 세간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없다. 이 상황이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정당 운동세력이 현재 입각해야 할 현실이다.

다시 국회의원으로 돌아오자. “당직공직 겸직이 금지돼 있다. 의원들이 당에 대한 책임을 느낄 구조가 아니다.” 복수의 민주노동당의 전략가들이 한 말이다. “그건 이제 식상한 이야기다. 언제까지 그 말 할 건가”라는 반문에 전략가들은 “그건 그렇다”고 인정했다. 연재의 앞선 순서에서 말했듯, 1987년부터 1997년까지 진보노동운동 세력의 한줌 역량이 모두 국회로 투자됐다. 책임의 범위는 무한한 것이다.

누가 초소로 보냈나?

한 전직 보좌관의 말처럼, 현재 민주노동당 의원실은 초소다. 초소는 전방주시와 대응이 주된 임무다. 적 방향에서 사안이 발생하면, 대응하고, 사안이 없으면 없다고 보고하는 게 초소의 임무다. 각 의원실은 상임위라는 초소 안에서 자체 교범에 맞게 전투를 수행 중이다. 또한 초소와 초소를 이어 전선을 만드는 것은 당의 임무일지 모른다. 하지만 전선을 만들 능력이 당에는 없다는 것을 이미 말했다. 또 한가지, 누가 의원들에게 초소를 지키라고 명했나를 살펴보자.

민주노동당의 의원 활용전술 즉 원내전술과 관련한 진지한 논의는 17대 국회 개원 직전인 ‘당선자 연수’에서 이뤄졌다.

2004년 5월 민주노동당 의원 당선자 10명은 남원연수원에 모여, ‘거대한 소수’ 전략을 기본으로 한 ‘개혁 네트워크’ 구성 전술에 공감대를 이뤘다(당선자 연수는 결론을 낼 권한이 없었다). 이후 이뤄진 2004년 첫 정기국회까지 이 전술은 각 의원들의 활동에 기본 틀로 자리 잡았다.

2004년 첫 국감에서,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진보에서 개혁 사이에 속한 모든 시민사회노동민중단체들의 의견을 구했다. 정책위는 개혁네트워크 구성을 위한 워크숍을 40회 넘게 진행했다.

“의원이 상임위 직원이냐?”

의견이 교류되던 장은 상임위였다. 정보와 의제를 들고 오는 사람들도 상임위의 틀에 맞게 들고 왔고, 받아들이던 당도 상임위 내에서 소화할 방법을 찾았다. 2004년 민주노동당 국정감사의 슬로건은 ‘참여·민생·정책국감’이었다

각 의원의 활동은 급속히 상임위 내로 빨려 들어갔다. 상임위로 의원단의 활동은 분절됐다. ‘선택과 집중’, ‘의원단의 통일된 활동’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초병들은 초소 내 문제와 초소 전방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개혁 네트워크’ 전술을 제안했던 당의 전략가들도, 이 전술은 한계가 명확한 전술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등원 전이었고, 국회에 식당이 어딘지도 모른 상태에서 나온 전술이었다. 오류는 필연이었다. 전술·전략은 수정하면 될 일.

2004년 5월 이후에 민주노동당은 ‘의원 활용방안’에 대한 어떤 진지한 논의도 진행한 바 없다. 매년 당대회에 의원단의 사업기조가 제출되지만, ‘몇대 원칙 몇대 과제’식의 현안 나열을 벗어나지 못했다. 초소로 들어간 의원들은 나올 줄 몰랐다. 각자의 활동영역이 굳어진 상황에서 굳이 어려운 말을 나눌 필요가 없었다. 민주노동당 의원단 내부 분위기는 ‘원로원’처럼 변했다.

국회를 오래 출입한 한 정치부 기자는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상임위 직원 같다”고 비꼬았다.

상임위에서 피감기관의 실수를 잡아내고, 법안을 발의하고, 타당 의원이 발의한 법안을 검토하고, 상임위 분야의 현안에 대응하는 게 ‘정책 활동’, ‘정책 국회의원’이라는 말로 포장됐다. 당은 한번도 상임위를 중심으로 한 의정활동을 결정하지 않았다. 그저 흘러갔을 뿐이다.

뚝방의 전설은 없다

을지문덕이 역사적 인물인 까닭은?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이 명장면인 까닭은? 병사가 많고, 보급이 잘되는 군대가 이기는 게 당연한데, 가끔 소수가 이기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아주 가끔 벌어진다. 단병호 의원실에서 일하던 강문대 변호사는 보좌관으로 일하던 당시를 이렇게 비유했다.

“저쪽이 로마 병정이라면, 우리는 원주민이었다. 정규군이 줄 맞춰서 공격해오는데, 돌 몇개 던지던 꼴이었다.”

290대9의 구도에서, 각 상임위별로 ‘17대1’의 양상으로 싸움이 진행됐다. ‘뚝방의 전설’은 생기지 않았다.

단병호 의원은 2월27일 환경노동위에서 비정규법이 처리될 때, 국회 경비에게 손발이 잡힌 채, “3월에 합시다. 꼭 오늘 안한다고 하늘이 무너집니까”라며 절규했다.

심상정 의원은 지난 13일, 재벌 총수 등으로 구성된 자신의 국정감사 증인요구를 철회하며, 울먹였다. 증인신청 여부를 재경위에서 표결을 해봐야 승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은 원내 진출 이후에, 2006년 상반기까지 232건의 법안을 발의했다. 대부분의 법안이 상임위에 계류 중이며, 원안 가결된 법안은 7건, 수정가결된 법안은 2건이 있다. 대안 폐기돼거나, 폐기된 법안은 15건이다.

통과되고 반영된 법안의 주요내용은 △학교보건법에서 건강검진과 관련된 조항 △파산으로 인한 불이익 금지조항 △장애인 이동권과 관련된 조항 △최저임금법 중 기준 산정과 관련된 조항 △에너지 기본법에서 보편적 공급 기여에 대한 조항 △학교급식법의 일부 조항 등이다. 민주노동당이 제도권 정치에 새로 등장시킨 의제들도 있다. 하지만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통과될 만한 법안’이었기 때문이다.

그이외의 법안은 사실, 현실 법리체계 안에 반영되기 어려운 정책보고서에 가깝다. 원내 세력관계는 이미 2004년 4월15일에 결정됐다.

실력행사의 방식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국회에서 여러차례 농성과 실력행사를 했다. 2004년 등원 직후에 김선일씨가 이라크에서 피살되자 첫 농성을 벌였다. 그후, 같은해 겨울 국가보안법 개·폐정안 ‘연내처리’와 민생법안 처리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환노위 소회의실은 단골 농성장이었다. 법사위원회와 통일외교통상위 회의실도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농성장으로 쓰인 적이 있다. 우선 의원들이 장기 단식을 한 경우를 살펴보자.

첫번째는 권영길 의원이 2004년 11월29일부터 12월5일까지 단식을 했다. 경찰은 11월24일 창원에 있는 권영길 의원 사무실에서, 피신해 있던 공무원노조 파업 주동자 2명을 경찰이 잡아갔다. 사무실에서 강제 연행됐다. 권 의원은 7일간 단식을 했고, 이해찬 당시 국무총리가 사과하는 것을 계기로 단식을 풀었다. 당시 단식 슬로건은 “민주주의를 구하겠습니다”였다.

두번째 단식은 강기갑 의원이 2005년 10월27일부터 11월24일까지 29일간 단식했다. 강 의원의 단식은 깔끔하게 끝나지 않았다. 강 의원은 단식 끝에 실신해 병원으로 실려가, 병원에서 영양제를 맞고 다시 국회 본청 단식농성장으로 왔다.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강 의원의 단식 재개를 강력하게 말렸다.

당시 의원들은 강기갑 의원의 건강이 우려돼서 말렸을까? 11월24일, 국회 본청 민주노동당 회의실에선, ‘단식을 계속하겠다’는 강기갑 의원과 ‘그만 해야 한다’는 다른 의원들이 3시간 동안 입씨름을 했다. 당시 강기갑 의원은 복식을 시작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29일 동안 단식을 한 사람의 건강이 정말 우려됐다면, 3시간 동안 입씨름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의원들은 “영양제를 맞으면 단식은 끝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미 전술적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도 했다. ‘병원에서 돌아온 후 단식 재개’, 이게 추문의 범주에 들어가는 문제일까? 원내 진출 이후 쌓아온 몇가지 이미지와 관념이 강 의원의 단식과 맞지 않았던 것이다.

강기갑 의원은 당일, “왜 안 된다는지, 이해가 안 된다”면서 곤혹스러워했다. 당시 전농을 비롯한 농민단체들은 마지막 조직력까지 짜내며 투쟁하고 있었다.

과격한 게 문제였나?

민주노동당은 수차례 걸쳐 환노위 회의장을 점거했다. 점거가 거듭될수록 의원들은 곤혹스러워했다. 대중투쟁은 받쳐주지 않았다. 양대노총 지도부들은 의원들이 점거를 하는 동안, 국회에 들어와 있었다. 국회 밖에는 깃발 몇개와 몇명 안 되는 시위대가 있었다. 곤혹스러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왜 점거를 하는지가 명확치 않다는 것이다. 대안 입법이 목적이었나? 어차피 17대 국회의 의석구조상, 민주노동당이 발의한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안은 처리 불가였다. 이미 양대노총과 경총, 노동부와 정치권이 함께한 협상은 결렬된 상황이었다. 입구제한과 출구제한, 고용의제와 고용의무, 기간의 문제 등 여러 쟁점 중 한가지만 어긋나도 민주노동당은 동의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저지가 목적이었나? ‘협상 가능한’ 대안입법안이 없는 상태에서 저지전술을 오래 쓰면 ‘곤혹스런 상황’은 당연히 닥치게 된다.

저지든, 대안입법이든 민주노동당이 확실한 전술이 섰다면, 권리보장 입법안을 주장하는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싸움의 현장으로 국회를 택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막상 환노위를 통과하던 날, 단병호 의원은 “꼭 오늘 처리해야 하냐”며 고함을 쳤다. 상황은 애절했으나, 말을 이해하긴 어려웠다.

한나라당은 사학법 문제, 국가보안법 문제와 관련 자당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국회를 자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국회 본회의장은 자주 한나라당 의원들에 의해 점거됐다. 장외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국회 파행은 한나라당의 중요한 협상카드였다.

2004년 12월, 과반수 이상인 152석을 가진 집권여당의 의원들도, 국가보안법을 개정해야 한다며 국회 본청에서 농성을 했다.

일 잘하는 의원이 필요했나?

민주노동당은 과연 그들보다 과격했나? 그리고 과격할 땐, 정교했나? 그 모든 것은 국회 담장 안에서 이뤄졌다.

대중은 17대 국회에서도, 그 이전에도 국회와 정치에 신물을 느끼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의 ‘정책’은 도매금으로 처리된다.

창당 초기부터 지역에서 활동하던 한 지역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비례대표 의원들은 다음 총선에서 지역구로 나와 ‘일 잘하는 국회의원 다시 한번 뽑아 달라’고 선거운동 슬로건 뽑을 것인가? 이미 그런 의원은 국회에 차고 넘친다.”

'일 잘하는 국회의원', 그것이 정책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런 국회의원은 이미 국회 담장 안에 차고 넘친다. '일 잘하는 국회의원', 그것이 민중의 호민관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런 국회의원은 민주노동당의 의원단을 포함해서 아직까지도 국회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민주노동당의 미래의 지지자들은 어떤 국회의원을 보고 싶어할까.

민주화가 됐다지만 아직도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세상이다. 열명밖에 되지 않는 민주노동당 의원단은 법(=정책)을 만들 힘이 업다. 운동권이 몰락한 게 합리성(=정책)이 결여돼 대중설득논리가 결핍되어서인가. 유권자가 보고 싶어한 것은 다른 정치였고, 그것은 처음에는 주먹과 억지로 시작되는 것이다.

정용상 기자 ysjung@labortoday.co.kr
2006-10-18ⓒ매일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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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항소이유서

1985년 최초 유통된 <항소이유서> 복사본에는 원문과 달리 여러 곳 글자나 문장이 빠진 곳이 있습니다. 최근 인터넷에 떠 있는 <항소이유서>는 당시 복사본을 옮긴 것이라 마찬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벌써 18년이 넘게 지난 사건이지만 관련자들의 이름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어서 자칫 그분들의 명예에 누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이 ‘정본 항소이유서’는 필자인 유시민이 직접 오탈자를 바로잡고 새삼 거론되기를 원하지 않을 관련자들의 이름과 불필요한 정보를 삭제하는 등 부작용을 없앤 후, 2003년 1월 18일 다음카페 ‘시민사랑’ 자료실에 올린 것입니다. 바로잡은 부분은 고딕으로 표시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본 적 : 경상북도 월성군 ○○면 △△동
주 소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흥 1동 ○○아파트 11동 △△호
성 명 : 유 시 민
생년월일 : 1959년 7월 28일
죄 명 :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요 지
본 피고인은 1985년 4월 1일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에서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 받고 이에 불복 다음과 같이 항소이유서를 제출합니다.

다 음
본 피고인은 우선 이 항소의 목적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1심 선고형량의 과중함을 애소(哀訴)하는데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이 항소는 다만 도덕적으로 보다 향상된 사회를 갈망하는 진보적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는 노력의 소산입니다. 또한 본 피고인은 1심 판결에 어떠한 논란거리가 내포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며 알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본 피고인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양심이라는 척도이지 인간이 만든 법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법률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본 피고인으로서는 정의로운 법률이 공정하게 운용되는 사회에서라면 양심의 명령이 법률과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에 서게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으리라는 소박한 믿음 위에 자신의 삶을 쌓아올릴 수밖에 없었으며 앞으로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 인간집단과 인간집단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행위는 본질적으로 그 사회의 현재의 정치적·사회적·도덕적 수준의 반영인 동시에 미래의 그것을 결정하는 규정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이하 폭행법이라 함) 위반 혐의로 형사소추되어 1심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본 피고인으로서는 자신이 관련된 사건이 우리 사회의 어떠한 정치적·사회적·도덕적 상태의 반영이며 또 미래의 그것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규명함과 동시에 사건과 관련된 각 개인 및 집단의 윤리적 책임을 명백히 밝힐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 사회가 젊은 대학생들이 동 시대의 다른 젊은이들을 폭행하였다는 불행한 이 사건으로부터 “개똥이와 쇠똥이가 말똥이를 감금 폭행하였다. 그래서 처벌을 받았다”는 식의 흔하디흔한 교훈밖에 배우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건 자체보다 더 큰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 항소이유서는, 부도덕한 개인과 집단에게는 도덕적 경고를, 법을 위반한 사람에게는 법적 제재를, 그리고 거짓 선전 속에 묻혀 있는 국민에게는 진실의 세례를 줄 것을 재판부에 요구하는 청원서라 하겠습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 피고인은 법률에 대해 논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이 글 속에서 ‘책임’ ‘의무’ ‘과실’ 등등의 어휘는 특별한 수식어가 없이 사용된 경우, 그 앞에 ‘윤리적’ 또는 ‘도덕적’이라는 수식어가 생략된 것으로 간주하여 무방합니다. 그리고 본 피고인이 특히 힘주어 말하고 싶은 단어나 문장에는 윗점을 사용하였습니다.

본 피고인은 우선 이 사건을 정의(定義)하고 나서 그것을 설명한 다음 사건과 관련하여 학생들과 현정권(본 피고인이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칙에 비추어 제 5 공화국이 합법성과 정통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표시하기 위해 정부대신에 정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각자가 취한 행위를 분석함으로써 이 글의 목적을 달성코자 합니다.

이 사건은 학생들에 의해서는 ‘서울대 학원 프락치사건’으로, 정권과 매스컴에 의해서는 ‘서울대 외부인 폭행사건’으로 또는 간단히 ‘서울대 린치사건’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명칭의 차이는 양자가 사건을 보는 시각을 전혀 달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건의 본질 자체가 달라질 리는 만무한 일입니다. 본 피고인이 가능한 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 사건을 정의하자면 이는 “정권과 학원간의 상호적대적 긴장이 고조된 관악캠퍼스 내에서,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은 네명의 가짜학생을 다수의 서울대 학생들이 연행·조사하는 과정에서, 혹은 약간의 혹은 심각한 정도의 폭행을 가한 사건”입니다.

‘정권과 학원간의 상호적대적 긴장상태’를 해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4월 민주혁명을 짓밟고 이 땅에 최초의 군사독재정권을 수립한 5·16 군사쿠데타 이후 4반세기에 걸쳐 이어온 학생운동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혈사(血史)와 아울러 가열되어온 독재정권의 학원 탄압사를 살펴보아야 할 터이지만, 이 글이 항소이유서임을 고려하여, 1964~65년의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소위 6·3사태), 1974년의 민청학련 투쟁, 1979년 부산마산지역 반독재 민중투쟁 등을 위시한 무수한 투쟁이 있어 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데 그치기로 하고 현정권의 핵심부분이 견고히 형성되어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1979년 12월 12일의 군사쿠데타 이후 상황만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경제적 모순·사회적 갈등·정치적 비리·문화적 타락은 모두가 지난 날의 유신독재 아래에서 배태·발전하여 현정권 하에서 더욱 고도성장을 이룩한 것들입니다. 현정권은 유신독재의 마수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와 민주회복을 낙관하고 있던 온국민의 희망을 군화발로 짓밟고, 5·17 폭거에 항의하는 광주시민을 국민이 낸 세금과 방위성금으로 무장한 ‘국민의 군대’를 사용하여 무차별 학살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피묻은 권력입니다. 현정권은 정식출범조차 하기 전에 도덕적으로는 이미 파산한 권력입니다. 현정권이 말하는 ‘새시대’란, 노골적·야수적인 유신독재헌법에 온갖 화려한 색깔의 분칠을 함으로써 그리고 총칼의 위협아래 국민에게 강요함으로써 겨우 형식적 합법성이나마 취할 수 있었던 ‘새로운 유신시대’이며, 그들이 말하는 ‘정의(正義)’란 ‘소수군부세력의 강권통치’를 의미하며, 그들이 옹호하는 ‘복지’란 독점재벌을 비롯한 ‘있는 자의 쾌락’을 뜻하는 말입니다.

‘경제성장’ 즉 자본주의 발전을 위하여 ‘비효율적인’ 각종 민주제도(삼권분립, 정당, 노동조합, 자유언론, 자유로운 집회결사) 등을 폐기시키려 하는 사상적 경향을 우리는 파시즘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파시스트 국가의 말로가 온 인류를 재난에 빠뜨린 대규모 전쟁도발과 패배로 인한 붕괴였거나, 가장 다행스러운 경우에조차도 그 국민에게 심대한 정치적·경제적 파산을 강요한 채 권력내부의 투쟁으로 자멸하는 길뿐임을 금세기의 현대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나찌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군국주의 일본은 전자의 대표적인 실례이며,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 합법정부를 전복시키고 등장했던 칠레·아르헨티나 등의 군사정권, 하루저녁에 무너져버린 유신체제 및 지금에야 현저한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 따위는 후자의 전형임에 분명합니다.

국가는 그것이 국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만이 구성원 모두에게 서로 방해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복과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기 때문에 존귀합니다. 지난 수년간,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요구하며 투쟁한 노동운동가, 하느님의 나라를 이땅에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 양심적 종교인, 진실과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감수한 언론인과 교수들, 그리고 민주제도의 회복을 갈망해온 민주정치인들의 선봉에 섰던 젊은 대학인들은, 부도덕하고 폭력적이며 비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반민중적이기 때문에, 국민이 자유롭게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조건 아래서라면 단 한 주일도 유지될 수 없는 현 군사독재정권이 그토록 존귀한 우리 조국의 대리인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해 왔습니다. 우리 국민은 보다 민주적인 정부를 가질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정권은 12·12 군사쿠데타 이후 4년 동안 무려 1,300여명의 학생을 각종 죄목으로 구속하였고 1,400여명을 제적시키는 한편 최소한 500명 이상을 강제징집하여 경찰서 유치장에서 바로 병영으로 끌고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정 구석구석에 감시초소를 세우고 사복형사를 상주시키는 동시에 그것도 모자라 교직원까지 시위진압대로 동원하는 미증유의 학원탄압을 자행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한번도 이러한 사실을 시인한 적이 없으며, 1982년 기관원임을 자칭한 괴한에게 어린 여학생이 그것도 교정에서 강제추행을 당하는 기막힌 사건이 일어났을 때조차, 최고위 치안 당국자는 국회 대정부 질의에 대하여 “교내에 경찰을 상주시킨 일이 없다. 유언비어의 진원지를 밝혀내 발본색원하겠다”고 태연하게 답변하였을 정도입니다. 현재 학원가를 풍미하고 있는 정권, 특히 경찰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은 이와 같은 정권의 학원탄압 및 권력층의 상습적인 거짓말이 초래한 유해한 결과들 중의 한 가지에 불과합니다.

이솝우화의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은 양떼를 잃어버리는 작은 사건을 낳는데 그쳤지만 주 유왕(周 幽王)이 미녀 포사(褒似)를 즐겁게 하기 위해 거짓봉화를 울린 일은 중국대륙 전체를 이후 500여년에 걸친 대 전란의 와중에 휩쓸리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양치기 소년의 외침을 외면한 마을사람들이나 오랑캐에게 유린당하기까지 주(周)왕실을 내버려 둔 제후들을 어리석다 말하지 않습니다. 정권의 주장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으려는 학생들의 불신은 과연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더욱이 야만적이고 부도덕한 학원탄압은 전국 각 대학에서 목숨을 건 저항을 유발하였고 그 결과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학생들이 생명을 잃거나 중상을 당했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만도 고 김태훈·황정하·한희철 등 셋이나 되는 젊은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83년 12월의 소위 자율화조치 이후에도 주전선(主戰線)이 교문으로 이동하였다는 단 한 가지를 제외하면 거의 변함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특히 지난해 9월 총학생회 부활을 전후하여 더욱 강화되었던 수사기관의 학원사찰, 교문앞 검문검색, 미행과 강제연행 등으로 인해 양자간의 적대감 또한 전례 없이 고조된 바 있습니다. 즉 소위 자율화조치 이후에도 ‘학원과 정권 사이의 적대적 긴장상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바로 이와 같은 조건 하에서 수명의 가짜학생이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을만한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예기치 못한 사건입니다. 이들의 의심을 받게 된 경위 및 사건경과는 이미 밝혀진 바이므로 재론할 필요가 없지만 여기에서 가짜학생에 대해서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이 실제로 정보원인지 그 여부는 극히 중요한 정치적 관심사임에 분명하지만 사건의 법률적·윤리적 측면과는 거리가 있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연행·감금·조사 또는 폭행한 것은 결코 정보원이나 단순한 가짜학생이 아닌 ‘정보원 혐의를 받고 있는 가짜학생’이었으므로, 조사 결과 그들이 정보원이었다고 해서 폭행까지도 정당할 수는 없으며, 또 아니라고 해서 학생들의 일체의 행위가 모두 부당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이 문제에 대해 재론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정보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 의해서 입니다.

갖가지 목적으로 학생처럼 위장하고 캠퍼스를 배회하는 수많은 가짜 학생들, 이들은 소위 대형화·종합화된 오늘날의 대학에서, 졸업정원제·상대평가제 등 대학을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마비되어 제 한 몸 잘사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전문기능인의 집단양성소로 전락시키기 위해 독재정권이 고안해 낸 각종 제도가 야기한 바 대학인의 원자화·고립화 등 비인간화 현상을 틈타 캠퍼스에 기생하는 반사회적 인간집단으로서, 교내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절도·사기·추행·학원사찰의 보조활동(손○○의 경우처럼) 등과 복합적인 관련을 맺고 있음으로 해서 대학인 상호간에 광범위한 불신감을 조성하고 대학의 건강한 공동체문화를 파괴하는 암적 존재입니다. 현정권은 이들이 대학인의 일체감을 파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내에 사복경찰을 상주시킴으로써 야기된 숱한 문제들마저 이들에게 책임 전가시킬 수 있다는(여학생 추행사건 때처럼) 잇점 때문에 가짜학생의 범람현상을 방관 또는 조장하여 온 것입니다. 따라서 학생들이 이들에 대해 평소 품고 있는 혐오감이 어떠한가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일입니다.

이들이, 이들 가짜들이, 혹은 복학생들의 소규모 집회석상에서 혹은 도서실에서, 법과대학 사무실에서, 강의실에서, 버젓이 학생행세를 하면서 학생활동에 대한 정보 수집활동을 하다가 탄로났을 경우, 법이 무서워서 이를 묵과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일이겠습니까? 상호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바로 그들을 보냈으리라 추정되는 수사기관에, 정보원 혐의를 받고 있는 가짜학생의 신분조사를 의뢰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대학의 교정은 개방된 장소이므로 은밀한 사찰행위뿐만 아니라 예전처럼 수백 수천의 정·사복 경찰이 교정을 온통 휘젓고 다닌다 할지라도 이는 전혀 비합법 행위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본 피고인은 이러한 행위가 도덕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이러한 부도덕한 학원 탄압행위에 대한 학생들의 여하한 실질적 저항행위도, 비록 그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한 일이지만, 현행 법률에 대한 명백한 침해가 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정의로운 사회에서라면 존재할 수 없는 법과 양심의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가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그 누구도 이 상황에서 법과 양심 모두를 지키기란 불가능합니다. 이 사건이야말로 우리 사회 전체가, 물론 대학사회도 포함하여, 당면한 정치적·사회적 모순의 집중적 표현이라는 학생들의 주장은 바로 이와 같은 논거에 입각한 것입니다. 법은 자기를 강제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지만 양심은 그렇지 못합니다. 법은 일시적 상대적인 것이지만 양심은 절대적이고 영원합니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양심은 하느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 피고인은 양심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법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양심의 명령을 따르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이 사건에서만이 아니라 그 이전의 어느 사건에서도 그랬습니다.

지난해 9월, 10일간에 걸친 일련의 사건은 이렇게 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자체로서 그리 복잡하지 않은 이 사건은 서울대생들의 민한당사 농성사건, 주요 학생회 간부들의 제적·구속, ‘학생운동의 폭력화’에 대한 정권과 매스컴의 대공세, 서울대 시험거부 투쟁과 대규모 경찰투입 등 심각한 충격파를 몰고 왔으며 공소 사실을 거의 전면 부인하는 피고들에게 유죄를 선고함으로써 일단락된 바 있습니다.

사건종료 다음날인 9월 28일 전 학도호국단 총학생장 백태웅과 뒤늦게 프락치사건 대책위원장을 겸직한 사회대 학생회장 오재영군 등이 지도한 민한당사 농성은 자연발생적·비조직적으로 일어난 이 사건을 부도덕한 학원사찰 및 정권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는 조직적 투쟁으로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가짜 학생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법률적·윤리적 과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학원사찰의 존재라는 별개의 정치적 문제를 덮어둘 수는 없는 일이므로, 이 투쟁은 그 자체로서 완전히 정당한 행위였다고 본 피고인은 생각합니다.

이 일이 있은 다음 날인 9월 29일 저녁 학교당국은 이정우·백기영·백태웅·오재영 등 4명의 총학생회 주요간부를 전격적으로 제명 처분하였으며 본 피고인은 9월 30일 하오 경찰에 영장 없이 강제연행 당한 후 며칠간의 조사를 받고 구속되었습니다. 본 피고인이 가장 먼저 연행당한 것은 미리 도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도피하지 않은 것은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고,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은 도망칠 만큼 잘못한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은 경찰·검찰에서의 조사 및 법정진술시 기억력의 한계로 인한 사소한 착오 이외에 여하한 수정·번복도 한 바 없었으며 오직 사실 그대로를 말했을 따름입니다.

어쨌든 서울시경국장은 10월 4일 소위 ‘서울대 외부인 폭행사건’의 수사결과를 도하 각 신문·TV·라디오를 통해 발표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4명의 외부인을 감금·폭행한 이 일련의 사건이 복학생협의회 대표였던 본 피고인 및 학생대표들의 합의 아래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10월 4일 이전에 경찰에 연행된 몇몇 학생들 중(본 피고인을 포함) 어느 누구도 이 발표를 뒷받침해줄 만한 진술을 한 바 없으며, 이후에 작성된 구속영장·공소장 및 관련학생들의 신문조서들이 모두 이 발표의 기본선에 맞추어 만들어진 것임은, 만일 이 모든 서류를 날짜별로 검토해 본다면, 누구의 눈에나 명백한 일입니다.

한마디로 10월 4일의 경찰발표문의 본질은 모종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견강부회·침소봉대·날조왜곡 바로 그것입니다. 그 목적이란 다름이 아니라 학생운동을 폭력지향적인 파괴활동으로 중상모략함으로써 이 사건의 정치적 성격은 물론 현정권 자체의 폭력성과 부도덕성을 은폐하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이 비조직적·우발적으로가 아니라, 학생단체의 대표들에 의해 조직적이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몇몇 관련 학생뿐만이 아니라 학생운동 전체를 비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총학생회장, 학도호국단 총학생장, 프락치사건 대책위원장, 복학생협의회 대표 등은,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인간이며 어떤 행위를 실제로 했는가에 관계없이 선전을 위한 가장 손쉬운 희생물이 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수법은 지난 수십년간 대를 이어온 독재정권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상투적으로 구사해온 낡은 수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현정권은 막 출범한 서울대 학생회의 주요 간부의 활동을 실질적으로 봉쇄하는 동시에, 60만 대군을 동원해도 때려 부술 수 없는 학생운동의 도덕성을 훼손시키는 데에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마치 자신이 더 도덕적인 존재가 된 듯한 자기만족조차 조금은 맛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검찰 역시 사실을 밝혀내는 일보다는 경찰의 발표를 뒷받침하기에만 급급하여 대동소이한 내용의 공소를 제기하고 그것에만 집착하여 왔습니다. 사건 발생후 일개월도 더 지난 작년 11월, 관악경찰서 수사과 형사들이 김도형·손택만군 등 무고한 학생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함으로써 공소사실과 일치하는 허위자백을, 형사들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짜내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즉 경찰은 본 피고인들이 ‘폭행법’을 위반하였다는 증거를 바로 그 ‘폭행법’을 위반하여 관련된 학생들을 고문함으로써 짜낸 것입니다. 그 짜내어진 허위자백이 증거로 채택된다는 사실을 못 본 체 하더라도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중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전혀 정당한 윤리적 기초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양심인으로서는 복종의 의무를 느낄 필요가 없었던 지난날의 긴급조치나 현행 ‘집시법’과 달리 이 ‘폭행법’은 지켜져야 하며 또 지켜질 수 있는 법률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각인은 현정권에 대한 정치적 견해에 따라 이 법 앞에서 불평등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본 피고인은,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학생들을 상습적으로 폭행·고문하는 각 대학 앞 경찰서의 정보과 형사들이 그 때문에 ‘폭행법’ 위반으로 형사소추당했다는 비슷한 이야기조차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19일, ‘민주화운동 청년연합’이 주최한 광주항쟁 희생자 추모집회에 참석하였다가 귀가하는 길에, 그녀 자신 제적학생이면서 역시 고려대학교 제적학생인 서원기씨의 부인 이경은씨가 동대문 경찰서 형사대의 발길질에 6개월이나 된 태아를 사산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부부는 이 법의 보호 밖에 놓여 있음이 누구의 눈에나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고소장을 접수하고서도, 검찰은 수사조차 개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 역시 여러 차례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조사받는 과정에서 폭행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 법의 보호를 요청할 엄두조차 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에게도 협박 또는 폭행을 가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본 피고인은 폭력범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말았습니다. 본 피고인이 굳이 지난 일을 이렇듯이 들추어냄은 오직, 흔히 이야기되고 있는 바 검찰의 정치적 편향성의 존재를 환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이 사건을 담당한 경찰관 역시 앞에서 밝힌 바 현정권의 정치적 음모와 무관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론적으로 검찰이 주장하는 바 공소사실의 대부분은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경찰이 날조한 사건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으로서, 한편에 있어서는 정권과 매스컴이 공모하여 널리 유포시킨 일반적인 편견이 기초 위에 서 있으며,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경찰이 고문수사를 통해 짜낸 관련 학생들의 허위자백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공허한 내용으로 가득찬 것입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이 이 사건에서 드러난 학생들의 과실과 본 피고인 자신의 법률적·윤리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이렇듯 정권의 부도덕을 소리 높이 성토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가짜학생에 대한 연행·조사가 윤리적으로 정당하다손치더라도, 이들에게 가한 폭행까지를 정당화할 의향은 없습니다. 조사를 위한 감금은 가능한 한 짧아야 하며 폭행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현상적으로 폭력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본질상 다 폭력의 영역에 속할 수는 없지만, 무력한 개인에게 다중이 가한 폭행은 비록 그것이 경찰에 대한 이유 있는 적대감의 발로인 동시에 그들이 상습적으로 학생들에게 가해온 고문을 흉내 낸 것이라 할지라도 학생운동의 비폭력주의에서 명백히 이탈한 행위라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또 폭행을 가한 당사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책임을 감당하지 않은 것 또한, 비록 그것을 어렵게 만든 당시의 특수한 정치적 사정이 개재됐다손치더라도, 학생들이 가진 윤리적 결함의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자신 폭행과 절대로 무관하며 사건 전체와도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여 틀림이 없을 총학생회장 이정우군이 스스로 모든 책임을 떠맡아 항소조차 포기했다고 하는 아름다운 행위가, 그 누구도 선뜻 폭행의 책임을 감당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윤리의 공백상태를 어느 정도는 메꾸어 주었다고 본 피고인은 확신합니다.

본 피고인은 역시 언행이나 조사를 지시한 사실이 없지만(지시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만일 그럴 필요가 있었다면 언제라도 기꺼이 직접 그들을 연행·조사하였을 것입니다(그것이 위법임은 물론 잘 알지만). 본 피고인은 복학생 협의회의 사실상의 대표로서 개인적으로 비폭력의 원칙을 준수해야 할 소극적 의무에 부가하여 학생운동의 전체수준에서도 이 원칙이 관철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적극적 의무 또한 완수해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의 9월 26일 밤 전○○·정△△ 양인이 구타당하는 광경을 잠시 목격하고서도 그것을 제지하려 하지 않았던 본 피고인에게는 다른 학생들보다 더 큰 윤리적 책임이 있음에 분명합니다(법률적 측면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또한 임○○·손△△의 경우에도 본 피고인이 사건에 접했을 때는 이미 감금 및 조사가 진행 중이었으므로 어떠한 지시를 내릴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 자신도 조사를 위한 감금에 명백히 찬동했으며 또 잠시나마 직접 조사에 임한 적도 있기 때문에 법률을 어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에 따른 책임이라면 흔쾌히 감수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경우, 가능한 한 짧은 감금과 비폭력이라는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실제로 이 원칙이 관철되었으므로 본 피고인은 아무런 윤리적 책임도 느끼지 않습니다.

어쨌든 상당한 정도의 법률적·윤리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떠맡기 위해 이정우군처럼 처신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너무나도 명백한 정권의 음모의 노리개가 될 가능성 때문에 본 피고인은 사실과 다른 것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결코 시인하지 않으리라 결심하였고 또 그런 자세로 법정투쟁에 임해 왔습니다. 그래야만 본 피고인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책임감이, 공소사실을 기정사실화시키기 위해 우격다짐으로 요구하는 그것과는 성질상 판이한 것임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본 피고인은 이 사건의 재판이 갖는 정치적 의미가 무엇이며, 이 사건을 우리 사회의 도덕적 진보의 계기로 삼으려면 사법부가 본연의 윤리적 의무를 완수해야 함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사건은 누적된 정권과 학원간의 불신 및 적대감을 배경으로 하여 수명의 가짜학생이 행한 전혀 비합법적이라 할 수 없지만 명백히 부도덕한 정보수집행위가 본질적으로 부도덕하지 않으나 명백히 비합법적인 학생들의 대응행위를 유발함으로써 빚어진 사건입니다. 지난 수년간 현정권이 보여준 갖가지 부도덕한 행위들 - 학원 내에 경찰을 수백 명씩이나 상주시키면서도 온 국민에게 거짓증언을 한 치안당국자의 행위, 소위 자율화조치라고 하는 아름다운 간판 위에서 음성적인 학원사찰을 계속해온(이에 관해서는 법정에서 상세히 밝힌 바 있음) 수사기관의 행위,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 사건조차 서슴지 않고 날조·왜곡한 행위 등 - 은 같은 뿌리에서 돋아난 서로 다른 가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재판은 사건의 진정한 원인을 규명하여 그에 대한 처방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행위 중 비합법적인 부분만을 문제 삼아 처벌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마도 사법부 자체는 이처럼 부도덕한 정권의 학원난입 행위를 옹호하려는 의도가 없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태의 전후맥락을 모조리 무시한 채 조사를 위한 연행·감금마저(폭행 부분이 아니라)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규정한 1심의 판결은 지금 이 시간에도 갖가지 반사회적 목적으로 위해 교정을 배회하고 있을 수많은 가짜학생 및 정보원의 신변안전을 보장한 ‘가짜학생 및 정보원의 안전보장 선언’이 아니라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결코 학생들의 행위 전부에 대한 무죄선고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부도덕한 자에 대한 도덕적 경고와 아울러 법을 어긴 자에 대한 법적 제재가 가해져야 하며, 허위선전에 파묻힌 국민에게는 진실의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것, 사태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지 않고서는 우리 모두의 도덕적 향상은 기대될 수 없는 것을 주장할 따름입니다. 법정이 신성한 것은 그것이 법정이기 때문이 결코 아니며, 그곳에서만은 허위의 아름다운 가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때로는 추악해 보일지라도 진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늘날의 사법부가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正義)를 세우며, 또 그 정의가 강자(强者)의 지배를 의미하지 않는다면, 1심의 재판과정에서 매장당한 진실이 다시금 생명을 부여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본 피고인은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마도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렇지 않아도 쉽게 허물어버리기 어려울 만큼 높아져 있는 현재의 불신과 적대감의 장벽 위에 분노의 가시넝쿨이 또 더하여지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고, 언젠가는 더욱 격렬한 형태로 폭발할 유사한 사태를 반드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난 5년간 현정권에 반대했다 하여 온갖 죄목으로 투옥되었던 1,500여명의 양심수 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신성한 법정’에서 ‘정의로운 재판관’들에 의해 유죄선고를 받았습니다. 야수적인 유신독재 치하에서도 역시 그만큼 많은 분들이 전대미문의 악법 ‘긴급조치’를 지키지 않았다 하여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긴급조치 위반사건의 보도 또한 긴급조치 위반이었으므로 아무도 그 일을 말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변론을 하던 변호사도 그 변론 때문에 구속당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긴급조치가 정의로운 법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리고 그때 투옥되신 분들이 ‘반사회적 불순분자’ 또는 ‘이적행위자’였다고 말하는 이도 거의 없지만, 그분들을 ‘죄수’로 만든 법정은 지금도 여전히 ‘신성하다’고 하며 그분들을 기소하고 그분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검찰과 법관들 역시 ‘정의구현’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정의를 외면해 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법정이 민주주의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뜻일 것입니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정의를 세워왔다”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가 진정 진지한 인간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정의란 독재자의 의지이다”고 굳게 믿는 인간일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그곳에 민주주의가 살해당하면서 흘린 피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서만은 진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신성한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싶습니다. 본 피고인은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재판관이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정의에 관심을 갖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는’ 현명한 재판관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을 밝히는 일이야말로 정의가 설 토대를 건설하는 일이라 믿습니다.

이상의 논의에 기초하여 본 피고인은 1심판결에 승복할 수 없는 이유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합니다. 본 피고인은 판결문을 받아보았을 때 참으로 서글픈 심정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려 7회에 걸쳐 진행된 심리과정에서 밝혀진 사건의 내용과 거의 무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 피고인이 그토록 진지하게 임했던 재판의 전 과정이 단지 예정된 판결을 그럴듯하게 장식해주기 위해 치러진 무가치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선, 「판결이유」의 ‘범죄사실’ 제 1 항 중 “······임○○이····· 구타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피고인 유시민은 성명불상 학생들에게 위 임○○의 신분을 확인·조사토록 하고···”라는 부분은 형식논리상으로조차 성립할 수 없었습니다. 본 피고인에게 지시를 받은 학생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면, 어떻게 그가 성명불상일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본 피고인이 한번도 이를 시인한 바 없으며, 백수택군 등 여러학생들의 진술은 물론이요, 임○○ 자신의 법정진술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할지라도, 본 피고인이 임○○이 연행 구타되던 현장에 있었음을 증명하기란 불가능한 일인데, 하물며 본 피고인이 성명불상의 누군가에게 어떠한 지시를 내렸다는 일이 어찌 증명 가능하겠습니까? 사실 본 피고인은 그때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음, ‘범죄사실’ 제 2 항 중 “·····위 김도인은 피고인 백태웅과 피고인 유시민 앞에서····· 구타하여 동인(손○○를 말함)에게 전치 3주간의·····다발성 좌상을 가한·····” 부분 역시, “백태웅과 유시민에게 조사받는 동안 한번도 폭행당한 일이 없다”고 한 손○○ 자신의 법정진술에조차 모순됩니다.

그리고 ‘범죄사실’ 제 3 항 중 “피고인 유시민은·····동일(9월 26일을 말함) 21:00경부터 익일 01:00까지 피고인 윤호중, 같은 오재영 및 백기영, 남승우, 오승중, 안승윤 등과 같이·····(정○○을)·····계속 조사하기로 결의하고·····” 및 ‘범죄사실’ 제 4 항 중 이와 유사한 대목 역시, 본 피고인이 당시 진행중이던 총학생회장 선거관리 및 학생회칙의 문제점에 관해 선거관리 위원들과 장시간에 걸쳐 논의한 사실을 왜곡해 놓은 것에 불과하며, 이는 오승중, 김도형 등의 진술에 의해서도 명백히 밝혀진 일입니다.

이 몇 가지 예는 특히 현저하게 사실과 다른 부분을 지적한 것에 불과하며 판결문 전체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유사한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습니다. 이는 사건 전체가 본 피고인 및 학생대표들의 지휘 아래 의도적으로 진행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정권의 의도를 반영하는 현상으로서, 기실 판결문의 내용 중 대부분이 침소봉대·견강부회·날조왜곡된 지난해 10월 4일 경찰발표문을 원전(原典)으로 삼아 구속영장·공소장을 거쳐 토씨하나 바꾸어지지 않은 그대로 옮겨진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1심판결은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사건과 관련된 각 개인 및 집단의 윤리적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함으로써 우리 사회 전체의 도덕적 향상에 기여해야 할 사법부의 사회적 의무를 송두리째 방기한 것이라 판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 피고인이 이처럼 1심판결의 부당성을 구태여 지적한 것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당한 이유에 의한 유죄선고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현재 마치 '폭력 과격 학생'의 본보기처럼 되어 버린 본 피고인은 이 항소이유서의 맺음말을 대신하여 자신을 위한 몇 마디의 변명을 해볼까 합니다. 본 피고인은 다른 사람보다 더 격정적이거나 또는 잘난 체하기 좋아하는 인간이 결코 아니며, 하물며 빨간 물이 들어 있거나 폭력을 숭배하는 젊은이는 더욱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청년에 지나지 않으며 늘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말라”,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생각하라”, “거짓말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신, 지금은 그분들의 성함조차 기억할 수 없는 국민학교 시절 선생님들의 말씀을 불변의 진리로 생각하는, 오히려 조금은 우직한 편에 속하는 젊은이입니다. 본 피고인은 이 변명을 통하여 가장 순수한 사랑을 실천해 나가는,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 곧 민주주의의 재생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투쟁 전체를 옹호하고자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1978년 2월 하순, 고향집 골목 어귀에 서서 자랑스럽게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눈길을 등 뒤로 느끼면서 큼직한 짐 보따리를 들고 서울 유학길을 떠나왔을 때, 본 피고인은 법관을 지망하는 (그 길이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좋은 옷, 맛난 음식을 평생토록 외면해 오신 부모님께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또 그 일이 나쁜 일이 아님을 확신했으므로)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열아홉 살의 촌뜨기 소년이었을 뿐입니다. 모든 이들로부터 따뜻한 축복의 말만을 들을 수 있었던 그때에, 서울대학교 사회계열 신입생이던 본 피고인은 ‘유신 체제’라는 말에 피와 감옥의 냄새가 섞여 있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유신만이 살길이다”고 하신 사회 선생님의 말씀이 거짓말일 수도 없었으니까요, 오늘은 언제나 달콤하기만 했으며,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 설레던 미래는 오로지 장밋빛 희망 속에 감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달래는 벌써 시들었지만 아직 아카시아 꽃은 피기 전인 5월 어느 날, 눈부시게 밝은 햇살 아래 푸르러만 가던 교정에서, 처음 맛보는 매운 최루 가스와 걷잡을 수 없이 솟아나오던 눈물 너머로 머리채를 붙잡힌 채 끌려가던 여리디 여린 여학생의 모습을, 학생 회관의 후미진 구석에 숨어서 겁에 질린 가슴을 움켜쥔 채 보았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 모든 사물이 조금씩 다른 의미로 다가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숙사 입구 전망대 아래에 교내 상주하던 전투 경찰들이 날마다 야구를 하는 바람에 그 자리만 하얗게 벗겨져 있던 잔디밭의 흉한 모습은 생각날 적마다 저릿해지는 가슴속 묵은 상처로 자리 잡았습니다. 열여섯 꽃 같은 처녀가 매주일 60시간 이상을 일해서 버는 한달치 월급보다 더 많은 우리들의 하숙비가 부끄러워졌습니다. 맥주를 마시다가도, 예쁜 여학생과 고고 미팅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다 ‘문제 학생’이 될 조짐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 겨울, 사랑하는 선배들이 ‘신성한 법정’에서 죄수가 되어 나오는 것을 보고 나서는, 자신이 법복 입고 높다란 자리에 않아 있는 모습을 꽤나 심각한 고민 끝에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해 여름 본 피고인은 경제학과 대표로 선출됨으로써 드디어 문제 학생임을 학교 당국 및 수사 기관으로부터 공인받았고 시위가 있을 때면 앞장서서 돌멩이를 던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점증하는 민중의 반독재 투쟁에 겁먹은 유신정권이 내분으로 붕괴해 버린 10·26정변 이후에는, 악몽 같았던 2년간의 유신 치하 대학 생활을 청산하고자 총학생회 부활 운동에 참여하여 1980년 3월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그 봄의 투쟁이 좌절된 5월 17일, 본 피고인은 갑작스러이 구속 학생이 되었고, ‘교수와 신부를 때려준 일’을 자랑삼는 대통령 경호실 소속 헌병들과, 후일 부산에서 ‘김근조 씨 고문 살해'사건을 일으킨 장본인들인 치안 본부 특수 수사관들로부터 두 달 동안의 모진 시달림을 받은 다음, 김대중 씨가 각 대학 학생회장에게 자금을 나누어 받았다는 허위 진술을 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구속 석 달 만에 영문도 모른 채 군법 회의 공소 기각 결정으로 석방되었지만, 며칠 후에 신체검사를 받자마자 불과 40시간 만에 변칙 입대당함으로써 이번에는 ‘강집 학생'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입영 전야에 낯선 고장의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이면서 본 피고인은 살아 있다는 것이 더 이상 축복이 아니요 치욕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날 이후 제대하던 날까지 32개월 하루 동안 본 피고인은 ‘특변자’(특수 학적 변동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며, 늘 감시의 대상으로서 최전방 말단 소총 중대의 소총수를 제외한 일체의 보직으로부터 차단당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하 20도의 혹한과 비정하게 산허리를 갈라지른 철책과 밤하늘의 별만을 벗삼는 생활이 채 익숙해지기도 전인 그해 저물녘, 당시 이등병이던 본 피고인은 대학시절 벗들이 관계한 유인물 사건에 연루되어 1개월 동안 서울 보안사 분실과 지역 보안 부대를 전전하면서 대학 생활 전반에 대한 상세한 재조사를 받은 끝에 자신의 사상이 좌경되었다는, 마음에도 없는 반성문을 쓴 다음에야 부대로 복귀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다른 연대로 전출되었습니다. 하지만 본 피고인은 민족 분단의 비극의 현장인 중동부 전선의 최전방에서, 그것도 최말단 소총 중대라는 우리 군대의 기간 부대에서 3년을 보낼 수 있었음을 크나큰 행운으로 여기며 남에게 뒤지지 않는 훌륭한 병사였음을 자부합니다.

그런데 제대 불과 두 달 앞둔 1983년 3월 또 하나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세상을 놀라게 한 ‘녹화 사업' 또는 ‘관제 프락치 공작'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일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벗을 팔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는 가장 비인간적인 형태의 억압이 수백 특변자들에게 가해진 것입니다. 당시 현역 군인이던 본 피고인은 보안 부대의 공포감을 이겨 내지 못하여 형식적으로나마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타협책으로써 일신의 안전을 도모할 수는 있었지만 그로 인한 양심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군사 독재정권의 폭력 탄압에 대한 공포감에 짓눌려 지내던 본 피고인에게 삶과 투쟁을 향한 새로운 의지를 되살려준 것은 본 피고인과 마찬가지로 강제 징집당한 학우들 중 6명이 녹화 사업과 관련하여 잇달아 의문의 죽음을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동지를 팔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 순결한 양심의 선포 앞에서 본 피고인도 언제까지나 자신의 비겁을 부끄러워하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순결한 넋에 대한 모욕인 탓입니다. 그래서 1983년 12월의 제적 학생 복교 조치를 계기로 본 피고인은 벗들과 함께 ‘제적 학생 복교추진 위원회’를 결성하여 이 야수적인 강제 징집 및 녹화 사업의 폐지를 위해 그리고 진정한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며 복교하지 않은 채 투쟁하였습니다. 이때에도 정권은 녹화 사업의 존재, 아니, 강제 징집의 존재마저 부인하면서 우리에게 ‘복교를 도외시한 채 정부의 은전을 정치적 선동의 재료로 이용하는 극소수 좌경 과격 제적 학생들’이라는 참으로 희귀한 용어를 사용해 가면서, 어용 언론을 동원한 대규모 선전 공세를 펼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9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복학하게 되었을 때 본 피고인은 ‘민주화를 위한 투쟁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형태로든 계속되어야 한다’는 소신에 따라 ‘복학생 협의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과 복학한 지 보름 만에 이 사건으로 다시금 제적 학생 겸 구속 학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 피고인의 이름은 ‘폭력 학생’의 대명사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본 피고인은 이렇게 하여 5.17폭거 이후 두 번씩이나 제적당한 최초의 그리고 이른바 자율화 조치 이후 최초로 구속 기소되어, 그것도 ‘폭행법’의 위반으로 유죄 선고를 받은 ‘폭력 과격 학생’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은 지금도 자신의 손이 결코 폭력에 사용된 적이 없으며 자신이 변함없이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늙으신 어머니께서 아들의 고난을 슬퍼하며 을씨년스러운 법정 한 귀퉁이에서, 기다란 구치소의 담장 아래서 눈물짓고 계신다는 단 하나 가슴 아픈 일을 제외하면, 몸은 0.7평의 독방에 갇혀 있지만 본 피고인의 마음은 늘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빛나는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설레던 열아홉 살의 소년이 7년이 지난 지금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배처럼 비난받게 된 것은 결코 온순한 소년이 포악한 청년으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가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 내는' 부정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지난 7년간 거쳐온 삶의 여정은 결코 특수한 예외가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학생들이 공유하는 보편적 경험입니다. 본 피고인은 이 시대의 모든 양심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에 비추어, 정통성도 효율성도 갖지 못한 군사 독재 정권에 저항하여 민주 제도의 회복을 요구하는 학생 운동이야말로 가위눌린 민중의 혼을 흔들어 깨우는 새벽 종소리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오늘은 군사 독재에 맞서 용감하게 투쟁한 위대한 광주 민중 항재의 횃불이 마지막으로 타올랐던 날이며, 벗이요 동지인 고 김태훈 열사가 아크로폴리스의 잿빛 계단을 순결한 피로 적신 채 꽃잎처럼 떨어져 간 바로 그날이며, 번뇌에 허덕이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이 성스러운 날에 인간 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 바치고 가신 숱한 넋들을 기리면서 작으나마 정성들여 적은 이 글이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을 기원해 봅니다.

모순투성이이기 때문에 더욱더 내 나라를 사랑하는 본 피고인은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라면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격언인 네크라소프의 시구로 이 보잘것없는 독백을 마치고자 합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1985년 5월 27일
서울 형사 지방 법원 항소 제5부 재판장님 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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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의 항소이유서

아래 글은 김진숙님의 1995년도에 썼던 항소이유서입니다.
원글은 영남노동운동연구소의 기관지 연대와 실천 1995년 12월호에 실렸던 것입니다.

편집자주 : 부산노동자연합 김진숙 의장은 지난 10월13일 제3자개입,폭력, 업무방해,집시법 위반 등으로 구속되었다가 11월20일, 1심공판에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2년으로 풀려났다.
93년 동래봉생병원 노조의 59일에 걸친 치열한 파업투쟁을 지원,지지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시 동래봉생병원 노조는 신생노조로서 노조인정, 최소한의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한 상태였다.
그러나 병원측은 대화를 통한 해결보다는 합법적인 노동조합을 "빨갱이 집단"으로 내몰며 구사대를 동원, 대부분이 여성인 조합원들을 무차별 폭행하는 등 노조탄압에만 혈안이 되었다. 부산,양산지역 노동자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었고 동래봉생병원노조의 투쟁은 지역적 투쟁으로 확산되어갔다. 당시 누구도 동래봉생병원의 악랄한 노조탄압을 남의 일로 간과할 수 없었던 것은 병원의 비인간적인 폭력행위가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진숙 의장은 노조사수를 위해 울부짖는 동래봉생병원 노동자들의 절규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속되어야 했던 것이다. 현재 항소심 계류 중이다.


물이 0도에서 얼듯이 세상만물은 영하로 내려가야지만 얼어붙는 줄 알았습니다.

출감한 후 따뜻한 방안에서 발가락이 몹시 가렵고 잠시도 못참고 긁어대면서도 그저 무좀이려니 했습니다. 발가락을 끊임없이 긁어대는 걸 보다못한 친구가 제 발가락을 들여다보더니 화들짝, "동상이다!"하길래 그때서야 발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말 새끼 발가락부터 빙돌아 뒷꿈치까지 벌겋게 얼어 있었습니다. "부산엔 한번도 영하로 내려간 적이 없는데 발을 우쨌길래 이래되?ㅃ??"하는 친구의 핀잔을 들으며 가만히 생각하니 짚이는 구석이 있더군요.

제가 있던 독방은 누우면 머리끝과 발끝이 벽에 닿을 정도로 좁았습니다. 자연히 뼁끼통으로 불리우는 변소문짝이 발끝에 닿았었죠. 담요를 덮으면 발치께 담요 한자락이 변소안으로 들어가 버립니다.아크릴로 된 변소문짝이 달려있긴 해도,밑이 휑 뚤려있어서 잠결에 여차하면 담요자락이 그리로 들어가 버리거든요.그래서 의식적으로 담요를 자꾸 위로 끄집어 당기고,잘때도 그런 잠재의식이 작용을 했던지 발이 시려워서 새벽6시 기상전에 늘 깨곤 했었습니다.물론 양말은 신었었지요.

영하가 아니더라도 얼어버리는 게 있다는 사실을 무슨 귀중한 진리나 되는듯 깨닫습니다. 엄동설한 얼음이 꽁꽁 얼어있을 줄 알았는데 단풍이 들어 있더군요. 하늘도 너무 파랗구요. 오랫동안 불치의 병을 앓다 방금 일어나 새로운 생명을 얻은 사람의 희열이 이만할까요?

길거리에 뒹구는 은행잎 하나도 예사롭질 않고 골목 모퉁이집 대문 사이로 빼꼼 보이는 국화 한송이에도 문득 목이 메이는 요즈음입니다. 너무 호들갑 스럽지요?

갇혀있던 기간이 40여일이 채 안됨에도 밖에서의 4년보다 길고, 알록달록한 사람들의 옷색깔도 소중하게 눈에 들어오고,낯선 이의 웃는 얼굴에서 십년지기를 만난듯 가슴이 뭉클하기도 합니다. 그런것들을 그만큼 간절하게 그리워해서 그럴거예요. 온종일 보이는 거라곤 높다란 회색담 만큼이나 암울한 그곳 사람들의 표정,사방 회색뿐인 벽,회색의 철문,횟가루 떨어져 내리던 관뚜껑만한 천장. 그런것들에선 바람만 나올뿐이었죠. 햇볕 한부스러기 기웃거리지 않는 외진 독방엔 한낮에도 손을 내놓지 못하게 하는 독사의 혓바닥같은 시린 바람만 온종일 낼름거리며 소름끼치게 온몸을 핥을뿐이었습니다.
열심히 살아야겠구나.내 인생에 최선을 다해야겠구나.나가면 사람들한테도 잘해야지.어떤 경우라도 부끄럽지 말아야지.그런 다짐들도 어째 그리 절박하던지.

노태우씨도 그럴까요. 그는 무슨 다짐을 하면서 징역살이를 깨고 있을까요. 아주 근엄했던 사람. 그가 노동자문제에 대해서 언급을 하는 경우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던걸로 기억됩니다.

"불법 노사분규 엄단, 국가의 기반을 흔드는 근로자들의 집단행동에 대해선 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 그런 발표가 있을때마다 어김없이 노동자들이 굴비두름처럼 줄줄이 엮여 감옥으로 끌려갔고, 저 역시 그 행렬의 틈바구니에 끼어 90년에 145일간 복역하기도 했습니다.

구더기가 꾸물꾸물 기어나오는 한여름 징역을 살면서도 법이 그러니까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옳고 그래서 이렇게 갇혀있는 건 부당하다는 울분이, 진동하는 똥냄새보다 진하게 꺽꺽 숨통을 막아도 법을 어긴 현실은 쇳덩어리 철창처럼 요지부동이기만 했습니다.

그 근엄하기만 했던 대통령께서 어느날 갑자기 못난 노태우가 되어 눈물을 찔끔거리며 0.75평 제 독방에까지 찾아들었습니다.
비자금이라고도 하고 도자금이라고도 하는 그 돈이 5천억이라고도 하고 그보다 훨씬 많다고도 합니다. 억대라 하면 만져보기는 커녕 평생을 가봐야 먼발치서 구경할 일조차 쉽지않은 노동자들에겐, 5천억이 만원짜리 지폐로 5톤트럭 11대가 꽉 찬다고 해야 서서히 입이 벌어집니다.

그러면서 40년 혹은 50년 자신들의 노동자 인생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20여년전 부인이 시집올때 가지고와 이제는 거울이 뿌옇게 벗겨져 흰머리카락도 제대로 뽑을 수 없을 만큼 낡은 8자짜리 장농과, 펴고 접을때마다 벌건 녹이 가루져 내리는 호마이카밥상,군내나는 보온밥통과 때절은 신앙촌 담요뭉치까지 다 합치고, 아이들 국민학교 교과서까지 구석구석 ?y어 실어봐야 5톤 트럭 두대를 미처 못채울 자신들의 인생 전부에 대해서 말입니다.

노태우씨가 국민들 앞에 청렴결백을 맹세하며 대통령 취임선서를 한 날로 부터, 역사에 한점 부끄러움 없는 대통령으로 남게되어 감개가 무량하다는 퇴임사를 한 날까지, 5년 동안 공장에서 일을 했던 노동자의 퇴직금이 500만원을 넘기가 쉽지 않은게 이땅 노동자들의 현실입니다.

제가 한진중공업에서 받은 퇴직금은 113만원이었습니다. 찬란한 미래로 가는 희망의 꽃가루인듯, 온몸에 용접불똥을 뒤집어 쓰고 여름이면 55도가 넘는 선박 탱크안에서 손톱 밑에까지 땀띠가 박혀 귤껍질 같은 온몸에 소금을 벅벅 문질러가며(소금을 문지르면 덜 가렵거든요), 죽음과 산재사고로 부터 한순간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5년의 세월동안, 결근은 물론 지각 한번 안하고 받아든 퇴직금 113만원은 서러워 목이 메이면서도 제 일생에 처음 만져보는 큰 돈이기도 했습니다.

지루하시죠? 그래도 이왕 읽으신거 제가 살아온 인생얘기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18살 순진한 근로자가 왜 싸우는 노동자가 되고, 서른여섯 장년이 되어 두번의 전과기록을 가진 전과자가 될 수 밖에 없었는가 하는 사연을.
끝까지 읽어주시면 그것만으로도 저에겐 큰 격려가 될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는 지금 회한의 늪으로 자꾸만 빠져드는 심정이거든요.


열여덟살. 누가 그랬지요. 숫자만으로도 찬란한 축복받은 나이라고. 그 나이에 공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반여동 대우실업, 가난한 농촌출신인 저에겐 어마어마한 공장 건물과 100대가 넘는 통근버스를 가진 회사라는 것 만으로도 가슴벅찬 자랑거리이기에 충분했었습니다. 시키는대로 일을 했지요. 선적이 바쁠때는 일주일간 곱빼기 철야까지 해가며 비록 점심시간에 길다랗게 줄을 서서 밥을 타는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서서 졸면서도, 철야를 못하겠다거나 오늘은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은 감히 엄두도 못낼 일이었습니다. 손가락에 물집이 가실 날이 없어도, 쪽가위질이 서툴러 옷감을 상하게 하고 그때마다 볼때기를 쥐어 박히고, 행동이 빠리빠리하지 못하다고 발길질에 이리 채이고 저리 채여 종아리에 시퍼런 멍이 가실 날이 없었어도 매월 7일 월급날을 기다리는 기쁨 하나로 버텼습니다. 기숙사에 돌아와서는 저녁마다 베갯잇이 흠뻑 젖어 아예 베개위에 수건을 덮어야 하고, 하얀 벽위로 새카맣게 기어오르던 빈대에 물어뜯기면서도 그 생활이 기꺼울 수 있었던 건 희망 때문이었죠. 이 악물고,

어머니 말씀대로 이 악물고 몇년만 고생하면 나도 보란듯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큰만큼 욕심도 많았습니다. 내 공부도 하고 싶고," 니가 좀 고상이 되드라도 저거 하나만 니가 맡아서 높은 핵교만 마쳐주면 내가 여한이 없겄다"시며, 하나뿐인 아들인 남동생 진학을 간절히 바라시던 아버지 소원도 들어드려야 하고,고생만 하신 부모님 호강도 시켜드리고 싶고... 하루 스물네시간은 정해져 있는거고, 남들보다 빨리 성공하는 건 그 만큼 부지런한거 밖에 없다는 걸 좌우명으로 삼기까지는 채 일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여름에는 해운대 백사장에서 아이스크림 장사를 했습니다. 고되고 자존심이 상해서 그렇지 벌이는 공장보다 낫다길래... 그해 여름 태풍이 불어서 아이스크림 장사는 보증금 3만원만 떼이고,밥대신 주식으로 삼았던 라면 외상값만 고스란히 빚으로 남더군요.

신문배달도 했었죠. 새벽엔 조간, 오후엔 석간.낮시간 동안엔 서면일대 다방들을 돌아다니며 땅콩도 팔고 주간지도 팔고 그랬습니다. 팔아줄때까지 끈적거리며 붙어 있는다고 예사로 쥐어박히며-. 열아홉의 시퍼런 자존심보다는 풀칠해야 할 입이 휠씬 더 절박했었죠.

새벽 4시 통행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우유배달도 해봤습니다. 오후 두시쯤 배달이 끝나면 싸구려 샴푸나 주방세재 외판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루종일 걸었죠. 한걸음한걸음이 돈이다 생각하니 발목이 퉁퉁 부어도 아픈 줄을 몰랐습니다. 한겨울에도 연탄불을 못 피운 방에서, 이불 하나가지고 한자락은 깔고 한자락은 덮어가면서 3년을 살았습니다. 스폰지 깔개 하나를 3년만에 장만을 하고 어찌 그리 좋던지... 계획만큼 욕심만큼 통장이 따라와주는 건 아니고, 꿈과 통장 사이에 서서히 체념이라는 게 자리잡아가기 시작하더군요.

남들도 다 이렇게 사나. 울긋불긋 모자쓰고 놀러가는 또래의 아이들을 보면 괜히 우울하고 일할 맛도 안나고. 인간답게 사는걸 포기해야 했습니다. 현실이 그걸 강요했죠. 동생은 이미 대학에 입학을 했고 그 전의 벌이로는 동생하숙비 조차 빠듯했습니다.

결단을 내리듯 찾아든 곳이 버스회사였습니다. 122번. 시내버스 안내양이 된거죠. 그때만하더라도 안내양은 운전기사나 배차주임의 밥이고 안내양은 갈보보다 더한 창녀라는 소문들 때문에 안내양이라면 버린 여자 취급하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절대 술집이나 버스차장만큼은 안된다시던 어머니와의 약속을 어겼습니다. 나만 깨끗하면 어머니도 이해하실거라 생각했습니다.

보세공장이나 가방공장,신발공장의 세배가 넘는 월급보다 더 중요한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새벽 4시15분, 김해에서 첫차로 나오면 충무동까지 하루 여섯번 왕복. 차고지에 돌아가 입금하고 속옷 구석구석까지 홀딱 벗고 항문까지 몸검신 당하고, 다시 나와 빠께스에 하이타이 풀어 수세미로 차 청소하고 숙소에 들어가면 일러야 새벽 1시30분. 두시를 넘기가 예사였습니다. 그리고 또 4시15분. 이틀에 한번씩 쉬게 해준다는 건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오히려 배차주임이 쉬라할까봐 조마조마 했었죠. 규정대로 휴일찾아 먹다간 수입이 1/3로 줄어들거든요. 자면서도 잠꼬대를 하는건 물론 밥을 먹으면서도 주례 삼거리 나오세요 소리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아침에 학생들 등교시간이면 문을 닫지도 못하고 버스는 출발을 하죠. 김해 대저에서 구포까지 그냥 대롱대롱 문짝에 매달린 채 구포다리를 건넙니다.

손님 수십명의 생명이 제 두팔에 매달려 있다는 생각. 난 언제까지 이 무게를 버티며 살아야 하나. 그렇게 구포다리를 지날때면 문득문득 그 팔을 그만 놓고 싶다는 생각을 날마다 했습니다. 고향을 떠나올때 꼬깃꼬깃 접은 5천원 짜리를 쥐어주시며 "객지밥이 오죽허겄냐, 밥이나 굶지마라"시며 내내 우시던 어머니가 아니라면, 합격통지서를 들고 "우리집안은 인자 고생 끝났어."하며 환하게 웃던 동생의 그말이 아니었다면 전 그 질긴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설날도 고향엘 못가고 색동옷의 손님들을 온종일 실어나르고 숙소에 돌아가니 어머님의 부음이 기다리고 있더군요.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어요. 워낙 돈독 오른 깡다구로 통했으니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고향엘 한번 다녀오라고 해도 안 갈까봐, 일부러 고향 보내주려고 그런 농담을 하는 거려니 했지요.

그날 아침에 이미 위독하시다는 전보가 도착을 해있었는데도, 대신 일해줄 사람이 마땅치 않아 알리지 않았다는 배차주임의 평소와 다른 변명에 그제서야 무릎이 툭 꺾이더군요.

임종도 지키지 못한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서도, 버스회사가 있던 김해쪽으로는 고개도 돌리기 싫었습니다. 신문광고를 보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찾아간 곳이 영도에 있는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였습니다.

용접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남자들이 하는 일이니 다른 공장보다 돈이 많을 거라는 그 생각 뿐이었습니다. 사내직업훈련소에서 기술을 배우고 용접기능사 자격증을 따고 배치받은 현장은 지옥이 이러랴 싶었습니다.

여기저기 철판들이 괴물처럼 솟아 있고, 몇발자욱을 떼기도 전에 용접불똥과 그라인다 쇳가루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덮쳐 왔습니다. 이곳에서 일을 해야 한다니. 저 높은 배위를,저 아슬아슬한 사다리를 타고, 한쪽어께엔 40㎏짜리 홀더를 메고 , 또 한쪽 어깨엔 작업공구통을 메고 안떨어지고 오르내릴 수 있을까. 용접가스와 그라인다 먼지 ,가우징가스에 뒤덮여 발끝이 보이지 않는 탱크안에서 질식하지 않고 살아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가용접 해놓은 철판이 바로 옆에서 텅텅 소리내며 쓰러지고, 수십키로짜리 철판이 족장위에서 미끄러져 코앞에 떨어지는 일은 예사였습니다.

비오는 날 수십미터 족장위를 미끌거리며 곡예를 하듯 홀더를 끌고 작업을 해야 하고, 바람이 몹시 부는 날 바다에 떠있는 선박표면을 용접할때면, 폭 30㎝짜리 족장위에 서 있는 것 자체가 묘기였습니다.

마침내 올것이 오고야 만듯이 넘어지는 철판에 깔리는 사고를 당하고 그 사고로 지금도 오른쪽 발목이 온전치를 못합니다. 그때 병원에 문병을 오셨던 동료분들이 그러시더군요. "기름밥 묵기가 쉬분 줄 아나. 그래야 옳은 땜쟁이가 되는기다. 삼년 넘은 사람중에 빙신 아닌 사람이 하나또 없다."

저도 그렇게 옳은 땜쟁이가 되어갔고, 그렇게 서러운 기름밥그릇수가 쌓여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노동조합이 뭔지도 몰랐고, 그런게 제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거라곤 꿈에도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아침 출근 타각기를 찍을때 내가 무사히 살아서 저녁퇴근 타각기를 찍을 수 있을까 두려울 뿐이었고, 저녁 퇴근타각기를 찍을 때면 오늘도 살아냈구나 안도하는 그런 생활일 뿐이었습니다.

13만원 가량의 기본급으로는 방세 3만원 내고, 이래저래 한푼씩 갈라붙이고 나면 작업복 빨 아댈 빨래비누 하나 못사쓸 형편이라, 잔업 한시간이라도 더 하려고 아둥바둥하고, 철야라도 있는 날이면 제일 먼저 철야신청을 하면서 나이드신 분들한테 "딸린 식구도 없는기 벌써르 저래 돈독이 올라가 우짜노" 핀잔을 들어도 그저 칭찬이려니했습니다.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철판에 코를 박고 그렇게 청춘이 흘러도 잔업시간이 채워지는 기쁨 하나로 살았습니다.

친구 만나서 마시는 커피값 한잔도 목돈이고, 친구들이 놀러오면 하다못해 새우깡 한봉지 값이라도 들어야 하는게 아까워,만나는 친구하나 없이 이십대 청춘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5년을 보내던 해. 노동조합 대의원 선거가 있던 겨울이었습니다. 주변에 같이 일하시던 아저씨들이 "니는 처자식 멕여살릴 걱정도 없고, 찍혀봐야 우리보단 헹펜이 안 낫나. 니가 총대한번 메봐라" 하시면서 대의원 출마를 권유하실 때만 해도 귓등으로 들어 넘겼습니다. 그런건 노동법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남 앞에서 말도 잘하는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거라 생각했지, 저 같은 건 언감생심 꿈도 못꿀 일이었거든요.

그때 제가 일하던 배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작업중이던 갑판위에서 동료한분이 수십미터 바닥으로 떨어져 뇌가 수박처럼 쪼개져 즉사를 했습니다. 발도 얼고 손도 얼고 몸이 꽁꽁 얼어붙어 손발이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을 만큼 그렇게 추운 날이었습니다. 아. 전 그때의 그 추위를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요. 안전과에서 관리자들이 ?i아오고 사고보고서를 작성한다고 목격자들의 진술을 받더군요. 바람도 많이 불고 몹시 춥고, 그래서 바람막이 하나없는 바다위 갑판작업은 무리였다는 얘기는 하나도 없고 그저 그들이 작성해온 문구는, 사고자가 옷을 너무 많이 껴입어서 행동이 둔해서 추락한 걸로 적혀 있고 거기에 지장만 찍으라더군요.

비오는날 감전사고로 숯덩이처럼 새카맣게 그을은 주검, 족장위에서 바다로 떨어져 일주일만에 찾아낸 퉁퉁불은 주검, 떨어지는 철판에 깔려 형체도 알아보지 못할 주검. 일년에도 수차례의 그런 동료들의 주검 앞에 그런 보고서가 작성 되었을거고, 제가 그렇게 죽어도 저런 보고서가 작성되려니 생각하니 그저 남의 일일수만은 없었습니다.

가족들이 시신을 회사문 앞에 갖다놓고 울부짖어도 그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본인 부주의에 의한 실족사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습니다. 목격자들이 다 있는데 어디와서 생트집이냐고, 죽은 시체놓고 한 밑천 잡으려 한다고. 고추장에 비벼놓은 퉁퉁불은 라면처럼 쏟아져 나와 뒹굴던 그분의 깨진 뇌수가 며칠을 눈앞에 어른거려 라면봉지만 봐도 토악질이 났습니다.

보상이라도 제대로 받게 해드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린애들 학교라도 마치게 하는게 그분의 마지막 소원을 지켜드리는 일 같았습니다. 자식들 만큼은 높은 학교 보내서 애비처럼 험한 고생시키지 않겠다는게 노동자들의 한결같은 소원이니까요. 제 주위 분들 중에는 자식들 상고는 보내도 절대 공고는 보내지 않는게 무슨 불문율처럼 돼 있거든요. 상고를 보내면 볼펜을 굴리지만 공고 보내봐야 공돌이 밖에 더 되겠냐며-.

그렇게 해서 대의원에 출마를 했습니다. 순진했었죠. 대의원 등록부터 우여곡절과 흑백논리의 시작이었습니다. 대의원 등록 서류를 가지러 노조에 가니까 노조에서 그러더군요. 니네 부서엔 이미 출마할 사람 다 정해져 있다고. 사실 그렇게 해왔습니다. 저도 5년동안 대의원 선거라곤 제가 출마하던 해에 처음 해봤으니까요.

자기네들끼리 이름써서 올리면 그게 대의원이고, 그중에서 돈 좀쓰면 간부되고 더 쓴 놈이 위원장 되는거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현장 노동자들은 몇년가야 노조가 어디 있는지 위원장이 누군지 알 수도 없고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투표가 끝나고 대의원에 당선되어 대의원대회에 참석을 하니 전부 완장(관리자들) 일색이었습니다. 몇번을 손을 들어도 발언기회가 주어지지도 않고 일사천리였습니다. 회의가 끝나자 일제히 송도횟집으로 모셔져 진탕먹고 간부라는 사람들은 어디서 데려왔는지 색시들과 쌍쌍이 춤판이 벌어지고-.

물론 현장에선 조합원들이 죽음을 넘나들며 작업을 할 시간이었죠. 돌아오는 길에 차비나 하라며 봉투를 하나 건네 주더군요. 좋은게 좋은거라며-. 집에 와 열어보니 10만원이 들어있었습니다. 기본급 13만6천1백원이던 86년도에.

아무 소리도 안하고 자기들 하는대로 박수치면 따라서 치고, 손 들라면 손이나 들어주고 그러면 최소한 이런건 보장되겠구나 하는 갈등이 없진 않았습니다. 아니 좀더 솔직해져야 겠군요. 밤새 천장에 새파란 종이돈이 왔다갔다 하고 가슴이 벌렁거리고 그랬습니다. 그래도 그돈을 받으면 저를 대의원으로 뽑아준 아저씨들을 똑바로 쳐다볼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평생을 짓밟히고 억눌려 살아온 그분들의 기대를 배신하면 죄 받을것만 같아 결국 그돈을 돌려줬습니다. 그 돈은 수십명 조합원의 목숨값이었거든요. 그날로 찍힌 거죠.

노동조합의 예산결산 보고서는 그야말로 코메디 각본이었습니다. 멀쩡히 살아계신 저희 아버지도 돌아가신 걸로 되어 상조비가 지출되어 있고, 10년전에 환갑이 지난 분이 작년에 환갑경조비를 타먹고, 돌아가신 분이 환생을 해서 환갑을 치루고, 국민학교 다니는 딸내미가 결혼을 해서 축의금을 타먹고.(이런 사실은 이미 폭로가 되어 신문에 기사화된 적도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조합원 중에 산재를 당하면 노조에서 지급하게 되어있는 위로금은 장부상으로는 분명히 지출이 되었음에도 막상 당사자는 그런게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조합원 삼천명을 26년동안 그렇게 우롱해온 것입니다. 조합원의 권익단체인 노동조합에서.

점심식대가 개인당 630원씩 부담이 되었었는데 쌀이나 부식은 노조에서 결정을 하는대로 지급되었는데 식사의 질은 형편없고, 하다못해 안전화,작업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부상으로는 만원짜리를 구입한걸로 해놓고 실제적으론 팔천원 짜리를 지급하는 식으로-.

공식적으로 징수되는 조합비를 착복하는 걸로도 모자라 온갖 명목과 구실로 조합원들의 목숨을 갉아먹던 노동조합은 비리의 온상 복마전이었습니다.
그런 사실들이 하나하나 폭로되고 저에겐 부서이동이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영도 공장에서 버스로 한시간도 넘게 걸리는 우암동에 있는 직업훈련소로 가라더군요. 조합원들은 영도에 있는데 우암동 직업훈련소로 발령을 내는 건(당시 직업훈련소에는 강사들만 15명정도 근무를 했고 그중 조합원은 8명) 노조활동 탄압이라고 거부하다가 명령불복종으로 해고 되었습니다. 86년 7월 전두환 군사정권시절의 일이었죠.

노조간부들을 싸그리 잡아다 삼청교육대에서 병신 만들어 내보내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이런거 저런거 다알고 세상물정에 휜했다면 저도 비겁해졌겠죠. 그땐 몰랐어요. 정말 아무것도.
다만 제가 옳다고 생각했고 기름범벅 손으로 제 등을 두드려 주시던 조합원들의 손길이 천군만마일 뿐이었습니다.


86년 7월14일 해고통지서를 받아들었을때 그냥 다. 전부 다. 쏴아 빠져나가는 느낌. 모든게 와르르 소리내며 무너지는 느낌. 하늘이 무너지면 그럴까요. 습관처럼 회사로 갔습니다. 매일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6시30분이면 출근타각을 찍었던 오래된 습관 그대로 회사엘 갔습니다. 막더군요. 노조간부들이랑, 관리자들이랑, 경비아저씨들이랑.넌 이제 이 회사 사람이 아니라며. 그 땐 그말이 그렇게 가슴에 사무칠수가 없었어요. 넌 이 회사사람이 아니란 말.

철조망이 쳐진 담장안 저 곳에 내 꿈이 있고 내 청춘이 고스란히 있는데...
내 손때가 묻은 용접홀더, 깡깡망치,화이바,불똥맞아 끈 떨어진 안전화,테이프로 누덕누덕 기운 작업복이 그대로 있는데... 난 저길 들어가야 한다고 ...제발 좀 들어가게 해달라고...아스팔트 바닥에 내동댕이 쳐 지면서도 또 ?i아가 매달리고...웃도리 단추가 다 떨어지고 바지 지퍼가 다 뜯어져도... 눈물 콧물 범벅이 된채 발버둥치며 울부짖었습니다.세상에서 할줄 아는 일이란 그것밖에 없고,그 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두달동안...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용접을 하는 게 대단하다고,불량 안내고 일 잘한다고, 연탄가스에 중독된채 출근한날은 회사에 도착해서 쓰러지자,다들 저런 애사심을 본받아야 한다고,당신들 입으로 그러지 않았냐고, 그러던 당신들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수가 있냐고,내가 뭘 잘못했냐고...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어 목이 쉬도록 버둥거리다 돌아오면 손가락 하나 꼼지락거릴 기운도 없이 온종일 누워있다, 떨어진 단추 달고 바지 기워서 꿰입고 다음날 아침 또 나가고...

회사앞에서 장사하시는 아줌마들까지 나오셔서 그러시더군요.그래 뚜디리 맞으면서 말라꼬 맨날 오냐고,그러다가 진짜로 빙신이라도 되면 내만 서러븐 거 아니냐고,막말로 니 하나 죽어도 눈하나 깜짝할 놈들이 아니라고,내 같으면 더러버서라도 잘묵고 잘살아라하고 치아삐리겠다고,니 몸띠가 쇳덩어리라 캐도 저래 큰 회사하고 싸워가 이길수 있을거 같냐고,회사는 권력이 다 뒤를 봐주고있다고...

이튿날 부턴 닭장차까지 와서 막더군요. 그리고는 매일 영도경찰서로 실려 갔습니다.
도로교통법 위반이라더군요. 그래도 갔어요. 아무데도 갈데가 없었거든요. 맞아죽더라도 ,도로교통법을 자꾸만 위반해서 사형을 당하더라도 거기 밖엔 갈데가 없었거든요.

표창장을 받고, 잔업을 100시간 이상씩 하면서 희망을 가꾸어가고, 그 희망에 빨간 빛도 칠해보고 파란색도 입혀가며 무지개빛을 만들어 가던 곳. 거기 말고 어딜가란 말입니까.

한달도 아니고 두달도 아니고 일년도 아니고 이년도 아닌 꽉채운 5년인데.
눈매가 선하던 아저씨들. 그저 등을 토닥여 주는 것만으로 백마디 말을 대신 하던 아저씨들. 눈을 감으면 그 아저씨들의 얼굴이 선하고 눈을 떠도 천장엔 온통 그분들의 까만 얼굴들 뿐인데-.

그날 이후로 전 어딜가나 3자 였습니다.
88년 한진중공업 노조에서(87년 7월 노동자들의 대투쟁때 한진에서도 파업을 통해 어용노조 집행부를 몰아내고 민주집행부를 마침내 세웠습니다) 해고자 복직문제로 파업을 할때, 안건이 안건이니 만큼 제가 참석해서 해고자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이번 기회에 확실히 단결해서 기필코 해고자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조합원들을 선동했다고 3자개입으로 90년 구속이 되었었습니다.

3자. 그게 참 우습더군요. 해고된 당사자가 복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데도 3자라더군요. 약5개월동안 감옥안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전 그 논리를 이해하기가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최근 들어선 3자 개입법이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부당성이 제기된다는 말을 듣고 이해못하는 사람이 나말고도 또 있구만 하는 생각이 들어 내가 머리가 나빠 그런 것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더군요.

저는 악법도 법이니까 지켜야 한다는 쪽 보다는,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하는 나쁜 법은 자꾸 문제제기를 해서 깨버리자는 논리에 더 수긍이 갑니다. 사실 3자 개입금지법은 그동안 노동자 쪽에만 일방적으로 적용이 되어 노사형평의 원칙에도 많이 어긋나고 그로 인해 단결권이 제약 받아온게 엄연한 현실이거든요. 오죽하면 다른 나라에서까지 남의 나라 법을 가지고 입을 대고 그러겠습니까.

여기저기서(사용자만 빼고) 다 나쁘다는 법은 이미 법으로서의 권위를 잃고, 그 법을 적용해봐야 개과천선을 기대하거나 평화를 도모하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아. 어느덧 3자개입법 쪽으로 흘러가 버렸군요. 그 말씀은 나중에 말미에서나 언급을 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제가 연행될 당시의 제 사정말씀을 좀 드려도 될까요? 많이 길어졌는데 그래도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려니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올해 4월달에 부산노동자연합 의장직을 사퇴했습니다. 6년동안이나 해왔고 여러가지 정세가 많이 변하고 있는데 역량이 전혀 발전하지도 못한, 그런 노력도 못해온 제가 그 자리를 계속 맡고 있기는 참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렇더라도 전 노동운동만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가꾸어 나가고 발전시켜나간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추악한 정치인들이나 돈가진 사람들만 살았다면 우리나라는 벌써 망해버렸을 겁니다. 묵묵히 일하고 성실하게 땀흘리는 노동자들이 있고 그 노동자들의 힘이 있기에 썩어들어간 환부를 도려내고 닦아내고 새살이 채워진다고 생각하거든요.

95년 들어서면서 제가 세운 목표는 다시 일하는 노동자로 살자는 것과 한달에 20만원 정도는 저금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취직을 하기로 한거죠. 나이가 들어 더 건강이 안 좋아지더라도 주변 동지들 한테 더 이상 짐이 될수도 없고 노후대책(?)으로 방 한칸은 마련하기로 한 것입니다.

해고자 생활 만 10년 입니다. 일정한 수입도 없고 그러니 생활이 불안정하고 한진 노조에서 생계보조비가 약간씩 지급되긴 하지만 그 역시 조합원들의 목숨값이고, 저도 몸뚱아리 움직여 월급봉투를 받고 그돈으로 고생하는 동지들 밥도 한번씩 사주고, 몇년이 걸릴진 모르겠지만 제가 열쇠를 따고 들어가는 골방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하는게 몇년동안 유예돼온 아주 간절한 바램이었거든요.

취직은 예상보다 휠씬 힘들었습니다. 용접경력 하나만 믿고 찾아갔던 몇군데의 철공소같은 공장들은 제 기대를 무참히 깨버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루 만칠천원의 일당, 열한시간의 노동, 물론 연장수당이나 초과근로수당 같은 건 없구요.

며칠 일했던 감전동 새벽시장 부근의 어떤 공장에서 일하시던 아주머니는 자기 딸네 회사는 생리휴가가 다 있다더라면서 여자가 생리를 하는데도 회사에서 수당을 다 준다면서 웃으시더라고요. 그곳에선 며칠 일하고 3일을 꼬박 몸살을 앓았습니다.

벼룩시장이나 문전옥답 같은 정보지를 보고 몇군데 신평쪽까지 가봤습니다만 사정은 비슷비슷하더군요. 그래도 월급이 좀 왠만하고 근로기준법 대로만 지켜져도 그럭저럭 다닐 수 밖에 없었겠지요. 다닥다닥 붙은 그런 공장들은 그야말로 무법천지였습니다. 법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 그들은 제가 그랬던 것 처럼 지금도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것 조차 모르고 살겠지요.

노동조합만 있어도 그 정도는 아니었겠지요. 저는 비겁했습니다. 감옥에 앉아서 생각을 하니 그때 제가 그런 현실들을 외면하고, 나 혼자만 좀더 나은 밥벌이를 찾아 헤맨게 결국 벌받은 거라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너댓명 혹은 열명. 그런데 들어가서 노동조합을 만들 엄두도 안나고, 설사 만들었다해도 사장과 싸우고(노동조합에 대해 선선히 받아들이는 사장은 아직 이땅엔 없으니까요) 그런 과정에 또 업무방해니, 뭐니 해서 코가 걸릴 건 뻔하고,이 나이에 감옥살이를 또하고 출감해서도 기다리는 건 해고통지서.... 어휴,그 짓을 .... 도저히 엄두가 안나더군요. 그런 상상만으로도 아득해지더란 말입니다.

법적으론 하나도 없지만 현실적으로 너무나 많은 그런 공장들을 몇군데 옮겨 다니면서 저는 분노하기 보다는 무력감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노동운동을 해왔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민주노조가 있는 사업장들은 그 정도는 아니니까, 설마 그런곳이 아직까지 있으랴 싶었어요.국민소득 만불을 넘었다는 대한민국에-.

이 시간에도 그분들은 여전히 그렇게 사시겠지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일이 밀리면 자연히 잔업하고, 명절에도 보너스가 아니라 참치통조림이나 미원 선물셋트 한 상자씩 주면 입이 벙그러져 사장님 칭찬에 침이 마르면서-. 검찰에서 저를 조사하셨던 분에게 그런 말씀을 드렸더니, 에이, 지금이 뭐 60년대요?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검찰에서도 모르고 계시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람들이야 찬밥 뜨신밥 가려먹을 형편이 되겠냐고,근로기준법 위반 사업장이라고 안 가고 그런 형편이라도 되면 오죽이나 좋겠냐고,노동쟁의조정법으로 구속되는 노동자는 숱하게 봤어도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사용자는 몇명이나 되느냐고...

여기는 정말 마지막이다 하는 심정으로 벼룩시장 보고 찾아간 곳이 큰 제과점의 빵공장이었습니다. 아침 7시30분 작업시작 시간은 있는데 마치는 시간은 없는 곳. 그냥 일 끝나는 시간이 퇴근 시간인거죠. 저는 음식을 만드는 곳이라 상당히 위생적이고 청결할 줄 알았는데 그 곳 역시 분위기는 다른 공장과 다를 바가 없더군요. 온종일 서서 일하며 무릎 한번 구부릴 여유가 없어 점심먹으려고 앉으면(하루 중에 유일하게 앉는 시간입니다) 무릎에서 뚝 소리가 납니다. 빵을 굽는 철판을 한개도 무거운데 열개씩 포개 나르고, 상자에 빵을 담고, 담겨진 빵상자를 키보다 높게 쌓아서 곡예를 하듯이 나르고, 조금만 늦으면 빵이 산더미 처럼 쌓여 혼을빼고.

거긴 점심시간도 따로 없어요. 빵굽는 가마 보는 아저씨들이 밥먹으러 가서 빵 나오는게 잠시 주춤하면(그 아저씨들도 교대로 식사를 해서 온전하게 비는 시간은 없습니다) 뛰어가서 밥을 후루룩 마시고는 또 ?i아 올라와야 합니다. 점심시간이라고 늘어지면 쌓이는 빵을 감당을 못하거든요. 한달내 일해야 쉬는 날이라곤 매월 둘째주 화요일 정기휴일과 한달에 한번 비번날 두번뿐이었습니다. 그곳 노동자들 소원은 하루라도 남들 노는 일요일날 노는 거래요.

그렇게 일하고 제가 받기로 한 월급은 40만원이었습니다. 그것도 한두달 일하는거 봐서 정식직원으로 채용이 되면 지급한다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일이 위낙 힘드니까 대부분 며칠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이 위낙 많고, 그렇게 소소하게 나가는 돈도 아까워서 그런 모양이예요.

일을 잘한다고 포장하고 운반하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오늘부터 반죽하는 일을 배우라고 해서 어깨가 빠져라 반죽을 돌리다가 밀가루 범벅이 되어 빵 모양을 한 채 저는 연행되었습니다. 저항하기는 커녕 마음이 홀가분해지더군요.

내일부턴 여길 다신 안와도 되는구나. 발바닥이 부어서 어기적거리면서도 전쟁터에 나가는 것 처럼 뛰어서 출근하는 그걸 안해도 되겠구나. 40㎏짜리 용접홀더 보다 무거운 빵 철판과 키를 넘는 빵상자를 들고 곡예를 하는 그 짓을 이젠 안해도 되겠구나. 그일보다는 차라리 감옥생활이 편하지 싶더라구요.

발바닥이 부르튼거 보다 전 발가락에 동상든게 휠씬 나아요. 동상이 든건 신발을 좀 큰걸 신으면 그런대로 걷는데 큰 지장이 없지만,발바닥이 아프니까 정말 죽겠더라고요.

그나마 간신히 얻은 직장마저 더 이상 다닐 수가 없게 돼 버렸으니 또 어딜 알아보고 무슨 일을 해야할 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하는군요. 출감하고 삼사일은 그저 기쁘고 정신없기만 했는데.

재판장님. 혹시 노동자를 직접 구속해 본적이 있으세요? 그런 경우가 있으셨다면 물론 법을 집행하시는 분이시니까 법리적 해석과 현명하신 판단에 따라 결정을 하셨겠지요. 저 한몸 잘되고 호강하자고 하는 일도 아닌데 그들이 왜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투쟁을 하는지도 물론 생각해보셨겠지요.

저는 감옥안에서 노태우씨 도자금 문제를 지켜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돈의 주인은 노동자들 아니겠어요. 노태우씨가 강제로 빼앗았든 알아서 상납을 했든 결국은 해당기업체에서 뼈빠지게 일했던 노동자들의 몫이 아니었을까요. 이 사회에서 유일하게 재화를 생산해 내는 건 노동자들 뿐이니까요. 그 돈만이라도 제대로 임자를 찾아갔더라면 저는 노동자들이 해마다 줄줄이 감옥으로 끌려가는 숫자가 휠씬 줄었을 거라고 감히 확신을 합니다. 노동자들은 3만원 혹은 5만원의 임금인상 때문에 투쟁을 하고, 그로 인해 해마다 줄지않는 굴비두름의 참담한 행렬이 감옥으로 향할 수 밖에 없는게 현실이거든요. 3만원 혹은 5만원의 돈이 일년동안 그들의 생계에 숨통을 트이게도 하니까요.

열포기 밖에 못했던 김장을 올해는 열 다섯포기 할수도 있고, 작년 추석에는 고향갈때 정종 한병 밖에 못사갔는데 올해는 소고기 두어근 묵직하게 들고 갈 수도 있고, 그게 고향에 계신 부모님들에겐 다음 명절까지 내내 자식자랑이 되기도 하고 그렇거든요. 임금인상이 제대로 안되면, 물가는 자꾸 오르고 명절이 돌아오는 것도 무섭고, 애들 학교에서 운동회한다 해도 한숨부터 나오고 그러는게 그들의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해마다 서슬퍼렇게 엄단을 해대고 그 칼날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노동자들의 투쟁이 끊이질 않는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엄마마저 돈벌러 나가고 없는 집을 지키다가, 친구가 다니는 유치원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 친구 나올때까지 기다리며 하루를 보냈다는 작은 아이에게 노란 유치원 가방을 당당하게 매주고 싶어서이고, 애들이 우리 김밥은 안먹는대 하며 소풍도시락을 그대로 들고 와서는 내팽개치는 큰 아이의 소풍날, 속으론 울면서도 야단을 쳐야만 하는 못난 부모가 아니라 올봄 소풍날엔 우리 아이 김밥에도 쇠고기 볶아넣고 햄도 큼지막하게 썰어넣어주고 싶어서 입니다. 고무공장에서 신발 밑창에 풀칠을 해대느라 갈라터진 아내의 손바닥을 볼때마다 죄스러움으로 외면하는게 아니라, 가슴 떳떳하게 펴고 이제는 정말 그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요. 저는 5년전에도 똑같은 죄목으로 구속된 적이 있는 전과잡니다.
대통령은 바뀌었어도 노동자를 둘러싸고 있는 노동현실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게 이유라면 지나친 자기 합리화일까요?

제가 3자개입 할 수 밖에 없었던 동래봉생병원 노동조합은 합법적 절차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당연한 수순처럼 탄압이 따랐지요. 동래봉생병원은 유독 그 정도가 심했습니다. 저는 전국병원노동조합연맹 소속도 아니고 병원쪽 상황에 대해선 사정이 어둡습니다.

93년 이었죠. 9월쯤이었나. 봉생노조라면서 전화가 왔더군요. 노조설립을 해서 노조전임자와 노조사무실 문제를 놓고 병원측과 교섭을 하는데 정의화 원장은 교섭석상에 한번도 안나오고 계속 관리자들을 통해서 조합원 탈퇴공작을 일삼고 있으니 지역에서 원장 면담요청을 해서 원장을 한번 만나봤으면 한다구요. 노동조합에선 아무리 보자해도 콧방귀도 안뀐다면서-.

그때 당시 공투본이라는 지역 노동조합들의 한시적 연대기구가 결성되어있을 때라 면담대표는 공투본 중심으로 구성이 되었었고 ,저는 상황도 파악할 겸 전화를 받고 안가볼수도 없고 털레털레 가 봤습니다. 저는 이미 그동안 그런 상황은 백번도 더 봐온 일이기에 긴장도 없고 분노도 없고 그저 강건너 불구경 가듯이 갔었습니다. 예정시간보다 한시간이나 늦게 도착을 하니 원장실이 있다는 입구계단에 조합원들이 쭉 앉아있더군요. 면담대표들은 원장실 복도 앞에 한시간 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원장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아무 응답이 없다면서......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그저 끼리끼리 앉아 잡담도 하고 음료수도 마시고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그리고 며칠후 아침에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동래봉생인데 파업현장에 관리자들이 쳐들어와 대자보를 뜯고 조합원들을 폭력적으로 끌어내고 그래서 여러명이 다쳤다고-.

또 갔습니다. 첫날 가 봤을때 조합원 대부분이 나이어린 아가씨들이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제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예상보다 휠씬 처참했습니다. 노란티셔츠가 여기 저기 뜯겨 머리를 산발을 한 채 끌려나와 밖에서 서로 얼싸안고 우는 아가씨들이 제일 먼저 보이고, 그들의 파업 농성장이었다는 병원로비에선 그때까지 병원측 남자관리자들의 광란의 현장이었습니다. 바닥에 깔았던 스치로폴을 뜯어내 폭격맞은 전쟁터같은 그곳에서 그들은 닥치는대로 뜯어내고 깨고 부수고 밥을 해먹었던 밥그릇,수저,김치쪼가리 등이 그들의 발길에 이리저리 채이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기운이 남아 울부짖으며 매달리던 조합원 아가씨들의 머리채를 잡고 짓밟는 그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손아귀에 잡혀있는 아가씨들을 빼내는 것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었습니다. 그냥 놔두면 마음먹고 달려든 그들의 손에 누군가가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칠 수 밖에 없는 다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찢기고 밟히고 채여 만신창이처럼 짓이겨진 조합원 아가씨들의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져 주는데 머리카락이 한웅큼씩 빠지더군요. 그 머리카락들을 수북이 모아놓고는, 이거라도 가발공장에 팔아 치료비나 보태쓰자는 누군가의 울음기 가시지 않은 코맹맹이 소리에 허탈하게 웃기도 했습니다.

노조사무실 마련, 전임자 인정, 그리고 임금인상. 이 요구조건의 어디에 병원측 남자관리자들을 대거 동원하여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어내고, 스물몇살 채 피지도 못한 꽃봉우리들을 우악스럽게 짓밟아야할 이유가 있단 말입니까.

담당검사님은 그러시더군요. 병원에서 폭력을 휘둘렀다면 사진을 찍어놨다가 고발을 하지 그랬냐고. 물론 노조측에서도 사진을 찍었지요. 역시 카메라는 빼앗겨서 박살이 났구요. 그들 숫자가 휠씬 많았고 힘도 휠씬 셌으니까요.그중 심하게 다친 조합원들 10명이 전치 10일에서 4주까지 진단서를 첨부해서 폭력을 주도했던 병원측 관리자 21명을 고발도 했구요.

그러나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더군요. 노조측에선 13명이 사법처리 당하고 3명이 구속되었었는데도 말입니다. 새삼스럽게 법은 만인앞에 평등해야 되는 게 아니냐며 흥분하려는 건 아닙니다. 제가 겪은 법은 늘 그래왔으니까요. 그걸 다시한번 확인했을 뿐이었습니다. 아주 생생하게.

그래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하라는 검사님의 충고도, 목적이 아무리 옳아도 불법에 대해선 처벌할 수 밖에 없다는 판사님의 지엄하신 판결에도 얼른 고개가 끄덕여지질 않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구구절절한 항소이유서를 쓰는거구요.

계란으로 바위치기래도 할 수 없고 대답없는 메아리래도 어쩌겠습니까. 힘이 약해 맨날 당하고 깨지기만 하는 약자들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알아보고 그렇게라도 서로에게 힘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을-.

조합원 대부분이 스물을 갓 넘은 아가씨들인 70여명의 작은 노동조합. 병원측의 잔인하고도 악랄한 탄압과 일상적인 폭력을 그들만의 힘으론 도저히 막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 그들과 함께 했고 저의 작은 힘이나마 보태 노조가 지켜졌다면 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낸거라는 생각으로 오히려 가슴이 뿌둣합니다.

이 땅 어느 구석에선가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가 탱크앞에서 맨주먹으로 자기는 노예가 아니라고 외치며 대항할때, 우리가 외면한다면 도대체 우린 무엇이란 말입니까.

정의화 원장은 이미 좌천동 봉생병원 역시 노조를 무력화시킨 전력이 있는 사람이고, 합법적인 노조활동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다면 도대체 법의 테두리라는 건 어디서 어디까지란 말인지요.

병원은 대부분 학연과 혈연으로 구성되어 있더군요. 학교선배인 수간호사를 통한 끊임없는 탈퇴압력, 친척인 관리자의 보증으로 입사를 한 조합원에게 집안까지 동원한 관리자들의 탈퇴압력은 차라리 고문이었다더군요. 어떤 조합원은 노조가입 한달만에 몸무게가 4㎏이 빠졌다며 그런 압력을 받을때보다 차라리 까놓고 두들겨 맞는게 속은 훨씬 편하다더라구요. 몸이 고달퍼서 그렇지.

전 왜 제가 폭력으로 꼬인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맞긴 우리가 휠씬 더 맞았는데 .힘있는자가 휘두른 폭력은 합법이고 한대라도 덜 맞기 위해 몸부림쳤던 약자의 방어가 불법이란 논리가 성립되는 것도 아닐텐데. 성공한 쿠데타는 합법이라더니 무조건 싸워서 이기기만 하면 합법인가요?

이제 마무리를 해야겠군요. 참, 면회왔던 봉생친구들에게 들으니 조합원이 1/4로 줄어있다더군요. 끊임없는 탄압의 성과라면서-. 제가 그랬어요. 그래도 그게 어디냐고. 내가 봉생건으로 구속되었는데 노조가 아예 와해되었다면 얼마나 부끄럽고 민망할 뻔 했냐고-.

이 글을 쓰고있는동안 뉴스에서 5.18 특별법을 제정하기로 결단을 내리셨다는군요. 제가 감옥살이 하는 동안에도 에지간히 시끄러운 것 같더니만-.
옆에서 뉴스를 듣던 친구가 오징어를 질겅거리며 검찰은 ×됐네, 하는군요.도대체 어느 장단이 옳은 가락인지 한동안 또 혼란스럽게 생겼습니다. 법이 노동자에 대해서 단호한 만큼 권력에 대해서도 그렇게 냉정하고 단호했으면 좋겠어요. 노동자들에 대해선 가차없기가 추상같지 않습니까. 맨날 힘없는 사람들에게만 호통치지 말고 진짜 단호할데서 단호했더라면 이 땅에 부정과 비리는 애초에 근절되지 않았겠습니까. 정말 국가의 기반을 흔드는 싹은 다른 곳에서 열심히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데. 제가 아직도 너무 순진한건가요?

사법부가 권력의 시녀니 어쩌니 해도 전 막상 법앞에 서면 겉으론 안그런 척 해도 속으론 많이 떨려요. 이번에 선고 받을때도 판사님 말씀 하나하나가 제 운명이고 인생이라 생각하니 그저 공자님 말씀이 따로 없고 하느님이 따로 없으니 그저 하느님! 왼눈이라도 살짝 떠서 부디 굽어 살피소서 하는 기도가 저절로 나오더라구요. 끝내야지 하면서도 자꾸 미련이 남아 질질 길어지는군요.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릴께요. 법이 곧 정의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같이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이 배가 둥가죽에 붙어가면서 정의를 소리높여 외치지 않더라도 그저 법이 정의이기만 하다면. 그렇다면......

항소이유서는 난생 처음 써보는거라 그냥 편하게 편지쓰듯이 썼는데 이렇게 써도 되는 건지 지금도 잘 모르겠네요. 더러 외람되기도 하고 사족이 많이 달려있더라도 쳐내지 않으신다면 제 인생에 또 다른 계기로 삼겠습니다.
너무 길어서 죄송하구요, 끝까지 읽어주셨다면 정말 감사드립니다.

1995. 11. 27.

Posted by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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