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하는 그대, 세상을 다 바꿔라
빼빼로데이를 포착해 연간 450억원 매출을 일궈낸 건 기획자의 호기심과 관찰력… 신문의 한 줄 헤드라인을 넘어 시대 흐름을 읽는 ‘통찰력’이 기획의 핵심 요소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빼빼로’는 식품업계에서 마케팅 기획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히는 상품이다. 지난 1983년 첫선을 보인 빼빼로가 도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996년이었다. 부산의 한 여자중학교에서 11월11일을 맞아 친구들끼리 빼빼로를 주고받는 ‘빼빼로데이’ 기념일이 있다는 사실을 마케팅에 활용하면서부터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롯데제과의 마케팅 기획자들은 대대적인 시장조사와 판촉행사를 전국적으로 벌였다. 그 결과 2000년 이후 지금까지 한 해 평균 매출액은 450억원 안팎을 기록하고 있고, 이 가운데 빼빼로데이 대목 기간(9~11월) 동안의 매출액이 한 해 매출액의 60%를 차지하는 현상이 매년 반복되고 있다. 빼빼로데이를 만들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에 대해 지나친 상업주의적 접근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조그마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은 기획자의 호기심과 관찰력이 일궈낸 극적인 변화였다.
9·11의 원인은 ‘상상력의 빈곤’
바야흐로 기획이 대접받는 시대다. 잘된 기획 하나가 조직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는 인식은 이미 널리 퍼져 있다. 미래를 예측하는 기획 능력이 없는 조직은 한 치 앞길도 내다볼 수 없다는 것이 최근의 추세다. 그러다 보니 기업과 정부조직, 개인의 삶에 이르기까지 기획 역량은 조직과 개인을 살리는 핵심 능력으로 꼽히고 있다. 기획이 일상의 한가운데로 들어왔다는 사실은 주변이 온통 ‘~기획’ 투성이라는 데서도 쉽게 확인된다. 광고기획, 마케팅기획, 영화기획, 텔레비전 프로그램 기획, 출판기획, 취재기획, 공연기획, 웹기획, 도시기획, 건축기획…. 정부나 국가기관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국가발전 기획, 신도시건설 기획, 사회간접자본 확충기획, 정보격차 해소기획…. 정당은 선거기획, 종교단체들은 신도확보 기획, 자선단체에서는 성금모집 기획, 사립학교에서는 학생유치 기획을 한다. 기업 내부도 마찬가지다. 영업기획, 생산기획, 구매기획, 자금조달 기획, 신제품 기획, 유통기획, 사업기획, 투자기획, 재무기획….
지구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차원의 기획도 있다. 9·11 테러가 대표적이다. 9·11 테러는 기획이 요구하는 일련의 과정을 꼼꼼히 밟은 치밀한 작품이다. 어떤 특정한 과제와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세계와 이슬람의 적’인 미국을 치명적인 방법으로 공격해야 한다), 그 과제의 완수 또는 문제 해결을 위해(치명적 테러를 통해 미국을 혼돈에 빠트리기 위해) 일정한 대상물들에 대해(미국의 민간 항공기들을 대상으로) 일정 기간 동안 벌어질 수 있는 주요 상황을 파악·예측해(항공기를 동시에 여러 대 납치해도 전투기들이 즉각 뜨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일정 의도에 따라 목표한 결과를 얻도록 하는(납치한 항공기로 미국의 상징적 건물을 향해 자살 테러를 감행함으로써 미국 전체를 혼란에 빠트린다) 일련의 사고 과정과 행동 양식(테러 요원을 종교적·사상적으로 무장시켜 훈련한 뒤 테러 행위에 투입해 실행한다)을 기획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오사마 빈 라덴은 ‘세기의 기획자’인 셈이다. 미국 의회가 초당적으로 구성한 9·11 진상조사위원회는 2004년 8월 해산에 앞서 발표한 최종보고서에서 “9·11 동시 테러를 막지 못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상상력의 빈곤’ 때문이었다”고 결론을 내린 적이 있다. 기획의 핵심 구성요소인 통찰력과 상상력에서 미국 당국은 오사마 빈 라덴에 뒤처진 것이다.
한국의 직장인들을 상대로 “업무 능력 가운데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면 보통 첫 손가락에 꼽는 것이 ‘기획문서 작성’이다. 기획 능력의 핵심을 ‘기획서 작성’으로만 국한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짙은 것이다. 이에 반해 기업 안에서 전문적으로 기획 업무를 담당하는 이들은 이와는 다른 답변을 해 눈길을 끈다. 파워포인트를 능숙하게 써서 깔끔한 기획서를 작성하는 것보다는 기획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해 천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통찰력에 이르는 7가지 습관
100명의 기업 내 기획자를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39명)와 설문조사(61명)를 한 결과가 나와 있는 신간 <한국의 기획자들>(토네이도 펴냄)을 보면 답변자의 70%가 뛰어난 기획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통찰력과 분석력’을 꼽았다. 그 다음은 ‘커뮤니케이션 능력’(26.7%)이었다. 이들은 또 평균 27.4명의 정보원을 확보하고 있으며, 업무 시간은 평균 11.49시간으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지만 업무 만족도는 64.9%로 비교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획 과정에서 통찰력이 핵심 요소가 되는 이유에 대해 피닉스커뮤니케이션의 서재근 차장(AE)은 “기획 과정에서 쓰이는 여러 시장분석 도구가 있지만 아무리 과학적으로 접근해도 인간의 직관과 바꿀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며 “특정한 수치나 자료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며 그것이 통찰력과 관련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통찰이란 정보와 지식을 처리하는 인간 고유의 창조적 상상력 또는 그런 상상력을 통해 사물·행동·사건 등의 본질 속에 숨겨진 ‘새로운 의미’를 해석해내는 과정이자 그 해석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기획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곧 발행될 책에서 기획 업무에서 통찰력에 이르는 7가지 습관을 △전문가를 믿지 말 것 △고정관념 속에서도 답을 찾으려고 할 것 △성급하게 정의하거나 분류하지 말 것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오히려 귀를 기울일 것 △프로세스(과정)의 노예가 되지 말 것 △원인을 추구할 것 △조사를 믿지 말 것 등으로 정리했다.
이 때문에 통찰력 있는 기획 능력을 지닌 기획자들이 스카우트의 1호 대상이 되는 현상도 점점 늘고 있다.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카피를 전 사회적으로 유통시켰던 광고계 인사가 삼성전자 상무로 스카우트된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그를 영입한 것은 무엇보다 그가 지닌 통찰력 있는 기획 능력을 높이 산 것”이라고 말했다. <100억짜리 기획력> <기획 천재가 된 홍대리>의 저자인 하우석 공주영상대 교수는 “기획의 궁극적인 목표는 조직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는 데 있고 이를 위해서는 예측 분석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통찰력은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기획 능력을 높이 사는 기업에 젊은 인재들이 몰리는 현상도 요즘의 추세다. NHN(네이버) 홍보실의 이경률 대리는 “우리 회사는 직군이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개발자이고 나머지 하나는 기획자”라며 “‘지식iN’이나 네이버 블로그 등 이곳에서 이뤄지는 업무의 대부분이 통찰력을 갖춘 첨단의 기획 능력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베르베르와 공지영씨의 공통점
통찰력 있는 기획이 시장에서 먹힌다는 점은 다른 분야에서도 도드라지게 입증되고 있다. 출판기획 분야에서 분야별로 인기를 끌었던 책들은 모두 이런 범주에 속한다. 읽는 역사에서 보고 체험하는 역사로 역사책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놓은 사계절출판사의 <생활사박물관> 시리즈나, 사진보다 더 생동감 있는 세밀화로 상업성과 작품성 모두를 충족시켰다는 평을 듣는 보리출판사의 생태 시리즈 기획 등이 그것이다. 번역서이기는 하지만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우화나 이야기 형식이 장차 대중적인 소구력을 가질 것이라는, 번뜩이는 통찰력이 효력을 발휘한 사례다.
작가 개인의 통찰력 있는 기획 능력도 비교 우위의 차별성을 가져오는 핵심 요소다. <개미>의 베르나르 베르베르나 꾸준히 베스트셀러를 내는 소설가 공지영씨가 그렇다는 게 출판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공지영씨의 경우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보여지듯이 철저한 사전 기획취재를 통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출판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제 작가는 기획력이 있는 작가와 기획력이 없는 작가 두 가지로 분류된다”고 잘라 말했다.
영화 분야에서 기획의 중요성은 오히려 구문에 속한다. 대표적인 영화계 기획통인 MK픽처스의 심재명 대표는 “영화계에서 기획이라는 요소는 마치 공기와도 같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기획 역량을 강조하면 왠지 어색하다”고 전제한 뒤 “다만 성공한 기획과 그렇지 못한 기획으로 나누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했다. 심 대표는 “시대와 소통하는 통찰력을 갖추지 못한 기획의 경우 영화가 개봉되자마자 반응이 온다”고 덧붙였다. ‘이 영화에 저런 배우를 캐스팅하는 게 말이 되냐’ ‘시나리오를 꼭 저렇게 써야 했나’ 하는, 관객의 반응이 그런 것들이라고 한다. 개봉된 영화 가운데 통찰력 있는 기획이 담긴 영화를 꼽아달라는 요청에 심 대표는 영화 <장화, 홍련>을 떠올렸다. “아이디어의 원천은 한국 고전이었지만, 엄마와 가족에 대한 소녀들의 심리적 공포나 억압기제를 적절히 간파한 결과 가장 젊은 관객인 10대들에게 어필한 점은 높이 사야 한다. 신문에 나온 한 줄의 헤드라인이나 문학·음악·미술 등 다른 장르에서 시대의 흐름을 읽는 통찰력이 기획의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영역 간 경계를 넘어서
통찰력 있는 기획을 위해 최근 강조되는 점은 ‘영역 간 경계를 넘는 상상력 있는 기획’과 ‘일상에서 돋보이는 기획’ 능력이다. 인문학과 경영학을 접목해 주목을 받은 구본형씨나 진화생물학과 인문학을 접목한 최재천 교수의 통찰력에서 새로운 기획의 패러다임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틀에 박힌 마케팅 툴로 박제화한 기획은 잘하지만, 요즘은 일상의 삶 속에서 소통할 수 있는 통찰력이 더 필요한 것 같다. 그런 기획이 장기적으로 소비자들에게 먹힐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요즘엔 아마추어이지만 전문가보다 더 전문적인 통찰력을 지닌 이들을 주목하게 된다.” 기획 업무를 10년 이상 해온 한 대기업 ‘기획전문가’의 넋두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획은 준비, 기초 가운데 기초”
기획 이론 강사 김영민 인하대 겸임교수
김영민 인하대 겸임교수는 기획 이론 강사로 기업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기업과 공무원 조직 등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한 지 8년째다. 한 대기업의 인사팀장을 지내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 연구를 통해 기획에 매달린 그는 “처음에 기획에 관한 제대로 된 강의 교재가 없어서 한자사전과 영어사전을 뒤져가면서 교재를 스스로 만들었다”며 “우리 사회가 기획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있지만, 여전히 기획의 개념이 뿌리내리지는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지난해 그동안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기획특강>(새로운 제안 펴냄)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기획력이 다른 능력과 비교해 핵심적인 능력인 이유는 무엇인가.
= 기획은 한마디로 준비다. 준비 잘하는 이가 실패할 확률이 낮은 것은 상식이다. 기초 가운데 기초다. ‘기업이 원하는 능력’에 대한 조사를 해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게 기획력과 문제해결 능력이다. 그런데 기획력 안에는 문제해결 능력이 포함돼 있다. 현황파악 → 원인분석→ 대책개발→ 세부계획 설립이 기획의 과정 아닌가. 아무리 복잡한 것에서도 핵심을 잡아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기획력은 또 통찰력을 필수로 한다. 통찰력은 시스템적 사고를 통해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꿰뚫어보는 능력이다. 일 잘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전체를 보는 데 반해 일 못하는 사람은 부분이 전체인 줄 안다.
기획력에 대한 요구가 이전 시기보다 더 늘어났다고 할 수 있나.
= 서점에 나가보면 10년 전에는 기획 관련 책이 2~3권 정도였는데 요즘에는 15~16권 정도 된다. 관심이 훨씬 늘었다. 요즘 기업들이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방식이 기획서를 준비해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라는 것이다. 취업도 전략적으로 기획해야 하는 시대다. 기획력은 갈수록 비중이 높아질 것이다. 기업에서는 대학에서 기획에 대해 가르쳐서 기업으로 보내줬으면 한다. 대학에서는 이런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실정이다.
기업 영역뿐만 아니라 공무원 조직에서도 기획 강의를 했는데 어떻게 다른가.
= 기업은 신속함을 요구한다. 순발력과 적응력이 아주 뛰어나야 한다. 조직원들이 거기에 길들여져 있다. 강의를 해봐도 스스로 ‘재수’를 하는 이들이 더러 있을 정도로 적극적이다. 공무원 조직은 일단 여유가 있다. 한마디로 유장하다. 기업의 기획이 성과를 내는 게 목표라면 공조직의 기획은 정책의 일관성과 안정성을 목표로 한다. 공무원이 일반 기업의 직장인들처럼 바쁘기만 해도 문제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기획의 깊이이며, 전문성·일관성·신뢰성 등이다. 공무원들이 쓰는 자원은 세금에서 나오는 만큼 공무원들이 만드는 기획이 잘못되면 나라가 흔들릴 수도 있다. 그런데 공무원 조직의 기획 역량은 여전히 부족하다. 공무원들은 기본적으로 간결한 문체를 두려워한다. 기업에서는 두세 줄로 끝날 것을 한 페이지씩 간다. 장관에게 보고된 보고서가 엉망인 경우도 많다. 다행히 요즘엔 지자체의 장들이 선거로 뽑히면서 역동적으로 변하는 분위기도 엿보인다.
기획형 인간’이 되는 법
전문가들이 훌륭한 기획자 되려는 이에게 던지는 첫째 권고는 ‘독서’…영감을 주는 ‘교수진’을 꾸리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생활습관을 만들라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wjryu@hani.co.kr
책에 길이 있다
“월급의 10%는 책을 사는 데 써라.”
훌륭한 기획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전문가들이 권하는 첫 번째 권고사항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생산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기획자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기댈 곳은 바로 정제된 콘텐츠의 보고인 책이라는 것이다. 운동선수들이 연봉의 상당 부분을 체력 보강을 위해 보약이나 건강보조 식품에 투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뇌가 재산인 기획자들은 책에 투자해야 한다는 얘기다. 책을 사지 않더라도 서점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것이 상당한 효과를 불러온다는 이들도 있다. 대형 서점의 경우에는 한 달에 한 번이나 2주일에 한 번꼴로 가서 어떤 책이 새로 출간됐는지를 살피는 게 좋다. 이렇게 하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대중의 관심과 세상의 흐름을 읽을 수 있어 좋고, 자신이 얼마나 무식한지를 깨달아 반성하고 긴장할 수 있다.
자신만의 교수진을 꾸려라
기업 내 기획자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 가운데 하나는 경제·경영서만을 읽으려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최근 세상과 사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기획은 모래 위에 쌓은 성이라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인문학적인 바탕 없이 실무기술적 지식만 잔뜩 쌓아놓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허무해질 수 있다. 하우석 공주영상대학 교수는 꾸준한 독서를 통해 ‘자신만의 교수진’을 만들 것을 권고한다. 그가 제안한 ‘나만의 교수진’의 한 사례를 살펴보자.
“마케팅·커뮤니케이션 부문: 필립 코플러, 돈 E. 슐츠, 잭트라우트, 알 리스, 탄넨바움 등. 철학: 데카르트, 흄, 칸트 등. 기호학: 롤랑 바르트, 소쉬르, 퍼스, 장 보드리야르 등. 정신분석학: 지그문트 프로이트, 칼 융, 에리히 프롬 등. 문화연구: 레이먼드 윌리암스, 스튜어트 홀 등. 시문학: 김수영, 김소월, 김영랑, 구상 등. 마음공부: 법정, 숭산, 달라이 라마, 틱낫한, 에머슨 등. 기타 석학: 노엄 촘스키, 박노자 등.”
하 교수는 “이 스승들은 제자들이 기획자로서 걸으려는 길에 밝은 빛이 되어주고, 끊임없는 영감을 주며, 의지를 강하게 만들어주고, 늘 동기를 부여하고,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고, 격려해주고, 희망을 주고, 늘 함께해준다”고 강조했다. 물론 개인별로 교수진의 구성은 다양해질 수 있다.
세상을 향해 ‘호기심’을 열어라
독서가 중요하지만 책 속에만 파묻혀 있다고 좋은 기획 아이디어가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건 아니다. 일상에서 중요한 것은 세상을 향해 언제나 열려 있는 ‘호기심’이다. 서울에 있는 한 광고기획사는 신입사원들에게 호기심의 중요성을 알려주기 위해 입사하는 날 1시간 동안 명동을 돌아다닌 뒤 회사에 돌아와 돌아다닌 시간과 똑같은 시간만큼 자신이 느낀 점을 말하게 한다. 그렇게 하면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길거리를 다녔던 사람도 사소한 것까지 관찰하게 된다고 한다.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한 생활습관으로는 ‘지하철이나 버스 등 대중교통 수단으로 출퇴근하기’ ‘메모를 일상화하기’ ‘5가지 이상의 전문 잡지를 정기 구독하기’ ‘제2, 제3, 제4의 취미나 동호회를 만들기’ 등이 있다. 현재 물건별로 유행하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법도 권장된다. 자동차, 화장품, 청바지, 아파트, 청량음료, 음악, 연극, 영화, 연예인 등을 쭉 써놓고 각각의 아이템별로 유행하고 있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는지 확인하는 놀이다.
평상시 혼자 있는 시간에 세상만사에 대해 ‘왜’라고 끊임없이 묻는 것도 기획자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생활습관이다. ‘비슷한 규모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 유독 초고속 정보통신이 발달한 이유는 뭘까’ ‘다른 나라보다 비싸다고 하는데도 테이크아웃 커피점이 여전히 인기를 끄는 이유는 뭘까’ ‘인간은 왜 남을 지배하고 싶어할까’ ‘무서운 걸 싫어하면서 왜 공포영화를 찾는 걸까’ 등 단순한 호기심도 통찰력 있는 기획력을 진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감성지수’를 높여라
호기심을 기르면서 함께 키워야 하는 것은 ‘감성지수’를 높이는 일이다. 기업 현장에서는 ‘감성 소비’나 ‘감성 제품 마케팅’이 화두가 된 지 오래다. 기업이 아니더라도 감성이 풍부하지 못한 사람 가운데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나 네트워킹 능력이 뛰어난 이는 거의 없다. 또 감성 능력은 좌뇌와 우뇌를 골고루 발달시켜 균형 잡힌 뇌 기능을 발휘해야 하는 기획자에게는 필수적이다. 일상에서 감성을 키우는 방법으로는 ‘글을 읽는 시간만큼 그림을 보기’ ‘음악을 30분 이상 들으면서 상상하기’ ‘시·소설·수필 등 문학 책을 폭넓게 읽기’ 등이 있다.
국어 공부에 매달려라
기획자는 영어 공부보다는 국어 공부에 매달려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하우석 교수는 “영어는 부차적일 뿐이고 국어 공부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써야 나의 논리가 명확해지고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으며 토론에서 자유롭게 대화하게 되어 기획서 만들기에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이는 결국 기획 자체에 대한 자신감으로 변한다”는 게 하 교수의 주장이다.
시집·소설책·수필집은 부드러운 읽을거리, 철학·역사·전문 분야는 딱딱한 읽을거리, 일기·수필·시는 부드러운 글쓰기, 고객면담 보고·업무상황 보고·기획서는 딱딱한 글쓰기로 나눈 뒤 이 4가지 영역을 반복해서 훈련하는 방법이 있다.
내 안의 여성성에 눈떠라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소장은 기획자의 자질에 대해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중장기적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해야 한다. 이름난 미래학자들의 책은 빠짐없이 읽는 게 좋다. 시대를 관통하고 ‘노마디즘’과 같은 사조에 대해서는 관련된 사회학적 연구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미래를 좌우할 키워드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여성성과 상상력, 창조력이다.”
그리고 겸손하라
기획자에게 요구되는 품성으로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뜻밖에도 ‘겸손’이다. 기획자에게 요구되는 능력 가운데 중요한 것이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기획팀 내부의 의견을 모아서 조율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의견을 조직의 수평·수직으로 전달하면서 조율하는 과정은 전부 복잡한 커뮤니케이션 과정이다. 여기에 더해 협력업체나 관계 기관 등 외부 환경에 존재하는 커뮤니케이션 대상까지 더해지면 겸손하지 않고서는 기획을 제대로 진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참고: <100억짜리 기획력> 하우석 지음, 새로운 제안 펴냄
순간이 위대함으로…
훌륭한 기획의 위대한 품성은 평범한 이들이 갈망하는 일상의 진보적 대안에서…사회환원 사업은 칭송하지 않네, 아름다운 기획은 일과 삶에 지금, 살아 있으니
김학원 출판사 휴머니스트 대표
삶의 시계는 두루마리 화장지와 같다. 술자리에서 누군가에게 들은 말이다. 처음엔 마구 써도 표시가 나지 않다가 갈수록 눈에 띄게 줄어든다. 종국엔 그 끝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후다닥 사라져버린다. 맞는 말이다. 한 사람의 생은 제한적이며 생의 시계는 갈수록 놀랄 만큼 빠르다. 기획의 서사는 생의 그것과 같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의 기획은 변화무쌍하다. 119 소방대원이 되기로 했다가 어느 날 트럭기사와 버스기사 사이에서 고민한다. 기획의 원천은 꿈이다. 만일 ‘기획의 어린 시절’ ‘기획의 사춘기 시절’을 잊는다면, 당신은 아무리 프로 기획자라 하더라도 기획의 원천을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 10대는 기획의 어린 시절이고, 20대는 기획의 사춘기와 같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고 그 사이에서 수많은 체험들이 쌓인다. 30, 40대가 되면 기획이 깊고 넓어진다. 50, 60대로 접어들면 기획은 새로운 동력을 얻는다. 무덤에서 요람까지 기획은 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의지적 활동이다. 한시적인 삶을 어떻게 하면 좀더 의미 있게 살 수 있을까. 이것이 모든 기획의 원천이다.
‘기획의 어린 시절’ ‘기획의 사춘기’…
잘 쓴 글은 멋지지만, 내면을 자극하지 못한다. 그러나 훌륭한 글은 가슴을 뛰게 한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온다. 멋진 기획, 감각적인 기획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 매력이 있다. 그러나 훌륭한 기획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 훌륭한 기획은 공통적으로 위대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 위대한 기획은 취지와 배경, 의도가 훌륭하다.
본문의 글쓰기를 고통스러워하는 저자에게 가끔씩 머리말을 먼저 써보라고 권한다. 머리말이 분명하면 본문이 탄력을 받는다. 기획의 취지와 배경이 얄팍하면 스테디셀러는 나오지 않는다. 학창 시절 ‘강독을 위한 일문법’이라는 소책자가 있었다. 짧은 기간에 일서를 해독할 수 있는 일문법의 핵심들을 놀라울 만한 구성으로 압축해놓은 책자였는데, 일서를 통해 사회과학을 접할 수밖에 없었던 선배들의 오랜 경험이 쌓인 결과물이었다. 지금 다시 보아도 최고의 실용서 기획으로 손꼽을 만하다.
기획의 위대한 품성은 평범한 이들이 갈망하는 일상의 진보적 대안에서 나온다. ‘인생의 책’으로 자주 꼽히는 <백범일지> <난중일기> <전태일 평전>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하나같이 위대한 품성을 품고 있는 책들이다. 내가 펴낸 책들 중 가장 위대한 품성을 지닌 책을 꼽으라면 단연 <살아 있는 한국사 교과서>와 <대담>이다. <살아 있는 한국사 교과서>에는 새 역사 교육에 대한 교사들의 갈망이 담겨 있다.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와 인문학자 도정일 교수가 3년 동안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경계를 허물고 시대의 주제를 놓고 토론한 <대담>은 두 세계의 오랜 장벽에 물꼬를 열며 입에서 입으로 두 학자의 위대한 품성이 오르내리고 있다.
어떻게 하면 탁월한 기획력을 갖출 수 있는가.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다. 아울러 가장 난감한 질문이다. 30대 초반에 기획·출판·편집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책은 거의 모두 읽었다. 도움은 받았지만, ‘기획의 기술, 편집의 기술’은 탁월한 기획력 쌓기와 거리가 멀었다. 기획은 ‘좋은 품성 쌓기’에서 비롯하며 훌륭한 기획은 현장에서 발견·발굴된다는 것을 일 속에서 체험했다. 15년 동안 500여 종의 책을 펴내면서 체득한 기획의 노하우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라면? ‘많이 읽고, 많이 만나고, 많이 생각하라.’ 이보다 훌륭한 답을 찾기는 불가능하다. 그래도 특별한 노하우가 있다면? 나만의 기획 창고를 만들어라. 일반적으로 45개의 창의적인 아이디어 중 3개만이 채택돼 그중 하나가 제품으로 만들어지고 이 과정을 거친 100개의 상품 중에서 2개가 시장에서 특별한 성공작으로 평가받는다. 30대 초반 책에서 읽었던 이 문장 하나가 나의 기획력을 근본적으로 자극했다. 행동으로 옮겼다. 틈만 나면 서점에 가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신간 아이디어를 메모했다. 실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거르지 않았다. 6개월 만에 1천 종의 아이디어를 채웠다. 10여 년 전에 출간한 <상식 밖의 세계사> <상식 밖의 과학사> 시리즈는 1천 종의 기획 비밀 창고에서 나왔다. 물론 책으로 결실을 맺은 것은 20종을 넘지 못했다.
화려한 드리블보다 정확한 패스
훌륭한 아빠가 되고 싶은가. 100개의 아이디어를 메모하라.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아이들과 아내의 요구를 경청해야 한다. 3년 전에 두 아이가 TV를 보다가 말했다. “아빠랑 낚시 가면 정말 좋겠어요.” 지난해 말 아내가 워크숍을 떠난 주말에 두 아이와 낚시를 다녀왔다. 나 역시 난생처음이었는데 그날 나는 아이들에게 “우리 아빠 최고”라는 행복한 찬사를 받았다. 빛나는 창의성은 좋은 품성과 훌륭한 습관에서 비롯한다. 기획의 현장에서 얻은 것을 나만의 비밀 창고에 넣어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행동으로 옮기면 기대하지 않은 감동을 주고받을 수 있다. 마케팅에서 말하는 기획의 승패에 대한 평가 기준은 ‘기대한 만큼의 감동’은 70점, ‘기대 이상의 감동’은 100점이다. 좋은 기획, 위대한 기획은 모종의 비밀스런 음모와 배후가 있어도 좋다. 일과 사랑, 나와 세상에 대한 비밀스런 기획 창고를 만들어 부지런히 저장해두는 습관을 몸에 익혀라.
기획은 아이디어가 아니다. 진보적 열망과 열정, 갈증들을 실천적으로 풀어가는 노력의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품성이 열정을 낳고 열정이 남다른 공력을 거쳐 결실을 맺는 것은 농사일과 다름없다. 1907년에 태어나 2005년 돌아가실 때까지 손수 농사를 짓고 밥상을 차린 내 할머니는 생에서 만난 최고의 기획자였다. 난 아직도 가끔 편의점에 들러 바나나 우유를 사먹는다. 어린 시절 우유만 먹으면 배탈이 났던 내게 바나나 우유는 촌놈을 위한 훌륭한 배려의 결실이다. 이 기획은 누군가의 엄청난 노력의 결실이었을 것이다.
21세기는 평범한 이들의 특별한 기획이 살아나는 시대다. 화려한 드리블보다 정확한 패스 하나에 더 깊이 열광하는 시대다. <라디오 스타>의 안성기가 그랬다. 기획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상 사이의 멋진 관계 맺기이자 소통이다. 핀란드인과 한국인은 공통적으로 이웃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가지지만, 먼저 인사를 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것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지닌 노키야와 삼성의 휴대전화를 낳는 토양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있다. 소통의 문화, 소통의 철학은 서로 승리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기는 관계 맺기는 구시대의 기획이다. 훌륭한 기획자는 정확하고 멋진 패스워크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하며 또한 이를 연출할 줄 알아야 한다. 연출이란 일의 영역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건축과 영화에 대한 가장 큰 아쉬움이 여기에 있다. 훌륭한 건축과 영화에서 왜 설계자와 감독만이 주연이 되어야 하는가.
기획은 설계도이지만, 설계도 모두가 건축물이 되지는 않는다. 연초 워크숍에서 역량 있는 학자들의 깊이 있는 학술서 시리즈의 표지 포맷을 기획한 디자이너의 멋진 프레젠테이션이 있었다. 학자들의 깊은 지식 세계를 남다른 시각의 인물 사진으로 담아내는 안이었다. 박수를 받았지만 실행 단계에서 무산됐다. 인물 사진을 찍기 싫어하는 국내 학자들의 공통된 기질 때문이었다. 이처럼 현실은 기획자들에게 전복의 상상력을 선사해준다.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서 실패는 새로운 상상력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실패가 준 전복의 상상력
이 기획으로 나와 이웃, 세상 사람들이 더 행복해질 수 있는가. 건강한 진보의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가. 인류애를 향한 물음은 먼 훗날, 내가 좀더 윤택해지면 해보리라. 난 빌 게이츠의 재단 사업과 사회환원 활동을 그리 칭송하고 싶지 않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부자들의 논리는 안쓰럽다. 아름다운 기획은 더운 여름날 연거푸 아이스크림을 찾는 아이에게 배탈 나니 오늘은 그만 먹으라며 돌려보낸, 내 어린 시절 동네 아주머니의 아름다운 가게처럼 일상의 일과 삶에 지금, 이 순간부터 살아 있어야 한다.
한겨레21 2007년02월02일 제64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