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07.30 [펌]Who's who 이명박 파워맨_신동아
  2. 2008.07.30 MB의 두 가지 뻘타

김병국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
미국에 두터운 인맥 둔 하버드 박사

정현상(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대통령의 외교안보 정책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고 있는 김병국 외교안보수석은 외교부 장관, 국방부 장관, 통일부 장관과 함께 한미동맹 강화에 역점을 두면서도 경제에 방점을 찍고 있다. 수석에 내정된 뒤 그가 “변환의 시대에 외교안보가 경제 살리기의 걸림돌이 되지 않고 오히려 엔진이 되도록 하겠다”고 소감을 밝힌 것도 그런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대북 외교 정책과 관련해서는 “21세기 복합변환시대에 맞는 ‘햇볕 이후’ 새로운 대북 외교 정책이 필요하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아일보 창업자인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의 손자인 김 수석은 미국의 명문 고교를 나와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학사와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같은 학연 덕분에 미국 내 한반도 전문가 및 관료들과 두터운 인맥을 형성하고 있으며, 또 그 점이 외교안보수석 발탁의 주요 요인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전공분야는 비교정치와 정치경제학. 박사논문 주제는 ‘한국과 멕시코의 사회경제 변화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비교 연구다. 1990년부터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해왔으며 2002년 5월에는 동아시아 지역의 외교·안보 문제를 연구하는 동아시아연구원(EAI)을 창립해 수석 내정 이전까지 원장을 맡았다. 1994년부터 4년간 대통령자문 21세기위원회에서도 활동했다.

이명박 대통령과의 인연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이번 외교안보수석 발탁에는 EAI 이사로 있는 하영선 서울대 교수(외교학)의 추천을 받은 류우익 대통령실장의 천거가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훈은 ‘공선사후(公先私後)’이며, 책임감이 강하고 공(公)과 사(私)의 구분도 명확하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성실하고 학문적 역량이 뛰어난데도 나서는 스타일이 아니며, 겉으론 유연해 보이지만 주관이 강한, 저돌적인 완벽주의자”라는 평도 얻고 있다.

金炳局
생년월일 : 1959년 3월18일
출생지 : 서울
학력 :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과 / 하버드대 정치학 박사
경력 :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하버드대 국제관계연구소 객원교수 / 동아시아연구원(EAI) 원장 / 하버드대 자문교수 / 고려대 평화연구소장
저서 : ‘라틴아메리카의 도전과 좌절’ ‘분단과 혁명의 동학’ ‘국가ㆍ지역ㆍ국제체계 : 변화와 연속성’ ‘21세기 한국정치’ ‘한국 민주주의의 강화Consolidating Democracy in South Korea’ 등
상훈 : 국민훈장 동백장(1998)


김하중 통일부 장관
중국 고위인사와 언제든지 전화할 수 있는 중국통

신석호(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 하종대(동아일보 베이징특파원)

김하중 통일부 장관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그는 이명박 새 정부의 초대 통일부 장관으로 내정된 다음날인 3월3일 베이징(北京) 한국대사관에서 한국 특파원단과 가진 간담회 자리에서 “기도했다”는 표현을 여러 차례 사용했다.

그는 “북한 동포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고 눈물이 나온다”며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을 수행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남북한에 모두 축복이 내려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통일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아침저녁으로 기도했다”고 회고했다. 또 “현재 내가 매일 기도를 해주는 80여 명의 중국 고위 관리 가운데 5명이 현직 부장(장관)이고 21, 22명이 부부장(차관)”이라며 “이들 모두와 급할 때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통일부 장관으로서 “이명박 대통령의 글로벌 코리아와 실용주의, 개혁개방 캐치프레이즈에 맞춰 국민이 합의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무리하지 않게 정책을 추진할 것”이라며 “실용주의에 입각해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방법으로 대북정책을 추진해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과거 대통령의전비서관과 외교안보수석비서관, 주중대사로 일하면서 북한 측 인사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던 점이 통일부 장관으로서 정책을 추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2005년 6자회담 9·19공동성명 발표 당시 김계관 외무성 부상 등 북한 측 대표단과 허심탄회하게 폭탄주를 마셨던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1년 10월 주중대사에 임명돼 6년 5개월째 일했다. 정통 직업 외교관으로서는 역대 최장수 대사 재임 기록의 보유자다.

유명환 신임 외교통상부 장관과 외무고시 7회 동기로 수준급의 중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중국 실력자들과 교분이 두텁다. 언제든지 중국 고위 인사들과 연락을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한국인으로 꼽힌다.

특히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 주석과는 각별한 친분을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2001년 통역 없이 장 주석에게 대사 신임장을 들고 가 그가 제시한 3개 대표론(중국 공산당이 선진생산력과 선진문화, 광범위한 인민을 대표해야 한다는 내용)을 줄줄 외워 깜짝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金夏中
생년월일 : 1947년 1월9일
출생지 : 강원 원주
학력 : 삼선고, 서울대 중문과, 서울대 행정대학원(수료)
경력 : 외무부 동북아 2과장, 의전담당관, 아태국장, 장관 특별보좌관, 대통령의전비서관, 외교안보수석, 주중대사
상훈 : 황조근정훈장(1997), 꼼멘다또레 기사훈장(2000, 이탈리아), 레지옹도뇌르 3등급훈장(2000, 프랑스), 아즈텍 독수리훈장(2001, 멕시코)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준비된 경력과 뛰어난 정치적 감각

김현수(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2월7일 열린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내정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소속 여야 의원이 모두 쌍수를 들어 유 내정자를 환영했다. 여야 의원들은 앞 다퉈 “이명박 내각 중 가장 잘된 인사(통합민주당 정의용 의원)” “장관 축하연 자리 같다(한나라당 고흥길 의원)” 등으로 유 내정자를 치켜세웠다. “예전부터 장관이 될 거라 예상했다”는 말도 여러 번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유 장관은 2005~2006년 노무현 정부에서 외교부 제1, 2차관을 역임했다. 통합민주당이 그의 과거 행적을 비판할 수 없는 이유다. 한나라당도 새 정부의 초대 외교장관을 대놓고 파헤칠 처지가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과의 직접적인 인연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이한 외교정책을 표방하는 두 정부에서 모두 요직을 맡게 된 유 장관을 두고 외교가에선 ‘준비된 경력’과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그 이유로 꼽고 있다.

유 장관은 외교부의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꼽힌다. 외무고시 7회로 1973년 외교부에 입부한 후 35년 동안 주미대사관 참사관, 미주국 심의관, 북미국장, 주미대사관 공사 등을 두루 거쳤다. 최근 자원외교와 대(對)테러 문제로 중시되고 있는 중동지역에 대해서도 해박한 편이다. 대테러 및 아프간 문제 담당대사와 주(駐)이스라엘 대사를 거쳤다. 김영삼 정부에서 청와대 외교비서관을 맡는 등 청와대 경험도 있다. 이에 대해 한 외교부 고위인사는 “프로필만 봐도 준비된 외교부 장관”이라고 말했다.

대체로 평소 소신과 주장이 뚜렷하면서도 타고난 융화력으로 조직을 통솔한다는 평이다. 친화력이 있어 핵심 요직만 거쳤지만 적이 많지 않다고 한다. 반면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권력의 눈치를 다소 본다는 지적도 있다.
유 장관이 외교부 제1차관 시절, 미국이 요청한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참여 확대 여부를 두고 논란이 빚어지자 2006년 10월 국회에서 “PSI에 부분적으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사안별)로 하려 한다”고 ‘소신발언’을 했다가 여당 의원들로부터 호된 추궁을 당했다. 그러나 한 달 후 11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한반도 주변 수역에서 PSI를 이행하면 무력 충돌의 가능성이 있어 참여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번 장관 인사청문회에선 다시 “PSI에 더 적극적인 참여 방안이 있는지 검토하는 게 타당하다고 본다”고 밝혔다.
유 장관은 ‘정치 감각이 뛰어나고 양지만 지향한다’는 일부 평에 대해 인사청문회에서 “저와 생활을 같이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평가가 다르다”고 말했다.

柳明桓
생년월일 : 1946년 4월8일(음력)
출생지 : 서울
학력 : 서울고, 서울대 행정학과
경력 : 외시 7회, 북미국장, 주이스라엘 대사, 외교부 1·2차관, 주일대사


김태표 대외전략비서관
이 대통령의 외교안보 ‘과외선생’

박민혁(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청와대 비서관 가운데 이명박 대통령의 복심(腹心)으로 분류되는 비서관은 많지 않다. 비서관들 가운데 이 대통령과 함께 지낸 세월을 기준으로 한다면 김태효 대외전략비서관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다.

단순히 함께한 시간의 양뿐 아니라 외교안보 분야에서 실력도 뛰어나다는 평가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권’을 꿈꾸며 준비하던 2004년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이던 김 비서관을 ‘외교안보 분야 과외 선생님’으로 모실 정도였다. 경제에 대해선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이 대통령이지만 당시만 해도 외교안보 분야는 ‘과외 공부’가 필요했다.

김 비서관은 초창기 멤버인 연세대 김우상 교수 등과 함께 일요일마다 이 대통령에게 ‘외교안보 분야 주말공부’를 시켰다. 당시 경제 분야 자문 선생님은 곽승준 국정기획수석비서관이었다고 한다.

대선이 본격화하면서 김 비서관은 이명박 캠프의 외교안보 분야 핵심 자문교수 멤버로 활동을 이어갔다. 1967년생으로 자문교수 가운데 막내이던 김 비서관은 보고서 작성 등 실무적으로 이 대통령에게 도움이 됐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경선이 한창 진행 중이던 2007년 6월경 사석에서 김 교수에 대해 “젊은 사람이 능력이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김 비서관은 대선 과정에서 이 대통령의 대표적인 대북정책인 ‘비핵·개방·3000’ 구상을 현인택 고려대 교수 등과 함께 주도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의 길로 나온다면 국제사회와 협력해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을 3000달러로 올려주겠다는 게 핵심이다.

김 비서관은 이 대통령의 핵심 외교안보 자문 교수 가운데 유일하게 청와대에 입성한 인물이다. 함께 일했던 김우상 연세대 교수, 남성욱 고려대 교수, 현인택 고려대 교수, 남주홍 경기대 교수 등은 학교로 돌아갔다.

그는 미국 외교 정책과 외교안보 전략이 주된 전공 분야로 한미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보수성향의 학자다. 청와대에서는 외교안보수석의 외교비서관, 국방비서관, 통일비서관 업무를 조율하기도 한다.

金泰孝
생년월일 : 1967년 2월23일
출생지 : 서울
학력 : 마포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미국 코넬대 정치학 석사, 시카고대 정치학 박사
경력 : 신아세아연구소 외교안보연구실장, 한국국제정치학회 총무간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초빙연구원, 일본 게이오대 방문교수, 외교통상부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저서 : ‘21세기 미국의 외교안보정책과 동아시아’ ‘서울-평양간 교류협력 방안의 모색’


김재신 외교비서관
외교통상부 내 대표 일본통

조수진(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외교관으로서는 드물게 주미대사관, 주일대사관, 주중대사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대통령비서실을 모두 거쳤다. 외교통상부에서는 대표적인 ‘일본통’. 일본어에 능통해 정부 고위층 일본어 통역을 담당했다. 일본에서 두 차례 근무했고, 외교부에서도 동북아1과장(일본 담당), 아시아·태평양국장, 동아시아국장을 지냈다. 일본 외무성 관료들은 물론, 중·참의원, 언론인 등 여러 분야에 지인이 많다.

이런 이유로 이명박 대통령이 천명한 ‘새로운 한일관계 정립’ 실무자로서 가장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후문이다. 또 김병국 대통령외교안보수석, 유명환 외교부 장관, 김태효 대통령외교전략비서관이 모두 대미 외교 전문가여서 일본, 중국을 두루 잘 아는 인사가 필요하다는 판단도 고려됐다고 한다.

일복이 많다는 평을 듣는다.

1995년 주미대사관 1등서기관 시절에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을 위한 4자회담 협의체 구성과 개최 문제를 담당했다.

2001년 외교부 동북아1과장 시절엔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왜곡 교과서 파문, 쿠릴 열도 꽁치조업을 둘러싼 꽁치 파동 등이 잇따라 터졌고, 한일관계가 위기를 맞으면서 타결책 마련에 동분서주했다.

2007년 7월 외교부 아시아·태평양 국장 시절엔 아프간 피랍사태가 발생하는 바람에 인질 석방의 막후 협상을 지휘하면서 두 달 가까이 피말리는 시간을 보냈다.

업무 처리는 치밀하며, 인화와 의리를 가장 중요시한다. 동북아1과장 시절 거의 매일 야근을 하게 되자 간단한 저녁식사 후 당구 한 게임을 함께 하며 후배들을 다독인 일화는 유명하다. 한 외교관 후배는 “후배들이 믿고 따르는 선배”라고 평했다. 상대방을 설득해 타협을 이끌어내는 조정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외교부 농구부 주전 선수로 탁구, 골프, 축구 등 공과 관련된 스포츠에는 모두 강하다고 한다. 별명은 올 라운드 플레이어란 의미에서 ‘날쌘돌이’와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에서 ‘의리의 사나이’. 영화와 음악 감상이 취미지만 시간이 잘 나지 않아 영화관이나 음악회에 자주 가지 못하는 게 아쉽다고 한다.

金在信
생년월일 : 1957년 5월30일
출생지 : 전주
학력 : 전주고,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학·석사
경력 : 외무고시 14회, 주일본대사관 2등서기관 및 참사관, 주미국대사관 1등서기관, 주중국대사관 참사관, 외교부 동북아1과장, 아시아·태평양국장, 동아시아국장
상훈 : 홍조근정훈장(2007)
취미 : 영화관람, 독서
가족관계 : 아내 이종민(48)씨와 1남 1녀
좌우명 : 매사에 성실하자


홍양호 통일부 차관
공직생활 끝내려다 차관 된 햇볕정책 실무책임자

신석호(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행시 21회에 합격한 뒤 총무처에서 공직을 시작했다. 1983년 자원해 당시 국토통일원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현재 남아 있는 통일부 내 고시 출신 최고참으로 고시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매우 강하다.

2000년 6월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한 기간(1999년 12월~2001년 7월)에 인도지원국장으로 일하며 김대중 정부 ‘햇볕정책’의 핵심인 대북 인도지원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했다. 노무현 정부의 정동영, 이종석 장관 재임 기간 중에는 요직인 기획관리실장(2005년 2월~2006년 6월)을 맡았다.

2006년 6월에는 남들이 가기를 꺼리는 남북회담본부 상근회담대표 자리를 후배들을 위해 자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 공직 생활을 정리할 마음의 준비를 하던 중 통일부 차관에 발탁됐다.

꾸준히 쉬지 않고 공부하는 학자 스타일이다. 경북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통일부 재직 중이던 1986년 12월 미국 조지아주립대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단국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해 1998년 2월 ‘탈냉전시대 북한의 협상행태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올해 4월3일 경남대의 남북공동체지도자과정 특강에서 학생들에게 “평생 학습의 시대이니 열심히 배워 꼭 목적을 이루라”고 격려했다.

3월 3일 취임사에서 “그동안 우리는 ‘보다 많은 접촉, 보다 많은 대화, 보다 많은 협력’을 위해 노력해왔다”고 평가하고 “(앞으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이제는 ‘보다 많은 내실 있는 접촉, 보다 많은 내실 있는 대화, 보다 많은 내실 있는 협력’을 해나가자”고 말했다. ‘내실’의 의미는 “지난 10년이 접촉에 주력했다면 이제는 알맹이도 추구하자는 것”이라며 “이왕이면 이익과 성과가 있는 경협, 성과가 있는 대화를 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취임 후 장관 인사청문회와 대통령 업무보고 등 각종 조직 내 대사를 무난하게 지휘해 부처 폐지 위기에 시달리던 통일부의 안정에 기여했다는 평가다. 3월27일 북한이 개성공단 내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에서 남한 당국자 11명을 사실상 추방했을 때 “이번 사건과 관련해 (북에) 당근(유인책)을 내놓지 않을 것”이라며 당당하게 대응했다.

북한 협상 관련 전문가인 그는 3월 말 이후 잇따른 북의 도발에 대해 “북한은 남한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각종 도발을 해 온 전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4월6일 일요일에도 출근한 그는 “차관이 되기 전까지는 매주 일요일 아내와 집 근처 산에 올랐는데 올해는 취임 이후 한 달이 넘은 오늘에야 처음으로 산을 찾을 시간을 낼 수 있었다”며 “몹시 분주했던 사이 온 산에 봄이 왔더라”고 말했다.

洪良浩
생년월일 : 1955년 5월25일
출생지 : 대구
학력 : 경북고, 경북대 경제학과, 미국 조지아대 대학원 정치학과(석사), 단국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박사)
경력 : 행정고시 21회, 통일부 인도지원국장, 경수로기획단 정책조정부장, 기획관리실장, 남북회담본부 상근회담대표
저서 : ‘탈냉전시대 북한의 협상행태에 관한 연구’(박사학위 논문)
상훈 : 홍조근정훈장


권종락 외교통상부 1차관
10년 외곽 돌다 화려하게 컴백한 대통령 고향 후배

조수진(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외무고시 5회로 1972년 3월 외무부에 들어와 북미 라인과 통상, 유엔 등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쳤다. 외시 7회인 유명환 장관보다 기수는 2회 앞서지만 입부후 군 복무(해군 장교)로 실제 근무시기는 외시 9회와 같아 ‘서열’에는 문제가 없다는 게 중평이다.

과장 시절에는 통상업무에 주력했다. 이후 유엔 참사관을 지내다 이상옥 장관 보좌관으로 발탁됐다. 김영삼 정부 시절 주미대사관 정무참사관과 대통령외교비서관, 대통령외교통상비서관을,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엔 북미 라인의 핵심인 외교부 북미국장을 각각 지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주케냐 대사, 주아일랜드 대사 등 외곽을 맴돌았다. 보직을 받지 못해 연세대와 외국어대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이 대통령이 고향 선배이자 포항중 동문이지만 이 대통령과의 직접적인 인연은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에 재임중이던 2006년 6월 맺었다고 한다. 서울시장 임기 막바지이던 당시 이 대통령은 퇴임 후 대권 행보를 염두에 두고 해외 선진사례 벤치마킹을 위한 아일랜드 방문을 검토했고, 당시 주아일랜드 대사였던 권 차관이 몇 차례 조언을 했다는 것.

그러다 대통령선거 직전인 2007년 가을 외교부를 떠나 MB캠프에 합류했다. 대선 때엔 국제관계 특보로, 대선 이후에는 당선인 외교보좌역으로 이 대통령을 도왔다. 그 결과 새 정부 출범 후 고향인 외교부로 ‘화려한 컴백’을 했고, 취임 일성으로 “실용외교의 전사(戰士)가 되자”며 이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강조해 ‘실세 차관’이란 평을 들었다.

중요한 현안을 맡으면 특유의 집중력으로 철저를 기하는 스타일.

매사 판단이 예리하고 추진력이 뛰어나다. 과제가 주어지면 주변을 돌아보지 않아 저돌적이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 출장 수행에 늦어 뛰어가다가 호텔 로비 유리창을 깨고 돌진해 응급실로 실려간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술을 잘하지 못해 비사교적이란 선입관을 갖게 하지만 개방적인 사고를 지니기 위해 늘 노력한다고 한다. 직원들과의 토론도 마다하지 않는다. 좌우명도 ‘진취적으로 행동하자’.

티칭 골퍼 자격증을 취득했고, 윈드서핑에도 능한 만능 스포츠맨. 왈츠, 탱고, 룸바, 차차차, 자이브 등 스포츠 댄스 5개 정규 종목을 마스터하기도 했다. 주아일랜드 대사 시절 대사관저의 넓은 거실에서 부인과 함께 춤을 배우며 객지 생활의 외로움을 달랬다고 한다. 동생(권기창 FTA 추진단 과장)도 외교관이다.

權鍾洛
생년월일 : 1949년 8월16일
출생지 : 경북 포항
학력 : 대구고, 서울대 외교학과, 미국 플렛처법률외교대학원 석사
경력 : 외무고시 5회, 유엔대표부 안보리담당 참사관, 외무부 장관 보좌관, 주미대사관 정무담당 공사 참사관, 대통령외교비서관 및 외교통상비서관, 외교부 북미국장, 주케냐 대사 주아일랜드 대사,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겸임교수 및 외국어대 법과대학 전임교수, 대통령당선인 비서실 의전팀장.
가족관계 : 부인 남연희(53) 씨와 1남 1녀
종교 : 천주교.
좌우명 : 진취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라.
혈액형 : A형.
주량 : 포도주, 맥주, 소주, 양주 모두 1잔씩만.


김성환 외교통상부 2차관
음악 즐기는 다자외교 적임자

조수진(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구주 라인과 미주 라인을 두루 거쳐 외교통상부 내에서는 대미 외교 및 대러시아 관계 전문가로 손꼽힌다. 1977년 외무고시 10회에 합격한 이후 초기에 러시아에서 근무했다. 1985년부터는 2년간 런던대학에서 러시아어와 러시아정치학을 공부했고, ‘격동하는 러시아 정치’란 책을 펴냈다. 이후 1997년 미국 대사관 참사관을 시작으로 외교부 북미국 심의관 및 북미국장 등을 거치며 대미 외교 경험을 쌓았다.

2005년 외교부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2006년부터 차관으로 임명될 때까지 주오스트리아 대사 겸 주빈국제기구대표부 대사를 지냈다. 이명박 대통령과는 직접적인 인연이 없지만 오스트리아에는 IAEA(국제원자력기구)를 비롯한 국제기구 본부가 소재하고 있어 2차관이 맡는 다자(多者)외교 업무 수행에 적임자란 평가를 받아 낙점된 것으로 전해졌다.

외교부 내에서는 자원외교의 ‘개척자’로 통한다. 2002년 8월 자원이 풍부한 주우즈베키스탄 대사로 부임한 뒤 틈날 때마다 광산(탄광)을 시찰했다고 한다. 우즈벡은 금 매장량 세계 5위, 우라늄 매장량은 세계 8위. 호감을 느낀 우즈벡 지질위원회는 김 차관을 통해 한국에 금과 우라늄 채굴권을 제안했고, 김 차관은 이를 한국광업진흥공사와 연결시켰다.

이러한 양국 간 자원협력 분위기는 우즈벡이 개방한 11개의 천연가스전 중 우리나라 석유공사와 가스공사가 4개 가스전의 지분 및 탐사권을 따내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후문. EDCF(대외경제협력기금)을 활용해 우즈벡에 부족한 교육 기자재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 우즈벡을 떠날 때 우즈벡 수교훈장 대장을 받았다.

부드럽고 조용한 성품으로 인간관계가 원만하고 선후배들의 신망이 두텁다. 주요 보직 인사 때 경합자에게 자리를 양보한 적도 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유비’. 하지만 업무에서는 강단이 있고 통찰력이 돋보인다는 평이다. 최근 2, 3년 동안엔 인사 때마다 차관 물망에 오를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는다.

취미는 오페라와 고전음악 감상. 김 차관은 “모차르트 탄생 200주년이던 2006년 2월 오스트리아 대사로 부임했고, 대사관저가 베토벤이 교향곡 ‘전원’을 작곡한 곳 부근에 있어 자연스럽게 음악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게 된 것 같다”고 했다. 우리 음악도들이 서양 음악의 본고장인 빈에서 예술적 기량을 펼칠 공간을 마련해주기 위해 1999년 반기문 당시 주오스트리아대사(현 유엔 사무총장)가 설립한 첫 해외 상주 다국적 오케스트라인 한-오 오케스트라 활동을 활성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발레와 와인에도 조예가 깊다.

金星煥
생년월일 : 1953년 4월13일
출생지 : 서울
학력 : 경기고, 서울대 경제학과, 서울대 대학원(국제경제학과 수료), 영국 런던대 연수
경력 : 외무고시 10회, 주러시아 1등서기관, 외교부 동구과장, 북미국 심의관 및 북미국장, 주우즈베키스탄 대사, 외교부 기획관리실장, 주오스트리아 대사
가족관계 : 이숭덕(54)씨와 2녀
종교 : 기독교


엄종식 통일비서관
노무현 정부 ‘찬밥’ 견뎌낸 통일부 고참

신석호(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1981년 제25회 행정고시에 수석으로 합격 했다. 1983년 행정사무관으로 통일부에 들어와 지난해 12월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외교통일안보분과위원회 전문위원으로 발탁될 때까지 24년 동안 일했다.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1월부터 2002년 10월까지 2년 10개월 동안 교류협력국 총괄과장을 맡아 제1차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 이후 활발해진 남북 교류 협력 사업의 실무를 현장에서 총괄했다. 1996년 12월부터 약 3년 동안 통일정책실 정책기획과장으로서 중장기 통일 방안과 통일과정 및 통일 후 플랜을 기획 입안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3년 동안 외부 기관 파견 생활을 했다. 2003년 1월 국방대학교에 파견돼 1년을 보냈고 2004년 1월부터 2006년 1월까지는 동북아시대위원회에 파견됐다. 정책홍보본부 정책기획관으로 복귀한 뒤에는 6자회담 대표 등으로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 업무 등을 맡았다.
노 정권 당시 ‘장기 외유’를 한 이유에 대해 대통령과 ‘코드’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嚴鍾植
생년월일 : 1959년 1월14일
출생지 : 서울
학력 : 영훈고, 연세대 행정학과,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경력 : 행정고시 25회, 통일부 교류협력국 총괄과장, 통일부 정책홍보실 정책기획관,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외교통일안보분과위원회 전문위원

Posted by 없음!
,
관련 기사는 여기

뻘타 하나, 다들 아는 ARF

싱가포르는 비동맹국이었고, 따라서 70년대 북의 외교를 생각해보면 주요한 외교상대국 중 하나
무뇌아 MB는 싱가포르나 북 정도는 외교의 대상으로 생각도 안 했겠지
그러다 한방 제대로 얻어맞은 거고

금강산 문제를 국제외교로 풀겠다는 개념없음에서 당연하게 비롯된 일인지도
금강산은 금강산관광특구 관련법으로 운영되는 남북 공동의 공간인데다,
많이들 까먹은 모양인데
원래는 해군항이었으니 준 군사지역이기도 할 텐데-물론 그렇다고 북측 초병의 경직된 판단, 또는 초병을 남북관계와 군사관계의 전방에 배치한 북측 당국의 잘못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남북이 해결할 일을 국제외교로 가져가니, 니들끼리 잘 해봐라 얘기 말고 뭘 해줄 수 있겠어 ㅋ


뻘타 둘, 비동맹회의에서의 대응

사실 이건 환영할 일임
10.4에 대응해 9.19를 넣자? 좋은 일이얌

MB 외교안보 라인은 9.19 전문을 제대로 보지도 않았음에 틀림없음
9.19의 핵심은 행동 대 행동에 경수로 제공 협의에, 동북아 평화보장 포함
10.4에도 9.19 지켜야 한다는 조항 들어가있음

10.4는 빼자는 발상에서 9.19가 나온 맥락도 잘 안 읽히지만, 어쨌든 9.19 이행하자고 하면 남측의 의무가 많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지

Posted by 없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