늠름한 민중

and writing 2005. 11. 7. 11:21

늠름한 민중

소년에게.
20년 동안의 공백 뒤에 귀국했던 나에겐 두 가지 충격적인 언어가 있었습니다. 남대문이나 서울시청 건물이 작아 보인 것은 ‘성장의 그늘’처럼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나를 갸우뚱하게 했던 말은 “부자 되세요!”였습니다. 내가 20여 년 동안 살았던 프랑스 사회의 가치관으로도, 그 이전에 살았던 한국 사회의 가치관으로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화두였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도 ‘기업하기 좋은 나라’처럼 납득할 수 없는 말들이 있었지만 가장 충격적이었던 말은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라는 광고 문구와 가난한 아버지가 자식에게 내뱉은 “너는 나처럼 살면 안돼!”였습니다.

오늘 첫 수요편지의 제목을 <늠름한 민중>으로 단 이유는 내가 아직 두 말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첫 편지를 소년에게 부치는 이유는 소년은 아직 ‘5년 안에 10억 만들기’ 위해 내달리기 전이라고 믿어 <늠름한 민중>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년이라면 알아야 합니다. 설령 일제 말기에 중학생이었던 리영희 선생처럼 소년 시절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놓고 데칸쇼(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를 만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소년인 그대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가 얼마나 폭력적인 말인지 알아야 합니다.

양극화로 치닫는 사회에서 “대한민국 1%의 힘” 따위의 말에 분노하기는커녕 롯데 캐슬이나 타워 팰리스에 대한 선망에 매몰되어 그 말의 폭력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어른들과 달리, 타자에 대한 상상력을 간직하고 있는 그대는 가령 쪽방촌 사람들이 그 말을 듣는 광경을 그리면서 그 말의 폭력성을 충분히 알아차릴 것입니다.

그리하여 소년은 그 말을 다음과 같이 바꿔 말할 줄 알 것입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속물인지 말해줍니다.” 가난한 아버지가 자식에게 내뱉는 “너는 나처럼 살면 안돼!”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의 대구(對句)입니다. 뒤의 말이 물질지상주의의 폭력성을 담고 있다면, 앞의 말은 그런 사회가 가난에 강요한 비참함을 반영합니다.

아직 소년인 그대의 친구들이 벌써 장래 희망을 CEO로 꼽고 있을 때, 세계와 만나는 창문인 책을 자주 펼치며 성찰하는 그대는 일생 땀 흘려 일한 아버지들의 “너는 나처럼 살면 안돼!”에서 슬픔과 함께 분노를 느낄 것입니다. 그 슬픔과 분노는 <늠름한 민중>이 이 시대를 사는 조건입니다. 물론 이 사회를 지배하는 속물들은 <늠름한 민중>을 용인하지 않습니다.

.......

그래서 어른들은 말해왔습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그러니 나서지 말라고, 편안하게 살려면 적당히 굴종하라고 말합니다. 자본의 독재 시대에 늠름한 민중이 설자리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소년이 정녕 늠름한 민중이 되고자 할 때, 이 시대가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분노와 슬픔을 비판하고 참여하고 행동하는 근거로 삼아야 하는 까닭입니다.

한겨레 제2창간 독자배가추진단장 홍세화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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