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에 목숨 걸지 말라
부동산값 급등으로 가장 재미본 집단은 금융회사들…무리하면 총이자가 원금에 가까워질 수도
“두 분 명의의 부동산이 있나 보죠?”
남편 이기용(36·가명)씨와 부인이 각자 청약예금과 청약부금 통장을 갖고 있고, 무주택자만 가입할 수 있는 청약저축 통장이 없어서 물어본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이씨 부부는 현재 서울에서 1억4천만원짜리 전세를 살고 있는데, 4년 내로 4억원쯤 되는 아파트를 마련하고 싶어한다. 이씨는 4년 전에 300만원짜리 청약예금에 가입했다. 부인 역시 비슷한 시기에 청약부금에 월 10만원씩 붓다가 최근에 불입을 중지했고 잔금은 450만원이다.
결혼 뒤 부인은 이씨가 청약예금을 해약하고 청약저축에 가입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4년씩이나 유지한 통장을 해약하는 게 아까워 은행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은행 직원은 1순위이니 그냥 유지하라고 말했다. 오히려 더 큰 평수가 가능한 600만원으로 증액하는 것도 고려해보라고 했다.
상품 자체로만 본다면 은행 직원 말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건 이씨에게도 맞고 다른 사람에게도 맞는 말이다. 그렇게 누구에게나 맞는 답을 찾자는 게 아니라, 이씨의 구체적인 상황에 가장 알맞은 답을 찾자는 것이다. 은행 직원은 투자가치를 생각해 그렇게 대답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이씨 가정에는 국민주택 규모의 주택이 우선 필요하다. 그리고 부인도 청약통장이 있으므로 본인은 청약저축으로 전환해 주택공사나 지자체가 공급하는 국민주택을 청약하고 부인이 민간 건설 국민주택을 청약하는 게 유리하다. 4년 뒤를 목표로 하므로 시간은 충분하다. 또한 자금 계획 면에서도 가능한 자금이 적게 드는 아파트를 구입하는 게 좋다. 이후 발생할 투자가치를 위해 무리한 대출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금 계획을 보자. 이씨가 4년 뒤에 4억원대 아파트에 청약했다고 하자. 지금 전세가가 1억4천만원이니까 차액은 2억6천만원이다. 저축 여력의 80% 이상인 200만원씩을 매월 연 8% 수익률로 투자하면 4년 뒤에 약 1억1천만원을 모은다. 그래도 1억5천만원이나 모자란다. 모자라는 돈을 연 6% 이자율로 3년 거치 20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대출받는다고 치자. 이씨가 내야 할 총이자는 무려 1억1600만원이 넘는다. 원금에 가까운 금액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 돈을 대출해주는 금융사는 아주 쉽게 이자수입을 챙긴다. 은행으로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집을 사면서 최대한 많이 대출해가기를 바란다. 은행 직원 역시 자기가 일하는 은행의 논리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동화된다.
물론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민영 개발 아파트에 청약하는 것이 더 많은 시세차익을 얻을 수 있다.’ ‘시세차익이 대출이자를 감당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지난 몇 년 동안 부동산값이 많이 올랐다. 대출을 많이 받아 투자 목적으로 아파트를 산 사람들도 많았다. 부채도 자산이라며 너도나도 수익률 경쟁에 나섰다. 그래서 정말 각 가정들이 재산을 더 불렸는지를 조사해봤다.
지난해 재무설계 전문업체인 포도에셋에서 재무 상담을 받은 36∼45살 고객들을 부채가 500만원 이하인 고객과 1억원 이상인 고객으로 분류해봤다. 가구당 월평균 소득은 각각 474만원과 487만원으로 큰 차이가 없다. 자녀 수도 1.80명과 1.85명으로 비슷하다. 부동산 자산은 부채가 1억원 이상인 가구(3억9435만원)가 부채가 거의 없는 가정(1억7869만원)에 비해 두 배 이상 많다. 그런데 자산에서 부채를 뺀 순자산은 반대로 부채가 거의 없는 가정(2억6439만원)이 부채가 1억원 이상인 가구(2억4466만원)보다 더 많다.
부채가 1억원 이상인 가정의 자산(부동산자산+금융자산) 비중을 보면, 부동산 자산이 전체의 92.5%로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다. 또한 그 부동산 자산의 반 가까운 46%(1억8181만원)가 부채다. 그 빚을 갚기 위한 원리금 상환액이 월 114만원으로 소득의 23%나 된다. 이렇게 부채 상환 부담이 크니 당연히 저축액(월 51만원)은 소득의 10%를 조금 넘을 뿐이다. 반면 부채가 500만원 이하인 가정은 저축액이 월 159만원으로 소득의 33%가 넘는다.
결국 부채가 없는 가정이 많은 가정에 견줘 월 70만원 정도씩 저축을 더 하고, 대출 상환으로 새는 돈도 극히 적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부동산값 급등으로 가장 확실하게 수익을 남긴 집단은 대출 금융회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너도나도 앞다퉈 부동산 담보대출 경쟁에 나섰던 것이고, 그 결과 이제 한국도 부동산 거품이 꺼질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경제보고서가 나오고 있다. 이런 대출에 따른 손실과 큰 자금이 묶이는 위험을 감안한다면, 가능한 한 대출을 적게 받도록 평수도 다소 적은 것으로 공공분양 아파트에 청약하는 게 바람직하다.
장마보험? 너 자신을 알라
내년 결혼이 목표여서 단기자금이 필요한 김씨, 고액 장마보험 상품을 즉흥적으로 구매하는 실책을…
“내년에 결혼하는 게 목표입니다.” 직장생활 5년째인 김상철(33·가명)씨에게 가장 큰 재무목표는 결혼이다. 아직 사귀는 사람은 없지만 늦출 수는 없다고 한다. 재무 관점에서 보면 결혼자금과 집 마련계획이 관건이다. 특히 서울에 사는 김씨로서는 전세든 자가든 주거대책이 큰 걱정이다. 재무상황을 점검하면서 자산을 보니 순자산이 1500만원 정도였다.
“1년에 300만원씩 모은 셈이네요?” 머리를 긁적일 뿐 말을 못한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얘기한 것이지만, 김씨에게는 질책이다. 지난해 포도에셋 재무상담을 받은 비슷한 나이대의 미혼 남성의 순자산이 6천만원인 점을 감안하면 김씨의 지난 5년 재무성적은 낙제점인 셈이다. 그런데 최근 김씨의 저축률은 매우 높다. 전자우편으로 받은 재무점검표에는 월 저축액이 145만원으로, 세후 소득의 60%나 된다. 문제는 김씨가 적은 대로 정리해보면 월 현금 흐름이 마이너스 60만원이라는 점이다. 하나하나 물어보며 점검해봤다.
지난해 봄 큰맘 먹고 적립식 펀드에 50만원씩 불입하기 시작했다. 가을엔 좀더 욕심을 내 50만원짜리 계좌를 하나 더 만들었다. 연말에 홈쇼핑을 보다가 월 30만원씩 내는 장기주택마련보험(이하 장마보험)에도 가입했다. 주택마련을 위한 청약부금도 15만원씩 내고 있었다.
이렇게 저축액을 늘렸지만 소득이 그에 따라준 것도 아니고 소비지출을 크게 줄이지도 않았다. 당연히 현금 흐름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수익률이 마이너스인 두 번째 적립식 펀드와 청약부금의 불입을 중지했다. 그렇게 해서 현금 흐름상의 적자를 모면했지만, 가장 시급한 과제인 결혼자금 마련계획은 여전히 요원했다.
그렇다면 단기 목적자금을 모을 수 있는 저축계획이 필요한데, 가장 최근에 가입한 장마보험은 20년 동안 유지해야 하는 장기상품이다. 게다가 초기에 해약하면 원금을 하나도 받지 못한다. 펀드는 불입을 중지해도 되지만 이것은 그렇게 하면 해지가 된다. 어쩔 수 없이 계속 불입해야 하는 강제성이 있다. 사실 이 강제성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김씨 역시 홈쇼핑을 보다가 문득 이런 맘이 들었다고 한다. ‘저축부터 해야지. 안 그러면 다 써버릴걸.’ 거기다 김씨를 더 자극한 건 연말정산이란 단어다. 마침 그때가 연말이었다. 그리고 7년 이상 유지하면 이자소득세도 전혀 없다는 것이다. 김씨가 가입한 장마보험은 소득공제와 비과세란 장마상품의 일반 특성에다 한 가지 기능이 더 있다. 사망하면 사망보험금이 나온다. ‘500만원 + 해약환급금’.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은행이나 증권사 장마상품에는 없는 이 사망보험금은 보험사가 고객 돈을 20년 동안 장기로 운용할 수 있는 대가다. 중간에 그 약속을 저버리면 원금 손실이라는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투자하거나 상품에 가입하거나 새로 일을 시작할 때 사람들은 늘 잘되는 측면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김씨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 눈 딱 감고 20년 동안 저축하는 거야.’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김씨가 결혼자금을 모으려면 단기저축이 필요하다. 현재 순자산 1500만원으로는 1년 뒤 결혼 때 전세자금도 모자란다. 부모님이 4천만원 정도를 도와준다 해도 서울 변두리의 신혼살림집 전셋값에도 턱없이 모자란다. 김씨가 생각하는 전세금은 적어도 8천만원 이상이다. 저축 여력을 최대한 다 동원해도 모자랄 판인데 월 30만원씩 장기로 묶어두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30만원씩 20년이면 원금만 7200만원이나 되는 고액이다. 이런 고액 상품 가입을 앞뒤 충분히 따져보지 않고 홈쇼핑에서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펀드나 예금상품처럼 몇 달 뒤 해약해도 원금이 보장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물론 장마보험을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대출이자는 손해 보고 투자수익을 낼 기회는 놓치는 방식이다. 이미 납입한 120만원이 아까워 김씨는 장마보험을 그냥 유지하겠다고 한다.
그 상태로 생애 재무설계를 해보았다. 죽을 때까지 대출을 끌고 가야 하는 마이너스 신세였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상황은 김씨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수도권의 주거비용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결혼비용에서 남자에게는 역시 주거비용이 가장 부담스런 존재다. 설명이 끝나자 김씨가 멋쩍게 웃으며 한마디 던진다. “결혼해도 부모님 집에 살아야겠네요.” 김씨 부모는 현재 40평대 아파트에 살고 있다. 김씨나 부모 모두에게 그것이 재무적으로나 효도나 행복한 삶이란 면에서 가장 훌륭한 선택일 수 있다.
유니버설 보험이냐 적금이냐
언제 어디에 돈 쓸지 따져야…5년 동안 불입하고 10년 뒤에 환급금 받는 경우 적금이 훨씬 유리
“복리로 운용되고 2년만 넣으면 그 다음부터는 안 넣어도 된다는데요?” 지난 연말 재무상담을 받았던 진효숙(48·가명)씨가 보험사 저축상품에 대해 물어보며 한 말이다. 한 보험사 텔레마케터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마침 저축 여력이 20만원 정도 생겨서 할까 말까 고민하다 전화한 것이다. 이런 금융상품 얘기를 할 때 빠지지 않는 수익률 얘기도 덧붙인다. “5% 이상 수익이 난대요.”
그리고 10년 이상 유지하면 이자소득세가 없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일정 기간 불입하면 그 이후로는 불입하지 않아도 해지되지 않고, 목돈이 필요할 때 약관대출이 아니라 쌓인 해지환급금 범위 내에서 그냥 꺼내 쓸 수 있는 유니버설 상품이다. 예전 보험사 상품에 비하면 이 두 가지 기능은 고객 입장에서 꽤 유리한 것이다.
수화기 너머로 전보다 밝아진 진씨 목소리를 들으며 과거 상황을 떠올려봤다. 4개월 전 진씨는 머니마켓펀드(MMF)에 넣어두고 있던 목돈 1500만원을 다른 금융상품에 넣고 싶다며 찾아왔다. 펀드수익률이 한창 절정에 달한 때이기도 해서 진씨는 그 돈을 거치식으로 펀드에 넣고 싶어했다. 그러나 안전한 고정금리 상품에 일단 넣어두자고 설득했다. 마침 저축은행 이자율도 6%대로 좋은 편이었다.
그때 진씨의 소득과 지출을 따져보면서 투자 여력을 찾아낸 게 월 20만원이었다. 그 돈을 적립식으로 투자하기로 했다. 1년쯤 해보면서 투자는 손해볼 수도 있다는 걸 몸소 익힌 다음에 더 큰 금액을 해보자고 했다. 그런데 그 뒤 확인해보니 진씨는 월 30만원씩을 펀드에 넣고 있었다. 소비지출을 좀더 줄인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사교육비에 들어갔던 돈 일부를 아껴 더 투자할 생각인 것 같았다.
“적립식 펀드는 계속 잘 넣고 있나요?” 넣고 있다고는 하는데 수익률이 마이너스라며 실망스러워했다. 당장 돈 쓸 일이 없는 진씨로서는 적어도 2년 정도는 그냥 유지하는 게 필요하다. 그러나 진씨가 수익률 높은 걸 찾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보험사 장기상품이 눈에 들어온 것 같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렇게 모은 돈을 언제 쓸 거냐고 물었다. 지금 당장 확정된 것은 없지만 5년쯤 뒤에 돈 쓸 일이 생길 것 같다고 한다. 아마 지금 직장에 다니는 딸이 결혼하는 걸 생각하는 모양이다.
5년 정도 소득이 유지되고 그 뒤에 돈 쓸 일이 있다면, 진씨가 생각하는 유니버설 상품의 복리·비과세·중도인출·납입유예라는 특징은 그에게 해당되지 않거나 별 쓸모없는 것이 돼버린다. 가장 평범하게 적금을 드는 게 최선이다. 즉, 모든 투자 여력을 펀드에 몰입하는 것보다 일부는 고정금리 적금상품으로 분산하는 게 바람직하다. 또 진씨는 아직 원금손실을 볼 수 있다는 펀드투자를 이해는 하지만 몸으로는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상태다.
실제 진씨가 유니버설 보험상품을 선택해 5년 동안만 불입하고 그 뒤 10년 동안은 불입하지 않은 채 보험상품을 유지하고 있다가 일시불로 환급금을 받는 경우를 가정해 계산해봤다. 사망보험금은 1천만원으로 설정했다. 이럴 경우 63살에 진씨는 약 1600만원을 받는다. 이번에는 같은 5% 수익률로 5년 동안 적금을 불입한다고 가정해보자. 5년간 적금 불입 뒤 10년 동안 예금으로 유지한 금액은 2187만원이다. 적금이 훨씬 더 낫다.
“그럼 이자에 대해 세금을 내야 하잖아요?” 적금을 들라는 제안에 진씨가 보인 반응이다. 이제 절세 문제를 따져보자. 15.4% 일반과세가 있고, 세금우대로 하면 9.8% 세금을 낸다. 단위농협·신협·새마을금고 등에 조합원으로 가입하면 1.4% 저율과세가 적용된다. 진씨는 당연히 조합원으로 가입하고 저율과세 상품에 가입하겠다고 했다. 월 20만원짜리 1년 정기적금의 일반과세나 저율과세는 이자 차이가 1만원 정도에 그치지만 금액이 커지면 사정은 조금 달라진다. 1천만원을 연이율 6%로 1년 정기예금에 가입하면 그 차이는 8만4천원으로 늘어난다. 조금만 신경쓰면 챙길 수 있는 이득이다.
전화를 끊을 즈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유니버설 상품에 가입하라고 할 걸 그랬나?’ 남편으로부터 노후자금을 보장받지 못할지도 모르는 진씨로서는 중간에 쓸 목적자금도 중요하지만 노후자금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놓아야 한다. 보험사 상품은 유니버설처럼 중도인출을 할 수 있다고는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다른 금융상품에 비해 끝까지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른바 강제저축인 셈이다. 먼 미래보다 눈앞에 닥친 일에 먼저 돈을 쓰는 관성을 생각하면 강제저축도 일리가 있다.
어떤 상품이 더 좋은지는 단지 수치로만 비교할 문제는 아니다. 언제 어디에 돈을 쓸지에 대한 명확한 목적과 그에 맞게 실천할 자세가 되어 있느냐를 함께 따져봐야 할 문제인 것이다.
2천만원이 더 중요합니까
부동산에 2억 투자해 10% 수익 기대하는 부부, 당장 주거환경·아이 교육은 어찌하나
“상담 애프터서비스 해주세요.” 1년 전에 재무상담을 받은 고객 박철수(41·가명)씨 부부로부터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최근 서울 근교에 있던 아파트를 팔았는데, 그 자금을 어떻게 운용하는 게 좋을지 해법을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그사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재개발 예정 주택을 구입하는 등 변화가 많았다. 소득은 크게 늘지 않았지만 1년 사이에 자산은 1억원 넘게 늘었다.
먼저 갖고 있던 아파트가 1년 전에 비해 3천만원 정도 오른 상태에서 팔았다. 물론 아쉬움도 크다. 매매계약을 맺고 중도금을 받은 뒤부터 뉴스에서 날마다 서울 강북지역 아파트값 오르는 소식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가만히 앉아서 3천만원을 벌었지만, 더 벌 수 있었던 돈이 눈앞에서 날아가는 걸 보자니 마음이 여간 쓰라린 게 아니었다고 한다.
“그 아파트에 나중에 살기로 하지 않았나요?” 현재 박씨 부부는 남편 직장 근처 다세대주택 밀집지역에 전세를 산다. 상업지역이 둘러싼 지역이라 전셋값은 비싸지 않지만 아이들 교육상 썩 좋지 않아 걱정이 많았던 터였다. 그런데 몇 달 전 재개발 예정 주택을 매입하는 바람에 1가구 2주택이 되어 양도세를 피하기 위해 서둘러 아파트를 판 것이었다.
이 재개발 예정 주택도 그사이 무려 4천만원이나 올랐다. 예상대로 재개발이 추진된다면 2∼3년 내로 더 큰 시세차익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재개발주택조합에서 내부 분란이 생겨 일정이 혼미해졌다. 서울 밖이긴 하지만 몇 년 뒤 제법 안락한 아파트로 이주하는 것을 상상했던 1년 전의 계획이 어지러워졌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부동산을 통해 오른 자산가치는 약 7천만원이 된다. 나머지 3천만원은 1년 동안 저축한 금액과 금융소득이다. 박씨네는 월 200만원 이상을 저축하는데, 이는 소득 대비 35%가 넘는 금액이고 비슷한 조건인 비교고객군의 저축률 23%에 비해 월등히 높다. 1년 전에 있던 빚도 그사이 다 갚아 부채상환액이 전혀 없다. 비교고객군은 부채상환액이 소득의 9%인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박씨 부부는 새로 생긴 여유자금으로 또 다른 부동산 투자를 하고 싶어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박씨 부부가 부동산 시세차익으로 올린 수입은 총 2억4천만원으로 순자산의 50%가 조금 넘는다. 그리고 지금까지 실패도 없었다. 이쯤 되면 누구나 경험주의자가 되기 십상이다. “얼마를 투자하고 싶은 거죠?” 2억원쯤 투자하겠다고 한다.
현재 투자한 재개발 예정 주택도 몇 년 동안 자금이 묶일 건데, 유동성에 문제가 있지 않느냐고 지적해보았다. “재개발 예정지 물건을 잘 골라 사서 1년쯤 지나 팔려고요.” 그러면 또다시 2주택 문제가 생기지 않느냐는 질문에 박씨는 아버지 명의를 빌리겠다고 했다. 위장전입이나 가짜 경작확인서를 만드는 일부 고위 공무원들의 위법에 비하면 이건 편법이라고도 할 수 없는 정도다. 세금 문제와 유동성까지 생각이 잘 정리돼 있었다.
이번에는 수익성을 물어볼 차례다. “1년에 2천만원만 벌었으면 좋겠어요.” 생각보다 낮은 수익률 목표를 제시했다. 최근 판 아파트의 지난 4년 반 동안 연수익률이 20% 정도인 점이나 재개발 예정 주택의 시세 상승을 생각하면 매우 낮은 목표치다. 그런데 박씨 부부는 2천만원이라는 금액을 생각했고, 나는 수익률을 계산했다. “2억원 투자해서 2천만원 벌면 10% 수익 아닌가요?” 돈으로는 2천만원이 큰돈이지만, 10% 수익률은 그리 높은 수치는 아니다. 투자할 원금이 많아졌기 때문에 10% 수익률로도 큰돈을 버는 것이다.
하지만 초등학생과 유치원생 자녀 하나씩을 두고 있는, 평범하고 알뜰한 40살 전후 박씨 부부에게 2억원은 함부로 할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다. 관성대로 또 부동산 투자를 하려고 하지만 금액이 커질수록 위험도 커지고 유동성도 문제가 된다. 더욱이 10% 수익률이 목표라면 더 안전한 금융투자도 얼마든지 있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불입하고 있는 적립식 펀드 수익률을 확인해보라고 했다. 연수익률이 하나는 16.58%, 다른 하나는 9.69%였다. “이 정도 수익률이면 되지 않나요?”
자연스럽게 자녀 얘기가 시작됐다. 직장이 멀어 일찍 출근하는 엄마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둘째가 안쓰럽고, 저녁에 집에 오면 어수선한 것도 걱정이라고 한다. 주변 주거환경도 걱정이다. 서울 노원구 아파트 밀집지역 전세를 생각해봤는데, 현재 전세보다 적어도 1억원 이상이 더 든다. 당장 눈에 보이는 더 높은 수익률을 좇을 것인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편안한 집과 좋은 교육 여건을 택할 것인가? 정답이 있을 수 없는 해법을 박씨 부부와 나는 일주일 넘게 고민하고 있다.
빚 문제, 도망가지 마세요
개인회생이나 파산제도 활용 못하는 사람들…적극적으로 헤쳐나갈 의지를 잃는 것이 더 문제
박미숙(39·가명)씨를 만난 건 지난해 가을이다. 네이버와 함께한 ‘부채 클리닉’ 캠페인에서 선정된 고객이었다. 중학생과 초등학생 자녀 둘을 데리고 사는 기초생활수급자다. 사업을 하던 남편이 망하면서 급기야 이혼까지 하게 됐다. 사업이야 흥할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이 때문에 가정까지 엉망이 되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10여 년 전 역시 망해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남 얘기 같지 않았다.
남편이 사라진 뒤에도 사업 실패의 흔적은 박씨를 괴롭히고 있었다. 남편이 부족한 사업자금을 대려고 박씨의 언니 이름으로 차를 샀다 팔았는데, 이 때문에 언니는 차를 써보지도 못하고 할부금을 내야만 했다. 박씨 이름으로 대출받았던 빚도 고스란히 남았다. 채권자는 카드사 두 곳과 새마을금고 한 곳이었다. 이 가운데 한 카드사에만 월 10만원씩 갚고 있었다. 다른 두 곳은 아직 연락이 없다고 한다.
“이거 갚지 마세요.” 국가에서 주는 최저생계비로 사는 마당에 무슨 빚 상환이냐고 다그쳤다. 파산제도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변호사 비용을 댈 형편도 아니고 정말 파산 신청을 하면 빚이 완전히 없어지는지도 확신하지 못하던 중이었다. 잘 아는 변호사 사무실에 부탁해 실비만 내고 파산 신청을 하도록 안내했다. 그리고 6개월쯤 지난 즈음에 법원 판결을 받았다는 연락이 왔다. 이제 몇 달을 더 기다려 면책선고까지 받으면 박씨는 빚 문제를 청산하게 된다. 적은 액수이지만, 빚 갚는 데 쓰던 월 10만원이라도 자녀교육비를 위해 저축하는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경기도에서 자영업을 하는 최충환(43·가명)씨는 10년 전 친척이 망하면서 보증 빚 때문에 아직도 고생이다. 최씨는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소득신고를 할 수 없는 형편이다. 7년 전부터 시작한 자영업이 그래도 이제는 조금 자리를 잡았다. 사업자 등록은 부인 명의로 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사업을 키우면서 자금이 많이 부족했다. 아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는 것도 이제 거의 한계에 도달했다. 부인 명의로 사업을 하기는 하지만 최씨 때문에 제1금융권 대출은 불가능했다. 다행히 A캐피털로부터 연 10% 이자로 급한 자금을 대출받았다. 그런데 계속 사업은 확장될 것이고, 앞으로 20년 정도는 경제활동을 해야 할 여건이기에 신용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놓는 게 필요했다. 게다가 최씨는 등록된 장애인이기 때문에 사업자금 대출을 일반인들보다 유리하게 받을 수 있다.
파산 신청이 가능한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일주일 뒤에 만난 최씨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부인 명의이긴 하지만 이미 부채 이상의 자산을 모아놓은 상태라 법원으로부터 파산 인정을 받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개인회생과 파산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던 2004년 즈음에만 신청했더라도 어렵지 않게 파산 선고를 받았을 것이라고 한다. 물론 원칙대로야 자산이 생겼으니 그것으로 빚을 갚으면 된다. 그러나 자가 주택도 없고 팔순 노모를 모시고 두 자녀를 키우는 최씨 부부가 10년을 고생해 이제야 겨우 먹고살 기반을 마련했는데, 그것을 10년 전의 보증 빚을 갚는 데 다 써야 한다는 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다.
박씨나 최씨 모두 자신의 빚 문제를 혼자 해결하거나 도피하는 방향으로 끌고 갔다. 개인회생이나 파산제도를 제대로 알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더라면 마음고생도 덜하고 훨씬 빨리 재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지 그런 제도를 잘 모르는 것보다, 자신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헤쳐나갈 의지를 잃는 것이 더 문제다. 꼭 학력과 지식이 짧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8년 전에 부도를 낸 김창식(49·가명)씨는 일류 대학 출신이고 그전에 10년 정도 사업을 잘 이끌어오던 사람이다. 당시 1억원 가량 빚을 졌는데, 그냥 방치했다. 아는 사람 회사에 비공식적으로 다니고 있는데, 최근 날아온 독촉장들을 확인해보니 빚이 무려 3억원이 됐다고 한다.
“진작 파산 신청을 하시지 그랬어요?” 김씨는 좀 엉뚱한 대답을 한다. “이 나이에 얼마나 더 사회생활을 한다고….”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아직 경제활동을 할 시간이 많이 남았다. 정상으로 되돌려놓고 다시 재기하는 게 옳다. 은둔자처럼 사는 것은 사람을 불행하게 한다. 빚은 사람의 희망을 갉아먹는 주범이다. 빚이 많아지면 대부분 삶의 의욕을 읽고 자포자기하게 된다.
그런데 빚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미래에 받을 국민연금을 담보로 현재 빚을 갚도록 하겠다는 정책을 내놓는 건 참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게라도 해서 신용불량 상태에서 빨리 탈출하라는 뜻이라는데, 그게 당사자들의 재기에 도움이 되기보다 채권기관만 확실하게 빚을 받아내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답답하면 기록하고 정리하라
현금흐름과 자산현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안정감과 자신감 얻을 수 있어
중학생 자녀 둘을 둔 박지수(38·가명)씨는 광고업을 하는 남편 회사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다. 남편 사업이 불안정해서 자신이 집에서 살림만 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집으로 매달 얼마씩 가져오죠?” 간단한 질문이지만 박씨는 대답을 주저했다. 그때그때 되는 대로 돈을 가져다 쓰기 때문에 정확히 얼마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남편이 얼마를 버는지 확인해보았다. 이 역시 정확한 자료가 없다.
그럼 집안일로 얼마를 쓰는지 물어보았다. 이 역시 정확히 파악된 게 없다. 질문을 하면서 하나하나 적어나갔다. 월세 30만원, 통신비 15만원, 부식비 80만원…. 이런 식으로 적어보니 월평균 330만원이나 되었다. 친정어머니를 모시는 5인 가족이라고는 하지만, 소비성 지출만으로는 꽤 많은 금액이다. 이렇게 수입과 지출이 정리돼 있지 않으면 남들만큼 쓰면서도 제대로 쓴 것 같지 않아 늘 빈곤감을 느끼게 된다. 빈곤감의 악순환인 셈이다.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재생자동차부품 공급상을 하는 김중철(41·가명)씨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7년 전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는 아주 조그맣게, 거의 자본을 들이지 않다시피 했다. 조금씩 사업을 키워오다 올해 초 다소 무리를 감수하고 사업 규모를 2배 이상 키웠다. 원칙대로라면 자본을 충분히 확보한 다음에 사업을 확대해야 하지만, 시장의 경쟁구도 때문에 무리하게 앞당겨 확장해야만 했다. 당연히 늘어난 거래처에 결제해야 할 자금과 비용이 늘었다.
자영업 수준이다 보니 금융권 대출은 거의 불가능했다. 친인척에게 무이자로 2천만원을 빌렸다. 3년 전부터 월 50만원씩 불입하던 유니버설보험은 올 초부터 불입을 중지했고, 사업을 확장하면서 800만원을 인출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보장성보험 약관대출로 300만원, ○○캐피탈로부터 2천만원을 대출받았다. 둘 다 10% 전후의 높은 금리였다.
“유니버설보험에서 더 인출할 수 있는 금액이 있을 텐데요?” 확장된 사업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어서인지 김씨는 쉽게 인출해 쓸 수 있는 자신의 돈이 있는데도 점검해보지 않았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처럼, 돈에 쪼들리더라도 차분하게 따져보고 계획을 세우면 도움되는 게 생각보다 많다. 앞의 박씨와 마찬가지로 김씨도 돈 흐름이 어수선하다 보니 돈은 돈대로 쓰면서도 늘 쫓기기만 하고 여기저기서 조금씩 손해를 보고 있었다.
사업이 아직 정상화되지 않았기에 김씨 자신의 급여는 150만원으로 정했다. 부인은 무급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면 김씨가 150만원으로 다섯 식구의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을까? 아니다. 사업체 자금흐름을 하나하나 따져보니 실제 김씨가 가정으로 가져가는 돈은 300만원 정도 됐다. 사업을 확장하기 전에 가져가던 450만원보다는 많이 줄었다. 사업을 확장하면서 직원 임금, 자동차 비용, 임대료, 대출 원리금 등이 늘어난 것에 비해 매출은 아직 그만큼 늘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정의 필요에 따라 가져가는 돈이 자신의 명목임금인 150만원보다는 꽤 많았던 것이다.
이것은 자영업자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다. 독일에서 발간된 재무 관련 책에서 ‘자영업자 재무설계의 기본은 사업수지와 가계수지 분리’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보면 선진국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봐야 한다.
아무튼 김씨의 재무설계는 일단 사업수지를 정리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집으로 가져가야 할 돈을 300만원으로 확정하고, 조금이라도 사업자금의 부담을 덜기 위해 세 차례로 나눠 100만원씩 가계통장으로 옮기기로 했다. 사업 확장 4개월째와 5개월째의 월별 손익을 정리해보니, 4개월째는 320만원 적자였지만 5개월째는 96만원 흑자로 돌아섰다. 물론 아직 안정 궤도에 들어섰다고 보기는 어렵다. 3개월 정도 살펴봐서 매출이 안정되면 가계수지로 돌리는 돈을 550만원으로 올리고, 그때쯤 가서 주택마련, 자녀 학자금, 노후자금 등에 대한 자세한 설계를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한편 자산을 살펴보니 아직 주택은 없지만, 재고자산이 많아 부채를 감안하더라도 순자산이 2억8천만원 정도로 계산됐다. 지난해 재무상담을 받은, 자녀가 둘인 같은 나이대 가정의 순자산 평균보다 20%가량 많았다. “부자입니다.” 비교표를 보여주며 농담조로 추켜주었다. 사업을 확장하면서 자금에 쪼들리고 사업 전망에 불안해하는 김씨에게 힘을 불어넣어줄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현금흐름과 자산현황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김씨는 안정감을 얻었다. 6월 손익계산서의 예상매출액 6천만원을 1억원으로 고쳐보자고 한다. 예상 순수익이 1천만원을 넘어섰다. “연말에는 이 정도 될 것 같아요.”
미래가 두렵습니까
재무상담은 사회적 필연 법칙을 인식시키고, 미래를 몰라 갖게 되는 두려움을 떨치게 하는 것
서울과 경기 부천에서 살다 강화로 이사간 지 올해 12년째다. 사업이 망한 탓도 있고, 아이들 건강 문제도 생각했고, 막 초등학교에 들어가려던 큰아이에게 좋은 선생님을 만나게 하려는 뜻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다. 아이들에게 도시의 각박한 경쟁에 시달리게 하지 않고 농촌에서 맘껏 뛰놀게 했다.
그런데 요즘 농촌이 아이들에게 다 좋은 건 아니다. 또래 아이들이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가 이사간 동네는 우리처럼 도시에서 이주해온 집들이 많아 또래 아이들이 많았다. 워낙 가깝게 지내다 보니 어린 나이이긴 하지만 친구 집에서 잘 때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반대한 적이 없다. 다만 꼭 한 가지를 챙겨가라고 한다. 어른들에게 재무 교육을 할 때 재미 삼아 이걸 문제로 내보곤 한다. “제가 우리 집 아이들한테 ‘친구 집에 놀러갈 때 꼭 가져가야 할 것은?’이란 질문을 종종 합니다. 뭘까요?” 내가 요구하는 답은 ‘칫솔’이다.
그러면서 나는 돈과 삶의 필연 법칙을 설명한다. “양치질을 안 하면 이빨이 썩고, 이가 상하면 건강이 나빠집니다. 돈도 많이 듭니다.” 이것은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것보다는 정도가 약하기는 하지만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자연과 사회의 필연 법칙입니다. 단지 지식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몸에 배게 훈련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자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용이다. 지식은 때가 되고 느끼게 되면 얼마든지 스스로 습득해나갈 수 있지만, 어릴 때부터 이런 필연 법칙을 제대로 몸에 익혀놓지 않으면 두고두고 고생한다.
재무상담사로서 고객이나 청중에게 전달하려는 핵심 역시 마찬가지다. 보건복지부 직원들에게 강의할 때 이렇게 물었다. “여러분은 무엇이 걱정되나요?” 정권이 바뀌어 부서가 통폐합되고 자리가 불안정해질까봐 걱정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걱정(?)이 있다. “우리 모두 100년 이내에 죽지 않나요?” 분위기가 차가워진다.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나는 아이들에게도 가끔 이렇게 혼낸다. “너, 그러면 100년 이내에 죽는다!” 사실이다. 우리가 100년 이내에 죽는다는 것은 필연이다. 그렇지만 우리 아이들도 그렇고 보건복지부 직원들도 그렇고 반드시 죽는다는 이 엄연한 사실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식 웃을 뿐이다. 왜 그럴까?
죽는다는 게 두렵지 않은 게 아니라, 죽는다는 필연을 충분히 인식하고 그에 맞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죽는다는 것보다 조금 정도가 약한 ‘늙으면 돈을 못 벌고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은 필연일까 아닐까? 지금 초등학생인 아이들이 10년 뒤 대학을 가고 결혼을 하게 되면 돈이 얼마나 들까? 이런 것들은 자연의 필연 법칙보다 그 정도는 약하지만, 사회적 필연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재무상담은 이런 사회적 필연 법칙을 인식시키고, 그럼으로써 미래를 몰라 갖게 되는 두려움을 떨치게 하는 것이다.
김주연(36·가명)씨 부부는 공무원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신혼 초에 주말부부를 했고 오랫동안 공부를 하느라 둘째는 낳을 엄두도 못 냈고 재산도 많이 모으지 못했다. 재무 상태를 점검하면서 은퇴 뒤 생활비를 물어보았다. 250만원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그 정도면 두 사람의 연금만으로도 남는다. 공무원연금법을 개정해 70% 정도로 감액한다 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돈 쓸 일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한도가 없다. 그래서 사실 돈 자체보다 돈에 대한 주관이 더 중요하다. 김씨 부부는 특별히 무리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주택은 서울에서 32평 아파트, 외아들 대학자금은 연 1500만원을 생각했고 유학은 고려하지 않았다. 다만 결혼지원금은 조금 많이 생각했다. 아이가 대학 갈 즈음에는 서울 집을 팔고 수도권에 전원주택을 짓겠다고 한다. 그러면 여유자산이 많이 생긴다. 이 정도로 자금 수요를 생각한다면 김씨 부부의 재무설계는 여유롭다. 오히려 돈 쓸 일을 더 찾아보라고 권할 판이다.
그러나 이건 두 번이나 만나 상담을 하고, 사전에 김씨 부부가 스스로 자신의 상황을 점검해보면서 생긴 결론이다. 그런 과정을 거쳤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하는 결론이 얻어진 것이지, 그렇게 수치로 따져보지 않았더라면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일단 많이 벌고 보자는 심리가 앞서게 되고, 누가 이러저러한 투자로 재미봤다더라 하면 자신도 뒤처지지 않으려고 기웃거리게 된다. 그런 불안한 심리를 파고드는 게 사기꾼이다. 최근 군 장교들이 관련된 금융사기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의 결론이 이런 식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제대 뒤 마땅한 대책이 없고 연금도 부족해서 장교들이 불안해한다.’ 불안의 진정한 원인은 돈이 적다는 그 자체에 있지 않다.
문제는 용기다
처지에 맞는 목표를 정하고 재무설계를 짰다면 남 눈치 보지 않고 용감하게 밀고 나가야
재무 상담을 받은 고객 중에 철학박사가 있다. 40대 주부들과 함께 ‘수다로 푸는 논어’라는 기치 아래 논어강독을 한다기에 함께하고 있다. 지난주 강독한 내용에 이런 구절이 있다. ‘지혜로운 자는 의혹하지 않고(知者不惑), 어진 자는 근심하지 않으며(仁者不憂), 용맹한 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勇者不懼).’ 사리를 밝힐 지혜가 있기에 혹하거나 걱정하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을 것이란 대목은 쉽게 이해된다. 그런데 그 다음 해설이 문제가 됐다. ‘이는 학문의 순서다.’ 그런데 왜 ‘지, 인, 용’(知, 仁, 勇) 순서일까? 공자에게 ‘인’은 최고의 덕목이므로 맨 마지막에 ‘인’이 와야 할 텐데 왜 ‘용’일까? 의아했다.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는 말도 있잖아.” 아줌마들의 수다가 시작됐다. “<톰 소여의 모험>으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은 용감하게 돌진해서 쟁취하는 것을 미덕으로 치켜세우던데요.” 미국 서부개척 시대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는 의견도 덧붙여졌다. “순서가 정말 지, 인, 용이라는 뜻 맞아?” 수다 끝에 실천의 문제가 끄집어내졌다. “이치를 배우고 삶의 철학으로 삼은 다음 실천해야 하는데, 실천에는 가치판단과 결단이 필요하잖아요. 그때 두려움 없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재무 상담을 하는 나에게는 쏙 와닿는 말이다. 정보를 주고 목표의식을 갖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필요자금을 얼마로 할 것인지, 돈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등이 모두 개인의 판단과 결단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혼자 사는 게 아니고 남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기에 정말 소신과 용기가 필요하다.
결혼을 앞둔 김인철(31·가명)씨에게도 마지막 설명은 역시 용기다. 수도권에서 집 사고 애 둘 키운다는 전제하에 대학자금과 결혼자금을 마련하고 60살에 은퇴해 월 150만원씩 쓰며 노후를 보낸다는 설계다. 소득이 많지도 않고 저축률이 높지도 않다. 모아놓은 순자산도 얼마 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설계가 어렵다. 결국 목표를 낮춰야 하는데, 세심한 김씨가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과감하게 결단을 내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상담 직전 김씨의 저축액은 월 50만원이었다. 첫 번째 상담을 하면서 저축을 100만원으로 늘려야겠다는 각오를 했고 소비성 지출을 줄이겠다고 했다. 연애 비용이 많이 드는 때인데,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결정이다. 변동성이 큰 몇 개 항목만 목표로 설정한 엑셀파일을 건넸다. 며칠 뒤 김씨한테서 답신이 왔다. “한 달 쓸 돈 벌써 다 썼네요.” 그렇지만 두 번째 만났을 때 보니, 지출을 줄이는 것에 대한 피로감은 커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록하면서 자신이 푼돈을 얼마나 많이 쓰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놀란 점을 표현했다. “전에는 쓴 돈을 열심히 적기만 했는데, 이제 써야 할 목표를 정하고 매일 목표와 비교하니까 눈에 확 들어오던데요.”
김씨는 결혼하고 살 집은 현재 마련돼 있는 전셋집(4천만원)에서 시작하되 7년 뒤 1억6천만원짜리 장기전세주택 마련을 고려해보았다. 현재 서울시에서 시행하고 있는 역세권 장기전세주택(SHIFT)이 잘 시행된다면 서민의 주거안정에 꽤 도움이 될 터다. 노후는 고향에 가서 보낼 생각이다. 현재 부모님이 농사를 짓고 있는데, 최소한 노후에 살 집은 확보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렇지만 생활비는 준비해야 하는데, 60살에 은퇴해 90살까지 살 계획이라면 무려 15억원(60살 시점 가치)이나 마련해야 한다.
전셋집 외에 모아놓은 자산이 거의 없는 김씨에게는 현재 저축액 월 100만원으로는 이런 목표마저도 달성하기 어렵다. 목표와 조건을 과감히 바꾸는 용기가 필요했다. 핵심은 목표는 낮추고 조건은 빡빡하게 하는 것이다. 주택비, 자녀의 대학자금과 결혼자금은 낮추고 은퇴 시기는 늦추고 저축액은 늘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물가상승률까지.
그동안 나는 물가상승률을 3.5%로 잡았었다. 그런데 요즘 5%대까지 오르고 있다. 물가야말로 재무설계에 가장 부담을 주는 요소다. 그러나 개인이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물가도 결코 방법이 없지는 않다. 물가에 영향을 덜 받는 생활방식을 개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사지 않거나 덜 쓰는 방식이다. “어지간하면 차는 안 살 겁니다.” “맞아요. 둘째 낳기 전까지는 없어도 살 만하죠.” 나의 응수에 김씨 표정이 밝아졌다.
집 문제도 신부 될 사람과 얘기해봤는데, 도시는 답답해서 농촌 지역으로 가기로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부담이 많이 준다. 거기에 나는 자녀 대학자금을 줄이고 결혼자금은 대주지 않는 것이 결코 문제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부모가 그걸 소신껏 결정하고 자녀에게 어릴 때부터 애정을 표시하며 자립심을 키워주면 된다. “이제 흑자 흐름이네요.” 문제는 이제 김씨가 이렇게 인식한 설계안을 얼마나 과감하게 밀고 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설계안을 믿는다면 이제 남 눈치 보지 않고 용감하게 밀고나갈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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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구 포도에셋 재무상담사 nari@phodo.com